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를 지어1
광화문 광장의 면적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 내부. 고대 신전처럼 굵은 기둥이 가득하다. 곳곳에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밝은 빛을 뿜어냈다.
질서정연함과 신비함이 뒤섞였던 고아한 공간은 어느새 난장판으로 변했다.
"죽여라!"
"길드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아."
"잡아서 기름에 튀기자."
레전드에서 유저들이 공인하는 삼대 길드.
1위 : WAR MADAM
2위 : ONE BATTLE
3위 : PEACE MAKER
사실 개개인의 전투력은 비슷하다. 다만 단합은 WM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길드전 터지고 OB는 80명 정도 모인다면 WM은 120에서 150까지 모였다.
죽어도 10분이면 부활하고 아이템 떨궈도 경매장 통해 쉽게 보충하는 게임 특성상, 누구도 누굴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다. 골드만 넉넉히 사놓으면 전투력 회복은 금세 되니까. 적을 박멸하려면 상대보다 훨씬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 집에 금산 은산 있지 않고는 누구라도 힘들다.
싸움이 길어지면 동맹 길드들도 참전하고, 대규모 전투가 되면 더욱 상대를 무너뜨리기 어려워졌다. 전술이나 전략 따위는 없이 그저 사람 갈아 넣는 경쟁으로 비화했다.
"냠쟈 새끼가 지금까지 고귀한 여자인 척하다니. 비만 돼지 주제에."
"뭔 개소리. 지금 니 면상 봐봐. 멧퇘지야."
유니콘 사는 삼대 길드에 구매 우선권을 줬다. 그래서 대부분 길드원이 가상현실 기기를 통해 첫 접속을 했다. 그간 스킨으로 가렸던 풍채가 그대로 드러났고, 캐릭터 만들 때 선택했던 성별 말고 진짜 성별이 드러났다.
길드원들끼리도 처음엔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캐릭터 꾸미기로 이쁘게 만든 몸매와 얼굴이 아닌 현실 그대로 드러났으니까.
문제는 외모뿐 아니라 성별까지 드러난 길드원이었다. 캐릭터를 여자로 만들고 음성 서비스 월 6만6천 원에 음성 변조 서비스 12만 원까지 써가며 WM 길드에 잠입한 첩자가 가상현실 기기로 접속하면서 그만 목소리를 들켜버렸다.
"언니, 언제 정모 한번 해요. 길드에 꼬추 들어온 것도 모르고 이게 뭐예요."
"그래. 어차피 서로 못 볼 꼴 다 본 마당에, 현실에서 얼굴 한 번 까자."
마법사나 사냥꾼 그리고 약초꾼을 비롯한 직업들은 근접 캐릭들의 싸움을 구경하며 느긋하게 대화를 나눴다.
"누구 접속했어요."
"일단 포위해."
하얀 빛무리가 사라지며 늘씬한 몸매에 여신 얼굴의 캐릭터가 접속했다.
"응? 애니콜 너 원판이었어?"
"언니도 참. 대기실에 성형 콘텐츠가 있어요. 19만9천 원이면 스킨과 똑같이 만들어줘요. 눈코입 따로따로 하는 방식도 있는데, 그런 건 전문가 도움이 필요해서 그냥 19만9천으로 기존 아바타랑 똑같이 만들었죠."
"잡았다."
도시에서 유일하게 PK 가능한 곳은 길드 하우스다. 보통 길드전은 상대 접속이 적은 시간대에 맞춰서 길드 하우스를 습격하는 거로 시작한다. 사냥도 질리고 PK까지 질린 고인물 유저들에겐 길드전만큼 짜릿한 콘텐츠도 없었다.
"영어 조또 못하는 게 외국 산다고 했을 때부터 의심스러웠어."
"어떻게 처리할까요?"
"길드 탈퇴 신청 반려해. 그리고 계속 죽인다. 강제 탈퇴하면 명성 떨어지고 24시간 접속 불가지?"
"언니, 저 '벗겨먹기' 쓸게요."
도둑 유저가 벗겨먹기 스킬로 제압한 유저 장비를 하나씩 뜯어냈다. 가끔 실패해서 장비가 휘발하는 일도 있었지만, 벗겨먹기 스킬 숙련도가 꽤 높은 듯 대부분 장비를 뜯어냈다.
