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그 발견
버려진 사원.
60레벨 달성, 마스터 랭크 달성, PK에 신물 난 길드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수많은 길드가 별의별 짓을 다 해보고 내린 결론은, '여긴 맥거핀' 이었다.
셋은 허물어져 밑동만 남은 기둥을 흔들어보고 무너진 잔해를 뒤집었다. 마른 우물 안에 뭐가 있지 않을까 해서 동해가 허리에 밧줄을 묶고 내려가 보기도 했다.
"보스몹 잡아서 뭔가 얻어야 비밀이 풀리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 보스몹 잡아서 아무것도 드랍한 적 없어. 분명히 뭔가 찾고 나서 보스몹을 잡든가, 아니면 버려진 사원과 보스몹은 아예 상관없을 수도 있어."
"게임인데, 그렇게 꼭꼭 숨겼을까?"
네크로는 점점 버려진 사원에 뭔가 없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늑대왕 세트도 봐. 늑대왕 죽여야 애꾸눈 늑대가 나타나잖아. 그걸 아는 사람이 몇 명 없었어. 늑대왕 풀세트 정보가 게시판에 올라온 적 있으니까 누군가는 알았겠지만, 쉽게 알 수 있는 정보는 아니잖아."
진돗개 말에 네크로가 무릎을 탁 쳤다.
"혹시 그런 거 아닐까? 누군가가 늑대왕 잡았는데, 다른 누가 애꾸눈 늑대의 퀘스트를 받아서 레어 세트를 얻었을 가능성. 그래서 둘의 상관관계를 몰랐던 거야. 다시 찾아갔는데 애꾸눈 늑대가 없으니까 일회용 이벤트 몹이었거니 했을 수도 있잖아."
시간이 흐르면서 진돗개와 동해도 힘이 빠졌다.
"형, 무턱대고 찾는 건 아닌 것 같아. 아무래도 머리를 써야 해. 난 머리 굳은 지 오래니까 두 분 좀 수고해."
"성필이 형, 그새 되게 뻔뻔해졌어요."
"아차, 아직 빼먹을 게 많은데. 내가 너무 빨리 마각을 드러냈구나."
진돗개와 동해도 반쯤 포기했는지 진지하던 분위기가 풀렸다.
버려진 사원은 그저 허물어진 폐허다. 온전한 건물 반 개라도 남아있으면 거길 파겠는데, 그런 단서조차 없었다.
"형들, 일단 보스몹이라도 잡아보죠. 운 좋게 드랍할 수도 있잖아요."
"무리야. 우리 셋으로는 잡을 수 없어. 저거 거지몹이어도 길드 단위로 잡아야 해."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달해 포기하고 사냥이나 하려는 생각이 꼬물꼬물 머리를 치켜들 때, 진돗개가 새로운 의견을 냈다.
"보스몹 잡으면 늑대왕 퀘스트처럼 어딘가에 특정 몹이 생기거나 하는 건 아닐까? 버려진 사원이 아니라 먼 곳에 나타날 수도 있어."
"황무지에 버려진 사원 빼면 특이한 곳 없어."
"오아시스. 버려진 사원 빼면 오아시스밖에 없어. 오아시스로 가면 새로운 NPC가 생겼을 수도 있어."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랬으면 예전에 오아시스에 유저가 북적거렸을 때 발견했겠지. 내 생각엔 기존 NPC가 갑자기 퀘스트 같은 거 줄 가능성이 커."
진돗개는 늑대 세트를 벗고 다른 템으로 맞춘 후, 레어 목걸이 사채업자의 눈물을 장착했다. 누런 황무지는 아이템 안 주기로 유명하기에 드랍률 상승 목걸이는 배제했었다. 그러나 보스몹이 혹시나 떨굴 뭔가를 위해 목걸이를 교체했다.
"어차피 죽어도 10분이면 부활이야. 한 번 해보자."
"버려진 사원 주변에 샘이 여러 개 있어. 보스몹 뻐드렁니는 샘에서 샘으로 움직여."
조금 과장을 보태서, 뻐드렁니가 거의 다리 굵기인 보스몹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비 선공 몹이야. 지금까지 발견한 보스몹 중에서 유일하게 선공이 아닐 거야."
