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기 전에 꿈틀1
"형, 이거 뭐야?"
"나도 몰라. 뭐 버그나 그런 거겠지. 일단 뒤로 물러나서 길을 터드려."
대문이 전혀 예기치 못하게 쓰러졌다. NPC들은 시스템을 통해 '예감'과 같은 감각으로 대략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진돗개의 베기 스킬에 대문 내구도가 바닥날 줄은 시스템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밀물처럼 밀고 들어가는 유저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문을 부숴도 대문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며 한동안 실랑이질했을 텐데, 그냥 훅 찌르고 들어갔다.
"너무 밀고 들어가지 말고 공간부터 확보해라. 성벽 공격도 멈추지 말고."
유저들이 신나서 달려들어 가자 지휘부가 자제를 요청했다.
"우르크 황제가 밖에 있는 부대를 불러올 수 있으니 교통 요충지를 점령하며 경계를 늦추지 말아라."
"레인저 부대는 순찰을 강화하고, 미리 짠 편제에 따라 중요 거점을 점령한다."
스탯과 스킬 그리고 아이템이 훌륭한 유저들만 안으로 들어가고 남은 유저들은 외부 거점 점령과 우르크 소탕에 동원되었다.
"자. 우리도 계획대로 움직입시다."
네크로와 진돗개 그리고 철벽과 동해만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황궁 창고로 간다."
점령이 끝나지 않았기에 도둑을 비롯한 몇몇 직업을 빼고 황실 소유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지 못한다. 귀중한 물건을 도둑질하는 건 제이크가 책임지기로 했다.
황궁 창고엔 벌써 발 빠른 도둑 유저 여럿이 와 있었다. 상자를 소리 없이 열면 상관없지만, 기척을 내거나 실패하면 은신이 풀렸다. 은신이 풀린 도둑은 1초도 못 버티고 대기실로 떠났다.
"철벽."
"천벌, 도발."
황궁 창고를 지키는 우르크는 무척 많았다. 게임답게 소대마다 담당 구역이 있었다. 설정과 철벽의 스킬이 충돌했고 설정이 이겼다. 해당 구역의 우르크들만 철벽 스킬에 이끌렸고, 다른 구역의 우르크는 네크로 일행을 보고도 알은체조차 하지 않았다.
"철벽, 죽이지 말고 잡아두고 있어."
"옙."
귀를 즐겁게 하는 딸깍 소리가 연신 터졌다.
"제이크, 귀한 물건만 훔쳐."
최하 유니크 등급으로만 훔친 제이크가 네크로에게 다가가 물건을 건넸다. 물건을 인벤토리에 넣은 네크로가 일행에게 신호를 줬다.
"처리하고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자."
황궁 창고의 모든 구역을 다 돌고 나니 시간이 부쩍 흘렀다.
"현피 오빠. 아직이야?"
"응. 아직 황제가 안 나왔어."
네 길드의 유저들은 대전에서 대공이나 공작들을 상대로 고전했다. 공작만 해도 웬만한 보스몹 정도다. 그런 자들이 여럿이 그저 보면 넓지만 전장으로 삼기엔 좁은 곳에 몰려있으니 전투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유저들은 파티 채널이나 공개 채널로 대화해야 하지만, NPC는 서로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유저보다 훨씬 빠른 대응을 보였다. 마음이 서로 통하니 유저들처럼 서로 방해하거나 목표가 겹치는 일이 없었다.
"오빠. 우리 마구간 가보자."
미리 황궁 지도를 입수했기에 어렵지 않게 마구간을 찾아갔다. 철벽이 인벤토리에서 테이밍 아이템을 꺼냈다. 하나에 현금 60만 원 하는 비싼 물건이었다.
"실패하면 한 달 다이어트 할 거야."
운동하겠다는 게 아니고 먹는 걸 줄이겠다는 뜻이었다.
새끼 코뿔소에게 다가간 철벽이 코를 살살 쓰다듬었다.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등도 긁어줬다.
"왜 저리 온순해?"
"전투 상태가 아니니까. 탈것도 전투 모드가 따로 있잖아."
