대륙으로3
유니콘 개발팀을 뒤집어놓은 줄도 모르고, 네크로 일행은 희희낙락 손바닥을 마주치며 승리를 자축했다. 비룡을 타고 갑판에 복귀한 후, 갑판장에게 지시를 내려 전함에 부착한 거중기로 대왕오징어를 갑판에 끌어올렸다.
"현황 보고드립니다. 현재 행방불명인 선원은 총 17명입니다. 갑판장이 망원대에 올라가 종적을 찾곤 있지만, 가망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치료가 필요한 타박상과 찰과상은 총 37명이고, 나머지는 침 바르면 낫습니다."
소용돌이 규모를 생각하면 예상보다 피해가 적었다.
- 네 분께 알려드립니다. 사령술사 궁극기 자폭을 동시에 사용하여 후폭풍의 공진으로 데미지를 비정상적으로 높여 대형 괴물을 즉사시키는 방식은 '버그'로 판명 났습니다. 버그를 발견한 네 분에게는 소정의 보상을 드립니다. 이미 알고 있는 버그로 지속하여 이득을 취할 시 엄중한 처벌을 내릴 것을 경고합니다.
대왕오징어에서 푸른 피가 후두두 갑판에 떨어졌다. 선원들은 그 피를 저장 탱크로 통하는 구멍에 몰아갔다.
"작살 발사기 127대 중 69대가 완전히 파손되었습니다. 최대한 멀쩡한 부분을 모아서 다시 조립해 보겠지만, 전부 수제품이라서 규격이 제각각입니다. 몇 대 완성될 것 같지 못합니다."
전함과 오징어를 이은 작살 발사기들은 소용돌이 힘을 크게 받았다. 힘의 방향이 일치할 땐 괜찮지만, 소용돌이는 안과 밖의 속도가 다르다. 조금씩 어긋날 때마다 어마어마한 힘에 발사기가 파괴되었다.
인벤토리를 확인하니 온갖 음식과 술이 가득했다. 남은 셋 역시 음식과 술을 보상으로 받았다.
"연료를 다 수습한 후 파티를 연다. 술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라."
네크로의 선언에 배가 끓어올랐다. 상대한 괴물에 비교하면 적은 피해라고 볼 수 있지만, 피해가 적다고 공포심이 덜해지거나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바다 사나이들은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슬픔과 공포를 깊은 바다에 처넣었다.
'책의 지식이 아무 쓸모도 없는 건 아니구나. 현실에서 사람 상대로는 잘 안 먹히지만, 게임에선 잘 먹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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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대왕오징어가 드랍한 아이템 한 번만 더 보자."
현피의 말에 네크로는 화를 버럭 냈다.
"차라리 네가 보관해. 은행 금고에 보내게도 못하고, 쩍하면 꺼내 보자 지랄하고."
"형, 예전보다 화가 많아졌어."
"슬슬 본성이 드러나는 거야. 그간 세상이 나를 감당 못 할 것 같아서 내 재능과 성질을 억누르고 살았거든."
광해 말에 진돗개와 동해가 키득거렸다. 현피도 피식 웃어버렸다.
"형, 늙으면 애 된다더니. 형은 너무 조숙해서 이미 노년기에 들어섰나 봐."
한참 어루만지던 유니크 반지를 돌려주며 현피가 말했다.
"형, 은행 금고로 전송해. 순조로워도 대륙까지 한 달이라고 했지? 그때까진 옵션 알아낼 방법이 없구나."
"전송."
1골드 소모해 유니크 반지를 은행 금고로 보냈다.
"그래도 나 정도 되면 외관만으로 알 수 있지. 저건 네크로맨서 반지야."
"그래? 형 쓰면 되겠네."
"아마 네가 써야 할 거야. 소환 네크 반지 같으니까."
현피 귀가 뾰족하게 섰다.
"그 부분 자세히 말해줘. 올해 내가 들은 중 가장 귀한 말씀 같아."
