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기 전에 꿈틀2
- 강신 스킬이 봉인되었습니다.
뜬금없는 메시지에 네크로는 깜짝 놀랐다. 강신과 천재지변 스킬의 조합으로 우르크 황제를 해치우려 했는데, 강신이 봉인되었다.
그레이트 웜을 잡을 때 바알드로가 자연재해 따위에도 저항하지 못한다면서 상대를 비웃은 적이 있다. 보란 듯이 손을 태풍에 밀어 넣어 약을 올리기도 했다.
만약 강신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천재지변을 펼친다면 우르크 황제의 몸에 내린 우르그르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
"우르그르."
특수 필드에 헤아가 난입했다. 그리고 유저들이 알던 헤아가 아니었다.
"바알드로. 용케 여길 찾아왔구나."
우르크와 헤아의 입을 빌려 두 최대 규모 종족의 신이 대화했다.
"우르그르, 넌 틀렸다. 신이 아무리 많아져도 진정한 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중간계에 신성이 넘치면 대부분 생물은 말라 죽는다."
"바알드로. 너도 틀렸다. 신의 숫자를 줄여 마계의 문을 연다고 해도 진정한 신이 되는 길은 없다. 진정한 신은 이미 존재한다. 헛된 욕심을 버려라."
"나도 틀렸다고 하는 걸 보면, 자신이 틀린 걸 아는 모양이군."
"내가 너보단 나은 것 같은데? 넌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아직도 모르잖아."
우르크 황제 손에 들린 단창과 헤아의 장창이 부딪쳤다. 목뼈로 뿔과 척추뼈를 이었고, 수염이 창술이 되었다. 힘이 실린 느낌도 없는데 고막을 찢는 굉음이 특수 필드를 꽉 채웠다.
우르크 황제가 정령 거미를 타고 급습했을 때 유저 셋이 당했지만, 특수 필드엔 아직도 스물이 넘는 유저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두 아바타의 싸움에 끼어들 엄두를 못 냈다.
'강신은 하위 스킬이어서 봉인됐구나.'
바알드로는 네크로 몸에 강림했을 때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보였다. 다른 스탯들이야 당연히 네크로가 훨씬 높을 테니 결국 친화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봐야 했다.
친화력을 12로 추측하는 네크로보다 높다면 헤아의 친화력은 최소 13이라고 봐야 한다.
"이름 찾은 지 얼마 안 되는데 힘을 많이 회복했구나."
"넌 그간 무슨 짓 하느라고 힘이 오히려 줄었느냐?"
"그건 천천히 알아보거라."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싸움을 멈춘 두 신은 짧은 대화를 끝으로 아바타를 떠났다. 트롤이나 고블린처럼 약한 종족이라면 훨씬 오래 머무를 수 있지만, 현재 가장 강한 두 종족인 우르크와 인간의 신은 강림 시간이 무척이나 제한되어 있었다.
"간다."
신이 떠나고 우르크 황제의 몸이 줄어들기 바쁘게 네크로가 돌격했다.
"긴급 탈출."
우르크 황제가 처음 듣는 스킬을 펼쳐 특수 필드에서 사라졌다.
-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 수도의 함락으로 우르크 제국이 정식으로 무너졌습니다.
- 공성전에 참여한 유저는 기여에 따라 한 달에 걸쳐 명성이 증가합니다.
- 우르그르를 함락했습니다.
- 우르크 수도를 함락하라 퀘스트 보상을 정산합니다.
- 1위는 고구려, 2위는 초, 3위는 WORLD, 4위는 대당성세, 5위는 만리장성, 대일본제국과 FreeDom은 공동 6위입니다.
- 5위까지 신의 축복이 내려집니다.
- 5분 뒤 인류 동맹을 해체합니다.
"얼음 상자."
역천이 갑자기 스킬을 사용했다. 두 개의 얼음 상자가 네크로와 진돗개를 가뒀다.
"뭡니까?"
