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흔적을 찾아서2
네크로 일행은 별 소득 없이 레오칸이 잠든 동굴에 도착했다. 제이크와 게륵은 어느새 종적을 감췄다.
"덩치가 장난 아닌데?"
"그것보다 털이 불에 타지 않는 게 더 신기해."
레오칸은 개미 여왕보다 더 컸다. 현피가 피시방 차린 4층 건물 정도 크기였다. 그리고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잠든 레오칸의 몸은 새하얀 불로 뒤덮였다. 딱히 뜨거운 기운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냉기로 얼음조차 소멸하는 투라칸도 어쩌지 못한 불이었다. 굳이 찍어 먹어보지 않아도 된장이 아니란 걸 확신했다.
게임 시간으로 12시간, 현실 시간으론 4시간 조금 안 되는 수면 시간. 네크로는 언데드로 귀갑진을 펼쳤다. 상대가 전진하지 못하게 막는 데 중점을 둔 수비진 중에서도 가장 질긴 진법이었다.
"찾은 것 같네. 레오칸이 깨어나고 있어."
수면이 끝날 시간이 아님에도 레오칸이 꿈틀거리며 잠에서 깨려고 몸부림쳤다.
"공격할까요?"
"동면할 때 불이 가장 세다네. 차라리 잠에서 깬 레오칸이 죽이기 더 쉬워."
현피가 슬그머니 발사한 마법탄이 레오칸의 몸에 닿지도 못한 채 그냥 사라졌다.
"마법 면역이야. 불이 마법을 태워버렸어."
네크로는 급히 깜쇠에게 리치와 해골 마법사를 통솔해서 물러나게 했다. 강한 전력보다 변수가 적은 전력이 전투하기 편하다는 게 네크로의 신조였다.
레오칸이 힘겹게 눈을 겨우 떴을 때, 제이크와 게륵이 달려왔다.
"찾았다. 누가 가서 수습해야 한다. 우린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레오칸이 이미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 그웩은 느긋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편하게 감은 그웩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철벽을 지목했다.
"성기사가 가서 수습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철벽은 화염 면역 레어 귀걸이를 떼서 네크로에게 건넨 후 제이크와 게륵을 따라 신의 흔적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달리는 속도는 민첩과 체력 스텟으로 결정했다. 민첩만 높고 체력이 낮으면 순간 가속 능력이 좋고 달리기 속도는 느렸다. 철벽은 체력이 괜찮고 민첩이 낮은 편이어서 가속은 형편없지만 달리기는 평균 정도 되었다.
"저기야."
'여긴 오빠가 와야 하는데.'
경사가 60도에서 70도 사이로 보이는 절벽. 언젠가 봤던 와이번 둥지의 절반 크기로 보이는, 돌로 쌓아서 만든 작은 제단이 보였다.
"게륵 따라가라. 내가 뒤에서 보호한다."
정작 게륵을 따라 절벽으로 오르니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그래도 밑을 내려다볼 때마다 겁이 덜컥 들었다. 철벽은 최대한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게륵을 따라 올라갔다. 끝내 도착한 둥지에 타조 알 크기의 돌멩이가 은은한 빛을 뿜었다.
- 신의 흔적을 수습하였습니다.
- 신성한 불이 신을 믿는 자들에게 힘을 줍니다. 신전 관련 직업의 화염계 스킬 위력이 증가합니다.
- 신의 흔적을 수습한 유저 '철벽'에게 보상이 내려집니다.
- 화염계 신성 스킬 '성화'를 보유하였습니다. 성화가 유니크 스킬 '신의 불'로 진화합니다. 숙련도가 90%로 하락합니다.
퀘스트 창을 불러보니 127일로 줄었던 카운트가 다시 160이 되었다.
"오빠들, 퀘스트 완성했어."
"야, 빨리 와. 지금 네크로 형 언데드 절반이나 녹았어."
철벽은 허둥지둥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올라올 때보다는 덜 무서워서 꽤 빠른 속도였다. 레오칸의 동굴 앞에 도착했을 때, 네크로는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시발, 이건 아냐. 내가 어떻게 모은 언데든데."