물론, 해동청은 그런 게 없었다.
아이템 '복종의 코뚜레'를 사용하자 코뿔소의 눈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철벽이 음식으로 달랬다. 이미 코뿔소가 어느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아냈기에 발작하지 않게 잘 구슬렸다.
코뿔소가 코뚜레를 부숴버리면 테이밍이 실패한다. 60만 원을 날릴 뿐 아니라, 쿨타임에 걸려 24시간 후에야 다시 시도할 수 있다.
"와, 됐다. 코뿔소 역소환."
새끼 코뿔소는 철벽 소유의 아이템이 됐다. 코뿔소는 분류가 공성 병기였다.
"오빠. 이거 그냥 코뿔소 아니고 철갑 코뿔소야."
"너 이래서 서브 직업 바꾼 거야?"
철벽은 화가 직업을 지우고 한 달 기다려서 사육사로 갈아탔다.
"내 그림은 뭐랄까. 시대를 너무 앞서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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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쩔 수 없군요. 황제 상대로 아껴두려 했는데."
철혈팔기 유저가 아이템 스킬 '침묵의 암살자'를 사용했다. 스킬로 소환한 암살자들이 우르크 귀족들에게 큰 상처를 안기고 사라졌다. 암살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언뜻 소환 스킬이 아닌 공격 스킬로 오해할 수 있었다.
"산맥의 지배자."
은색 털에 보라색 점이 박힌 아름다운 표범이 소환됐다. 덩치는 송아지에게도 못 미치지만, 지배자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전투력은 어마어마했다. 이빨에 물리고 발톱에 할퀸 우르크 귀족들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국경의 초병."
45명의 레인저 차림의 군인이 소환됐다. 작은 가죽 방패에 가죽 갑옷, 활, 검, 단창, 채찍 등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자들은 아홉씩 짝을 지어 우르크 귀족 다섯을 상대했다.
"제길, 무슨 황궁이 이렇게 넓어. 반나절 헤맸잖아."
진돗개가 툴툴거리며 대전에 발을 들였다. 곧 끝날 것 같다는 현피의 말에 부랴부랴 달려왔다. 그러나 네크로 일행은 바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음식을 먹으며 피로도를 관리했다.
"어디 좋은 데 다녀오셨나요?"
"황궁에서 여기보다 더 좋은 데 어디 있겠습니까. 영웅급 우르크는 에픽을 드랍하는데."
네크로의 말에 휴식을 취하던 유저들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여럿이 파티를 맺고 균등 분배 방식을 선택하면 시스템이 알아서 아이템을 나눠준다. 그때 가장 좋은 아이템을 주는 기준이 뭔지 시원하게 밝혀진 적은 없지만, 유저들은 가장 데미지 많이 준 사람이 갖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계속 휴식을 취하는 유저는 역천을 비롯해 몇 명밖에 없었다.
"붓은 총보다 강하고 혀는 채찍보다 효과적이죠."
역천이 멍청한 유저들을 비난했다. 빨리 피로도를 회복해서 황제 레이드에 전념해야 하는데, 에픽 아이템 욕심을 못 이기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여긴 왜 온 겁니까?"
"황제 잡으면 에픽 최소 세 개 준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신기를 드랍하면 대박 아닙니까."
"일행에 단창 쓰는 분 계시던가요?"
"팔아도 좋죠. 게임 접기 전에 최대한 벌어놔야지 않겠습니까?"
"게임 왜 접습니까? 고구려의 문은 늘 열려있습니다."
"그렇네요. 제가 외골수라서 시야가 좁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아무것도 못 이룬다. 역천은 네크로 마음을 흔들었고 네크로는 굳건하게 버텼다. 물리력을 동반한 공방이 오간 건 아니지만, 유저와 우르크 귀족 사이의 혈전 못지않게 치열했다.
'마음 단단히 먹었구나. 호락호락 물러날 것 같진 않은데. 철혈팔기는 네크로가 곧 포기할 거로 믿고 있었어. 이걸 이용해 철혈팔기에 타격 좀 줘야겠다.'
