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겨지는 인연의 실들
유니콘 운영팀에는 미녀가 꽤 있었다. 민소연과 이예지 그리고 배선화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데, 배선화는 이미 결혼했고 이예지는 미국 본사까지 마녀라 부르는 가시 돋친 가시였다.
자연스럽게 민소연이 인기 선두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
"예화야, 어떡하면 좋아? 몇 번이나 거절해서 이번엔 힘들단 말이야."
영혼의 단짝 민소연과 박예화. 둘은 서로 안 터놓는 게 없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내 마음은 늘 보름달을 향하는데, 달은 자꾸 썩은 웅덩이만 비추누나."
"기지배, 미쳤어? 내가 썩은 웅덩이야?"
"신재오 부장 정도면 인물 빼고 다 괜찮지 않아? 그냥 눈 질끈 감고 시집 가."
"미친. 네 달은 네 눈에만 둥글어. 찌그러진 깡통 같은 걸 어디 들이밀어."
배를 잡고 깔깔거리다가 민소연이 먼저 웃음을 멈췄다. 복사꽃처럼 환하게 폈던 웃는 얼굴이 갑자기 할미꽃이 됐다.
"내게 정말 꿩 먹고 알 먹고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금낭묘계가 있는데."
"뭔데 뭔데."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
박예화는 민소연의 귀에 한참이나 쑥덕거렸다. 얘기를 다 들은 민소연은 박예화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마구 간지럽혔다. 박예화도 하얀 피부와 귀염귀염한 얼굴로 젊은 사원들한테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복사꽃과 배꽃이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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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이 여자는 왜 나왔지?'
문철수는 대학교 후배이자 후임인 신재오와 운영팀의 꽃 민소연을 이어주려는 목적으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유니콘 한국 지사의 마녀 이예지 부장이 민소연과 함께 나타났다.
"자, 달립시다."
분명히 이 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문철수인데, 이예지가 주인 행세를 했다. 가냘픈 손가락으로 소주 병뚜껑을 부드럽게 따고 낭창낭창한 손목을 흔들며 술잔을 한가득 채웠다.
미처 불판도 올리기 전에 넷이서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이예지의 푸른 서슬에 문철수와 신재오는 연신 원샷을 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이어야 할 민소연은 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
"신 부장."
"왜?"
"너도 술 좀 따라. 지금까지 나만 부었잖아."
뜨끈한 불판이 매서운 공기를 덥혔다. 불판에 누운 한우가 자기 한 몸 희생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휘저었다. 이예지가 적당히 익은 소고기를 각자 앞접시로 배달했다.
평소에는 고기 굽는 것도 술 따르는 것도 병적으로 싫어하는 이예지였는데, 갑자기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동기에 동갑인 신재오는 물론, 직급도 나이도 경력도 위인 문철수마저 바짝 긴장했다.
"이사님, 업무 외 시간에 직원을 함부로 부르는 건 회사 규정에 어긋날 텐데요?"
한우 기름이 위벽에 발라지면서 긴장의 끈을 살짝 풀었던 문철수는 이예지의 급습에 당황했다. 그러나 짬을 코로 먹은 게 아니어서 허둥대진 않았다.
"무슨 소리야? 상대 허락 구했는데. 일방적 통보 아니었다고."
"저녁에 일이 있다고 했는데, 중요한 일 아니면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압력 가하셨잖아요."
"그냥 해본 소리야. 중요한 일이면 거절하면 되지. 내가 그런 거 속에 두는 사람도 아니고."
"그건 이사님 사정이고요. 하급자 입장에선 그렇게 말하면 조상님 제사가 있어도 감히 거절 못 합니다."
"그래, 미안하다. 근데 사정 말하고 안 나오면 되지. 왜 너까지 나왔어?"
"이사님과 신 부장이 술 마시는 데 고기 굽고 술 따라줄 여자가 필요한 것 같아서요. 소연이는 곧 남자친구가 데리러 올 테니, 제가 소연이 대신 두 분 수발들게요."