"오늘 삼겹살 파티하는 건가?"
뚱뚱한 남성 유저는 사령술사의 '벙어리' 저주로 벙어리가 되었다. 그래서 조롱에도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만 고수했다.
무인의 '혈도 짚기' 스킬로 아혈을 짚였을 땐 말을 못 해도 스킬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령술사 벙어리 스킬은 스킬도 사용하지 못하게 강제했다.
"이 오겹살들아, 오빠 간다. 잠깐이었지만 즐거웠어."
끝내 저항에 성공해 스킬 효력이 사라지자 남성 유저는 재빨리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처 로그아웃을 끝내기 전에 몰매에 캐릭터가 사망했다.
"길드 강탈했다. 이름은 못 바꾸니까 이후 '꽃보다 나비'는 무한척살이다."
"그나저나 다들 '성형' 좀 하고 와. 자꾸 냠쟈 같아서 한 대 때리고 싶다."
유저들은 분분히 로그아웃을 외쳤다. 대기실에서 성형 콘텐츠로 이쁘게 꾸미고 나서 하나둘 다시 길드 하우스에 나타났다.
그렇게 WM은 남성 유저 세 명을 제거했고, OB도 마찬가지로 여성 유저 여러 명을 쫓아냈다. 다들 두 거대 길드의 피 튀기는 싸움을 바랐지만, 서로 경계가 심한 것도 있고 가상현실 기기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한 터라 유저들이 기대했던 대규모 길드전은 바로 터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상현실의 실감 나는 전투와 생생한 감각에 두 길드 모두 속으로 은근히 별렀다.
###
"돈이 최고다. 장가가자."
네크로는 피곤이 느껴질 때마다 큰소리로 자신을 격려했다. 게임에서 잔인한 장면을 보면서 스트레스가 풀렸었는데, 그건 현실이 아님을 명확히 인지했기에 가능한 거였다. 현실과 비슷해지자 오히려 스트레스가 됐다.
네크로는 외압으로 사냥터를 바꿨다. 뉴스 뜨고 가입한 신규 유저들이 레벨이 오르면서 붉은 꼬리 여우 사냥터에 진출했다. 아이템 달라고 구걸하는 거지부터 파티 맺고 버스 태워달라는 빈대까지.
게다가 친구 추가 요청도 끊임없이 들어왔다. 일일이 거절하기 귀찮아서 금전표 사냥터로 옮겼다. 붉은 꼬리 여우와 마찬가지로 민첩 때문에 20레벨대 유저들에게 외면받는 금전표였다. 딱히 메리트가 없는 붉은 꼬리 여우와 달리 금전표는 골드를 동레벨 몹보다 3배 이상 줬다. 직접 골드를 주진 않지만, 드랍하는 가죽이나 발톱이 잡화점에서 비싸게 팔렸다. 저렙의 골드 노가다엔 참 괜찮은 장소지만, 경험치를 원하는 유저에겐 외면받았다.
"잡아."
해골 전사나 좀비나 주인 명령에 따르진 않는다. 그러나 높은 현실감 때문에 네크로는 가끔 몰입해 소리 지르곤 했다. 은밀히 접근해 공격한 금전표가 소환수들에게 포위당했다.
네크로는 내구도 높은 철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접근했다. 해골 전사와 좀비를 상대하느라 네크로를 무시했던 금전표는 그 대가를 빠르게 확인했다.
"시발, 죽어!"
'욕하는 버릇 고쳐야겠다.'
예전 습관이 남아있어 저도 모르게 자꾸 욕설을 뱉었다. 그땐 어차피 상대에게 들리지 않기에 마음껏 욕하며 스트레스 풀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강타 스킬을 동반한 후려치기는 금전표 머리에 '출혈' 상태이상을 일으켰다. 보통은 스턴 혹은 어지러움 유발이 대부분인데, 지팡이로 출혈이 생길 줄은 몰랐다.
'게임은 게임이네. 온갖 감각을 다 구현해놔서 자꾸 까먹어.'
"좀비 제작, 흡혈 좀비."
흡혈 좀비는 거머리처럼 상대에게 들러붙는 능력이 있다. 해골 전사 다음은 해골 궁수인데, 민첩이 높은 점박이 표범을 상대로 궁수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 심장과 뇌수를 파내십시오.