귀족들을 다 해치우자 용병들이 달려가서 귀족들 사체에 칼을 댔다. 네크로가 전투에 전혀 참가하지 않은 탓에 제이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전을 통해 황제가 업무를 보는 방에 들어갔다. 대전의 절반밖에 안 되지만, 혼자 쓰기엔 무척 큰 곳이었다.
- 특수 필드가 생성됩니다. 전투가 끝난 후 모든 물품이 복원됩니다.
특수 필드가 생성되고 나서야 일행과 우르크 황제를 막았던 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인간의 신 이름을 지우고 대륙에서 쫓아냈는데도 결국 이렇게 돌아왔구나. 다행히 여기선 너희 모두 목숨 하나밖에 없다."
우르크 황제의 입을 통해 죽는 즉시 특수 필드에서 추방되어 전투에 배제될 것임을 알려줬다.
끝까지 남아서 황제가 드랍한 아이템을 얻으려는 목적에 유저 모두 조심스러웠다.
"인간은 예전부터 간사하기 그지없었지. 왕은 겨우 둘만 왔구나."
다섯 세력에서 네크로와 역천만 특수 필드에 있었다. 남은 세 세력의 왕은 황궁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너희를 상대로 전사의 명예를 지킬 필요도 없겠지. 황제의 부름."
15만이나 되는 군대가 소환되나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88인의 우르크 전사가 소환되었다.
"한 사람이 셋 해치우면 되겠네."
유저 하나가 중얼거렸다.
"하얀 뿔 전사."
역천 길드의 유저 한 명이 아이템 스킬을 사용했다. 네크로가 얼음의 정령왕을 구출할 때 함께했던 수인 부족과 정말 비슷하게 생긴 수인족 전사들이 소환되었다.
"황제의 부름."
"저건 쿨타임도 없냐?"
16명의 무인 차림의 우르크가 소환되었다. 숫자가 적어졌다고 기뻐하는 멍청이는 없었다. 같은 스킬인데 숫자가 적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왕실 기사단 스킬 자제해주세요."
역천의 말에 네크로는 눈만 끔뻑였다.
"내 용병이 왕실 기사단 일원입니다. 당신이 스킬 사용하면 내 용병이 사라집니다."
만리장성이 그토록 이 아이템을 원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만리장성은 그때 가미카제와 역천을 함께 밀어버릴 생각으로 네크로의 왕관을 탐냈던 것이었다.
절대수호 스킬을 쓰는 용병이 없으면 역천의 생존 능력이 무척 떨어진다. 국왕의 죽음이 양측 NPC 사기에 무척 큰 영향을 끼치기에 중요한 전투에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약점이 있는 용병을 왜 계속 데리고 있죠?"
"끝날 즈음해서 써주세요. 확실히 바꿀 때가 되긴 했어요."
"붉은 띠 해적."
서른둘로 이루어진 해적단이 나타났다. 허리띠만 붉은색으로 통일하고 복장은 제각각인 해적들이 전투에 뛰어들었다.
"황제의 부름."
특수 필드가 갑자기 확장했다. 황제가 이번엔 2만 규모의 군대를 불러왔다. 다행히 단일 병과였다.
"불패의 군단."
5천 명 규모의 군단이 소환되었다. 숫자는 적지만 사제와 기마병까지 갖춘 군단이었다. 군단의 구성을 살핀 우르크 황제가 코를 실룩였다.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예감'한 것이 분명했다.
언데드가 아닌 멀쩡한 대장군과 병사들이 소환되니 보기에 무척 좋았다.
"사기 고취."
위엄 스탯 1 소모해 소환된 NPC들의 사기를 고취했다. 불패의 군단이 더욱 강한 힘을 냈다. 네크로의 스킬 덕분에 가뜩이나 강한 불패의 군단인데 사기 고취 스킬이 날개까지 달아줬다.
우르크 황제가 움직였다. 경각심을 늦추고 전투를 구경하던 유저 하나가 대기실로 떠났다. 소환자가 사라지자 하얀 뿔 전사들도 사라졌다.
