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흔적을 찾아서3
"제이크, 지도 얼마 나왔어?"
"39% 완성."
파열의 협곡 지하 동굴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개미굴과 달리 거주자가 없어서 길도 제대로 뚫리지 않았다.
"먹보가 밥값은 하네."
듀라한과 강화 좀비를 모조리 먹어치운 거인 좀비는 먹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철벽이 강력히 주장한 이름이었다. 이틀 동안 늑대를 잡아 좀비로 만들어서 먹보에게 충분한 '연료'를 공급했다. 활동 시간이 30으로 변하자 먹보는 좀비 섭취를 멈췄다.
"그래도 돌쇠랑 뚝쇠 안 먹은 게 어디야."
먹보는 지능이 상당히 높았다. 가끔가다가 막힐 때면 힘으로 길을 뚫어버렸다. 그러나 뚫을만한 길이 아니면 네크로가 명령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먹보가 길을 뚫으라는 명령에 반응하지 않자 일행은 오던 길을 되짚었다.
"여기 수상해."
제이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철벽이 곡괭이를 들고 힘껏 때렸다. 검은 수정이 와장창 부서졌다. 동굴은 30%의 종유석과 70%의 검은 수정으로 구성되었다. 검은 수정은 엄청 잘 부서져서 먹보가 쉽게 길을 뚫어내기도 했다. 반면, 종유석은 엄청 단단해서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았다.
깨지지 않고 살아남은 농구공 크기의 결정을 주웠다.
"황혼의 결정이야."
"밤의 결정 세 개에 황혼의 결정은 벌써 70개 정도 되지?"
"형, 귀족들이 황혼의 결정 찾고 있어. 와이번 나이트들이 사용하는 통신용 수정구 재료로 최고래. 일반 통신 수정구는 거리도 짧고 잡음도 많은데 황혼의 결정으로 만들면 그런 일 없대."
귀한 아이템은 네크로가 허리띠에 달린 아공간에 넣었다. 인벤토리는 죽을 때 드랍 확률도 있고 도둑의 소매치기에 당할 위험도 있었다.
"왜 생방송 안 하냐고 댓글 엄청 달렸어. 우리 벌써 한 달 넘게 생방송 안 했지?"
"레오칸 잡고 늑대 잠깐 잡은 거 빼면 맨날 걸어 다녔잖아. 레오칸은 실패를 염두에 두고 일부러 안 한 거고."
"게시판에선 WM의 보복이 두려워서 생방송 안 한다고 단정 지어 말해."
"WM 해체했잖아."
중심 도시를 잃은 WM은 며칠 뒤에 해체를 선포했다. 대부분 길드원은 대륙으로 넘어갔다가 역천 길드의 무한 척살에 캐릭을 지우고 다시 키우거나 중앙섬으로 돌아갔다. 잔다크를 비롯한 길드 핵심들은 새 길드를 만들어 중앙섬에서 활동했다. 개미굴 던전을 독점하고 길드 레벨을 올리는 데 열중했다.
"우리가 여길 뜨고 나서 레오칸 잡은 동영상 올리자. 시청자들한테는 새로운 콘텐츠 개발 중이라고 대충 둘러대고."
생방송을 시작한 건 돈을 벌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인지도를 올려 아이템을 더 잘 팔기 위함이 컸다. 도시 방어 퀘스트에서 네크로 혼자 20만 몹을 해치운 것도 있고, 최근 WM 길드를 상대하며 해외 팬까지 다량 확보한 덕에 생방송을 안 해도 인지도가 충분했다.
"힘들게 쌓은 이미지 소모하지 말고, 괜찮은 콘텐츠 생긴 후에 생방송 하자."
제이크와 게륵이 앞장서고 그 뒤를 먹보가 따랐다. 먹보는 네크로의 용병인 제이크의 부탁도 웬만하면 들어줬다. 가끔 먹보가 거절할 때 네크로가 나서고, 네크로 명령까지 거절하면 그곳은 완전히 막힌 길로 표기했다.
그래서 일행은 느긋하게 걸으면서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오빠, 그날 역천이 처음에 60억 불렀잖아."
"80억이야. 젊은 애가 기억력이 왜 그래."