익숙하게 심장과 뇌수를 꺼냈다.
- 심장에 흡혈초를 넣으십시오.
미리 준비한 흡혈초를 심장에 넣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나무 옹이처럼 단단하던 심장이 흐물흐물해졌다.
- 심장을 넣으십시오.
흐물흐물해진 심장을 가슴에 낸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심장 감촉이 약간 소름 끼쳤다.
- 주문을 외우십시오.
흡혈 좀비도 덩치가 크진 않았다. 좀비와 비슷한 덩치와 생김새. 다만 손가락 사이에 개구리 물갈퀴와 비슷한 흡판이 있었다.
표범이 있을 법한 곳으로 움직였다. 보호색 때문인지 게임 설정 때문인지 표범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표범이 와서 습격하고, 습격한 표범을 잡아야 했다.
체력이 간당간당하던 해골 하나가 표범 습격에 부서졌다. 사령술사는 소환수 체력을 보충하거나 죽은 언데드를 부활하는 스킬이 있다. 그러나 제작한 언데드에는 해당 스킬이 먹히지 않는다.
도시에서 만난 오지랖 유저가 스킬 지우고 다시 시작하라고 한 이유도 그거다. 안 죽게 지키지 못하면 해골 소환이나 좀비 소환 스킬보다 귀찮기만 한 제작이다.
푸륵. 흡혈 좀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표범을 덮쳤다. 물갈퀴를 닮은 빨판으로 표범 몸에 들러붙은 좀비는 입으로 표범 가죽을 깨물었다. 비록 표범의 방어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빨을 박진 못했지만, 표범 몸에 매달려 민첩 떨어뜨리는 역할은 톡톡히 해냈다.
덕분에 표범을 쉽게 사냥한 네크로는 사체를 흡혈 좀비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제작 스킬에 처음 실패했다. 제작 과정에 딱히 실수한 건 없으니, 낮은 숙련도로 인한 페널티로 여겨졌다.
"젠장. 이런 변경 사항은 공지로 좀 올리라고."
실패하니까 숙련도가 조금 떨어졌다. VR 게임 때와 다르다. 그땐 숙련도는 올라만 가고 떨어질 줄 몰랐다.
어차피 단독 생활 하는 표범이기에 흡혈 좀비 하나로도 충분했다. 스킬 숙련도가 가장 중요한 네크로는 그냥 해골 전사와 좀비만 만들었다.
###
수련자 세트.
투구, 목걸이, 반지로 이뤄진 세트다. 매직 등급의 아이템으로 VR 게임 때는 무척 소외당하던 아이템이었다. 드랍률이 엄청 높은데 수요가 너무 적었다.
세트 효과 : 숙련도 하락을 방지한다.
어차피 숙련도가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보정 효과가 미미해 숙련도를 높이는 데 큰 보탬도 되지 못했다.
경매장에서 정말 싸구려 가격으로 수련자 세트를 3벌 구했다. 잡화점에 파는 값에 30%를 붙인 정말 싼 가격이다. 수수료 20%까지 생각하면, 남는 게 없다는 말이 사실.
'우르크 도망자 마을을 털어야겠다.'
네크로는 경매장 아이템 가격이 조금씩 올라간 걸 발견하고 자신을 책망했다. 분명히 로그아웃했을 때 아이템 가격이 올라갈 걸 예상했고, 당분간 아이템에 투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로그인한 후엔 스킬 숙련도 높이는 데 정신 팔려 다짐을 깜빡했다.
현질로 골드를 사서 투자할 엄두가 나지 않는 네크로는, 우르크 마을을 털어 골드를 모으기로 했다. 동물형 몹 아무리 잡아봤자 보스몹 제외하면 가죽이나 발톱 그리고 노말템만 드랍한다. 매직 아이템은 인간형 몹만 드랍하고, 골드는 사회를 형성한 집단 거주 인간형 몹만 드랍한다.
우르크 도망자 마을은 길드 단위로 공략해야 하는 사냥터다. 일단 마을을 점령하면 희귀 광물과 골드를 얻는다. 운 좋으면 레어 심지어 유니크 아이템까지 얻을 수 있다. 드랍으로는 안 주고, 족장의 보물상자에서 랜덤으로 나오는 보상을 기대해야 한다.