천이 넘던 강화 좀비가 몇 남지 않았다. 듀라한도 십여 마리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미리 빼놓은 해골 마법사랑 리치들도 침을 질질 흘리며 발광하는 레오칸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오빠, 귀걸이는? 그리고 돗오빠는?"
"귀걸이 녹아 사라졌어. 진돗개는 2분 있으면 부활할 거야."
화염 면역이라고 하지만, 겨우 레어 아이템이었다. 레오칸의 불을 상대하면서 내구도가 빠르게 줄었고, 돌려쓰려고 귀속하지 않은 귀걸이는 녹아서 증발했다. 귀걸이가 사라지자마자 진돗개도 재 한 줌 못 남기고 대기실로 쫓겨났다.
"지금 현피랑 그웩만 쓸모 있어."
그웩은 강철의 성소로 일행을 보호하고 치유로 피통을 채워줬다. 투라칸 때도 냉기 때문에 생명력이 조금씩 줄었는데, 그땐 네크로의 회복의 빛 스킬이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오칸이 폭주하면서 내뿜는 열기로 인한 생명력 소실은 투라칸보다 훨씬 강했다.
"이러니 늑대 백만 마리씩 데리고 다니는 투라칸이 레오칸을 어쩌지 못했지."
재생 능력이 거의 없는 일반 늑대가 레오칸이 내뿜는 열기를 버틸 리 없었다.
"신의 불."
어마어마한 불길이 철벽 몸에서 치솟았다. 언데드들을 쫓아다니던 레오칸이 급작스럽게 몸을 돌려 철벽을 덮쳤다.
"강철의 성소, 신의 전사, 대천사의 은총."
그웩이 철벽에게 버프 스킬을 연신 퍼부었다.
쾅 소리와 함께 레오칸의 발톱과 철벽의 방패가 충돌했다. 철벽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네크로는 300대로 줄어든 소환수 카운트를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길지 않은 시간에 레오칸에게 2천 마리 언데드가 죽었다. 시약 값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고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현피, 파멸의 광선으로 놈의 불을 약하게 만든다. 저주가 걸리면 큰소리로 통보하고. 동해, 넌 영광일섬 사용할 기회만 노려. 네 판단에 맡기겠다. 제이크, 약점."
"천벌, 도발, 신의 분노, 이교도 심판."
"철벽은 신성력 아끼고. 새 스킬 끊어지면 우리 모두 위험해."
"신성력 잘 계산하고 있어요. 안 끊길 거예요."
"와 시발. 겁나서 게임 하겠냐. 10년 넘게 주방일 도왔는데, 갑자기 불이 무서워."
10분을 채우고 부활한 진돗개가 진저리를 떨었다.
"뜨거웠어?"
"뜨겁진 않은데, 내 몸이 탄다는 느낌이 있어. 시발, 이런 감각은 어떻게 구현한 거야? 내 몸이 타본 적 없는데. 내가 그 느낌을 어떻게 알았냐고."
"성필아, 이건 게임이야. 그리고 곧 저놈 해치울 거야. 참수 준비하고 기다려. 동해 궁극기 다음에 너다."
진돗개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게임 하면서 몹 이빨에 물려 죽기도 하고 발톱에 몸이 동강 나 죽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죽음이 유달리 진돗개에게 공포감을 심어준 것 같았다. 그래서 네크로는 평소와 달리 캐릭터 명이 아닌 이름을 불렀다.
"신의 분노."
철벽이 아닌 그웩이 사용했다. 저항을 낮추는 신의 분노는 철벽이 사용한 것보다 효과가 엄청났다.
"레오칸 털이 불에 탄다."
철벽이 불러온 신의 불이 아닌, 자신의 몸을 감쌌던 불에 털이 탔다.
레오칸은 황급히 불의 세기를 낮췄다. 레오칸의 불이 줄어들면서 털이 그을리는 현상이 멈췄다. 그러나 불이 줄자 레오칸이 철벽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오빠, 내 불이 더세. 곰이 내게 밀리고 있어."
키가 160도 안 되는 철벽에게 4층 건물 높이의 커다란 곰이 뒤로 밀렸다. 철벽이 새로 얻은 신의 불이 레오칸의 불을 뛰어넘으면서, 레오칸이 수세에 몰렸다.
