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를 지어
"해골 제작, 해골 전사."
- 살과 가죽을 제거하십시오.
미리 준비한 칼로 여우 배를 갈랐다. 몽글몽글한 느낌이 손을 통해 전달되어 소름이 끼쳤다. 몹을 죽일 때보다 불쾌한 느낌이 훨씬 강했다.
'가상현실은 가상현실대로 불편한 점이 있구나.'
네크로는 손으로 여우 내장을 퍼냈다. VR이었다면 이펙트 아이콘을 누르는 거로 자동 완성했을 텐데.
내장을 다 파내고 칼로 살을 베어냈다. 다행히 닭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네크로도 쉽게 해냈다. 몇 덩이만 베어내자 살이 다 사라졌다. 마지막에 가죽까지 분리하여 뼈만 남았다.
- 주문을 외우십시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진리의 탐구자여..."
눈앞에 뜬 텍스트를 보며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끝나자 허리춤에 겨우 닿는 작은 해골 전사가 나타났다. 손에 뼈를 갈아 만든 것 같은 무딘 비수를 들고 상체를 살짝 숙인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유치원 꼬마가 억지로 어른 흉내 내는 느낌이라고 할까.
"좀비 제작, 좀비."
- 심장을 도려내고 뇌수를 파내십시오.
한숨을 푹 쉰 네크로는 도축용 칼을 잡은 손에 힘줬다. 여우 사체의 가슴 부위에 칼을 꽂았다. 그 상태에서 선을 따라 돌리니 구멍이 생겼다. 손을 집어넣어 심장을 끄집어냈다. 다행히 단단한 나무 감촉에 외관도 그냥 나무 옹이 같았다.
여우의 긴 주둥이를 벌리고 입천장에 칼을 꽂았다. 마찬가지로 선을 따라 돌리니 구멍이 생겼다. 손을 넣으니 두부 감촉이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두개골 안을 깨끗이 비웠다.
- 주문을 외우십시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진리의 탐구자여..."
해골 소환과 주문이 똑같았다. 그저 마지막에 외치는 문구만 다르다. 해골 전사는 '단단한 전사여, 일어나라'이고 좀비는 '생명을 갈구하는 자여, 일어나라'였다.
"해골 제작, 해골 전사."
- 살과 가죽을 제거하십시오.
좀비 셋, 해골 셋. 해골은 무딘 비수를 꼬나들었고 좀비는 맨주먹이었다. 덩치는 비슷한데 기분 탓인지 좀비가 훨씬 강해 보였다.
해골 전사나 좀비 덩치가 작은 건 여우 사체를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숙련도가 낮아서 그런 것뿐이었다. 감각이나 여러 부분에서 현실로 오해할 정도로 유사하긴 하지만, 그래도 게임은 게임이었다.
- 초보를 위한 조언. 좀비보다 해골 전사가 전투 기술이 낫습니다. 좀비를 수비용으로, 해골 전사를 공격용으로 사용하시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조언은 초보한테나 하세요."
성기사의 오라 스킬 때문에 좀비와 해골의 전투력은 레벨보다 훨씬 강했다. 성기사 스킬은 전부 숙련도 최대치를 찍었다. 저항이 대폭 증가했고 생명력이 자동 회복된다. 공속도 증가했고 해골이나 좀비가 받는 데미지 일부를 네크로가 받는다.
네크로 캐릭터는 성기사 패시브 스킬로 생명력과 방어력이 대폭 증가했다. 그래서 여섯 언데드 소환수의 데미지를 나눠 받아도 거의 타격이 없다. 게다가 일반 사령술사와 달리 네크로는 직접 지팡이를 들고 전투에 참여한다. 지켜줘야 하는 짐덩이가 아니라 주 전력이다.
사냥터 중심으로 갈수록 여우들이 점점 뭉쳐있었다. 네크로는 여우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우들이 기다란 주둥이로 네크로를 물려 했다.
다다다닥. 좀비와 해골들이 뒤늦게 따라왔다. 네크로를 포위했던 여우들이 역으로 포위되었다. 네크로는 여우의 공격에 일절 반격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좀비와 해골이 여우를 공격하자, 여우들은 가만히 있는 네크로 대신 자신을 공격한 해골이나 좀비에게 반격했다.