"잠깐만."
"혹시 안 잡고 뒤를 따라다녀 보자고? 형, 대형 길드들도 멍청이만 있는 건 아니야."
"제길."
해골 마법사는 만들어질 때 무작위로 하나에서 세 개의 마법을 얻는다. 이건 숙련도가 아무리 올라도 변화가 없는 부분이다. 네크로는 얼음 화살 마법을 얻은 해골 마법사를 특별 관리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얼음 화살을 사용하는 마법사를 힘으로 끌어서 뻐드렁니가 다니는 경로에 놓았다. 이윽고 뻐드렁니가 털레털레 접근했다.
"공격."
뻐드렁니가 접근하길 기다려서 공격 모드로 바꾸자마자 강화 좀비들이 뻐드렁니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해골 마법사가 얼음 화살로 뻐드렁니에 적중했다.
"네크로 형, 조심해."
얼음 화살에 맞아 조금 느려졌지만, 해골 마법사를 덮치는 보스몹 뻐드렁니의 속도는 전혀 느리지 않았다. 네크로는 지팡이를 들고 신중하게 타이밍을 쟀다. 멧돼지 앞다리가 지나는 순간, 지팡이를 빠르게 밀어 넣었다.
원래는 전사인 진돗개나 무인인 동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셋 중에 컨트롤은 네크로가 으뜸이기에, 가장 '허약한' 네크로가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콰직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얼음 화살을 쏘아낸 해골 마법사가 뼈 무더기로 변했다. 다행히 해골 마법사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경로가 바뀌지 않아 해골 마법사를 박살 냈지만, 네크로의 지팡이에 뒷다리가 걸린 뻐드렁니는 힘차게 엎어졌다.
"자폭!"
자폭은 멧돼지의 피통을 많이 깍진 못했다. 피통이 예상보다 어마어마하게 컸다.
바로 부활한 네크로가 외쳤다.
"동해야."
"혈도 터뜨리기."
아쉽게도 혈도 터뜨리기는 스킬 데미지만 입혔다. 출혈에 실패해 멧돼지의 저항을 낮추지 못했다.
"광전사."
진돗개가 광전사 스킬을 펼치고 바로 멧돼지 위에 올라탔다. 거기에 강화 좀비들도 달려와서 멧돼지에게 들러붙었다.
그냥 주먹으로 때리는 일반 좀비와 들러붙기만 하는 흡혈 좀비와 달리, 강화 좀비는 작은 상대는 타격하고 큰 상대에겐 들러붙는다. 덩치가 탱크 수준인 멧돼지에게 열 마리에 가까운 강화 좀비가 각자 다리와 꼬리 그리고 갈기를 잡았다.
"형, 빨리."
멧돼지의 발버둥이 심해 동해는 접근할 엄두도 못 냈다. 게임인 걸 알지만, 시각 정보나 여러 감각 정보가 하도 실감 나서 바짝 얼어붙었다.
네크로는 지팡이를 한 손으로 잡고 뻐드렁니 몸과 머리를 두드렸다. 높아진 공속과 그랜드 마스터로 올라간 강타 스킬 덕분에 끝내 뻐드렁니에게 '분노' 상태이상을 걸었다.
"성필아, 분노 걸렸어. 빨리 물러나."
분노 상태이상은 어그로를 리셋한다. 그리고 무조건 가까운 놈을 공격하게 되어있다.
"형, 혹시 그 지팡이로 똥침 놓을 수 있어?"
동해의 말에 진돗개와 네크로는 서로 쳐다봤다. VR 게임이 아닌 가상현실로 처음 레전드를 접한 동해이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진돗개나 네크로는 VR 게임에 있던 이펙트 아이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했다. 당연히 똥침 놓는 건 이펙트에 없었다.
분노 상태이상이 사라질 때까지 둘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재수 없게 크리티컬이 터지거나 약점이 공격당하면 그대로 사망이다. 덕분에 고민할 시간이 충분했다. 긴박한 상황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했을 가능성이 넘쳤으나, 뻐드렁니의 위용을 직접 확인하니 동해의 엉뚱한 제안에 마음이 움직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힘드니까,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생각 밖으로 피도 적게 빠졌고 상태이상도 잘 안 걸려."
