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는 버그 유저1
드래곤 로드의 레어가 있는 드래곤 산맥 최고봉엔 드래곤이 살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가 신의 권위에 도전하다 영원한 소멸을 당했고, 남은 드래곤 중 모두의 인정을 받고 로드에 취임할 존재가 없었다.
그러나 드래곤만 안 살 뿐,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은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형, 도와줘."
네크로는 날렵하게 뛰어가 동해를 공격하는 오우거의 손목을 지팡이로 때렸다. 카운터 판정을 받으며 오우거가 든 몽둥이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동해는 답공보로 급히 물러나면서 물약을 들이켰다.
"천천히 물러서자. 너무 강해."
불멸이란 이름을 지어준 죽음의 기사만 챙기고 남은 언데드는 먹잇감으로 던져줬다. 봉우리 초입을 벗어나 안전지대에 도착하니 이미 부활한 현피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드 채널로 오지 말라고 말해둬서 덧없는 희생을 줄였다.
"철벽은?"
"잠시 후 부활할 거야. 도발로 몹 잡아두느라 못 빠져나왔어."
"형, 답이 안 보이는데?"
"역천 데려오면 될 것 같은데. 빙하시대 한 방이면 몹들 동작 굼떠지고 저항 다 떨어지겠지?"
"빙하시대 쿨타임 180일이야."
"오빠, 불의 용 소환하면 안 돼? 쿨타임 180일이니까 빙하시대랑 비슷한 위력 아닐까?"
"그건 안돼."
네크로 말고 진돗개가 반대했다.
"불의 용이 진짜 용이면 곧 다른 드래곤들이 몰려올 거야. 어떤 용이라도 드래곤 로드 영역에 침입하면 다른 드래곤들이 몰려와서 다굴 쳐."
"진짜 용 아니고 별명 같은 걸 수 있잖아."
"네크로 형 겨우 죽음의 기사 하나 만들었어. 그리고 불의 용 부른다고 저놈들 다 해치운단 보장도 없잖아."
게륵이 작은 망치와 이상한 도구를 들고 일행이 착용한 무구를 수리했다. 그러나 유니크까지만 수리하고 레전드 템은 손도 대지 않았다.
"와, 나 템 수리비 또 수백 골드 나가게 됐어."
"형, 돌아가서 방법 찾자. 이대로는 해결이 안 돼."
"그래. 일단 로그아웃해서 푹 쉬고, 그웩이랑 바미가 부활한 다음 희망의 등대로 돌아가자. 지금쯤 역천이 제한 풀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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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비서는 두 남자의 횡설수설을 꾹 참으며 들어줬다. 서른이 넘은 남자는 결혼 날짜까지 잡은 상태에서 파혼당하고 지금 택배 상하차 일을 하고 있었다. 아직 서른이 안 된 남자는 작은 회사에서 영업직 뛰고 있는데, 말주변이 꽝이라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떤 캐릭터 정보를 알아내려고 DB에 손댔는데 문제가 생겨서 회사에서 잘렸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죠. 원래 그냥 감봉으로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저희야 지시대로 한 것뿐이고 책임자는 따로 있죠. 힘이 약한 우리가 덤터기 쓰고 감봉으로 끝내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커지면서 퇴사 조치 당한 겁니다. 우리 둘은 억울하게 버림받은 거죠. 잘못한 거 전혀 없습니다. 기자님, 이거 이슈 안 될까요? 부당해고로 유니콘 고소해서 보상금 좀 받아낼 수 있지 않나요?"
유니콘이 승승장구하자 언론사에 익명으로 메일 보내서 각색한 사연을 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론사들은 답신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고려신문의 기자가 직접 찾아오니 기회다 싶어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회사 법무팀에 자문해보겠습니다. 이슈가 될 수 있다면 당연히 기사화할 겁니다. 대신 저한테 한 말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괜히 역풍 맞으면 다른 언론사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거든요. 생각나는 거 최대한 다 말씀해 주세요."
두 남자는 또 횡설수설 말을 토해냈다. 최 비서는 꾹 참고 단어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끝내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이 나왔다.
"잠깐만요. 두 분이 회사에서 해고된 게 괘씸죄라는 말씀이죠? 어떤 유저가 얻기 엄청 어려운 퀘스트 아이템을 얻는 바람에 90시간 넘게 업데이트했고, 원래 감봉조치로 끝내기로 해놓고 갑자기 해고를 통보했다는 말씀이시죠?"
"네, 일방적인 통보였습니다. 그날 오전까지만 해도 감봉조치로 봐준다면서 우리를 엄청 갈궜, 그러니까 조롱했습니다."
"그럼 그 퀘스트 아이템 얻은 유저가 엄청 밉겠네요? 그게 누군지 알아보진 않았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알아보려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DB 접속 권한이 아무도 없어서 알아낼 루트가 막혔습니다. AI라면 알겠지만, 저희는 대화 권한 자체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더 나눈 후, 최 비서는 둘과 악수하고 작별했다. 명함이라도 달라는 둘을 어렵게 뗀 최 비서는 차에 타자마자 전화기를 들었다.