"젠장. 이건 아냐."
지팡이로 여우 한 마리씩 때려죽이며 네크로가 소리 질렀다. VR 때 시각으로만 정보를 받던 것과 달리, 온갖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지니 실제로 동물을 죽이는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일었다.
'돈. 이건 돈이다. 여긴 직장이야. 난 일하는 거라고.'
네크로는 여우 잡으면서 나온 노말템들로 꽃단장했다. 붉은 꼬리 여우가 드랍한 아이템 대부분은 진한 붉은색이다.
- 초보를 위한 조언. 해골 전사와 좀비는 일반 등급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습니다. 투구, 갑옷, 무기 세 가지 아이템 착용 가능합니다.
"조언 고마워."
하얀 해골 전사가 붉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붉은 단검을 들었다. 검푸른 색 좀비도 붉은 투구와 갑옷 그리고 붉은 몽둥이를 들었다. 외관은 그야말로 꼴불견이지만, 전투력은 물론 생존력도 확실히 늘었다. 물리 공격만 하는 여우라 노말템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잠깐. 이러면 이후 등급 높은 언데드를 제작하고 일일이 템 맞춰줘야 하나?'
네크로는 머리가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뭐든 확실하게 계산해서 이득을 따지는 성격이라, 몹에게 어느 수준까지 템을 맞춰야 하는지 벌써 고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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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VR 게임 레전드, 가상현실로 전환 선포. 비상의 시작일까 추락의 서막일까.
[속보] 가상현실 기기 판매 시작, 레전드 게임 유저 상대로 우선 판매. 차별 우려.
[속보] 한 대에 천만 원, 가상현실 기기는 왜 비쌀까? 그 비밀을 알고 보니.
[단독] 국민 게임 레전드, 한 달 후 VR 접속 제한.
댓글이 가관이었다.
- 국민게임? 니들 가위바위보 무시하냐?
└ 남자는 주먹.
└ 여자는 보.지.
└ 대가리는 썩었는데 손가락은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거 참 미스터리네.
└ 뇌가 밑에 달려서 그래요. 이래서 내가 외국 남자 사귄다니까.
└ 외국 남자는 뭔 죄야?
- 레전드? 시발롬과 병신련들이 맨날 싸우는 그 저질 게임? 콘텐츠 다 건강한데 19금 왜 달았나 했더니, 쓰레기들 몰려올 거 미리 선견지명 했구나.
"아이디 거름망 가동해."
예전에 반 전무가 혼나던 그 사무실. 예스러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일본의 유명 회사에서 제작한 고급 노트북이 떡하니 놓였다.
회장의 말에 비서가 통통한 손으로 마우스를 조작했다. 그간 댓글 관리하면서 아이디마다 등급을 매겼다. 그냥 악다구니나 쏟는 아이디를 다 걸러내고, 그나마 견식이 있는 아이디들이 쓴 댓글만 남았다.
"인터넷에 저런 쓰레기들만 넘치니까 실제 여론 행방을 알아보기 힘들지. 부모가 어떻게 키웠길래 자식들 꼬라지가 저러지?"
"집안 어른이 훌륭하면 굳이 교육 안 해도 아이들이 바르게 자랍니다. 서민 대부분이 비렁뱅이 근성이니 아무리 대학 교육을 받아도 서민 자식은 저 모양이죠."
"김 비서는 늘 옳은 소리만 하는군."
호응을 얻지 못해 공감순이든 비공감순이든 쉽게 눈에 띄지 않던 댓글들만 남았다.
"반 실장 말과 비슷한데? 이 아이디들이 반 실장이 데리고 있는 사람은 아니겠지?"
