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대박이다
네크로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병정개미 한 무리를 상대로 선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군개미 무리가 뒤에서 공격했다. 지금까지 상대한 경험으론 머리를 써서 포위진을 짠 게 아니라, 우연히 두 무리의 동선이 이곳에서 겹쳤다.
"제발, 날 구해주게."
후방에 있던 해골 마법사들이 장군개미 무리에 학살당했다. 리치는 빠르게 후퇴해 목숨을 구했지만, 다소 멍청한 해골 마법사들은 제자리에서 저항하다 몇 마리 남지 않았다.
전방에서 듀라한이 거느린 강화 좀비들과 함께 병정개미를 학살하던 네크로가 황급히 돌아왔을 땐, 이미 상거지가 장군거미에게 다리 하나 잘린 뒤였다. 집게 같은 장군개미의 주둥이가 다소 얇은 상거지 다리를 절단했다.
"파티 결성."
상거지를 파티에 넣으면 회복의 빛 덕분에 생명력을 조금씩이나마 회복할 수 있다. 게다가 정의의 빛으로 저항도 상승하여 불구만 되고 목숨을 살릴 확률도 있다. 그러나 상거지는 그저 구해달라고 애원만 할 뿐, 네크로의 파티 결성 요청을 무시했다.
###
"안녕하세요. 높은 긍지와 아름다운 이상, 레전드 신문 마스코트 상미 기자예욤. 국민 게임 레전드의 구석구석 샅샅이 훑어서 재미와 감동을 낱낱이 모아오는 레전드 신문사가 오늘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는데요. 그 현장으로 떠나보겠습니다."
└ 성괴여 물러나라.
└ 언니, 팬이에요. 너무 이뻐요. 근데 수술 어디 어디 했어요?
└ 성괴면 어때, 그저 맛만...
└ 여기서 성괴거리는 것들, 거울이나 쳐 봐라.
└ 찌질하고 자존감 낮은 사람들 많군. 신문사 홈피 들어가 봐. 상미 기자님 쌩얼 사진 걸려있으니까. 얼마나 이쁜지 함 봐봐.
└ 쌩얼 같은 소리 하네. 게다가 뽀샵질은 풀메보다 더 악랄한 거 아냐?
└ 현실에서 성형의도 절레절레 고개 흔든다구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의료 기술의 한계라구요? 레전드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형 아무나 하는 거 아니죠. 자칫 돈만 팔고 못생긴 얼굴 나올 수 있어요. 저희 레전드 뷰티 길드로 오시면 상담료 10골드, 단돈 10골드에 성형에 관한 모든 답변을 해드립니다. 비싼 돈 팔지 마시고 저희 레전드 뷰티 길드로 와서 돈 적게 들이고 이쁘게 변하는 법 배워가세요.
업데이트를 통해 스샷 및 1분 미만의 영상을 레전드 게시판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긴 수많은 유저의 외면을 받는 사냥터, 황무지 유일 도시인 오아시스입니다. 레전드 역사상 최초의 스샷이 탄생한 곳이기도 한데요. 스샷 주인공이자 할리우드 배우를 닮은 얼굴로 '꽃거지'라는 닉네임을 얻은 오아시스 유일의 거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얼마 전 전해드렸었죠. 자리를 옮긴 게 아니냐는 추측이 한때 무성했는데요. 오늘 꽃거지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 성괴여 물러나라.
└ 언니, 팬이에요. 너무 이뻐요. 근데 수술 어디 어디 했어요?
└ 이 정도면 골수팬 아냐?
└ 첫댓 상미 기자님 짝사랑하다 제풀에 포기한 찌질한 놈일 듯.
└ 한 놈이 아이디 두 개 돌리는 것 같은데?
생방송 기능은 개발 중이라고 발표했다. 지금은 그저 짧은 영상 찍어서 게시판에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신문사를 운영했다.
"안녕하세요. 그간 자취를 감췄는데, 어디로 가셨던 건가요?"
"끝이야. 모든 게 끝장났어. 곧 암흑이 몰려올 걸세. 다들 도망가게. 곧 깊은 심연에서 괴물들이 나올 거야."
