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출연
눈을 뜬 광해는 깜짝 놀랐다. 광해 기준으론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느끼한 놈이 거울 안에서 광해를 마주 봤다.
"저기요. 좀 더 남성스럽게 하면 안 될까요?"
"고객님은 얼굴선이 고우셔서 이렇게 하는 게 화면에 훨씬 멋있게 비칩니다."
간드러지게 대답하면서도 뭔가 찍어 바르는 걸 멈추지 않는 남자, 남자의 손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광해는 움찔거렸다.
"그래도 덩치에 어울리게 남성적으로."
"반전 매력. 요즘 이게 유행이랍니다. 터프한 외모의 남자에게서 귀여움을 찾고 이쁜 외모의 여자한테서 터프함을 기대하죠. 제가 대한민국에서 2등 자처하면 누구도 감히 1등이라고 말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전문가 의견에 따라주세요."
다행히 바르는 게 많아지면서 점점 나아졌다. 처음보다는 자기 얼굴이 맘에 들었다. 실제로 나아졌는지 메이크업해 주는 실장에게 세뇌당했는지는 광해도 확신 못 했다.
"이광해 씨, 방송 출연 경험 있으시네요."
"네, 토크쇼 나간 적 있습니다."
"그땐 단독 게스트였고 지금은 여럿이 경쟁하는 거잖아요. 점잖게 있다간 아무것도 못 합니다. 다른 분들은 다 방송 경험이 많거든요."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이 잘하시면 분량을 당연히 그분들에게 할애해야죠."
방송국 직원과 광해의 대화에 유니콘 홍보팀 직원이 끼어들었다.
"저, 이광해 씨. 홍보 효과 안 나오면 다른 방송 또 섭외할 겁니다."
광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 많이 시켜주세요."
허리를 구십 도로 꺾은 광해를 보며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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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는 네 명, 연예인 패널이 열 명 정도 있었다. 게스트 넷 다 전문 방송인이 아니어서 흐름을 이끌어줄 MC와 그에 호응해줄 패널이 필요했다.
"자, 여기 나와 계신 네 분. 요즘 화제의 인물들입니다. 대기만성의 대명사들인데요, 한 분씩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역주행의 아이콘, 불쌍해서 챙겨주고 싶은 가수 1위. 팀 태블릿의 귀염 막내 뿜뿜입니다."
'이름이 뿜뿜?'
MC가 말했던 화제의 인물이란 표현은 말치레였는지, 방청석에서도 빵 터진 사람이 많았다. 다행히 당사자도 배꼽 잡고 이 다 보이게 웃는 바람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자, 방청객 여러분은 솔직하게 하셔야 합니다. 모르는 걸 억지로 안다고 해도 안 되고, 알면서도 마음에 안 든다고 X 누르면 안 됩니다. 난 이 사람을 안다면 O, 모른다면 X 눌러주세요."
또 한 명은 아역으로 시작했지만, 아역 때도 무명이어서 30년 무명 생활을 겪었다는 배우였다. 삼십 중반의 나이에 드라마 조연으로 박탈되었다가 신 스틸러로 유명해졌고, 점점 분량이 늘어 주조연이 되었다. 드라마 여주보다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떠오르는 명품 조연 박아람이 두 번째 게스트였다.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새내기 국가대표 함우진입니다."
마지막은 30 다 된 나이에 국가대표 골키퍼로 발탁된 함우진이었다. 최근 뉴스에 자주 나오고 유럽 명문들과 스캔들이 잦았다.
"안녕하세요. 레전드 게임 유저명 네크로, 이광해라고 합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26억이라는 단어가 가끔 튀어나왔다. 사실 더 굵직한 게 두 개 더 있지만, 그건 대중에게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역천이나 유니콘 측에서 계약 내용에 대해 함구하라고 요구했다.
인지도 투표에서 광해가 단연 앞섰다. 셋 모두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이력을 갖췄지만, 게임으로 26억을 벌었다는 광해의 이야기보다 덜 인상적이었다.