"실장님 현재 서른도 안 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회장님 지시로 거름망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미국에 계셨던 실장님이 미리 알고 손 썼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거름망 비슷한 거 만들어서 저자들을 찾아 일일이 매수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가문은 말이야, 장남이 물려받아야 해. 능력 좋은 놈에게 준다고 한 순간, 형제끼리 싸우면서 자기 살 다 파먹는다니까. 첫째가 무능하니 내가 아픈 몸 이끌고 이 자리를 지키는 거 아냐. 다행히 첫째 놈이 자식 농사는 잘 지었어. 김 비서는 나만 신경 쓰지 말고 반 상무도 많이 도와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상무님 하시는 일마다 전력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반 실장이 게임 안에서 언론사 차려야 한다는 말, 김 비서 생각은 어떤가?"
"서둘러야 하는 일입니다. 인터넷 진출이 늦어서 초반에 돈 많이 쓰지 않았습니까. 혹세무민하는 헛소리만 무책임하게 지껄여놓고 무지한 서민들 옹호 좀 받았다고 인터넷 평론가라는 작자들이 얼마나 꼴사납게 굴었습니까. 지금이야 꼬랑지 흔드는 개가 되었다지만, 먹이를 덜 주면 이빨 드러내는 늑대 같은 놈들입니다."
"그럼 반 상무도 그거 하라고 시켜. 반 실장에겐 일절 지원하지 마."
그때 똑똑 소리와 함께 미모의 여비서가 들어왔다. 김 비서가 몇 달 동안 집적거렸지만, 전혀 틈을 보이지 않는 철벽녀.
"회장님, 뉴스 2개 떴습니다. 반 사장님 막내아들이 고용인 상대로 갑질했다는 내용입니다. 녹음 파일 일부도 공개되었습니다."
"김 비서. 둘째 짓인지 조사해. 그리고 협력 언론에 바로 전화 돌려 조기 진압해."
붉게 충혈된 반 회장 눈에 어두운 구름이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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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국민 게임 레전드, 하루 사이에 신규 유저 8천 명 유입.
광해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통장 잔액 5천. 가상현실 기기를 구매해 피시방처럼 만들려던 계획은 물거품 되었다. 비싸야 15만 원 하던 VR 고글과 장갑을 생각해서 기껏 해 100만 원 정도 하겠지 예상했는데, 한 대에 천만 원이다.
게다가 레전드 유저 상대로 우선 판매한다. 그게 아니면 24개월 할부로 어떻게 덤벼볼 만도 한데.
'제길. 이러면 자기 전에 계산했던 게 다 물거품이잖아.'
하루에 8천 명 유입이면 일주일에 최소 6만 명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주말은 평일 다섯 날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유입될 가능성이 크다. 낙관적으로 일주일에 10만 신규 유저도 가능하다.
'유저가 많을수록 아이템 가격은 비싸진다. 일단 아이템을 모아두자. 골드 가격은 유니콘 사에서 당분간 변동 없다고 했으니 골드보다는 아이템이 중요하다. 파는 사람 있으면 사는 게 이득이다.'
광해 예상으로는 골드 가격도 언젠가는 상승할 거다. 그 시기를 잘 가늠해서, 당장은 아이템에 투자하고 적당한 때엔 골드에 투자해야 한다.
윙 소리와 함께 가상현실 기기가 부팅을 끝냈다. 5분의 부팅 시간에 광해는 라면을 끓여 김치와 함께 후딱 해치웠다.
'먹는 것도 신경 써야겠다. 게임만 했는데도 직접 뛰어다닌 것처럼 피로가 느껴졌어. 괜히 병이라도 걸리면 돈도 못 벌고 치료비만 날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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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저 사람 뭐야?"
도시에 도착하니 대뜸 구경거리가 되었다.
여우 잡다가 지팡이가 부서졌다. 소환수들은 잘 죽진 않지만, 잘 죽이지도 못했다. 몸빵 역할을 잘 해줘서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네크로에게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직접 전투에 나서서 지팡이로 때려잡다 보니 이틀 만에 지팡이 내구도가 다해 먼지가 되었다.
"님, 히든 클래슨가요?"
"제작 네크입니다."
히든 클래스로 관심 끄는 것보다 이게 낫다. 소환으로는 많은 언데드를 거느릴 수 없다. 유지하는데도 마나가 소량 소모되니까. 그러나 제작은 언데드 위력이 약하고 1레벨부터 키워야 하는 대신, 거느리는 숫자엔 제한 없었다.