우르크 도망자 마을 공략이 어려운 이유는, 15분의 리젠 타임 및 몹의 협동심 때문이다. 마을 외부를 돌아다니는 사냥팀, 마을 울타리를 따라 움직이는 순찰팀, 마을 내부에 주로 머무는 전투팀. 게다가 60레벨에 레어템으로 도배한 유저랑 맞먹는 족장.
다행히 제국 편제에 드는 우르크 마을과 달리 도망자 마을에는 주술사가 없었다. 주술사까지 있다면 네크로도 혼자 마을을 상대할 엄두를 못 냈다.
도망자 마을과 일반 마을의 차이는 주술사의 유무와 족장의 무력 차이뿐. 일반 몹의 무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우르크 전사의 투박한 무기가 좀비 머리를 정타로 때렸다. 치명타를 맞은 좀비가 그대로 무너졌다. 타이밍을 재던 네크로는 잽싸게 뛰쳐 갔다. 우르크 전사는 상대를 죽인 후 짧게 자축하는 습관이 있었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우르크 전사는 네크로의 강타 스킬에 갈비뼈가 부러졌다. 양손 무기를 사용하던 우르크 전사는 갈비뼈가 부서진 쪽의 팔이 마비되며 전투력을 상실했다.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좀비와 해골에게 마무리를 맡긴 후, 네크로는 흡혈 좀비를 몸에 단 우르크 전사를 덮쳤다. 흡혈 좀비 방해로 동작이 느려진 우르크 전사는 강타 스킬 세 번에 시체가 되었다.
흡혈 좀비는 살아있는 자의 피만 먹으려 한다. 우르크 전사가 시체가 되자 바로 떨어져서 다음 목표를 덮쳤다.
16인 규모의 사냥팀은 매직 아이템 2개와 1골드, 그리고 몇 개 노말템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이템 착용."
좀비와 해골들이 알아서 노말템을 착용했다. 5분의 시간을 소모해 네크로는 16구의 시체를 좀비와 해골로 바꿨다. 세 마리로 늘어난 흡혈 좀비가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마을에 접근해야겠다.'
해골과 좀비 숫자가 70에 육박했다. 해골과 좀비는 최고 레벨이 15다. 이미 절반에 달하는 해골과 좀비가 15레벨을 달성했다.
골드가 목적이 아니라면 사냥팀만 처리해도 쉬지 않고 사냥할 수 있다. 그러나 네크로의 목적은 마을을 점령한 후 보상으로 나오는 골드다.
사냥팀과 달리 순찰팀은 위험 부담이 크다. 순찰팀은 정해진 시간 안에 처리하지 못하면 마을 안 전투팀을 부르거나 마을 밖 사냥팀을 부른다.
재수 없으면 둘 다 부르기도 했다.
우르크 마을은 굵은 통나무로 울타리를 쳤다. 순찰팀은 그 울타리 밖을 돌면서 침입자를 막아냈다.
굵은 통나무로 든든하게 지은 울타리와 달리, 거주하는 집은 허름한 오두막이 대부분이었다. 편한 거주환경보단 생존에 더 신경 쓴다는 설정이긴 하지만, 제국까지 이룬 지성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마을에 접근하자 어느새 네크로 무리를 발견한 순찰팀이 달려왔다. 사냥팀보다 적은 10마리. 그러나 개개인의 무력은 사냥팀은 물론 전투팀보다도 더 강했다. 숙련도가 꽤 오른 패시브 스킬 '편제' 덕분에 좀비와 해골이 적절하게 조합해 우르크 순찰자 한 명씩 맡았다.
'천천히 죽여야 한다. 한 놈 남겨서 사냥팀 혹은 전투팀을 불러오게 해야 한다.'
혼자인 성기사일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많은 소환수가 있다. 전투팀을 불러오면 네크로도 참전해서 재빨리 해치우고 빈 마을로 달려가서 족장을 상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휘를 듣지 않는 해골과 좀비는 네크로의 예상과 달리 순찰조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정식 마을보다 약하다 해도 족장이다. 어떻게든 전투팀을 유인해 내와야 하는데.'
- 작가의말
생각보다 안 나아서 약을 바꿨습니다. 예전엔 쉽게 걸리고 쉽게 떨어지는 게 감기였는데, 요즘은 2년에 한 번 정도 하는 대신 무지 들러붙네요.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