철벽이 항의했다. 네크로와 진돗개는 얼음에 갇혀서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우르그르를 점령하고 수작 부리려는 것 같은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잘생긴 얼굴도 저런 얄미운 표정이 가능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버그 아냐? 아직 인류 동맹 깨지지도 않았는데."
"얼음 상자는 보호 마법입니다. 자기나 아군에 펼치는 스킬이죠."
"그렇게 안 친절해도 돼요."
철벽이 짜증을 부렸다.
"그럼 약속대로 우르그르는 고구려가 차지하겠습니다."
역천이 수정구를 향해 걸어갔다. 저기에 손을 대고 '도시 점령'이라고 외치면 우르그르는 고구려의 도시가 된다.
예전과 달리 길드장이나 국왕만 도시 혹은 마을을 점령할 수 있게 바뀌었다. 길드원이 많은 길드라고 해도 도시와 마을을 빠르게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다. 역천이 진돗개와 네크로를 얼음 상자에 가둔 이유기도 했다.
"공명일섬."
동해의 외침에 역천이 멈칫했다. 아직 인류 동맹이 깨지지 않아서 서로 공격할 수 없을 테지만, 조건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수호 기사 용병이 사라진 지금, 역천은 웬만한 공격에도 목숨이 위태롭다.
"설마, 길드장 자리를 넘긴 겁니까?"
수정구에 손을 댄 동해를 보고 역천이 경악했다. 수정구를 목표로 공명일섬을 사용한 동해는 공간을 뛰어넘어 역천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화접목."
이름 : 서리건
분류 : 두건 - 무인
등급 : 신화
능력 : 친화력 +1
능력 : 민첩 +2
특별 : 내공 회복이 빨라짐
특별 : 공격에 '냉기 효과'를 동반함
특별 : 스킬 '이화접목' 사용 가능 - 쿨타임 1일
이화접목 : 나와 지정 상대의 위치를 바꿈.
네크로가 얼음섬에서 얻은 에픽 템이었다. 허리띠라고 하기엔 좀 짧다 싶었는데, 무인 전용 아이템 영웅건이었다.
냉기 효과는 움직임이 느려지고 반응이 무뎌지는 등 빙결 하위의 상태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도시 점령."
진돗개가 고른 치아를 자랑했다. 진돗개 대신 얼음 상자에 갇힌 동해도 웃는 얼굴이었다. 우르그르는 즐기자 길드 소속이 되었고, 자동으로 WORLD에 속하게 되었다.
"교통 요충지인 우르그르를 점령해서 행군 속도를 느리게 만들겠다는 생각인가요?"
우르그르는 고구려와 대당성세와 만리장성 그리고 프리덤이 만나는 곳이다. 큰 강을 낀 수로 요충지기도 하고 사방으로 도로가 시원하게 뻗은 대륙 중앙 물류의 심장이기도 했다.
이걸 WORLD가 점령하면 현실로 3개월하고도 3주 더 지나야 공격할 수 있다.
그때 만리장성 채널에서 난리가 났다.
"가미카제가 만리장성의 도시 6개와 20여 개 마을 밖에 집결했습니다."
"빨리, 모두 포탈 타고 돌아가."
"포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뭔 개소리야. 포탈 생기는 거 다 봤는데."
황궁의 높은 곳에서 도시 곳곳에 포탈이 올라오는 게 눈에 보였다.
"줄을 서야 합니다."
"양보해 달라고 해."
포탈은 어디로 가는지 말하면 NPC가 금액을 알려준다. 그 금액에 동의하면 골드를 차감하고 유저를 이동시킨다.
이 과정이 보통은 3초도 안 걸린다. 금액을 미리 알고 있기에 목적지를 말하고 바로 동의를 외쳐버린다. 굳이 3초까지 걸린다면 다음 유저가 포탈 범위로 발을 들이는 시간까지 포함한 거였다.
"양보 안 합니다. 네크로 세력 유저들입니다."
"다른 포탈 찾아. 탈것 타고 움직이면 어차피 얼마 안 걸리잖아."