네크로의 방패가 빠르게 움직였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네크로를 기습했던 우르크 황제의 공격이 방패에 막혔다. 우르크 황제의 무기가 신기라지만, 네크로의 방패 해동청도 만만치 않았다.
"얼음의 성."
네크로가 열흘 도움 받는 대가로 준 허리띠에 내장한 스킬. 얼음으로 된 성이 나타나서 역천을 보호했다.
"왕실 기사단."
역천은 왕실 기사단을 사용하라는 의미로 얼음의 성 스킬을 펼쳤다. 네크로는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 왕실 기사단 스킬을 펼쳤다.
"절대 수호."
회색 기사 둘이 절대 수호 스킬을 사용했다. 우르크는 두 명의 기사를 해치워야 하고 방패도 넘어야 네크로를 타격할 수 있다.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챈 황제는 붉은 띠 해적을 소환한 유저를 목표로 했다.
"방패 쌓기."
철혈팔기의 성기사 유저가 우르크 황제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쉽게 막은 게 아닌지 허리띠에서 붉은빛과 푸른빛이 반짝였다.
역천은 얼음의 성에 숨어서 자기 보신에 열중했고 철혈팔기와 만리장성 유저들은 한데 뭉쳐 우르크 황제의 공격에 대비했다. 네크로는 기사단의 수호가 있고 동해와 진돗개는 철벽이 지켰다.
초인동맹 유저들은 성기사 직업이 없지만, 운 좋게도 황제의 공격을 거의 받지 않았다.
"우리가 유리해."
불패의 군단이 우르크 군대를 난자했다. 자신들은 5천이나 똘똘 뭉쳐 다니면서 상대는 산산조각내고 작은 조각부터 먹어치웠다. 16명 무인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군대는 벌써 끝나고도 남았다.
군대를 지휘하던 대장군이 갑자기 검을 뽑아 들고 우르크 황제를 덮쳤다. 소환 시간이 5분 남았다는 신호였다. 불패의 군단도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 일변도로 변했다. 그 서슬 푸른 기세에 개인 기량이 출중한 무인들도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대장군이 우르크 황제를 잡아두자 네크로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왕실 기사단과 함께 우르크 무인과 전사 그리고 군대를 공격했다. 다른 유저들도 눈치껏 전투에 참여했다.
황제는 공격력이 무척 강했다. 네크로와 철벽 그리고 철혈팔기의 성기사 유저를 제외한 남은 유저는 막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방어력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물론 우르크 황제의 무력에 비교해 약하다는 것이지, 아무 공격에나 데미지 입을 정도로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 승리인 것 같군."
황제가 소환한 우르크를 모두 해치우고 1분 지나서 불패의 군단이 사라졌다.
"정령 거미."
탈것 정령 거미에 탄 황제가 사라졌다. 마법사의 순간 이동 마법과 비슷해 보였다. 단, 그 이동 거리가 마법사의 순간 이동보다 훨씬 멀었다.
"해동청."
얌전히 있던 해동청이 드래곤으로 변했다. 광산을 흡수하며 덩치를 꾸준히 불린 해동청이지만, 아직은 변이 드래곤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경비행기 크기의 해동청을 기억하던 유저들에겐 큰 놀라움이었다.
"사라져라."
드래곤 피어가 터졌다. 정령 거미가 특수 필드 안에 친 바람의 거미줄이 가닥가닥 끊어졌다. 정령 거미가 다시 거미줄을 치려 했지만, 해동청이 순순히 놔두지 않았다. 황제를 내려놓은 정령 거미가 해동청과 일대일로 붙었다. 공격 마법을 얻지 못하고 브레스와 피어만 있는 해동청은 정령에 속하는 거미를 쉽게 해치우지 못했다.
"나를 궁지에 몰았군."
우르크 황제가 탄식했다.
"이걸 쓰면 또 한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겠군."
"필살기 쓰려는 거 같은데?"
진돗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우리 하려던 것만 하면 돼."
네크로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일행은 아직 남겨둔 패가 좀 있었다.
"신의 전사."
우르크 황제의 몸집이 서서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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