"그랬어? 그때 너무 놀라서 잘못 들었나 봐. 하여튼, 그때 역천이 80억 불렀는데 오빤 왜 평강 왕국을 공격한 거야?"
"성공과 실패를 모두 염두에 둔 결정이었어. 만약 실패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위력을 보유했는지 보여서 가격을 더 받으려고 했지. 실패했으면 난 아마 120억 정도 불렀을 거야."
"근데 오빠. 왜 역천은 80에서 280으로 뛰었는데 흥정도 안 하고 바로 들어준 거야?"
"신사협정 같은 거야. 역천은 먼저 WM을 이용해서 내 광산을 공짜로 뺏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어. 하지만 내게 80억이나 주겠다고 제안했지. 충분한 아량과 품위를 보인 거야. 나 이런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80억에 광산 내게 넘겨. 지금 계산해보면 광산 판매 적정 가격은 260억 정도야. 역천은 자기 힘을 과시하며 먼저 가격을 깎은 거야."
"그래서 나는 혼자서 평강 길드를 공격하기로 했지. 내 아이템 스킬이 적아구분 못 하는 거라서 혼자 공격한 것도 있지만, 너희 도움을 받는 것과 혈혈단신으로 임하는 건 엄청난 임팩트 차이가 있어. 여럿보단 혼자가 임팩트 훨씬 강하지."
"나는 혼자서 평강 왕국을 없앴어. 역천은 자신이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나를 오판했음을 인정한 거야. 그래서 내가 적정 가격보다 20억 더 불렀음에도 흥정도 없이 바로 수락했어. 우리를 대등한 협력자로 인정하고 이후 손잡을 여지를 남긴 거지."
"형, 그런데 왜 우리에게 출입 제한을 걸었어?"
"보여주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길드원들에게 체면이 안 설 테니까. 지금 역천은 한국 서버의 고수들 대부분을 모았고 WM도 용병으로 쓸 수 있어. 거기에 우리만 방해하지 않으면 다른 세력들을 전부 제압해서 통솔할 수 있어. 그쪽 에픽 퀘스트는 어디까지 했는지 모르지만, 에픽 퀘스트를 완성하고 왕의 혈통을 얻으면 바로 왕이 될 수 있어. 희망의 등대를 수도로 삼고 중앙섬에서 도시 2개 점령하면 되니까. 그러면 왕국 세금을 유리하게 분배할 수 있거든. 왕위만 유지하면 지금까지 투자한 건 우습게 뽑을 수 있지."
"역천 생각보다 스케일 크네?"
"내게서 전함 26억에 사 갔잖아. 그거랑 다른 배를 합쳐서 유저 2만 명을 태웠어. 200골드씩 받았으니까 4백만 골드잖아. 그거 현금으로 하면 52억이야. 더 크게 먹으려고 생필품 사재기해오다가 우리가 포탈 뚫는 바람에 결국 손해 봤지. 광산 280에 사가도 본전 넉넉히 뽑을 자신 있는 게 틀림없어."
"오빠. 그럼 어차피 평강 왕국도 사라졌는데, 우리가 그냥 광산 운영하면 안 돼?"
280억 이상 뽑아낼 수 있다는 말에 철벽은 광산 판 게 손해라고 여겨졌다.
"안 팔고 버틸 재주가 없으니까. 역천이 아니더라도 일본이나 중국 길드들이 수작을 부릴 거야. 사실 역천이 수작 안 부리고 160억 정도만 불렀어도 난 팔았을 거야. 솔직히 광산 운영하고 지키는 게 꽤 벅찼거든."
"형, 요새 길드 탈퇴하는 유저들 꽤 있어."
"갈 사람은 가게 냅둬."
"역천이 길드 새로 만들어서 광부랑 대장장이 빼가고 있어. 광부들은 다 넘어갔고 대장장이도 절반 넘어갔어. 상인은 저쪽에 어마어마한 놈 있어서 몇 명밖에 안 건너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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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흔적을 수습하였습니다.
- 순수한 어둠이 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줍니다. 신전 관련 직업의 디버프 계열 스킬이 강화됩니다.
- 신의 흔적을 수습한 유저 '진돗개'에게 보상이 내려집니다.