"일단 해골이 새겨졌잖아. 네크로맨서 가능성 급증. 그리고 육망성 봤지. 그거 저주 아님 소환이야. 근데 저주라면 해골 문양이 없었을 거란 말이야. 아무래도 소환 스킬 관련 반지야."
현피 입이 헤 벌어지더니 실없는 웃음이 줄줄 샜다.
"문제는 마스터 랭크 돼야 유니크 쓸 수 있다는 거지."
"흡혈 좀비 소환, 해골 궁수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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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전함보다 더 큰데?"
"섬인 줄 알았어."
"선장, 괴물 정보."
"들어본 적 없습니다."
멀리서 섬으로 오해했는데, 커다란 거북이었다.
"작살이 박히지도 않겠는데."
"전함의 대포를 써야 할 것 같아. 갑판장, 포격 실시."
네크로의 지시에 분노조절장애 갑판장이 신났다.
"배를 멈춘다."
조타수가 현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배를 멈췄다.
"마탄포 16구, 괴물의 껍질 이음새를 정확히 조준한다. 5분 시간을 준다. 확인해서 조준이 잘못된 놈들은 채찍과 갈고리로 벌준다."
"각자 정밀 조준. 1분 뒤 신호에 따라 포격한다."
1분 뒤 갑판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마탄포가 동시에 발사되었다. 정밀한 조준으로 거북의 등껍질 2개가 떨어져 나왔다. 정확히 이음새만 타격해서 최대 위력을 발현했다.
'이것도 공진 어쩌고 버그라고 못 쓰게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음성 도우미가 잠잠했다.
"접근해 작살을 발사한다. 밧줄을 타고 넘어가 거북이 몸속에서 심장을 제거한다."
갑판장이 알아서 전투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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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전에 경매장에서 술과 음식을 대량 구매하는 의뢰가 올라왔다고?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하는 겁니까?"
역천이 크게 역정 냈다. 잔다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한 달 예상했던 배가 훨씬 빠르게 완성되었다. 붉은 광석으로 만든 용골이 너무 훌륭해서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지금 조선소에서는 이미 두 번째 배와 세 번째 배가 동시에 건조되고 있다. 대형 함선을 제작하며 NPC들이 레벨업하는 바람에 보름 뒤면 세 척의 배가 전부 완성되고 항해를 시작할 수 있다.
"항해사. 예상 항해 시간은?"
"두 개 항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북쪽으로 향하는 항로입니다. 대략 70일 예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추운 남쪽으로 가는 겁니다. 거기에서 얼음산 사이에 있는 빙하를 통해 대륙 북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항해 기간은 보름 정도 예상합니다. 물론, 둘 다 순조로울 경우입니다. 늘 예기치 못한 난항을 겪는 게 바다죠."
이 세상도 지구처럼 둥글기에 남반구에 있는 중앙섬에서 대륙으로 향할 수 있는 방식은 두 개다.
"거리상으론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왜 남쪽으로 가면 훨씬 빠르지?"
"바다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북으로 올라가는 건 좀 더 안전하지만 거스르는 거라서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남쪽으로 가는 건 해류를 타는 거라서 엄청 빠르지만, 자칫 흐름에 쓸려 엉뚱한 곳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만든 배에 음식을 비축하다가, 27일 전에 누군가가 경매장 의뢰로 대량의 음식과 술을 사 갔다는 사실을 잔다크가 알아냈다.
'27일에 배 건조에 15일 그리고 항해에 15일, 합치면 57일. 제발 먼저 출발한 놈들은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럼 우리가 먼저 도착할 수 있다.'
대륙에 최초로 도착하면 엄청난 특전이 있다. 바로 명성. 다른 자들보다 게임을 늦게 시작했고 도시를 차지한 적도 없는 역천 길드다. 길드의 낮은 명성로는 도시 세 개 차지해도 왕국이 되기 요원하다. 그래서 대륙에 최초 상륙함으로써 얻는 명성이 필수다.