문철수는 속에 열불이 터졌다. 상대가 여자만 아니라면 귀싸대기 하나 쳐올리고 싶었다. 신재오 역시 사사건건 자신에게 트집을 거는 이예지가 밉기는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민소연 대리의 카톡이 몇 번 울렸다. 카톡 내용을 확인한 민소연이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민소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문철수는 신재오를 툭툭 쳤다.
눈치 무디기가 도끼 등보다 더한 신재오는 뒤늦게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두를 꺾어 신고 벌써 고깃집 문을 나서는 민소연의 뒤를 허겁지겁 따랐다.
밖으로 나간 신재오는 민소연이 생각보다 멀리 가지 않은 걸 확인하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옷매무새를 조금 정리한 후 보폭을 키워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민소연 앞에 정확히 선 비싼 외제차를 보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잘 관리한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남자가 보조석으로 가고 민소연이 운전석에 앉고 차가 바로 출발했다. 신재오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다시 몸을 돌려 정처 없이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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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내가 데리러 간다고 해도 질색이더니, 오늘은 웬일이야?"
"그럴 일 있어. 오빤 신경 안 써도 돼."
"야, 야! 운전 조심히 해. 사장님 차 어렵게 빌린 거라고."
민정훈이 버럭 소리 지르자 민소연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차가 여동생보다 훨씬 귀하다 이거지?"
"또 남자 문제야?"
"오빠, 그렇게 말하면 내가 엄청 난잡한 여자로 보이잖아."
"그럼 어떻게 말해?"
"오빠 회사엔 나한테 어울릴만한 왕자님이 없어?"
"없어. 젤 괜찮은 애 셋 모두 네가 까버려서 내가 요즘 회사에서 눈치 보고 산다."
"그러게 왜 여동생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면서 자랑하냐고."
"나이 차이 하도 나서 군대 때 못 써먹었는데, 회사에서라도 덕 좀 보자."
"오빤 예전에 언니 보자마자 막 가슴이 뛰고 그랬어?"
"어. 지금도 잔소리 시작하면 혈압 오르고 뒷골이 막 땡기고 그래."
"난 왜 보면 심장이 뛰는 남자 없을까?"
"나 괜찮은 애 하나 아는데. 우리 회사 1년 다니다 그만뒀어."
"무슨 일 하는데?"
"너네 회사 게임 하는데 꽤 유명해. 게임에서 영어 이름 쓰는 거 같았는데."
"됐어. 나 게임 하는 남자 별로야."
"근데 게임 회사는 왜 취직했어?"
"돈 많이 주니까. 게다가 글로벌 기업이잖아. 동창들한테 자랑하기도 좋다고."
"이 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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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한 고양이 부뚜막 오른다고. 둘이 오늘 일 치르는 거 아냐?"
"그럴 일 없어요. 소연이 집 잘 들어갔다고 아까 카톡 왔어요."
"중요한 일 있다며? 근데 집 벌써 들어가?"
"중요한 일은 꼭 집 밖에서 벌어져야 하나요?"
말로는 이길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문철수는 신재오에게 전화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이거, 정말 수상한데? 둘이 눈 맞은 거 아냐?"
"남자들은 참 눈치가 없네요."
"뭐, 눈치 안 봐도 되니까. 약한 것들이나 눈치 보고 그러지."
그저 말로는 상대가 안 되는 걸 아는 문철수는 교묘하게 이예지를 자극했다.
"자, 건배해요."
능글능글한 문철수 상대로는 아무리 이겨도 이긴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를 삭이지 못한 이예지는 술로 문철수를 벌하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이예지는 미처 몰랐다. 야근과 결별하고 헬스로 건강을 되찾은 문철수가 예전처럼 소주 한 병에 쓰러지는 물렁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부장. 집 주소는 어딘가?"
"시발, 그거 알아 뭐 하려고?"