"형, 약화 저주 걸렸다."
현피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왔다. 수련자 세트를 빠르게 착용한 네크로가 레오칸 뒤로 달려갔다.
"다들, 최선을 다해줘. 자폭."
네크로가 부활했을 때는 이미 동해가 영광일섬을 사용했고 진돗개가 광전사 스킬을 펼치고 올곧은 용기로 레오칸의 다리를 벌목하듯이 사정없이 찍고 있었다.
"뒤통수, 약점 뒤통수다."
다른 몹과는 달리, 제이크는 레오칸의 약점을 어렵게 알아냈다. 심지어 약점 알아내라고 지시한 네크로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현피, 뒤통수로 마법."
현피가 마법탄과 파괴의 광선을 번갈아 레오칸 뒤통수에 쏟아부었다. 리치와 해골 마법사들도 레오칸의 머리에 다양한 마법을 퍼부었다.
"투심권."
답공보로 몸을 높게 띄운 동해가 레오칸 가슴에 투심권을 먹였다. 진돗개가 다리 하나를 못 쓰게 찍은 것과 겹쳐 레오칸의 몸이 뒤로 서서히 쓰러졌다.
"돗개야, 피해."
"참수."
스킬은 아니지만, 진돗개는 습관적으로 외쳤다. 정말 훌륭한 세로베기가 바닥에 모로 쓰러지는 레오칸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때렸다. 강한 일격을 날렸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진돗개는 레오칸에게 깔렸다.
"젠장, 상태이상 걸렸다. 하체 마비."
광전사 상태에서는 웬만해서 죽지 않고 상태이상도 안 터지는데, 정말 재수 없게 하체 마비가 걸렸다. 마비가 풀려도 민첩 수치가 1부터 천천히 회복하는 엄청 짜증 나는 상태이상이었다.
"신의 분노, 신성 낙인. 치유."
동해는 투심권으로 레오칸의 가슴만 두드렸다. 뒤통수는 이미 철벽과 네크로가 차지해서 끼어들 틈이 없었다. 현피는 레오칸에게 깔린 진돗개를 끌어내려고 낑낑거렸지만, 현피의 힘 스텟으론 어림도 없었다.
'정신 차리자.'
뒤늦게 수련자 세트를 유니크와 에픽으로 바꾼 네크로는 신의 회초리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줬다. 약한 다수를 상대로 절대적인 위력을 보였지만, 강한 소수 상대로는 점점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부활한 후 아이템 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결책이 있을 거야. 정 안되면 네크로맨서 스킬 다 갈아치워도 돼. 어차피 그랜드 마스터 랭크는 성기사 스킬로 유지하는 거니까.'
강한 몹 상대로 뭔가 할 수 있도록 스킬을 전부 갈아치울 생각도 떠올렸다.
"신벌."
어마어마한 벼락 줄기가 떨어져서 레오칸의 머리를 때렸다. 깜짝 놀란 철벽과 네크로가 뒤로 자빠졌고, 동해도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이 좋은 스킬 일찍 쓰지."
레오칸이 입으로 하얀 연기를 몰몰 뱉으며 사체가 됐다.
"신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재주네. 그대들의 정성에 감동하여 신께서 방금 허락을 내리셨네."
"그런 재주가 더 있습니까?"
"부활도 있고, 기적도 있고. 신의 허락을 얻어야만 펼칠 수 있는 재주네."
"제이크 칼 들었다."
"전설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냐?"
"생방송 안 해서 참 다행이야. 오늘 우리 좀 꼴불견이었어."
"제길, 부위로는 투군데?"
그웩의 치료로 마비에서 겨우 풀려난 진돗개가 탄식했다. 진돗개는 이미 유니크 투구를 보유했기에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응? 모양은 투구가 아닌데?"
"아니, 왜 머리에서 방패가 나와?"
제이크는 레오칸의 뒤통수에서 방패를 끄집어냈다.
"제이크, 거인 좀비 만든다."
다시 수련자 세트를 착용한 네크로는 비수를 꺼내 들고 사체의 심장을 추출했다. 제이크는 다시 뒤통수에 칼을 댔다. 두개골을 도려내고 머리 안에 기어들어 가서 뇌수를 밖으로 던졌다.