"길드장님. 전문 랭크 화가가 도착했습니다. 초상화 그릴 시간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집사처럼 역천을 챙기는 역천 길드 간부를 보며 잔다크는 부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언니'를 외치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길원들과 엄청나게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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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사. 우리가 목표로 한 곳은 '희망의 등대' 아니었습니까?"
네크로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신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했습니다. 신은 늘 옳습니다."
항해일지로 계산했을 때, 대형 괴물 영역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면 50일 정도에 희망의 등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첫 번째 대형 괴물을 연료를 소모하지 않고 잡았기에 여유가 생겼다. 두 번째 괴물부터는 전함의 마탄포를 펑펑 써가며 잡아버렸다.
그렇게 다섯 번째 괴물까지 해치웠는데, 며칠 거리에 있어야 할 희망의 등대가 훨씬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대장. 섬에 내려서 이틀 정도 휴식해야 합니다. 바다 출신이라고 하지만, 기껏 해 며칠만 배에서 지낸 경험이 대부분입니다. 배가 하도 커서 괜찮았지만, 이젠 한곕니다. 반드시 육지를 밟고 휴식해야 합니다."
"형, 내 생각에 저 섬에 뭐가 있어."
"대륙을 첫 번째로 발견하면 보상이 있단 말이야. 남부 항구에서 이미 배 다 만들어서 바다에 띄웠다고 영상까지 올라왔는데. 보름이면 대륙에 도착한다더라."
"형. 즐기자고 시작한 모험이잖아. 초심 잃지 말자."
네크로는 심호흡했다.
"대형 괴물 잡으면서 유니크 아이템 쉽게 얻더니 내가 욕심이 커졌구나. 섬에 정박할 수 있는지 확인해."
갑판장이 망원경을 목에 걸고 전망대로 성큼성큼 기어올랐다. 망원경으로 섬을 살피고 나서 갑판으로 내려온 카리스마 갑판장이 말을 더듬었다.
"이인간, 사사람. 사람 있슴네. 정박합니다."
"사람이 살고 정박할 수 있다고?"
"네네네."
거대한 전함이 다가가자 수많은 사람이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딱히 전함에 위협이 될만한 대형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린 인간이다. 정박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헤아가 나서서 목청껏 외쳤다. 잠시 후 파란 깃발이 솟았다. 부두에 정박하도록 허락한다는 신호였다.
"헤아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데?"
'잊힌 신의 신전? 이렇게 쉽게?'
퀘스트대로 정상적인 루트로 움직였다면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남쪽 항로를 선택했다면 추운 대륙 북부에 도착한다. 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해서 남쪽으로 내려온 후 대형 괴물을 처리해야 섬에 도착할 수 있다.
북쪽으로 움직였다 해도 마찬가지다. 코쿤 공작의 전함이 아니라면 감히 대형 괴물 영역을 모두 들르는 항로를 선택하지 못했다. 그리고 항해사인 헤아가 다섯 번째 괴물 영역을 지난 후 말없이 항로를 조금씩 틀어버렸다.
헤아가 아닌 다른 항해사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경로였다.
코쿤으로 변해 제국에 잠입했다면 꽤 많은 퀘스트를 성공하고 나서야 찾아냈을 신전이었다.
-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 잊힌 신의 신전에 방문하십시오.
배가 정박하자마자 제일 먼저 섬에 내린 헤아가 전구처럼 밝게 빛났다. 일말의 경계심을 버리지 않았던 섬사람들이 분분히 무기를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아아. 이 품이 늘 그리웠다."
헤아의 눈에서 빛이 줄줄 흘렀다.
- 오아시스의 상거지 헤아가 잊힌 신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네크로여, 내 축복의 첫 대상이 되어주겠는가?"
"영광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보통 나쁜 걸 축복이라 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초가 붙으면 대부분 좋은 거였다.
- 잊힌 신의 대주교로부터 진심이 담긴 축복을 받았습니다.
- 스킬이 강해집니다. 스킬 숙련도가 노력보다 빠르게 상승합니다.