- 패시브 스킬 '냉정'의 숙련도가 최대치가 됩니다. 광전사 스킬로 인한 후유증이 대폭 완화됩니다.
"와 대박. 광전사 스킬 30분에 한 번씩 쓸 수 있어. 게다가 후유증이 15분밖에 지속하지 않아."
"제길. 전투 마법사 안 했으면 순수한 어둠은 내 몫인데."
"꿀 빨았다고 내 앞에서 그렇게 자랑질하더니, 쌤통이다."
"저주할 거야. 널 저주할 거야."
"장난 그만하고, 빨리 마을로 가자. 며칠 뒤면 투라칸이 부활해서 마을 공격한다."
철벽은 벌목 퀘스트를 받아서 힘을 키웠고 남은 사람들은 네크로와 함께 늑대 사냥에 열중했다. 좀비를 잔뜩 만들어서 거인 좀비 식량을 마련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하루 전에 레오칸 잡는 영상과 거인 좀비 만드는 영상을 올려 사람들의 구미를 돋우고, 투라칸과 싸우는 날엔 오랜만에 생방송 했다.
"여기가 투라칸을 죽일 함정이란 말이지?"
지난번에 투라칸을 죽이지 못한 건, 구룩 부족의 역량이 부족해서였다. 비록 네크로 일행과 NPC들이 힘을 합쳐 투라칸을 잡았지만, 게임 시스템은 양측의 역량을 대비한 후 투라칸을 죽일 능력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중상을 입고 도망친 것으로 수정했다.
지난 반년간 구룩 부족은 목책을 보강하고 힘을 키웠으며 제대로 된 함정까지 준비했다. 이번에 투라칸을 완전히 죽이지 못한다고 해도, 부활에 필요한 시간이 훨씬 길어진다.
"와, 시청자가 2천만이야. 대한민국 절반 가까이 보고 있어."
"대부분 외국인일 거야. 한국에 할 일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아."
이례적으로 생방송 시작해서 5분도 안 되어 광고 하나 때렸다. 보통은 40분에서 50분 정도에 때렸는데, 인공지능이 자본주의 물을 제대로 먹었는지 성급하게 광고를 송출했다.
"제이크, 카운트."
"89만."
지난번보다 늑대 숫자가 줄었다. 반면, 구룩 마을은 목책을 다섯 겹이나 둘렀다. 화살과 단창도 넉넉히 준비했고 투라칸을 잡아둘 함정까지 만들었다.
누구도 상황 설명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게임에 임했다. 어차피 채팅창만 봐도 한글이 드물게 보일 정도로 외국 유저가 대부분이었다.
"쟤 이번엔 뜸 엄청 들이는데?"
"레오칸이 죽었잖아. 이젠 30분 제한 안 받을 거야."
"밤의 결정이 하나가 아니었어. 저걸 완전히 죽이지 않으면 계속 구룩 마을을 괴롭힐 거란 말이야. 저놈들 때문에 구룩 마을이 발전하지 못하잖아. 이 기회에 어떻게든 해치우자."
레오칸의 죽음이 불러온 변화는 어마어마했다. 예전과 달리 목책을 빨리 무너뜨리고 파열의 협곡으로 진입하려는 게 아니라, 활과 단창의 사거리 밖에서 깔짝대며 화살과 단창 소모를 유도했다.
"이제야 늑대 답네. 늑대들 사냥 방식이 사냥감을 지치게 만드는 거라던데."
첫 목책에 있던 구룩들이 전부 철수했다. 그리고 목책의 문도 활짝 열었다. 목책 하나 포기하는 대신 늑대를 끌어들여 기동력을 없애려는 속셈이었다. 목책 안에 들어오면 지금처럼 얄미운 짓거리를 못 한다.
우우웃우.
투라칸이 뭔가 명령을 내렸다. 덩치가 작은 하얀 늑대들이 입으로 푸른 피를 토하며 하나둘 쓰러졌다. 대신 늑대들 덩치가 커지고 이빨과 발톱이 날카로워졌다.
"빠르게 목책 전부 돌파한다."
게륵이 늑대 말을 알아듣고 투라칸의 전략을 파악했다. 목책 사이에 끼면 늑대들이 불리할 게 뻔하기에, 목책을 빠르게 돌파한 후 마을 안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했다.
