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레벨 퀘스트2
- 퀘스트 '신의 아바타'를 수락했습니다.
네크로는 트롤 피를 얻으려고 예전에 트롤왕을 잡았던 곳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트롤 부족이 마을을 짓고 살았다.
트롤은 집을 짓는 대신 땅굴을 팠다. 굳이 마을이라고 한 건 파낸 흙으로 토담을 쌓아 안팎을 구분했기 때문이었다.
외곽의 트롤을 하나씩 잡아서 피를 얻으려고 트롤의 행동 양식을 관찰하는데, 무릎에 겨우 닿는 작은 트롤이 다가와서 네크로를 쿡쿡 찔렀다.
"인간 성기사. 퀘스트 하나 줄게."
거절도 못 하고 퀘스트를 받아버렸다.
- 트롤 신 하약스의 아바타가 리자드 유일 도시에 있습니다. 리자드 대장로는 나이가 500이 넘는 강자입니다.
- 리자드 도시를 함락하고 리자드 대장로를 죽인 후 하약스의 아바타를 찾으십시오.
- 보상은 최상급 트롤의 피 300L입니다.
- 성과에 따른 추가 보상이 있습니다.
"꼭 성공하길 바랄게."
말을 마친 아기 트롤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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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팅팅 불어 겉은 생생해 보이는 나뭇가지. 사실 속은 이미 썩어서 독한 가스를 방출하는 중이었다. 속만 썩은 나뭇가지들이 온갖 풀과 엮여 미동도 하지 않아 고요한 늪지로 오해할 수 있는데, 표면만 그렇고 밑으로는 물이 느리게나마 흘렀다.
그런 늪지 한복판에 돌로 쌓은 성이 덩그러니 있었다. 푸른 이끼가 가득해 돌도 썩은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더구나 네모반듯한 돌이 아니라 둥글둥글한 돌로 쌓아서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네크로. 네가 큰 역할을 해줘야 한다."
'고작 트롤 피 300 때문에 내가 이래야 하나?'
도착 전에 몇 번 연습을 거쳤기에 두려움은 가셨다. 그러나 번지점프가 두렵지 않다고 해서 막 하고 싶거나 하진 않은 것처럼, 트롤들의 계획이 반갑지 않았다.
"네 역할은 시간을 끄는 것이다. 안에 리자드 2만 마리가 있다. 최대한 요란하게 놈들을 붙잡아두면 우리가 저들의 토템을 파괴할 것이다."
말을 마친 트롤들이 투석기를 조립했다. 대충 다듬은 나무와 짐승 힘줄을 꼬아 만든 줄, 무슨 풀로 만든 용수철. 얼핏 보기엔 대충 만든 조잡한 장난감 같았지만, 트롤 신인 하약스의 손길이 닿은 걸작이었다.
"시간이 없다. 어서 올라가라."
네크로는 마지못해 투석기에 '장전'되었다. 푸른 막이 생겨서 네크로를 보호했다. 트롤 여섯 마리가 힘껏 당겨 탄력을 최대치로 만든 후, 무정하게 줄을 놔버렸다.
푸른 막에 둘러싸인 네크로는 럭비공마냥 빙글빙글 돌면서 리자드 성 한복판에 떨어졌다.
다행히 거인이 될 때처럼 멀미가 나거나 심하게 어지럽진 않았다. 공중에서 나는 동안 눈을 감아 시각 정보를 차단했기에 조금 울렁이는 거로 끝났다.
"죽음의 군단, 원형진."
희망의 등대 근처의 늪지에 사는 리자드와 급이 달랐다. 3천이나 되는 죽음의 군단이면 예전에 상대하던 리자드 2만이라도 소환 시간이 다하기 전에 다 없앨 수 있다.
그러나 대장로의 휘하에 있는 리자드는 평범한 리자드가 아니었다. 영웅급도 여럿 있어서 네크로는 수비에 치중하기로 했다.
- 서쪽 토템을 파괴했습니다.
죽음의 군단이 3백도 안 남아 초조한 가운데, 가뭄의 단비와 같은 메시지가 들려왔다.
리자드들의 덩치가 조금 작아졌다. 현피의 토템은 스탯만 올려주는데 리자드 토템은 힘과 민첩과 저항 그리고 덩치를 키워줬다.