문철수는 고주망태가 된 이예지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회사에서 잠까지 해결하는 문철수여서 차도 끌고 나오지 않았다. 이예지는 뭉개진 발음으로 욕만 퍼부었다.
"이 부장, 회사로 갈 거야. 정신 좀 차려."
그러나 술이 한도를 초과한 이예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야, 문철수. 저기, 저기 가자."
이예지가 가리킨 곳은 모텔이었다.
"너 단단히 취했구나."
"나 토할 거야. 토할래. 빨리, 저기 가서 토하자."
욱욱 거리는 이예지의 모습에 모텔 주인이 거스름돈을 엄청 빠르게 내줬다.
"2층 계단 오르고 첫 방이요. 복도에 토하면 청소비 받아낼 거요."
유니콘 모든 남직원을 치 떨게 만든 마녀답게, 이예지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방까지 버텼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서 30년 만에 보는 이산가족이라도 되는 듯 변기를 부둥켜안았다.
'이거 동영상 찍어둬야 하는데.'
취기가 올라 깜빡깜빡하지만, 문철수는 정신을 완전히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 복도로 지나던 커플이 쿵 소리 나게 문을 닫아줬다.
정신이 문득 든 문철수는 빨리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예지가 이상한 소리 하면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는 상황임을 뒤늦게 알아챘다.
"야, 물. 물."
냉장고를 열어 생수 뚜껑을 따서 건넸다. 그리고 핸드폰 녹음을 켰다. 남자가 살기 참 팍팍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이예지를 부축했다.
입을 못 찾고 물을 절반 이상 흘려버린 이예지가 문철수의 넥타이를 꽉 잡았다.
"빙빙 도는 세상. 빙빙."
'시발, 가지가지 다 한다.'
그래도 혀는 마비가 풀렸는지 발음이 아까보다 뚜렷해졌다. 이예지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힌 문철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부장, 너무 취한 거 같으니까 여기서 푹 쉬어. 난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
"야, 나 혼자 모텔에 두고 어딜 도망가. 위험하게스리."
"집 주소 알려달라니까. 그럼 집까지 모셔다 줄게."
"내 집 주소 알아서 뭐 하려고? 왜? 곧 발렌타인데 쪼꼬리 얻어먹고 싶어서?"
"이 부장. 아무리 취해도 내가 직장 상사고 나이도 더 많아."
"내가 꼬추 달고 태어났음 지금 내가 이사고 네가 부장이야. 꼬추 덕에 이사하고 어디서 유세야?"
"제기랄. 내가 꼬추 떼도 너보단 낫다. 어디서 노처녀 히스테리야."
"인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말 같은 말 해라. 네가 한 말 다 녹취할 테니 내일 술 깨고 들어봐."
"불법 녹취는 불법이야."
생떼를 부리던 이예지는 프로 선수 못지않은 순발력으로 세 걸음 만에 화장실로 튀어갔다. 새끼손가락을 목구멍으로 넣는 이예지의 모습에 문철수는 눈을 감아버렸다.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지 미모로만 따지면 한국 지사에서도 3위 안에 드는 이 부장인데, 지금은 더러운 취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 물."
"시발,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냉장고에 하나 남은 생수를 따서 건넸다. 정신을 꽤 차렸는지 이번엔 입도 헹구고 머리카락에 묻은 토사물도 씻어버렸다.
"문철수, 너 법대 나왔잖아. 근데 왜 프로그래머 된 거야?"
"너 경찰이야? 갑자기 웬 취조야?"
"아니, 그렇잖아. 판검사 아니라도 변호사 돼서 대형 로펌 들어가면 훨씬 성공할 수 있었잖아. 왜 다 때려치고 프로그래머 됐냐고?"
"궁금할 것도 없다. 내 뒷조사는 언제 한 거야?"
"난 영업팀 도 부장이 경쟁적수라고 생각했는데, 네놈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사 자리 차지했어. 당분간 몇 년 안에 이사 자리 공석이 생길 일 없단 말이야. 네놈이 날 짓밟았어."