분노 상태이상이 사라지자 진돗개가 다시 달려들었다. 지팡이 하나 버리는 셈 친다 생각하고, 네크로는 크게 돌아 뻐드렁니 뒤로 접근했다. 때마침 꼬리를 잡고 들러붙었던 강화 좀비가 뒷발질에 차여 멀리 날아갔다.
멧돼지의 들린 뒷다리가 채 땅에 닿기 전에, 네크로의 지팡이가 항문을 통해 내부에 침투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형, 나 광전사 스킬 곧 끝날 것 같아. 빨리 상태이상 걸어야 해."
딱히 큰 타격은 주지 못했고, 오히려 멧돼지 꽁무니에 무기 하나 달아준 셈이 되었다.
"형,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박아넣을 순 없어?"
"해볼게."
인벤토리에서 새 지팡이를 꺼낸 네크로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휘두른 지팡이는 멧돼지 항문에 꽂힌 지팡이를 정확히 두드렸다. 지팡이가 좀 더 깊숙이 침투하자 뻐드렁니가 스턴에 걸렸다.
"스턴이다. 계속 두드려."
광전사 스킬이 남아있는 진돗개는 미친놈처럼 멧돼지 목덜미에 칼을 쑤셔댔다. 1초에 5번 이상은 찌르는 느낌이다. 게임은 게임인지, 그렇게 칼을 깊게 박아넣는데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출혈 상태이상이 터지지 않은 거다.
"혈도 터뜨리기."
오히려 레벨도 20에 불과한 동해의 주먹 공격에 멧돼지가 피를 철철 흘렸다.
"동해야, 늑대 불러 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사라지는 늑대다. 버려진 사원을 살필 때 사라진 후 소환하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났다.
"좀비보다 낫다."
여섯 마리 늑대는 멧돼지의 다리나 뱃살을 물고 그대로 늘어졌다. 가끔 머리를 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보스몹에게 타격을 주진 못했지만, 쉽게 떨어지는 강화 좀비보다 더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어, 이거 뭐야?"
네크로가 항문에 꽂힌 지팡이를 몇 센티 더 깊게 박아넣었는데, 멧돼지 피통이 갑자기 크게 줄었다.
유니콘 서버를 관리하는 AI와 한국 지사 개발팀에게 일거리를 잔뜩 안겨준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네크로는 뜻밖의 횡재에 싱글벙글하며 항문에 꽂은 지팡이를 계속 두드렸다. 멧돼지의 몸부림이 심해 몇 번 때려서 겨우 한 번 적중하지만, 그때마다 피통이 쑥쑥 깎였다.
"파멸."
광전사 페널티로 약해졌지만, 공격력을 10배로 뻥튀기하는 파멸 스킬 덕분에 진돗개의 공격력도 낮은 수준은 아니었다.
"영광일섬."
무인의 필살기. 적중률 100%의 공간기. 공간을 뛰어넘어 상대를 가격하지만, 단 한 번밖에 공격할 수 없는 무인의 궁극기다.
거기에 네크로가 강타 스킬로 휘두른 지팡이가 멧돼지의 항문에 꽂힌 지팡이를 통해 내부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전달했다.
펑 소리와 함께 보스몹이 바람을 과하게 넣은 풍선처럼 터졌다. 그러나 사체가 되면서 다시 온전한 멧돼지 모습이 되었다.
- 크리티컬 중첩 판정. 뻐드렁니를 즉사시켰습니다.
"네크로 형. 리치 만들자."
"듀라한 만들자. 좀비 제작 숙련도가 해골 제작보다 조금 더 높아."
항문의 지팡이를 어렵게 뽑아낸 후, 가슴에 구멍 뚫고 심장을 꺼내고 입천장에 구멍을 뚫어 뇌수를 파냈다. 심장과 뇌수를 각각 여러 시약으로 처리한 후 다시 안에 밀어 넣었다.
"게임은 게임이야. 어떻게 멧돼지가 사람 되냐?"
조금 긴 주문을 실수 없이 끝내자 누워있던 멧돼지가 일어서며 인간 형태의 듀라한으로 변했다.