"상무님, 상무님이 우르크 마을을 몇 번 공격하고 에픽 퀘스트 아이템을 얻으셨죠? 다이아몬드 상자 서른일곱 개를 열어서 얻으셨다고요? 네, 알겠습니다. 가상현실 전환하고 며칠 안 되어 4일 정도 업데이트한 적 있잖아요. 어떤 유저가 에픽 퀘스트 아이템을 얻어서라고 합니다. 그 유저가 네크로가 아닌지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상당히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해킹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 비서는 유니콘 정보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정보원마다 다른 번호로 연락해서 혹시라도 서로 들키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각자의 부서와 지위에 알맞게 확인해야 할 정보를 지시한 후에야 여유가 생겼다. 양복 단추를 풀고 넥타이도 느슨하게 했다. 좋은 예감이 입가의 미소를 오래 머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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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최강 흑마법사 리치먼드를 쓰러뜨렸습니다.
-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 리치먼드가 드래곤의 뿔에 새긴 흑마법 최고 주문 '불사의 저주'. 해당 주문을 새긴 드래곤의 뿔을 소멸해야 합니다. 리치먼드가 만든 던전 '영원한 암흑'의 최하층에서 드래곤 뿔을 찾아서 '검은 용암 호수'에 던지십시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퀘스트만 남았네요.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다시 달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고생 많았어요.","나랑 앵벌이 갈 사람."
미치몬드가 드랍한 템을 수습한 후 역천은 도시로 돌아가 로그아웃했다. 길드 소속 도둑들이 '영원한 암흑' 던전을 찾아낼 때까지 길드 사무와 신문사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땀이 살짝 나서 샤워하려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요즘 밖으로 나도느라 얼굴 보기 바쁜 최 비서였다.
"전화 받았어."
[상무님, 큰 거 물었습니다.]
"전화 말고 직접 대화해."
[네, 따로 약속 잡지 마시라고 전화드린 겁니다.]
"사무실에서 기다릴게."
최 비서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엄청난 뭔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늘 말라 있던 목도 오늘따라 촉촉하게 느껴졌다.
샤워를 마치고 양복을 갖춰 입었다. 넥타이는 조금 꽉 조였다. 목에 적당한 압박감을 주는 게 오히려 편한 반형운이었다. 말린 머리를 대충 만진 후 승인을 기다리는 중요한 기사들을 체크했다. 굳이 알아보려 애쓰지 않아도, 중요 기사들만 체크하면 나라 돌아가는 꼴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어렴풋이 보였다.
"상무님, 정말 놀라운 소식입니다."
최 비서가 이토록 호들갑 떠는 모습은 반형운도 처음이었다.
"커피 마시고 천천히 해."
적당히 식은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린 최 비서는 소매로 입을 쓱 닦고 말을 이었다.
"첫 에픽 퀘스트 아이템을 얻은 게 네크로 유접니다. 그리고 받은 게 '불신의 성기사' 퀘스트랍니다."
에픽 퀘스트 여덟 개는 초창기부터 있었던 여덟 직업을 상대로 했다.
불신의 성기사, 광야의 전사, 괴물 사냥꾼, 광기의 약초꾼, 미쳐버린 마법사, 현명한 사령술사, 절제의 무인, 정직한 도둑.
불신의 성기사는 잊힌 신의 이름을 찾는 여정을 걸어야 하고, 미쳐버린 마법사는 흑마법사의 최고봉인 리치먼드를 제거하고 불사의 저주 스킬을 없애야 한다.
"잠깐, 그러면 우리가 신의 조각상 퀘스트 한 거 네크로를 도와준 셈인가?"
"상무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사령술사가 성기사 퀘스트를 받았다는 것부터 문제 아닐까요?"
"그건 문제 아냐. 중국에서도 전사가 절제의 무인 퀘스트를 받았어. 우리는 유저가 적어서인지 나랑 네크로가 너무 빨리 달려서인지 경쟁자가 없지만, 다른 국가에선 한 퀘스트에 여럿이 매달려서 경쟁해야 해."
비록 가설 하나가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최 비서는 기죽지 않았다.
"그리고 네크로 유저가 에픽 아이템 얻었을 때, 캐릭터 만든 지 며칠 안 된 시간이랍니다."
"누가 도움을 줬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네크로 뭘 믿고 밀어줬을까요? 결과적으론 네크로가 엄청 대단한 행보를 보였지만, 그걸 미리 확신하는 건 딴 얘깁니다."
"그럼 본인 실력으로 해냈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해? 우리도 편법 써서 다이아몬드 상자를 어렵게 만들어냈는데."
'엄동설한' 스킬은 쿨타임이 3일이었다. 엄동설한과 눈보라를 결합하면 우르크 족장을 쉽게 해치웠다. 그러나 쿨타임 때문에 필살기를 못 사용할 땐 길드원들이 희생하면서 전투팀을 끌어내고, 도둑 유저가 은신으로 느릿느릿 걸어서 족장을 암살해야 했다.