덩치에 따라 타격 범위가 달라지기에 트롤들은 가장 먼저 서쪽 토템부터 파괴했다.
- 동쪽 토템을 파괴했습니다.
동쪽 토템은 저항이었다. 리자드의 저항이 줄자 네크로는 바로 스킬을 펼쳤다.
"지옥의 심판."
소환수로 분류하는 죽음의 군단은 직접 데미지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지옥의 심판으로 불러온 불은 열기를 비롯한 부가 효과가 없었다. 죽음의 군단은 멀쩡하게 네크로 주변을 지켰다.
'생각보다 위력이 훨씬 강하다.'
쿨타임이 짧아서 조금 경시한 느낌이 있었다. 설명만 보면 빙하시대나 천재지변에 꿀리지 않는 대단한 스킬처럼 보였지만, 네크로는 선입견으로 스킬 위력을 디스카운트했다.
그러나 정작 펼쳐보니 장난 아니었다. 빙하시대나 천재지변과 달리 지속해서 영향을 끼치는 스킬이 아니었다뿐이지, 그 위력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아쉬운 점이라면 범위가 좀 작았다. 빙하시대를 보면 엄청 넓은 면적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지옥의 심판은 지름이 백 미터 조금 넘은 정도였다.
'그럼 불의 용도 엄청 대단한 스킬이라는 뜻인데.'
철벽의 목걸이 불타는 심장에 있는 스킬 불의 용. 쿨타임이 180일이나 되는데 지옥의 심판처럼 공격이 끝나면 깔끔하게 매듭짓는 스킬이었다. 친화력이 높으면 어떤 위력을 보일지 기대됐다.
네크로가 불러온 불판은 지속 시간이 다하자 깔끔하게 사라졌다. 다른 마법은 불이 옮겨붙기도 했는데, 지옥의 심판은 적만 깔끔하게 태우고 나무나 풀은 그대로 뒀다.
- 북쪽 토템을 파괴했습니다.
- 남쪽 토템을 파괴했습니다.
지키는 리자드를 해치우고 토템을 파괴한 트롤들이 사방에서 달려왔다.
"리자드와 대장로는 우리가 맡겠다. 너는 중앙 토템을 파괴해라."
중앙 토템은 아무런 버프도 주지 않았다. 그저 동서남북의 토템을 복구하는 역할이었다.
'이것들이. 어려운 일만 나한테 떠넘기네?'
중앙 토템은 말이 토템이지 사실 건축물이나 다름없었다. 첨성대처럼 생긴 토템에 다가간 네크로는 얼마 안 남은 죽음의 군단에 보호를 명령하고 망치로 건축물을 두드렸다.
- 힘을 잃고 이름을 숨긴 리자드 신이 당신을 적대합니다.
- 리자드 종족과 앙숙 관계가 됩니다.
- 리자드 종족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당신의 적과 손잡을 수 있습니다.
'동맹은 대가를 줘야 하고, 앙숙은 대가도 없이 상대편 든다고?'
드워프와는 경제 동맹이었다. 드워프가 생산한 아이템을 원하면 최저가로 가져다가 팔았다. 노말과 매직 아이템 독점을 풀고 자금이 넉넉해진 지금, 드워프가 생산하는 유니크와 레전드 아이템을 사다가 파는 거로 수익을 올렸다. 구매자는 유저뿐이 아니라 NPC도 있었다.
오우거와는 무력 동맹이었다. 오우거의 무력을 빌려 쓰고 싶어도 못 빌려 쓰는 다른 세력에 비교하면 꽤 괜찮은 혜택이지만, 다른 국가와 전쟁할 때 리자드가 상대편을 들 수 있다고 하니 짜증이 확 치밀었다.
'리자드 신을 찾아내 죽이면 새 신이 탄생할 것 같고. 그대로 두자니 하약스나 다른 신처럼 풀려날 것 같고.'
갑자기 가슴이 딴딴해졌다. 이두와 삼두가 팽팽하게 팽창하더니 온몸에 힘이 솟았다. 손에 든 망치가 가볍게 느껴지며, 예전에 미스릴 조각상이 그레이트 웜을 때릴 때 그렸던 아름다운 궤적을 똑같이 그렸다.