"성필아, 거기 떨어진 아이템 주워서 뭔지 봐봐."
"무슨 아이템? 어디 있는데?"
"너 왼발 바로 옆에."
"동해, 넌 보이냐?"
"안 보여."
네크로는 진돗개 곁으로 걸어가서 뻐드렁니가 드랍한 아이템을 주웠다.
"귀속 아이템인가? 왜 나한테만 보이지?"
"지금은 보여. 편지 같은데?"
- 불신의 성기사 퀘스트 시작합니다.
- 버려진 사원에 관한 정보를 모으십시오. 해당 퀘스트 아이템을 소지하고 오아스시의 주민들에게 탐문하십시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신실한 신자는 당신을 잊힌 신의 신전으로 이끌 것입니다.
'불신의 성기사 퀘스트? 이거 중앙섬 벗어나서 대륙에 가야 발동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유니콘 게임 운영팀은 자기들이 만든 게임도 제대로 모르는 건가?'
분명히 새로 생성한 여덟 에픽 퀘스트는 해당 퀘스트 아이템을 들고 대륙의 인간 도시 NPC에게서 받을 수 있다고 공지에 적혀있었다.
"좀 더 사냥할래?"
"동해가 많이 피곤한 것 같아."
동해는 아직 다리 하나를 실제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게임에선 그 다리로 걸어 다니니, 느끼는 피로감이 네크로나 진돗개보다 훨씬 컸다.
"그럼 오아시스로 돌아가면서 보이는 몹만 사냥하자."
전갈과 멧돼지 그리고 도마뱀을 잡으며 오아시스로 돌아갔다. 첫 접속부터 많이 돌아다닌 동해는 바로 로그아웃했다. 진돗개는 스킬 숙련도 올린다고 성문 근처에서 리젠하는 몹을 잡았다.
네크로는 얼마 없는 잡템을 처리하고 퀘스트 정보 얻으러 돌아다녔다.
"버려진 사원과 잊힌 신 말인가? 그걸 믿는 멍청이가 아직도 남아있었나?"
"내게 결정적인 정보가 있는데, 정보료로 3골드 어떤가?"
"할아버지한테 들은 적 있지. 이곳 오아시스는 예전에 항구 도시였어. 그러다 신의 노여움을 사고 황무지로 버려졌지. 이 도시는 원래 바다 건너 거대한 대륙에 있었어."
계속 돌아다니다가 시청 가까운 곳 노른자를 차지하고 동냥하던 거지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자네에겐 신의 향취가 느껴지는군. 사실 이 도시에는 잊힌 신의 신전이 남아있다네. 저 황무지에 있는 버려진 사원은 신의 용서를 바라고 도시 사람들이 지은 신전이네. 그러나 결국 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지. 유일하게 신이 인정한 자가 도시 지하에 지은 작은 신전이 있어. 그 신전 덕분에 우물과 샘들이 마르지 않아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거야."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주실 수 있습니까?"
"거기로 가는 길은 괴물이 들끓네. 자네는 그곳으로 갈 능력이 있음을 일단 증명해야 하네. 난 신전으로 가는 길을 아는 유일한 존재야. 섣부른 도박에 내 목숨을 걸 수 없네."
-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 신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존재를 확신하는 유일한 신자, 오아시스 상거지의 믿음을 얻어라. 짧은 꼬리 도마뱀의 꼬리 100개, 주먹 전갈의 독주머니 100개, 황무지의 무법자인 황야의 멧돼지 뻐드렁니 100개를 가져오십시오.
-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됩니다. 잊힌 신의 총애를 받는 상거지는 당신이 가져온 물건이 본인 실력으로 얻은 것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진돗개에게 사정을 알리고 좀비와 해골 그리고 듀라한을 이끌고 수집퀘 하러 떠났다. 갓 게임을 시작했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이 다시 돌아왔다. 더구나 다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동생도 함께고, 안지 오래지 않지만 두터운 믿음을 쌓은 진돗개도 있다.
'돈도 벌고, 재미도 있고, 사람도 사귀고.'
네크로는 레전드가 정말 갓 게임이라고 느꼈다. 스트레스 해소가 되던 예전과 달리 너무 실감 나는 장면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론 예전보다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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