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3
깔끔한 인테리어와 부드러운 자연광. 현대식 사무용 책상과 인체공학 의자.
그런 사무환경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 한쪽씩 사이좋게 까치집 선 두 남자가 키보드를 신나게 두드려댔다.
"선배님. 인사팀 발령이라고 좋아라 했는데, 이게 뭡니까."
입사한 지 일 년이 채 안 된 신 사원이 투덜거렸다. 눈 밑에 기미는 까마귀가 형님 하며 꾸벅 인사할 정도다.
"그래. 나도 드디어 권력 핵심으로 다가가는구나 했는데."
개발팀 유지보수 부서에서 인사팀으로 발령 날 때 둘은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정작 인사팀에서 둘에게 맡긴 건 유저 정보 관리였다.
"기존 DB랑 달라서 매크로도 못 짜고 일일이 수동으로 해야 한단 말입니다."
"너야 신입이라 괜찮은데. 난 입사 선배인 최 대리한테 큰소리 뻥뻥 치고 왔단 말이야."
"최 대리 빽 장난 아니라던데."
"큰 빽은 아냐. 그게 아니면 대리만 4년 달진 않았겠지."
"미국식으로 해서 연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던데요."
"맞아. 그래서 나도 일 년 선배인 최 대리한테 막 개길 수 있었던 거지."
대화는 대화대로 나누면서, 둘의 손가락은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야, 체크해 봐. 마녀가 지시한 유저 정보 빠진 거 없는지."
박 대리가 대학교 후배인 신 사원에게 지시했다. 그래도 짬이 있어선지 눈 밑에 살 색이 조금 남아있었다.
"잠시만요. 매크로 돌릴게요."
"왜 DB는 완전히 다른 구조로 짜서 기존 DB랑 전혀 호환도 안 되게 했는지 몰라."
"연초에 교육받을 때 해킹 대비해서라고 하던데요. DB뿐 아니라 모든 통신 구조도 자체 프로토콜이랍니다."
"시발, 유니콘 대단하긴 대단해. 근데 일 시킨 마녀도 미친년이야. 이 많은 유저 정보를 일일이 수동 검색해서 옮기라니."
유니콘 DB가 아닌 구식 DB에서 매크로를 돌려 유저 정보를 전부 옮겼는지 체크했다.
"몇 개 빠졌어?"
"딱 한 명입니다. 이름이 '성기삽니다'."
"성기사?"
"성기삽니다. 이름 다섯 글자예요."
"왜 우리나라 게임 폐인들은 그 좋은 머리를 이런 쪽에만 쓰는 거야?"
일이 거의 끝났다는 생각에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둘은 싸늘하게 식은 커피로 목을 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선배님. 삭제한 캐릭터라서 검색할 수 없는데요?"
편히 쉬시라며 마지막 유저 정보를 처리하겠다고 나선 신 사원이 난색을 보였다.
"삭제했다고 빼고 올리면 마녀가 지랄하겠지?"
"당연하죠. 남자가 하는 일은 사사건건 트집인 마녀 아니겠습니까."
"임시 복구해. 데이터 다 백업하면 다시 삭제 상태로 돌리고."
탁탁 키보드 열심히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대리님. AI가 거부했습니다."
"왜? 우리에겐 권한 있을 텐데."
"반려 이유가, '삭제된 캐릭터를 복구함으로 인과율이 어긋날 수 있음' 입니다."
"비켜봐."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던 박 대리가 의기양양해 외쳤다.
"넌 젊은 애가 왜 요령이 그렇게 부족해. 우선 유저를 테스트 레벨로 바꾼 다음, 삭제됨 상태의 'Y'를 'N'으로 바꾸면 돼. 그리고 여기 만능 클라이언트로 저 캐릭터를 로딩하는 거야. 넌 이뮬레이터의 패킷 캡처 기능을 켜."
"일찍 이렇게 할 걸 그랬습니다. 해당 유저 데이터만 만능 클라이언트로 로딩되면 매크로 짜서 필요한 정볼 엑셀로 저장하면 되는 건데."
"다음부터 이렇게 하면 되지. 캡처 준비됐어?"
"네."