"일단 목책에서 최대한 막아보자. 투라칸만 죽이는 게 아니라 늑대도 될수록 많이 줄여야 해. 그래야 구룩 부족이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두 번째 목책에서 최대한 버티며 늑대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나 몸을 던져 목책에 부딪혀오는 늑대들 때문에 구멍이 너무 많이 뚫려 오래 지키지 못했다. 세 번째 목책과 네 번째 목책도 빠르게 허물어졌다.
다섯 번째 목책은 예전부터 있던 목책으로 급조한 앞의 넷보다 훨씬 튼튼했다. 게다가 네크로의 리치와 해골 마법사들이 목책 위에서 대기했다. 구룩들도 레오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도망칠 곳이 없음을 인정하며 마지막 목책에서 버텼다.
"투라칸 움직인다."
NPC들은 시스템 보정을 조금씩 받았다. 네크로와 같은 유저는 이 싸움의 양상이 어떻게 흐를지 전혀 예측할 수 없지만, 게임 시스템은 대략 어떤 결과가 나올지 미리 계산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NPC인 투라칸은 '본능'이라는 설정으로 감지했다. 이대로는 마지막 목책을 돌파하는 데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함을 알고 투라칸이 움직였다.
"철벽, 진돗개. 둘이 오늘 핵심이야."
투라칸이 참전하자 수비군이 단번에 밀렸다. 냉기 브레스가 꽤 넓은 면적의 목책을 얼려버렸고, 늑대들의 몸통박치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신의 분노, 천벌, 도발."
투라칸은 도발에 쉽게 걸려들었다. 철벽은 투라칸의 공격을 방패로 차근차근 막으면서 계획적으로 물러섰다. 드디어 구룩 부족이 1년 가까운 기간 준비한 함정으로 투라칸을 유인했다.
"신의 불, 이교도 심판, 도발."
굳이 도발이 필요 없었다. 신의 불이 철벽의 몸에서 치솟자 투라칸의 눈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완 달리 전력을 다해 철벽에게 부딪쳐갔지만, 레오칸이 남긴 방패가 투라칸의 전력을 다한 돌진을 막아냈다.
"먹보."
거인 좀비가 구덩이에 훌쩍 뛰어들어 한 손으로 투라칸의 뒷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좀비를 입에 집어넣었다.
개발팀이 네크로를 견제하려고 만들어낸 설정이 네크로를 도왔다. 투라칸의 냉기로 줄어드는 생명력을 좀비 먹는 거로 보충했다.
"강철의 성소, 신성 낙인, 신의 분노."
그웩의 스킬이 철벽과 먹보를 도왔다. 철벽과 먹보가 앞뒤에서 투라칸을 확실히 잡아두자 가뭉이 배불뚝이 어항을 뒤집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구덩이로 쏟아졌다.
"얼음 연어."
머리가 하얗고 몸이 반투명한 마법 물고기가 물에 나타나서 투라칸을 공격했다. 반년간 준비를 단단히 했는지, 가뭉이 마법 스크롤을 연신 찢었다.
"강철 악어, 뭉구리 풀, 오달이."
강철 악어는 시커먼 악어였고 뭉구리 풀은 미역을 닮은 수초였다. 오달이는 수달과 다람쥐를 모두 닮은 귀여운 생김새인데, 사납기 그지없었다. 투라칸의 몸 한 군데를 물고 죽을 때까지 놓지를 않았다.
"이교도 심판, 도발."
지능이 높은 편인 투라칸은 도발에 잘 걸려들지만 그 지속 시간이 짧은 편이었다. 그러나 신의 불도 있고 뒷다리를 잡은 먹보도 있어서 구덩이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철벽은 쿨타임이 돌아오는 대로 이교도 심판과 도발을 사용하며 투라칸을 잡아두었다.
수련자 세트로 갈아입은 네크로는 언제든 뛰어들어 자폭을 펼칠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준비가 넉넉해선지 네크로가 나설 필요까지 없었다.
NPC 도둑이 몰래 찌르기에 이은 칼날비로 투라칸에게 큰 타격을 줬고, 저주술사로 추정하는 노인이 심연의 저주를 펼치고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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