"모든 포탈에 네크로 세력 유저가 있습니다. 포탈 하나에 대략 천 명 정도 줄을 섰습니다."
"이것들이 짰구나."
3초로 치면 1분에 20명, 한 시간이면 1200명 보낼 수 있다. 유저들이 조금 미적거리더라도 천 명 정도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전투 개시 30분 이후 양측 모두 새로운 유저를 투입할 수 없다. 도시를 지키며 한 시간 버텨도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남은 유저도 20만은 되잖아. 수도만은 꼭 지키라고 해."
"이미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세력에서 거절했습니다."
"왜?"
"수고비 달랍니다."
식량 문제로 만리장성은 레벨 높고 템 좋은 유저가 많은 큰 길드 위주로 전투에 임했다. 그런 상황에서 남은 길드는 마음대로 하라고 풀어줬으면 괜찮았을 텐데, 만약을 대비해 늘 대기시켰다.
전투도 못 하고 퀘스트도 못 하고 사냥도 못 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유저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가미카제의 도시와 마을을 다 차지하면 보상한다고 말했지만, 그 불만이 우르그르 공성전을 기점으로 터졌다.
"얼마?"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
"됐다 그래. 한 시간 기다려서 돌아간다. 수도 옮기고 남은 세 국가와 동맹을 맺은 다음 되찾으면 돼."
"그냥 인근 도시로 가서 포탈 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비행 탈것 아니면 기다리기만 못해. 비행 탈것을 보유한 유저들만 따로 추려서 가까운 도시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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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천으로 규모를 불린 가미카제의 기마병이 만리장성 마을을 빠르게 점령했다. 수도를 포함해 동시에 여섯 개 도시에 공격을 선포했다. 30분이 지났는데 지원군이 전혀 도착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역천 도움을 받고 이번엔 네크로 도움을 받았구나."
가미카제 간부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늘 아래로 보던 한국 유저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역천이야 줄 돈 다 주고 거래한 거라지만, 이번엔 공짜 도움을 받았으니."
"네크로가 원하는 대로 만리장성과 철혈팔기와 목숨 걸고 싸우면 됩니다."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어차피 만리장성과 철혈팔기와 목숨 걸고 싸우는 건 가미카제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수도 함락했습니다."
"40분 걸렸군. 바로 다음 도시 점령한다."
"네크로를 너무 믿는 거 아닙니까?"
"두 시간 지체해준다고 했다. 이미 40분으로 증명했는데 못 믿을 게 뭐 있냐. 우릴 속여 네크로에게 좋은 게 뭐 있다고. 그리고 우린 호랑이 등에 탔다. 머뭇거릴 시간조차 아까우니까 반론은 허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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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들이 최대한 미적거렸으나 30개나 되는 포탈에서 WORLD 유저들은 겨우 1시간 끌었다.
다른 세력에 양해를 구하고 줄을 섰던 만리장성 유저들은 갑자기 꺼지는 포탈의 불빛에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포탈 점검합니다. 1시간 뒤에 가동합니다."
포탈도 연소탄을 태워 얻은 마력으로 가동한다. 정기적으로 점검하면 마력 효율이 높아져서 도시 지출을 크게 줄여준다.
보통은 사흘 전부터 점검 시간을 알려준다. 레전드 게시판에 포탈 점검 시간을 정리한 게시글 인기가 대단했다.
"어떻게 합니까?"
"기다려. NPC가 한 시간이라고 했잖아. NPC는 거짓말을 못 해."
보통 우르크 도시를 점령해도 남은 우르크를 소탕해야 한다. 그런데 우르크 황제가 긴급 탈출로 도망가면서 우르크들도 모조리 튀었다. 포탈도 사용할 수 없고 근처에 사냥터도 없다. 비전투 유저까지 합치면 백만이 넘는 유저가 손가락 빨면서 기다렸다.
만리장성 간부가 네크로에게 항의했지만, 비웃음만 당했다.