조금씩 흔들리기만 하던 토템이 폭삭 무너졌다. 토템을 지키기보단 트롤을 막는 데 더 열중이던 리자드들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신의 힘이 깃든 토템이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오우거 신의 축복으로 얻은 괴력 특성이 발동해 단번에 토템을 박살 냈다.
어느새 모습을 나타낸 제이크가 돌무더기를 뒤져 아이템 하나 건넸다. 마노처럼 빨간 모습에 에픽 아이템임을 알아차린 네크로는 죽어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에픽이 지금까지 경매장에 올라온 적 없어서 정확히 가격을 추산하는 건 힘들지만, 옵션 좋은 레전드도 몇억 하는 판에 에픽이 십억 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이템은 바로 은행 금고로 전송했다. 아공간에 넣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금고로 보내는 게 마음이 확실히 놓였다.
리자드 대장로가 트롤들의 공격을 무시하고 네크로에게 달려왔다. 주술사로 생각하고 지팡이 공격을 막은 네크로의 몸이 훨훨 날았다. 대장로는 예상과 달리 리자드 전사였다. 500년 동안이나 성장한 거대한 육체가 뿜어내는 힘에 네크로는 반항도 못 했다.
벌떡 일어선 네크로는 새 방패를 꺼내 왼손에 들고 앞으로 달렸다. 자신이 리자드 대장로를 잡아두면 트롤들이 토템이 사라진 리자드를 학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휘둘러오는 통나무를 방불케 하는 지팡이를 허리 숙여 피했다. 허리를 펴기 바쁘게 네크로는 허공을 날았다. 힘이 최소 13은 될 것 같은 리자드 대장로는 종족 특성인 민첩도 엄청 높았다. 지팡이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발로 네크로를 걷어찼다.
전사의 발차기도 공격으로 여겨져 데미지를 입힌다. 네크로는 천천히 차오르는 피통을 확인하며 다시 대장로에게 달려갔다.
"도대체 누가 트롤이야."
리자드의 머리를 힘으로 뽑아 몸통에서 분리하던 영웅급 트롤이 벌떡 일어선 네크로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트롤도 저 정도 얻어맞으면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 12로 추정하는 체력 수치와 하약스 목걸이, 축복으로 커진 피통과 빨라진 회복력, 패시브와 신의 은총 스킬에 힘입어 네크로는 두려움 없이 리자드 대장로에게 덤볐다.
'스킬 아니곤 날 죽일 수 없어.'
그저 타격도 적은 데미지가 아니었지만, 네크로를 죽이기엔 많이 부족했다.
'왜 스킬을 안 쓰지?'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였다. 덩치가 너무 커서 리자드의 순발력을 이용한 은밀한 공격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네크로는 백 번 정도 얻어맞고 걷어차이는 사이에 딱 세 번 공격에 성공했다.
'제길. 지친다. 저 트롤 새끼들은 왜 이리 미적거리는 거야.'
트롤은 천 정도고 리자드는 7천 정도 남았다. 토템 지키던 리자드가 전부 죽었고 네크로의 스킬에 수천이 죽었다. 네크로가 리자드 대장로를 상대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약한 리자드는 다 죽었고, 남은 7천은 약하지 않았다.
리자드의 주 무기 중 하나인 샴쉬르가 트롤의 심장에 박혔다. 트롤은 가슴 근육을 수축해 심장을 관통한 무기를 꽉 잡은 후 손으로 리자드의 머리를 돌려버렸다. 무기를 뽑으려고 힘쓰던 리자드는 반항도 못 하고 목이 돌아가며 죽어버렸다.
트롤은 가슴에 박힌 샴쉬를 자루 쪽으로 끊은 후 뒤로 뽑아냈다. 팔이 길고 유연하여 끊어진 칼날을 정말 부드럽게 제거했다.
심장이 쪼개진 트롤은 창백한 얼굴로 동료가 많은 곳으로 달렸다. 철퍽 쓰러진 트롤 곁에는 마찬가지로 팔다리가 날아갔거나 머리 반쪽만 남은 트롤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갑자기 뿌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네크로, 퇴각일세."
일부 트롤이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트롤 하나씩 업고 먼저 튀었다. 남은 트롤들은 눈이 벌겋게 충혈해 죽자 살자 덤비는 리자드를 침착하게 상대하며 네크로와 함께 퇴각했다. 네크로를 훌쩍 던져 높은 담벼락을 넘긴 트롤들이, 구렁이처럼 벽을 쓱 훑으며 순식간에 넘었다.