"님, 스킬 삭제하고 다시 키우셈. 그거 다른 사람들 해봤는데 한 번 죽으면 끝이라 고렙 가면 힘들어요."
해골 열두 마리에 좀비 열다섯. 모두 빨간 노말템으로 치장했다. 만들기는 훨씬 많이 만들었는데, 사냥터 중심으로 가면서 무리 지은 여우와 조우하고 많이 죽었다. 어차피 숙련도만 신경 썼고, 전투 주력도 네크로 본인이라 죽든 말든 여우 무리를 휩쓸며 다녔다.
덕분에 하루 만에 숙련도가 예전 일주일 치나 올랐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세요."
네크로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오지랖 유저가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가상현실 유저구나.'
VR 유저라면 고개 젓는 걸 이팩트로 해야 한다. 그 이팩트의 과장된 동작을 잘 알고 있는 네크로기에, 상대가 가상현실 기기로 접속한 것임을 알아챘다.
"야, WM 길드 내분이란다."
"구경 가자."
"내분? 거기 1일1살남으로 단합이 OB보다 더 단단한 애들 아냐?"
WM 길드가 지배하는 중심 도시지만, 유저 평판은 바닥이었다. 물론 더 바닥인 OB가 있지만, 남의 똥이 더 구리다고 해서 내 똥이 안 구린 건 아니었다.
덜 구려도 어차피 똥이니까.
많은 유저가 WM 길드 하우스가 있는 시가지 중심으로 몰려갔다. 60레벨이 되면 다들 사냥보다는 스킬 숙련도 올리는 데 열중이다. 마스터가 되어야 유니크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으니까.
도시에선 가끔 숙련도 올리는 퀘스트가 무작위로 생성된다. 그리고 도시엔 스킬 수련하는 연습장이 있다. 마을에도 있지만 도시 규모가 클수록 수련 효과가 좋다. 현금으로 결제해야 하는 유료 시설이어서 광해는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지만, 성격 급하고 돈 많은 유저들이 애용했다.
대략 200만 원 사용하면 60레벨 찍고 일주일이면 마스터 랭크 된다. '성기삽니다'는 한 달에 60레벨 찍고 마스터 랭크 되는데 두 달 더 걸렸다. 물론 그땐 생초보라 많이 에돌아갔다.
원래부터 사냥터보다 도시에 사람이 더 많은 웃긴 게임이었는데, 이번에 신규 유저가 대거 영입되면서 도시에 사람이 넘쳤다. 얼핏 봐도 수천 명 되는 유저가 악명이 자자한 WM 길드에 내분이 터졌다고 하자 모조리 구경하러 달려갔다.
'저 시간에 1실버라도 더 벌어들이겠다.'
한심한 작태에 네크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잡화점에서 잡템을 전부 처분한 네크로는 무기 장만하러 갔다. 성기사는 서브 직업으로 인식되었는지 가죽 갑옷조차 착용 못 한다. 그러니 무기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천 방어구는 가격이 무척 비싸니까.
"내구도 높은 지팡이 보여주세요."
"내구도만 높으면 되는 건가?"
대장장이 NPC가 철로 만든 지팡이를 쭉 늘어놨다. 아이템 정보를 살피니 착용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아이템 정보에 내구도가 표시되지 않았기에 NPC에게 내구도가 높은 순으로 열 개 달라고 했다.
"손 큰 손님은 오랜만이군."
노말템만 취급하는 대장간이기에 유저들이 좀처럼 찾지 않았다. 네크로가 사용하는 무기인 지팡이는 타격 무기라기보다 마법사나 네크로맨서가 사용하는 증폭기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필드에서 구할 수 있는 지팡이 대부분은 물리 공격력과 내구도가 형편없다.
"많이 사니까 좀 할인해주세요. 이후에도 자주 찾을게요."
"그럼, 에누리를 뚝 떼주지."
VR 게임과 달리 가상현실은 흥정도 가능했다.
- 작가의말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유의하세요. 새벽에 십수 번은 깼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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