"야, 단어 선정 조심해. 난 네 꿈을 짓밟은 거야. 네가 아니고."
"네놈도 아는구나."
"아니, 네가 말하려던 뜻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냐."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날 마음대로 판단해."
"됐다. 갈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이예지는 어느새 가늘게 코를 골며 잠들었다.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성질만 빼면 민소연만큼 인기 있을 이예지였다. 더구나 늘 남자를 깔보며 도도하게 치켜뜨던 눈이 부드럽게 감기니 철모르는 해맑은 아기 같았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여자답게 신재오랑 동갑인데도 몸매가 이십 대 못지않았다.
'가겠다는 걸 만류하는 녹음도 있으니 뒤탈은 없는데.'
평소라면 피하기 급급했을 텐데, 술을 먹으니 이성이 알콜과 함께 휘발했다.
'아니야. 이대로 쭉 가면 죽을 때까지 회사에서 다 책임져줄 텐데. 괜히 실수해서 발목 잡히지 말자.'
문철수는 이예지가 안 떨어지게 침대 가운데로 밀고 이불을 덮어줬다. 이불로 꼭꼭 덮어놓으니 그제야 두근대던 심장이 느려졌다. 그러나 몸을 돌려 나가자니 발길이 안 떨어졌다.
'이러다 사고 치겠다.'
오줌이 마려웠지만, 바지를 내렸다간 큰일 날 것 같았다. 황급히 밖으로 나와 문을 닫은 문철수는 회사를 향해 달렸다.
'가서 땀 푹 내고 일이나 좀 하자. 머리 복잡할 땐 코드 짜는 게 최고지.'
가다가 오줌이 너무 마려워 포장마차 근처에서 오줌을 쌌다. 포장마차 안에 혼자 소주 마시는 남자가 있었다. 전화기를 잡고 우는 듯한 모습에 문철수도 마음이 짠했다. 앉은 자세가 딱 코드 짜는 공돌이였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화이팅 하십시오.'
뒤늦게 회사에 도착해서야 문철수는 전화기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모텔에서 녹음 기능을 켰으니 길 아니면 모텔에 떨군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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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샘으로 연결되자 신재오는 화를 버럭 냈다.
"젠장, 형도 날 버린 거야?"
가방을 고깃집에 두고 나왔다. 그걸 깜빡하고 포장마차에 들어가 혼자서 술을 진탕 마셨다. 다행히 핸드폰은 갖고 나와서 문철수에게 계산 좀 해달라고 전화했는데, 받지를 않았다.
"저, 신 부장님?"
"누구세요?"
"저 운영팀 박예화 사원입니다."
"아, 반가워요. 매일 아침 커피 고마웠어요. 내가 언젠가 밥 한 번 사야 하는데.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술 마시러 온 거예요? 혼자?"
"지나가다 부장님이 보여서 들어왔어요. 같이 한잔하실래요?"
민소연의 카톡을 받고 달려온 박예화는 자연스럽게 신재오 맞은편에 앉았다. 신재오를 찾느라 근처 술집을 다 뒤졌다. 그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재오가 눈치챌까 봐 무척 걱정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만약 신재오의 눈치와 도끼 등이 부딪친다면, 반드시 날카로운 도끼 등에 신재오의 눈치가 뚫릴 것이다. 풀 메이크업을 한 박예화가 지나가다 들렀다는 말을 신재오는 철석같이 믿었다.
신재오의 신세 한탄과 자기 자랑을 묵묵히 들어준 박예화는 고주망태가 된 신재오를 부축해서 포차를 떠났다.
"내일, 내가 돈지갑 찾으면 꼭 갚을게요."
횡설수설하는 신재오를 데리고 박예화는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이예지 옆방이었다. 민소연에게 미션 클리어라고 톡을 보낸 후 신재오를 침대에 눕혔다.
- 작가의말
뜬금포 2탄입니다.
물론 다들 눈치채셨겠죠? 신재오 같은 사람은 없을 거로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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