"왜 퇴각이야?"
"리자드는 피가 차가운 놈들이야. 싸우면 싸울수록 피가 뜨거워지며 강해지지. 그냥 리자드는 괜찮은데, 리자드 대장로의 피가 뜨거워지면 어마어마한 기술을 쓸 거야. 일단 퇴각해 리자드의 피가 식기를 기다려야지."
민첩형이지만 전사가 많은 리자드와 달리, 트롤은 도둑 스킬을 보유한 자가 꽤 많았다. 그런 자들이 늪에 숨어서 밖으로 나오는 리자드를 사냥했다. 네크로는 피가 식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말에 로그아웃했다.
게임에서 자도 되지만, 아무리 게임 캐릭터라도 늪지에서 재우는 게 탐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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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공격으로 리자드 대장로만 남았다. 쉽게 끝나겠거니 했는데, 리자드 대장로 혼자서도 스킬 쓸 정도까지 버텨냈다.
"꼬리 치기."
분명히 단단한 나무로 만든 지팡이인데, 악어 꼬리처럼 흐느적거렸다. 방패로 어렵게 지팡이를 막은 네크로가 담벼락 밖으로 날았다. 약 70미터를 날아서 늪에 처박힌 네크로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무너진 벽을 넘어 안으로 달렸다.
네크로 때문에 스킬을 끝까지 펼치지 못한 리자드 대장로는 꼬챙이로 몸 곳곳을 쑤시는 트롤에 꼼짝 못 하고 당했다. 네크로가 복귀할 즈음에야 다시 자유를 회복한 리자드 대장로는 무시무시한 지팡이를 휘둘러 가까이 접근한 트롤을 모두 쳐냈다.
네크로와 달리 트롤들은 한참이나 회복하고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마지막 방패다.'
어느덧 출발할 때 준비한 방패가 동났다. 공격 한 번 막을 때마다 방패 하나씩 깨져서 수십 개 준비한 방패가 하나 남았다.
지팡이에 날려 담벼락에 부딪힌 네크로는, 담이 무너지며 쏟아진 돌에 묻혔다. 트롤 몇 마리가 달려와서 네크로를 도와 돌을 치웠다.
'몸으로 때우는 건 문제 없는데, 스킬을 펼치면 어떻게 대처하지?'
스킬에 적중해도 꼭 죽는다는 보장은 없다. 네크로라면 꽤 큰 확률로 살아남을 것이다. 문제는 아이템 내구도. 갑옷을 비롯한 아이템이 얼마나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단죄."
참수와 비슷한 위력의 전사 스킬. 참수는 검이나 칼로 펼칠 수 있고 단죄는 둔기로만 펼칠 수 있었다. 민첩이 곧 8이 될 네크로지만, 단죄 스킬을 피할 순 없었다.
가슴이 딴딴해지고 팔 근육이 부풀었다.
'하늘이 날 버리지 않았어.'
부드러운 올려치기로 망치와 지팡이를 충돌시켰다. 팔이 부러졌지만, 목걸이가 순식간에 회복시켜줬다. 네크로는 바닥에 떨군 망치를 주워들고 리자드 대장로의 발목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트롤들 역시 벌떼처럼 달려와서 대장로의 몸에 꼬챙이를 꽂았다. 일부는 대장로 몸에 기어올라 목이나 심장 부위에 꼬챙이를 박았다.
지팡이가 부서져 맨손이 되고, 발목 하나 작살나서 쓰러진 리자드 대장로는 트롤 수십 마리를 죽이며 분전했지만, 결국 싸늘한 사체로 변했다. 수비에만 전념하던 네크로가 공격에 가담해 망치로 방어력을 낮춘 덕분에 트롤들의 공격이 점점 큰 데미지를 입혀 대장로는 나쁘지 않은 회복력에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삼백 남은 트롤들이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승리를 자축할 때, 네크로는 대장로 몸에 칼을 댄 제이크만 주시했다. 제이크는 대장로 몸에서 부지런히 비늘을 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하나 쭈그러들었다.
'전설 장갑과 전설 신발.'
아홉 개 중 둘 건졌다. 네크로는 풀이 죽은 제이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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