- 생명력이 자체로 회복합니다.
- 특수 스탯 신앙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수 스탯 행운과 마찬가지로 소모형 스탯입니다. 신앙 스탯은 신에 관련한 퀘스트를 완성함으로써 쌓을 수 있고, 신전에 기부하는 거로도 상승합니다. 신앙 스탯이 소모될 때마다 기적이 발생합니다. 단, 스탯의 소모는 행운과 마찬가지로 유저의 결정과 무관하게 무작위로 발동됩니다.
"와, 생명력 자동 회복, 마나 회복 속도 증가."
현피가 기쁨에 넘쳐 외쳤다.
"난 모든 스탯이 1씩 상승. 이건 완전 대박이야."
레벨 1이 2가 될 때와 10이 11이 될 때 필요한 경험치가 당연히 다르다. 스탯 역시 마찬가지인데, 1이 2되는 것보다 5가 6되는 게 어렵다. 플레이 시간에 비교해 스탯이 꽤 훌륭한 편인 진돗개에겐 스탯 상승이 엄청 좋은 거다.
"난 패시브 스킬 효과 강화."
배에는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내렸다. 헤아는 섬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처럼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섬에 살던 신도들도 헤아의 뒤를 따랐다.
헤아가 멈춘 곳에는 돌과 흙으로만 쌓아서 꽤 투박한 모습의 신전이 하나 있었다.
- 잊힌 신이 강림했습니다.
멀뚱멀뚱 서 있던 넷도 마지못해 무릎을 꿇었다. 모든 NPC가 무릎을 꿇는데 넷만 서 있기 힘들었다.
-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 잊힌 신은 더 많은 신도가 필요합니다. 신도가 많을수록 신의 힘이 강해집니다.
- 우르크에게 패권을 빼앗기고 수십 년 동안 고통의 나날을 겪어온 '희망의 등대' 주민들에겐 신앙이 필요합니다.
- 잊힌 신의 '마지막 남은 신상'을 희망의 등대로 옮기십시오. '신상이 부서진 신전'에 안치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눈으로 빛을 흘리던 헤아가 벌떡 일어서서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헤아의 품에는 네크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작은 조각상이 들려있었다.
"네크로 형제여, 신상을 희망의 등대까지 무사히 옮겨줬으면 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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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한 척이 부서졌습니다. 배에 탑승한 사람 전부 죽었습니다."
"저런 괴물이 또 있는가?"
"빙하를 따라가면 없습니다. 이번처럼 항로를 이탈하면 저런 괴물이 수두룩하죠."
노회한 NPC 항해사의 말에 배틀넷이 씩씩거렸다.
"시간만 급하지 않았으면 잡고 가는 건데."
삼대 길드의 정예들이 힘을 모으면 못 잡을 상대도 아녔다. 피통이 크고 위력적인 스킬이 있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다퉈야 하기에 배 하나를 먹잇감으로 던져줬다. 배 한 척 전력만으로 괴물을 어떻게 해치웠으면 했는데, 그건 배틀넷의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대륙에 도착해도 1년 동안은 서로 싸우지 않기로 협의가 이뤄진 거 맞죠?"
다시 항로에 들어선 배는 빠르지만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빙하만 벗어나지 않으면 배가 별로 흔들리지도 않았다. 배가 안정되자 유저들의 놀란 가슴도 진정되었다.
"이래서 기집들이란. 사내는 한번 말하면 절대 돌이키지 않아."
"게임에선 못 싸우지만, 현실에선 상관없지? 집 주소 불러. 일대일 맞짱 뜨자니까."
잔다크가 도발하자 배틀넷이 입을 꾹 다물었다.
'뭐지? 배틀넷 덩치도 생긴 것도 말투도 딱 조폭이었는데. 왜 잔다크를 무서워하는 거지? 역천이란 놈은 재벌가 후손이고, 잔다크도 뭔가 대단한 배경이 있는 건가?'
쪼꼬미 눈알이 뱅글뱅글 빠르게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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