"자, 세팅 바꾸고 녹화 이어갈게요. 방청 분들 멀리 가지 마시고요."
오프닝이 끝나자마자 녹화를 중단했다. 넷은 방송국 직원이 대기실로 안내했다.
"오빠, 게임 동영상 정말 재밌게 봤어요. 그 투라칸 잡는 거, 힘들 때마다 그걸 보면서 화이팅해요."
"네? 투라칸 잡는 거요?"
"첫 번째 잡은 거 있잖아요. 네크로 님이 마법 캐릭인데도 무기 들고 뒷다리 팼잖아요. 리듬감 정말 대단했어요. 그걸 볼 때마다 울컥하면서 힘이 솟아요."
'이상한 애구나.'
아이돌 가수인 뿜뿜은 남은 둘과 전혀 친분이 없었다. 다행히 게임을 좋아했고 네크로의 구독자라고도 했다.
"요새 생방송 안 하셔서 너무 섭섭해요. 언니들도 다 네크로 님 팬이에요."
운동밖에 모르는 함우진은 대화에 끼지 못하고 굳은 자세로 꼿꼿이 앉아있기만 했다. 레전드 게임이 유명하다는 걸 알지만, 관심을 가진 적 없었다. 26억은 들어봤어도 그게 누가 어떻게 벌었는지는 자세히 몰랐다.
"아우, 격 떨어지게."
박아람의 얄미운 소리에 뿜뿜이 움츠러들었다. 함우진의 굳은 몸이 한결 딱딱해졌다. 광해는 몸을 뒤로 느긋하게 젖히며 박아람과 눈을 맞췄다. 박아람도 피하지 않고 광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른 게스트가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는 처음부터 비밀로 했기에 광해는 박아람이 누군지 몰랐다. 그리고 관심도 없었다. 함우진만 뉴스를 통해 국가대표 골키퍼라는 걸 알았다.
"저, 다들 대기하세요. 세팅 끝났습니다. 장비 점검하고 바로 녹화 시작합니다."
방송국 직원이 나갈 때까지 광해와 박아람은 상대 눈을 끝까지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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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뿜뿜 양은 본명이 강순희네요?"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 고집에 딸내미가 오늘도 고생합니다."
뿜뿜의 걸쭉한 신세 한탄에 방청석이 또 터졌다.
"그래요. 그래서 별명도 깡순이죠. 어려운 연습생 생활 악과 깡으로 버텨낸 건 다 이름 덕분입니다. 남들이 깡순이라고 불러주니까 없던 깡도 생겨요."
"연습생 생활은 얼마나 했습니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했어요. 학교랑 합의되지 않아서 중학교 졸업장 못 땄어요."
"데뷔하고 인지도도 별로였잖아요. 지금은 엄청 잘돼서 다행이지만, 그땐 팀 해체 얘기도 몇 번 있었다 들었고요. 그럴 때 막막하지 않았나요?"
"내가 이 나이에 중학교 다녀야 하나 싶기도 했고요."
뿜뿜이 웃음 폭탄을 연속 터뜨리자 MC가 개인 재량으로 질문 몇 개 추가했다.
"함우진 씨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일본으로 갔네요?"
"네. 에이전트한테 속아서 일본 갔다가 필리핀 갔다가 태국 갔습니다. 그러고 중국에 갔다가 겨우 한국에 돌아왔어요."
"중국은 골키퍼 용병 안 쓰는 거로 알려졌는데요."
"중앙수비수 한번 뛰어보라고 해서요. 2부리그에서 석 달 뛰었는데 쥐꼬리만 한 계약금 빼고 돈 한 푼도 못 받았습니다. 그때 떼인 돈 지금도 못 받았어요. 시즌 중에 팀이 해체했거든요."
"한국 돌아와서도 일 년 놀았다고 들었습니다."