몰래 찌르기가 성공해야 하고 칼날비로 족장이 즉사해야 했다. 레어 비수 하나가 그냥 날아가는 거고, 칼날비 쿨타임이 24시간이어서 도둑 유저 여럿 고용해야 했다. 그러고도 성공률이 50%가 안 되어 에픽 퀘스트 얻어내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
"이건 그냥 추측입니다. 네크로 유저가 삭제한 캐릭터 직업이 성기사랍니다."
"자세히 말해 봐."
"네크로 유저가 WM과 시비 붙어서 캐릭터를 삭제했습니다. 유니콘 직원 둘이 네크로 유저의 캐릭터 정보를 알아내려고 DB를 건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캐릭터 정보가 전부 사라졌습니다."
반형운은 잠자코 최 비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기존 캐릭터 정보가 사라진 시간과 네크로 유저가 캐릭터 생성한 시간이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캐릭터 만들고 엿새도 안 되어 에픽 퀘스트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최 비서 추리가 궁금해."
"성기사 캐릭 정보가 사라진 게 아니라 네크로 유저에게 덮인 건 아닐까요? 네크로 유저는 사실 만렙 성기사였던 거죠."
"모순이야. 네크로는 분명히 사령술사 스킬을 보여줬어. 언데드 제작이랑 자폭을 보여줬고 패시브는 편제랑 불사는 의심할 여지 없잖아."
"남은 스킬은요? 남은 액티브랑 패시브가 성기사 스킬이 아니라는 보장 없잖아요. 액티브 중에 근접 공격 스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은 3개 패시브 중에 소환수를 강하게 하는 스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네크로 파티에 들어간 후 저항이 높아졌어. 그런데 성기사 캐릭에겐 저항 높여주는 스킬이 없었어. 그때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WM 길드를 이용해서 들쑤실까요?"
"좀 더 생각해보자. 실패하면 후폭풍이 크지 않을까?"
"실패하더라도 네크로 유저를 흔들어 상무님이 먼저 왕의 혈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폭풍은 WM이 감당해야죠. WM에 대한 반감 때문에 네크로 유저의 이미지가 좋아질 수 있지만, 지금 즐기자 길드 역량으론 나라 세우는 것도 힘들고 도시 지배 길드 되기도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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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괴소문이 돌았다. SNS와 카페 그리고 일부 게시판에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바로 26억의 사나이로 불리는 네크로 유저가 버그 혹은 해킹 유저라는 글이었다. '팩트'만 정리한 글들은 네크로의 언데드가 쉽게 죽지 않는다는 점, 네크로가 캐릭터 만들고 며칠 안 되어 에픽 퀘스트 아이템을 얻은 일, 출처가 불분명한 전함, 역시 출처를 밝히지 않은 레전드 템들에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죽음의 기사에 관한 의문도 표했고 생방송 중에 가끔 보여준 마법 캐릭답지 않은 근접 전투 실력에도 질의를 던졌다. 소위 레전드 전문가가 네크로의 근접 공격력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수준인지 다른 네크로맨서와 비교하기도 했다.
레전드 게시판에 항의 글이 엄청 올라왔고, 해킹 혹은 버그 유저가 분명한 네크로 캐릭을 삭제하고 해당 유저를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해킹? 형 컴퓨터는 잘 못 하잖아."
"해킹은 유니콘이 무조건 부정할 거야. 대신 버그 유저가 치명적인데, 형 괜찮은 거지?"
광해는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이 정도 되면 옳고 그름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스킬이 20개라는 게 들키는 순간 네크로는 게임을 접어야 한다.
'유니콘에서 지금까지 말이 없었던 걸 보면 법적으론 문제 될 게 없는데. 여론과 민심이 이토록 내게 적대적이니. 내가 누구의 이익을 건드려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형, 유니콘 공식 입장이 떨어졌어."
마우스가 번개처럼 움직여 유니콘 공지를 클릭했다. 길지 않은 공지를 다 읽은 광해는 이마의 주름을 조금 폈다.
유니콘은 네크로 유저의 캐릭터가 해킹을 통한 데이터 변형이 전혀 없고 버그 유저도 아님을 확실히 강조했다. 유저의 캐릭터 정보는 유니콘이 함부로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남겼다.
'뭐지? 설마 유니콘이 게임 정보를 제대로 모른다는 낭설이 사실이었어?'
이러다 네크로 스킬 20개인 게 들키면 유니콘 이미지에도 어마어마한 타격이 간다. 광해는 유니콘이 이런 식으로 확신에 찬 공지를 올린 게 이해되지 않았다.
"형, 새 지랄이 시작됐다."
SNS 계정과 게시판에서 네크로에게 스킬 정보를 공개하라는 글이 수백 개 올라왔다. 공지 올라오고 몇 분 사이에 올라온 글이라, 누군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게 아닌가 싶었다.
'퀘스트 끝내고 왕의 혈통 얻어서 역천에게 비싼 값에 판다. 그리고 게임 그냥 접는 거야. 돈 충분히 벌어서 게임 접는다는데 누가 뭐라겠어.'
머리는 한탕 하고 게임 접는 걸로 기울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이 격렬한 다툼을 벌였다.
'일단 퀘스트 끝내고 생각하자.'
패배자가 되어 레전드 세상에서 쫓겨나는 느낌에 오기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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