"형, 꼭 성공해야 해. 달랑 유니크 방패 하나로 만족할 수 없어."
게륵이 방패를 잡고 낑낑거렸다. 아이템 감정에 거듭 실패했다. 그웩이 더 확실하긴 한데, 그웩은 골드를 요구했다. 게륵의 숙련도도 높일 겸해서 계속 게륵에게 맡겼다.
심장에 육망성을 그린 후 여섯 가지 금속을 정해진 순서대로 꽂았다. 시약을 바르고 주문을 외우고, 다른 시약을 바른 후 새 주문을 외웠다.
"심장 됐다."
네크로는 안도의 한숨을 휴 내쉬었다. 시약 가격만 해도 현금으로 수십만 원이었다. 마스터 랭크의 상인 유저를 통해 구했기에 그나마 백만 원을 넘지 않았다. 네크로가 직접 구했다면 높은 친밀도에도 불구하고 백만 원을 분명히 넘었다.
뇌수에도 시약을 섞고 주문을 외우고를 반복했다. 네크로가 뇌수를 반죽하는 사이, 제이크는 칼을 들고 레오칸의 몸 곳곳에 문신을 새겼다.
"형, 제이크 뭐 하는 거야?"
네크로가 뇌수를 뒤통수 구멍으로 다 집어넣은 후, 긴장했던 공기가 느슨하게 풀렸다. 세 고비 중 두 개를 이미 건넜다. 이제 네크로가 주문을 세 번 이상 틀리지만 않으면 진인사는 끝이다. 그 뒤로는 게임 시스템이 자비를 베풀어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성공률 높여주는 주술 문신. 네크로맨서 길드에서 3백 골드 주고 산 거야."
레오칸의 몸에 신비한 문양이 가득 새겨진 후에야 네크로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죽음의 기사나 해골 기사와 달리 주문이 엄청 길었다. 그리고 주문 내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해골 기사는 한글로 주문 내용이 들렸는데, 거인 좀비는 외계어로 들렸다.
어두운 빛이 레오칸의 사체를 쓸고 지나갔다. 제이크가 정성 들여 새긴 문신들이 픽픽 터졌다. 유니크 방패를 잡고 낑낑거리는 게륵을 제외하면 모두 레오칸에게 집중했다.
- 축하합니다. 레전드 최초로 거인 좀비를 제작했습니다.
- 거인 좀비는 등급이 낮은 좀비를 섭취해야 합니다. 섭취가 부족할 경우 거인 좀비는 움직임을 멈춥니다.
"무슨 거인이 겨우 4미터야?"
"숙련도가 오르면 키도 자라나?"
"근데 거인이랍시고 10미터 이러면 우크 동굴이랑 들어가기 불편하잖아. 키가 적당한 게 좋지."
뉘어있던 윗몸을 일으킨 거인 좀비는 듀라한과 몇 없는 강화 좀비에게 손짓했다. 듀라한과 강화 좀비들은 거역하지 못하고 순순히 거인 좀비의 손짓에 응했다.
"뭐야, 징그러."
거인 좀비는 강화 좀비와 듀라한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4미터 크기의 거인 좀비는 강화 좀비와 십수 마리 듀라한을 다 삼킨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17일 동안 움직일 수 있대."
"형 견제하려고 유니콘에서 수작 부린 거 아냐? 게임 설정에는 이런 내용 없었잖아."
진돗개가 무심코 진실을 말해버렸다. 다른 제작 네크와 달리 소환수가 잘 안 죽는 네크로를 너프하려고 개발팀이 AI를 어렵게 설득해 해골용과 거인 좀비는 저등급 해골 혹은 좀비를 먹어치우는 쪽으로 설정을 수정했다.
이름 : 신이 비친 방패
분류 : 방패
등급 : 유일
능력 : 절대 뒤로 밀리지 않음
특별 : 수비에 성공할 때마다 신성력 회복
"와, 방패 너무 좋아."
안 그래도 게임을 한 시간이 짧아 힘도 체력도 낮은 철벽이어서 힘이 센 몹에게 가끔 밀렸다. 그러나 훌륭한 방패 덕분에 다시는 몹에게 밀릴 걱정을 덜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