"자. 그럼 로딩한다."
만능 클라이언트가 캐릭터 명 '성기삽니다'를 로딩하기 시작했다.
"어, 선배님. 큰일 났습니다. 데이터가 사라졌는데요?"
탁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소리가 멈춘 동시에 박 대리 입에서 장탄식이 터졌다.
"시발. 이거 어쩌냐?"
"삭제한 지 30일 되어 자동삭제된 게 아닐까요?"
거의 애원조다. 아니라고 말하면 바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기세다.
"일단 위엔 그렇게 보고하자. 시발. 이건 우리 둘만 아는 얘기야. 소주 열 병 먹어도 불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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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캐릭터 삭제한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가상현실 기기로 접속하니 캐릭터 생성에 진짜로 성공했다.
물론 유니콘 직원이 거짓말했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일말의 의심은 남았었다.
- 이름을 정하십시오.
"네크로맨서."
- 사용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네크로."
- 사용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 명 '네크로',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 성별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유저 정보에 따라 남자로 정해집니다.
- 외모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현재 외모를 스캔한 후 이미지화하여 사용합니다. 게임에 접속한 후 유료 콘텐츠 '성형'을 이용해 외모를 가꿀 수 있습니다.
- 직업을 선택하세요.
원래는 10레벨 돼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상현실로 바뀌면서 캐릭터 만들 때 직업을 선택하게 바뀌었다.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
- 허용된 범위 안에서는 성실하게 답해드립니다.
"원래는 10레벨 되어서 직업 선택하잖아."
- 게임에 익숙지 않은 유저를 배려했습니다. 가상현실 게임으로 전환하면서 AI가 조언할 수 있기에 캐릭터 생성 시 직업을 정하도록 바뀌었습니다.
"조언."
- 이미 만들어진 47개 직업 중 네크로 님에게 가장 적합한 건 '사령술사'입니다.
우연인가 운명인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서울로 돌아온 후 여덟 캐릭터를 밤새 연구했다. 그리고 사령술사가 가장 솔로잉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이미 액티브와 패시브 스킬 다섯 개씩 골라놓은 상태다.
예전에 성기사로 플레이한 건, 게임으로 돈을 벌 생각까진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무료 게임이라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선택했고, 성기사가 잘 안 죽을 것 같아 선택한 거였다.
"이유는?"
- 상체 반응은 무척 빠른데 하체 반응이 느립니다. 사냥꾼이나 전사를 비롯한 이동이 많은 직업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전투 중 움직임이 적은 캐릭터에서 사령술사가 가장 적합합니다. 대장장이나 화가를 비롯한 생산직 캐릭터도 적합하지만, 상부 지침에 따라 전투 직업을 최우선으로 권장합니다.
"그래. 네크로맨서. 아니, '사령술사'를 선택한다."
- 캐릭터 생성을 완료했습니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모든 기능이 정상인지 확인하고 게임에 접속하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던 풍경이 모두 사라지고, VR 게임일 때부터 익숙하게 봐왔던 대기실로 변했다.
가끔 플레이하다 사망하면 부활 대기 시간 동안 대기실에 머문다. 그때 심심해서 대기실 풍경을 나름 꾸며봤다.
낮은 화질로 플레이하던 때와 달리, 거의 실제라고 봐도 될 정도로 모든 게 실감 났다. 대충 꾸민 대기실이 가상현실로 보니 무척 괜찮았다.
"캐릭터 정보."
이름 : 네크로
성별 : 남
레벨 : 60
랭크 : 초보
'레벨이 60? 뭐가 잘못됐지?'
"스탯"
힘 7
민첩 5
체력 8
친화력 5
"스킬."
직업 : 사령술사
스킬 : (없음)
직업 : 성기사
스킬 : 강타, 용기의 빛, 회복의 빛, 정의의 빛, 희생의 빛, 빛의 축복, 생명의 축복, 이 악물어, 신력, 천군만마
"스킬 슬롯."
- 슬롯 A의 네 슬롯은 비어있습니다.
- 슬롯 B의 열 슬롯 중 액티브 슬롯은 강타, 용기의 빛, 회복의 빛, 정의의 빛, 희생의 빛으로 채워졌고 패시브 슬롯은 빛의 축복, 생명의 축복, 이 악물어, 신력, 천군만마로 채워졌습니다.