"무슨 말을 해도 위의 대사만 반복하네요. 아무래도 어마어마한 이벤트가 오아시스에서 벌어질 것 같습니다. 귀욤상큼 상미의 질문에도 유니콘 개발팀의 산적 아저씨는 모르쇠만 놓았답니다. 이미 유수의 명문 길드들이 오아시스로 몰려오고 있네요. 특히 앙숙인 WM과 OB 두 길드가, 며칠 전 늑대 숲 혈전에 이어 오아시스에서도 대규모 충돌을 일으킬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 성괴여 물러나라.
└ 언니, 팬이에요. 너무 이뻐요. 근데 수술 어디 어디 했어요?
└ 지금까지 올라왔던 노잼 뉴스들보다 낫긴 한데, 마지막에 귀두가 왜 나와?
└ 아재요. 보청기 건전지 가소.
###
"형, 괜찮아?"
동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광해를 바라봤다. 현성이 가게 개업 축하해주고 돌아온 후 에픽 퀘스트 한다고 말하고 홀로 사라진 광해는, 꼬박 20시간 후에 로그아웃했다.
푹 쉬고 다시 로그인한 후 16시간 만에 로그아웃했고, 그 뒤로도 10시간 안에 나오는 법이 없었다.
끼니 거르기 일쑤여서 얼굴이 홀쭉했고, 눈 밑도 거뭇거뭇했다.
"퀘스트 NPC가 죽었는데, 퀘스트가 계속 진행이야. 미치겠어."
광해는 머리를 털어 두통을 쫓아내려 했지만, 오히려 골이 더 심하게 울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NPC는 날 신전까지 안내해주는 역할뿐이었나 봐. NPC가 죽었으니 내가 직접 찾아야 하는데. 개미굴 던전이라서 길 찾기 정말 힘들어. 더구나 목적지가 어딘지도 몰라."
"열흘이나 했는데 퀘스트가 전혀 진전이 없단 말이야?"
"오늘은 일단 게임 하지 말고 푹 쉬어야겠다. 미로에서 길 찾는 방법이나 좀 알아보고."
"안 그래도 현성이 형이 저녁 같이 먹자고 전화 왔었어."
"나 잠깐만 눈 붙일게. 시간 되면 깨워줘."
광해가 눈을 떴을 때는, 현성과 성필이가 먹을 걸 바리바리 싸 들고 둘이 사는 집에 찾아온 후였다.
"형 너무 피곤한 것 같다고 해서 치킨이랑 족발 사 왔어. 가볍게 맥주 한 잔씩 하면서 얘기 좀 하자. 매형한테서 들은 중요한 정보야."
피곤해서 맥을 못 추는 광해와 다리가 불편한 동해 대신 둘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직 다리가 채 낫지 않은 동해 제외하고 맥주 한 캔씩 뜯었다.
"형, 요새 너무 변했어. 절대 안 마시던 술도 입에 대고."
'현성네 PC방'은 29대의 가상현실 기기를 들였다. 그리고 그 29대의 기기는 24시간 무휴로 열흘째 열일하는 중이다.
"너도 돈 좀 만지더니 애가 귀티 난다."
현성이 부모님 소유의 건물은 위치가 별로였다. 개발 대상 지역이라고 해서 웃돈 줘가며 샀는데 헛소문이었다. 일 년에 반년도 임대 안 나가는 곳이었는데, 피시방 들어서며 번화가 부럽지 않게 변했다.
"레전드 대기표 뽑은 사람들이 심심하니까 PC게임 해. 그래서 PC고 가상현실 기기고 도무지 전원이 꺼지질 않아."
"난 투자도 못 하고 아무 도움도 못 주고. 조금 미안하네."
"아냐. 형 아니었으면 내가 일 시작도 못 했지. 형이 잘 설득해줘서 다들 돈지갑 연 거 아냐. 큰 매형 자꾸 자기 여동생 형한테 소개해 주고 싶다고 내게 눈치 줘."
"이뻐?"
성필이가 관심 보였다.