"놀지는 않고 공사판 전전했습니다. 그 일 년 동안 십 년 이상 축구 하면서 배우지 못했던 많은 소중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지금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고 유럽으로부터 러브콜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이건 잘라주세요. 방송 내보내면 안 돼요."
"박아람 씨는 D 대학 연극영화과 나오셨네요?"
"연예계가 아무리 인기 위주로 돌아간다고 해도 롱런하려면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방법이 무척 많지만, 그래도 가장 확실하고 검증된 방법이 대학이거든요. 지식도 배우고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연습을 하는 거죠. 이광해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기 차례 아니라고 방심했던 광해는 박아람의 갑작스러운 토스에 화들짝 놀랐다.
"명문대 대기업은 검증된 루트잖아요. 그러나 명문대 입학이 행복은 아니고 대기업 입사가 성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가치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거고, 그 결정에 책임만 지면 되는 거 같습니다. 서울대 졸업한 사람들이 똑같이 성공하고 행복하진 않잖아요."
"핑계 아닐까요? 노력하기 싫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합리적인 핑계.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도 배려해야 합니다. 자기 행복만 추구하면서 검증된 길보다 모험적인 길을 가는 건 무책임한 행동 같은데요?"
교육 제대로 받은 뿜뿜은 계속 웃는 얼굴을 유지했지만, 함우진의 얼굴은 굳어갔다. 노련한 MC는 패널로 온 개그맨에게 눈치를 줬다.
"잠시만요.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박박이 씨. 말씀하세요."
"제가 석사 과정인데, 그래서 요즘 더 웃긴 건가요?"
MC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불을 끄라고 눈치 줬는데 신호가 잘못 전달되었다.
"아뇨. 박박이 씨가 개그 할 때 누구도 안 웃습니다. 더럽게 재미없거든요."
"그럼 이야기 나온 김에 질문할게요. 이광해 씨는 K대 나오셨고 요새 주식 시장의 다크호스로 불리는 M 사에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일 년 만에 회사 그만두고 레전드 게임에 올인했네요. 어디서 그런 확신이 생긴 겁니까?"
방청석이 술렁였고 박아람 얼굴이 돼지 간처럼 빨개졌다. K대라면 D대랑 겸상 안 해도 될 레벨이었다. 게다가 M 사는 대기업보다 더 입사가 어렵다고 소문난 회사였다.
"확신까지는 아니었고요. 우연히 접한 게임인데 한 달 좀 지나서 유니크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제가 사용할 수 없는 아이템이어서 경매장에 올렸는데 2천만 원에 팔렸어요. 환전하니 1천6백만 원이 통장에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바로 회사 그만둔 겁니까?"
"아니요. 두 달 뒤에 유니크 무기 하나 얻었는데,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거였습니다. 그 무기를 사용하려면 마스터 랭크가 되어야 하는데요. 마스터 랭크 되어 그 무기를 사용하니 게임이 무척 쉬운 거예요. 계산해 보니까 한 달에 천만 원 정도 벌 수 있더군요. 그래서 회사 그만뒀습니다."
"그럼 일단 여기서 잠깐 멈추겠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세팅 바꾸고 계속 듣겠습니다."
다시 대기실로 넷이 안내받았다. 대기실이 되자 뿜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선배인 박아람에게 뭐라 못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살갑게 다가가지도 않았다.
"뭘 봐요?"
광해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자 박아람은 화를 버럭 냈다.
"깔봐요."
"네?"
"깔보고 있다고요. 나보다 학벌 낮은 사람을."
"왜 나만?"
"당신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당신을 대하는 겁니다. 문제 될 거 없잖아요."
"나도 연기 병행하지 않고 공부만 했으면 K대 정도 갔어요. 어린 나이부터 연기 하느라 학업에 열중하지 못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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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네 분은 서로 오늘 처음 만난 거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제작진은 이 네 사람 중 두 사람이 꽤 깊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저요, 저요. 저 네크로 님 팬이에요. 방송 대부분 지켜봤어요."