"로그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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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기회다. 이 오류에 내 책임은 없어.'
패시브 스킬 중 '생명의 축복'은 최대 생명력 향상. '이 악물어'는 방어력 향상. '천군만마'는 오라 계열 스킬 효과 증대. '신력'은 한 손으로 양손 무기 사용 가능, 한손무기 사용 시 공속 증가. '빛의 축복'은 원래 하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오라 계열 스킬을 동시에 펼칠 수 있게 한다.
사령술사 스킬을 다시 연구했다. 한글화하는 과정에 사령술사로 정해지긴 했는데, 사실상 네크로맨서다. 현재 50개 정도 되는 액티브와 패시브 스킬 중 각각 5개씩 선택했다.
해골 제작 : 해골 전사, 해골 궁수, 해골 마법사, 리치, 해골 기사, 해골용 제작.
좀비 제작 : 좀비, 흡혈 좀비, 강화 좀비, 듀라한, 죽음의 기사, 거인 좀비 제작.
해골 소환과 좀비 소환 마법도 있다. 이건 제작할 필요 없고 마나를 소모해서 불러오는 방식이다.
소환은 숙련도에 따라 언데드 레벨이 정해지지만, 제작은 무조건 1레벨부터 시작해 언데드도 레벨업해야 한다. 성기사의 네 오라 스킬로 마나를 항시 소모해야 하는 네크로 캐릭터는 제작 스킬이 더 적합하다. 소환 방식으론 마나를 관리하기 힘들다.
해골 강화 : 해골 범주에 속하는 소환수 강화.
좀비 강화 : 좀비 범주에 속하는 소환수 강화.
오라 계열과 마찬가지로 지속형 액티브 스킬이다. 마스터가 되어야만 유니크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기에, 활성만 하면 알아서 숙련도가 오르는 둘을 선택했다.
자폭 : 궁극기.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어마어마한 폭발을 불러옴.
성기사 궁극기는 '파멸신'. 피아 구분 없이 아무나 공격하는 강대한 파멸신을 소환한다. 성퀴벌레로도 불리는 방어에 올인한 성기사만 시도 가능한 스킬이다.
궁극기는 숙련도 개념이 없다. 그러니 해골 제작과 좀비 제작 숙련도만 신경 쓰면 된다. 남은 스킬은 알아서 오른다. 대략 3개월 시간이면 패시브와 지속형 스킬을 마스터 등급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게임을 부지런히 한다는 전제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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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다루는 사령술사 길드는 밝은 등불로 휘황찬란, 그림자조차 없었다.
"스킬 배우러 왔습니다."
가상현실 기기 덕분에 음성 서비스 비용이 굳었다.
"그래. 생명의 진리를 탐구하려는 네크로여. 그대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노라."
옆집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늙은이가 네크로를 반겼다.
"죽음은 생명의 종착역이 아닌 순환의 일부. 격렬한 변화인 죽음 때문에 생명은 진화할 수 있다. 생명의 비밀은 죽음에 감춰져 있으니, 그 비밀을 파헤치는 자는 신의 총애를 받아 세상의 왕이 되리라."
"네가 가려는 길에 밝은 등불이 되어줄 재주를 고르라."
이미 웹페이지에서 망막에 영상이 맺힐 정도로 봤던 스킬들이 펼쳐졌다.
"펼치는 재주와 그저 품는 재주 각 다섯 개씩 고를 수 있다."
이것도 바뀌었다. 원래는 초반에 2개씩 고를 수 있었다. 직업을 얻고 둘 추가, 승급하며 둘 추가, 여기서 스킬 6개를 숙련도 마스터 찍고 랭크가 마스터 되면 둘 추가.
'마스터까지 3개월이나 걸리진 않겠다.'
"명심하거라. 네가 고른 재주는 서로 이어진다. 재주를 바꾸려면 열 개 모두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바뀐 게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정보는 홈페이지에도 없었다. 하나 삭제할 때 기타 스킬 숙련도가 랜덤으로 떨어지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삭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바뀌었다.