"그랬으면 내가 진즉에 나서서 줄을 이었지. 광해 형한테 부족한 여자야. 성깔도 만만치 않고, 낭비벽도 심하고."
현성이 사업은 부모님이 50% 지분, 현성이 30%, 누나 둘이 각각 10%와 6%를 차지했다. 원래 투자하려 했지만 동해 수술비랑 여러 가지 비용 때문에 빠진 광해는 4% 지분을 받았다.
잘되면 몰라도, 문제가 터졌을 때 누군가 나서서 수습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성네 가족은 그 적임자가 광해라고 생각했다. 광해가 대학 내내 성적이 선두를 달렸고 성현이 가족 앞에서 광해 칭찬을 많이 했기에, 대선에 출마해도 무조건 찍어줄 정도로 이미지가 좋았다.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넷은 순식간에 전투 식사를 끝냈다.
"그래. 중요한 정보 뭐야?"
넉넉하게 산 족발과 치킨을 뼈만 남기고 다 해치웠다. 광해는 치킨과 족발 뼈를 보며 주문을 외워 해골 전사를 일으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이템 중개하려고 했잖아. 그거 못할 거 같아."
"정책이 변한대?"
"모레부터 유니콘에서 일주일 동안 골드 환전 수수료를 없애는 이벤트 한대. 일주일 데이터를 확인한 후 수수료를 완전히 없앨지 아니면 비율만 조정할지 판단할 거래."
100골드 구매하려면 10만 원이다. 그리고 100골드 환전하면 8만 원 된다. 그 수수료 20%를 없앤다는 뜻이다.
"설마 경매장 수수료도?"
"응. 경매장 수수료도 일주일 동안 없애."
그때 성필이가 끼어들었다.
"형 설마 이거 예측하고 나보고 골드 모아두라 한 거야?"
평소 똑똑한 앤데, 이럴 때 보면 약간 모자라다. 히어로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아직도 남아있고, 자신이 크게 의지하는 광해가 엄청 대단한 인물이었으면 하는 환상을 품었다.
"일주일 안에 아이템 최대한 처분하고 골드 환전해야 하지 않을까?"
현성이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광해는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빠르게 스쳤다.
"매형이 다른 정보는 없대?"
"어. 급이 낮아서 더는 무리야. 이거 알아낸 것만 해도 줄 잘 탄 덕분이야."
"쉽게 결론 내릴 사항 아니네. 나라면 아이템은 팔아도 골드는 환전하지 않겠어."
현성의 예상을 벗어난 발언이었다.
"형 생각 구체적으로 말해줘."
광해는 한 모금 남은 미지근한 맥주로 목을 축였다. 자신이 내린 결론이 너무 황당해 본인도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 미친 생각이라 나도 확신은 없어. 내 생각엔 유니콘이 환전 수수료 없애고 골드 가격 올릴 것 같아."
"왜?"
"유저가 늘었어. 계속 늘고 있고. 유저는 게임에서 소비자이자 생산자야. 그런데 말이야, 골드는 인간형 몹이 더 잘 줘. 문제는 인간형 몹 잡기 힘들잖아. 골드가 필요한 소비자는 늘었는데 골드를 생산할 능력이 약해.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거야."
"한 명의 유저라도 소비자와 생산자 두 역할로 구분하고 보자. 전체적으로 소비자가 많은데 생산자가 적으면 어떻게 되겠어. 당연히 골드 구매자가 급증할 거야. 현질로 골드를 '생산'하는 거지. 그런데 유니콘에서 계속 지금처럼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유니콘 이 회사는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할 거야. 그럼 회사 이미지가 나빠지겠지? 회사가 당연히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자주 잊는다고. 아마 유니콘이 날로 먹는다고 욕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거야. 레전드 게임을 안 하는 사람이라도 말이지."
"돈만 벌면 장땡 아냐? 욕 좀 먹으면 어때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냥 한국 장사만 한다면 맞는 생각이야. 그러나 유니콘은 일본과 중국 시장 공략하고 있어. 북미 시장과 유럽 시장도 개척 중이고. 그러니 이미지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너무 비약 아냐?"