"현재 WORLD에 속한 도시나 마을 하나도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세요. 어차피 거리도 멀고 국경도 닿지 않았으니 그럴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어렵지 않죠? 각서 쓰면 바로 포탈 열어드립니다."
강한 자만 민낯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다. 네크로는 약자의 입장이어서 여론과 명분에 신경 써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강자인 네 세력이 가면을 써야 했다. 네크로의 소금성을 빼앗고 탄광과 광산을 빼앗고 아이템까지 빼앗을 작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크로의 노골적인 비웃음에도 만리장성 간부는 울분을 참아야 했다.
드디어 한 시간이 다 되었다.
"포탈 폐쇄합니다."
"왜요?"
"연소탄 부족으로 포탈을 폐쇄합니다."
연소탄이 부족하면 도시 일부 시설 사용을 멈춘다. 보통 포탈은 가장 마지막에 멈추는 시설이었다. 그러나 포탈을 먼저 폐쇄해선 안 된다는 법도 없었다.
"오늘 일은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내 집을 빼앗은 강도에게 도둑놈이라고 모욕당한 기분입니다."
"역시. 덕분에 오늘 안계를 크게 넓혔습니다."
"안타깝네요. 이런 모습은 안 보여드리려 했는데."
"언젠가 승패가 갈라진 그 날, 함께 술 한잔합시다."
"누구 잔이 쓰고 누구 잔이 단지, 그때 판가름 나겠군요."
철혈팔기 간부들은 아무 말 없이 떠났다. 포탈을 기다리던 유저들도 폐쇄 소식을 듣자 더 기다려도 소용없음을 깨닫고 가까운 도시로 향했다.
백만이 넘는 유저가 탈것을 타거나 걸어서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런 식으로 흘러 매우 안타깝습니다."
"저는 초인동맹이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세력이라고 늘 여겼습니다. 이번엔 실수했다고 확실히 말씀드리죠."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닙니까?"
"초인동맹이 잘 웅크리고 힘을 키운 것처럼 우리 역시 마찬가집니다. 거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은 건 서로 같은데, 왜 그쪽만 자신만만해야 합니까?"
우르크의 수도 우르그르를 함락한 날, 가미카제는 만리장성의 수도를 포함해 13개 도시와 67개 마을을 점령했다. 만리장성이 다른 도시를 수도로 정했지만, 변방의 일부 도시와 마을이 만리장성에 귀속하기를 거부하고 WORLD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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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LD는 우르크와 모든 종족을 포함해 누구의 공격도 받지 않습니다.
- 마찬가지로 WORLD는 어떤 도시나 마을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다행이다. 우르그르를 점령 못 하게 했으면 한 시간밖에 못 끌었을 거 아냐."
4개월에 일주일 정도 못 미치는 기간 마음껏 철혈팔기의 도시들을 공격하려 했는데, 유니콘이 빠르게 막아버렸다.
"3만이 아니라 더 데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다 사전에 유출되면 큰일이야."
"인구 2천만을 바라보고 활동 유저가 백만이 넘는데. 믿을 사람이 3만밖에 없다니."
"3만도 많은 거야. 지금까지 다 공평하게 대하려 했는데, 이젠 국가 안에서도 편 가르기를 해야겠어."
"형, 점점 게임이 현실과 비슷해진다는 느낌 안 들어?"
"결국 사람이 문제인 거야. 좌파인지 우파인지, 진보인지 보수인지. 그게 뭐 중요해. 이익이 있고 그걸 탐내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현실이나 게임이나 똑같지 뭐."
"제길. 게임은 좀 순수하면 안 되나?"
"그런 게임은 다 망했지."
인류 동맹은 동맹석으로 맺은 동맹과 같은 취급 받았다. 인류 동맹이 깨지고 당분간 모든 국가는 동맹석을 통해 동맹을 맺지 못한다.
"유니콘은 왜 이렇게 유저 사이 분란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일까?"
미리 아무 정보도 없었던 걸고 봐선, 급하게 설정을 수정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네크로는 유니콘이 무슨 목적으로 유저끼리 싸움 붙이려는지 머리 터지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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