미리 정해두었던 스킬 열 개를 선택했다. 물론 장착은 총 4개밖에 할 수 없다. 액티브 슬롯에는 해골 제작과 좀비 제작. 패시브 슬롯에는 '편제'와 '악덕 고용주'를 넣었다.
편제 : 해골과 좀비의 전투력 및 협동능력 향상.
악덕 고용주 : 해골과 좀비 이동속도 증가.
"자, 네크로의 앞날에 죽음의 축복이 드리우길."
일반 아이템인 '마력을 잃은 지팡이'와 '때 묻은 망토'를 얻었다.
'유저가 없는 곳으로 가서 스킬 숙련도부터 올려야 한다.'
만렙인 60이기에 경험치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성기사 스킬이 그대로이기에 적당한 사냥터를 찾아 시체를 얻어 사령술사 스킬부터 올려야 한다.
네크로는 붉은 꼬리 여우의 서식지를 찾았다. 시간 대비 경험치 효율이 최악인 곳이다. 붉은 꼬리 여우는 민첩이 높은 편이어서 잡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반면 늑대보다 경험치도 덜 준다. 사냥꾼 직업을 위해 만든 사냥터인데, 사냥꾼들 역시 초반에는 여우를 피한다. 민첩이 높은 상대로 명중률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조심하자. 자꾸 현실처럼 느껴진다.'
고글을 통해 게임을 할 땐 시각 정보만 조심하면 그만이었다. 광해는 자신과 게임 캐릭터를 엄격히 구분하며 전투했다. 그냥 몹 사냥은 굳이 둘을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단순반복 노가다였고, PK 할 때에만 의자에 앉아있는 자신과 게임 캐릭터를 구분하면 되었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자꾸 네크로를 속였다. 본인이 직접 걷는 느낌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왔다. 게다가 바람이 스치는 감각까지 구현되어 조금만 방심하면 게임에 몰입했다.
'여긴 직장. 즐기는 곳 아냐.'
붉은 꼬리 여우는 민첩이 높은 몹답게 등 뒤에서 기습하는 걸 즐겼다. 그러나 접근하면서 내는 바스락 소리를 감추진 못했다. 예전에 회전의자에서 빠르게 도는 기술을 연습할 때 이 사냥터에만 며칠 살았다. 그 감각을 살려 타이밍을 정확히 쟀다.
깨깽, 캑캑.
여우의 도약 타이밍에 맞춰 몸을 돌리며 지팡이로 후려쳤다. 무기가 허접하고 타격도 빗맞았다.
'게임은 게임이구나.'
지팡이는 여우 머리를 때렸다. 그런데 바닥에 내려간 여우가 다리를 절룩거렸다. 이 게임은 카운터에 엄청 후하다. 먼저 공격한 여우는 카운터 판정을 받았고, 카운터에 성공하면 높은 확률로 나타나는 상태이상에 걸렸다.
하지만 어지럼증 같은 상태이상을 유발하기엔 공격이 너무 약하니 절충하여 여우에게 다리 저는 페널티를 줬다.
다리를 절룩이는 여우는 네크로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지팡이로 다리를 때려 바닥에 쓰러지게 한 후,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은 발로 여우 목을 꽉 밟았다. 발에 느끼지는 꿈틀거림이 네크로에게 여과 없이 전달됐다.
'이건 아냐.'
발을 치웠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몬스터를 잔혹하게 죽이고 PK 하는 유저를 죽이고 조롱하면서 쾌감을 얻었는데, 가상현실은 너무 실감 나서 오히려 거부감이 생겼다.
아이템 먹으려고 지루한 사냥 하면서도 몬스터가 펑펑 터지고 픽픽 쓰러지는 걸 보며 스트레스가 풀렸는데, 지금은 너무 현실 같아서 외려 스트레스가 쌓였다.
- 작가의말
괜찮아요? 조금 놀라셨죠? 겨우 4화에 무려 사이다라니!
사흘 정도면 감기 다 나을 것 같습니다. 빨리 나아서 2연참으로 즐겁게 연재하고 싶군요. 지금은 비축분을 읽어보며 소소한 수정만 하고 진도는 못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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