"아까 말했다시피, 제대로 미친 생각이야. 내가 유니콘 사장이라면 환전 수수료를 없애. 그리고 100골드를 12만 원에 파는 거야. 그리고 100골드 환전하면 12만 원을 줘. 그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잘 모르겠어."
현성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게 아니라, 유니콘이 그렇게 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는 뜻이다.
"돈 주고 골드 사는 유저는 이렇게 생각하지. 이건 투자야. 어차피 게임 즐기다가 100골드 모이면 12만 원 돌려받을 수 있어. 즐길 만큼 즐기다가 게임 접을 때 골드 환전하면 최소 본전이야. 하지만 실상은 그럴까?"
"형 얘기는, 어차피 골드 사는 사람이 파는 사람보다 많다는 뜻이야?"
"당연하지. 수수료 없앤다고 환전 안 할 사람이 환전하는 건 얼마 안 돼. 대신 구매를 망설이던 유저가 구매하는 양은 무척 늘겠지. 20% 손해 본다는 생각이 사라지니까."
"형, 나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게임 하면서 몹 잡으면 아이템 주고 골드 주잖아. 그런데 왜 돈 주고 유니콘으로부터 골드 사야 해?"
동해의 질문이다.
"모든 아이템은 수리할수록 최대 내구도가 떨어져. 그래서 매직까지는 그냥 쓰다 부서지면 버리는 거야. 레어는 보통 수리해 쓰지만, 결국엔 부서져. 아이템은 물약처럼 소모품이야. 사냥을 통해 아이템과 골드를 생산하지만, 사냥하면서 둘을 소비하기도 해. 대부분 유저는 소비가 생산보다 빨라."
광해가 예전에 무기 제외하면 매직만 고집한 이유다. 물론 내구도 회복하는 수리가 있지만, 최대 내구도 1 복구하려면 1골드 소모한다. 정말 없으면 안 되는 아이템 외엔 굳이 골드 소모할 필요 없다.
"형. 근데 어차피 유저들 다 60레벨에 마스터 되면 생산이 소비를 넘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유니콘 손해 보는 거 아냐?"
광해는 괜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랜드 마스터 숙련도가 나왔어. 확실한 얘기니까 의심하지 마. 내 생각에 때가 되면 레벨 제한 풀고 마스터 위 등급도 나올 것 같아."
"형 말대로라면, 당장 골드 사야 하는 거네. 100골드 10만에 사서 이후 12만 팔 수 있으니까."
"각자 알아서 판단해. 어차피 난 던전에 갇혀서 골드 거래하지도 못해."
광해는 던전에 갇힌 덕분에 오히려 속이 편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걸 고민하느라 며칠 스트레스받았을 거다.
"그럼 그냥 수수료 없애고 가격 올리면 됐지. 왜 일주일 이벤트 하는 거야?"
현성이는 이해 안 된다는 듯 질문했다.
"너도 회사 잠깐 다녀봤잖아. 사장한테 이거 합시다 그냥 입으로 해? 데이터 모아서 조목조목 설명해야 할 거 아냐. 일주일 수수료 없애고 사는 사람 얼마, 파는 사람 얼마인지 데이터 뽑으려는 거지. 그 데이터가 수수료 없애고 골드 가격 올려야 하는 근거가 돼줘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이벤트 일주일 한다면 골드 여유 있는 사람들은 환전할 거 아냐. 비싸지기 전에 골드 회수한다고 봐야 해."
"형, 작은 매형이랑 당장 약속 잡을게. 머리 맞대고 상의해보자. 20% 이익을 단기간에 볼 수 있는 일이야. 잘하면 10억이 12억 되는 일이라고."
소심하던 현성이 최근 큰돈 쓰면서 간이 커졌다.
"야, 이 미친 새끼야. 12만은 내가 예를 든 거라니까. 수수료 안 없애면 그만큼 손해 보는 거야."
"괜찮아. 웬만한 손해는 피시방 수익으로 메꿀 수 있어. 형이 떠먹이다시피 한 일인데, 쫄려서 못 먹으면 병신이지."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