"아이돌이면 무척 바빴을 텐데, 생방송 다 챙겨볼 정도면 정말 팬이겠네요."
"그땐 안 바빴거든요. 요즘 제가 바빠지니까 네크로 님도 방송 안 하시더군요."
"아, 정말 깊은 인연이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저, 골키퍼 아저씨. 혹시 저희 팬 사인회 오셨어요?"
"아저씨라뇨. 함우진 씨 올해 갓 서른입니다."
"저 늦은 이라서 스물아홉인데요."
"자, 화면 보시겠습니다."
화면 해상도가 무척 낮았다. 그래도 골키퍼 장갑을 끼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함우진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함우진 씨 전혀 변한 게 없네요?"
"저 노안이라고 놀리는 거죠?"
"아뇨.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접때 찍은 증명사진 지금도 쓰시죠?"
함우진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저기요. 나 선방도 많은데 왜 하필 중학교 때 골 먹은 장면만 내보내는 겁니까."
"저거 중학교였어요? 고등학굔 줄 알았는데?"
"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토크쇼 나와서 말 안 하겠다니. 함우진 씨 프로 정신이 의심되는 대목이군요."
분량이 적은 함우진을 챙기려고 MC가 애쓰는 게 보였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함우진밖에 없어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저 골을 누구 상대로 먹었는지 기억납니까?"
"그걸 어떻게 기억합니까?"
"그 주인공이 바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설마?"
"그래요. 저 일곱 골 넣은 사람은 이광해 씹니다. 두 사람 나이도 같은 친구고 중학교 때 골키퍼와 골잡이로 경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저, 함 선수는 늦은 이라는데요?"
"아뇨. 요새 누가 그걸 따집니까."
동생 되기 싫은 함우진의 몸부림에 패널들이 과장되게 웃었다.
"이광해 씨 축구부였나요?"
"네, 고등학교 2학년 때 축구 그만뒀습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 싶어서요."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축구부 에이스였네요."
"아, 꾀쟁이."
함우진이 탄성을 질렀다.
"꾀쟁이요?"
"덩치가 나만한 놈이 어찌 얄밉게 공 차는지. 우리 감독님이 꾀쟁이라고 별명 지어줬어요. 저대로 크면 국가대표 할 놈이라고 하셨는데."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한길만 판 함우진 씨는 늦깎이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이광해 씨, 혹시 축구 그만둔 거 후회하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동생이 차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습니다. 작년에 수술받고 완치되었고요. 동생도 축구부였거든요. 그때 축구 그만둔 건 계속 축구 하는 저를 보고 고통스러워할 동생을 생각해서였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축구부라면 공부에 확신이 없었을 텐데요?"
"공부에 확신이 있어서 축구 그만둔 게 아닙니다. 그땐 어린 마음에 축구 반드시 그만둬야겠다고 느꼈거든요. 솔직히 제 선택에 책임질 각오도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니까 할 수 있었던 무모한 결정이었죠."
"와, 네크로 오빠 축구부 안 하고 처음부터 공부했으면 미국 유학도 가셨겠네요. 어린 나이부터 축구 하느라 학업에 열중하지 못해서 겨우 K대 가신 거군요."
함우진이 박장대소했다. 대기실의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함우진이 빵 터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MC는 혼자 심각한 박아람에게 표정 관리하라고 눈치 보냈다.
- 작가의말
1. 뜬금없다.
2. 너무 자연스러워 놀랐다.
3. 자연스럽진 않은데 재밌어서 괜찮다.
4. 재미도 없고 뜬금도 없다.
이런 내용 가끔 섞어주는 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슬슬 연성이를 버리고 작위적인 연출을 하려 하는데, 개연성은 조강지처라 완전히 버리진 못하겠습니다. 수위 조절하는 데 도움 좀 주십시오. 객관적인 평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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