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가 재물을 품으면 죄다1
"네크로 님, 대장장이 유저 대푭니다."
"말씀하세요."
"광석을 정련하면 절반 이상이 철과 동인데요. 철은 무리더라도 동은 일부 대장장이들에게 할당할 수 없나요? 가격은 똑같이 치를 수 있습니다. 광석 정련만으로도 경험치 잘 올라가는데, 제작까지 하면 레벨업이 더 빠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작 숙련도도 올려야 하고요."
"동으로 어떤 템을 만들 수 있습니까?"
"동으로는 매직이 한곕니다. 대부분 노말템이고 가끔 운 좋으면 매직이 나오죠."
"제작한 템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잡화점에 넘기죠. 대륙에서 레어 템 이하는 다 잡템이니깐요."
잠깐 고민하던 네크로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하죠. 동을 무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대신 제작템 소유권은 길드가 갖겠습니다. 대장장이 유저들이 숙련도 올릴 수 있게 편의를 봐 드리는 거고, 매직템은 적당한 가격을 치르겠습니다."
대장장이 유저 대표는 싱글벙글 기쁜 표정으로 돌아갔다. 네크로도 언데드를 무장할 아이템을 싼 가격으로 해결할 수 있어서 이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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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우리 장기 퀘스트 못 하겠는데?"
한 달에 한 번, 현실 시간으론 열흘에 한 번씩 퀘스트가 생겼다.
"자격이 안 되는 놈들은 도시도 먹지 말고 광산도 먹지 말라는 거겠지. 다들 게임에 환상을 품는데, 자세히 살피면 게임이 훨씬 현실적이야. 꿈도 낭만도 없는 곳이라고."
"시약은 준비했어?"
"응. 우크들의 왕이 거인 좀비나 해골용 재료가 될지 누가 알아."
메탈 웜에 이어, 다른 곳으로 이주했던 우크 일족이 돌아오는 퀘스트가 생성되었다.
"언데드가 죽으면 템을 드랍해? 아니면 그냥 사라지는 거야?"
"멀쩡한 템은 드랍하고, 파손된 템은 사라져."
절반이 되는 언데드가 노말템으로 무장했다. 듀라한과 리치는 매직 위주로 아이템을 분배했고 돌쇠와 깜쇠는 레어로 도배했다.
"안익진."
기러기 무리를 흉내 낸 진형으로, 네크로 일행이 가장 앞장서고 강화 좀비와 해골 마법사가 가장 뒤에 섰다. 강한 첨병이 덤벼오는 적을 적절히 분산해서 뒤로 던져주는 진법이었다. 레어 등급에 속하는 엄청 비싼 진법으로, 약하고 숫자가 많은 상대에게 효과가 좋았다.
"우크왕이 엄청 세진 않겠지?"
지난번 일이 있고 진돗개는 생방송 중에 시청자 반응을 과하게 의식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과 대화했다.
"머리 둘짜리 오우거 정도 돼도 쉽게 잡을 수 있어."
"이번엔 템 좀 줬으면 좋겠다. 메탈 웜은 광물 한 무더기만 줬잖아."
"유니크 템 정도 값은 했어. 귀한 미스릴도 많았고."
퀘스트 시간이 되자 우크왕의 통솔을 받은 수천 마리 우크가 나타났다. 보통 우크 무리는 50마리 정도에서 기껏해야 200마린데, 우크왕의 부족은 4천이 넘었다.
"현피."
그리핀을 탄 현피가 마법탄과 대폭발 두 마법을 번갈아 쏟아냈다. 레전드 템 덕분에 마법 쿨타임이 더 줄어서 예전보다 같은 기간에 훨씬 많은 마법을 쏟아냈다.
약화 저주는 큰 도움이 안 되지만, 광폭화에 걸린 우크들 덕분에 몹들의 대열이 무너졌다. 우크들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철벽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신의 분노, 천벌, 도발."
세 스킬을 연거푸 퍼붓고 바로 후퇴했다. 도발에 걸린 우크들이 철벽을 따라가며 대열이 더 형편없이 무너졌다.
대열 가장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던 우크왕이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오우거보다 훨씬 큰데?"
키가 15미터 정도 되는 우크왕은 오른손에 커다란 몽둥이를 들었다. 몽둥이 끝에 삐죽삐죽 늑대 이빨을 닮은 뾰족한 가시들이 가득했다. 영화나 소설에서 엄청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사용된 적 없는 낭아봉이었다.
"파괴 광선, 파괴 광선, 파괴 광선."
현피의 깐죽이 성공했다. 우크의 왕도 종족 특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광폭화 저주에 걸려들었다.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낭아봉으로 주변 우크들을 박살 냈다.
우크왕이 멈춘 틈을 타서 철벽이 도발 스킬로 우크들을 끌어갔다. 야금야금 끌려가서 녹아버린 우크가 천에 육박했을 때에야, 몇 번의 광폭화를 떨쳐내고 우크왕이 네크로 일행 앞에 도착했다.
"총공격."
돌쇠와 깜쇠가 언데드들을 거느리고 앞으로 돌격했다. 어느새 범위 도발을 단일 도발로 바꾼 철벽이 우크왕을 잡아두었다.
"참수."
진돗개가 이교도 심판에 걸려 움직임을 멈춘 우크왕의 발목을 힘껏 벴다.
"영광일섬."
공간을 뛰어넘어 우크왕의 가슴에 어마어마한 일격을 먹인 동해는, 바닥에 거의 닿을 무렵 답공보를 펼쳐 안전하게 착지했다. 영광일섬을 심장에 맞은 우크왕은 여러 개 상태이상을 얻고 뒤로 쿵 쓰러졌다.
"성화."
성화 스킬로 방어력과 공격력을 높인 철벽이 뛰어가서 우크왕의 머리를 때렸다. 네크로 역시 신의 회초리로 우크왕의 관자놀이 부위를 집중하여 공격했다.
"참수."
우크의 목에 참수 스킬을 사용했지만, 머리가 잘리기는커녕 혈관 하나 베지 못했다.
"투심권. 심정지에 내출혈."
"제길. 역시 무인은 사기야."
생방송 중에 점잔을 떨던 진돗개가 간만에 '전사만 구려' 컨셉을 잡았다.
"제이크, 얼음 폭탄."
예전에 철벽이 폭발하는 줄 알고 깜빡 속았던 그 얼음 폭탄이 우크왕의 입에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강한 냉기가 퍼지며 우크왕이 혼절 상태이상에 걸렸다.
"원래 덩치가 크면 저주는 쉽게 걸려도 상태이상은 잘 안 걸리는데."
"이놈이 돌연변이라서 그렇겠지. 정상적인 우크가 아닐 거야."
얼음 폭탄이 목구멍을 얼려버리는 바람에 우크왕은 의식이 끊어졌다. 그 틈에 진돗개가 참수 스킬로 끝내 우크왕의 머리를 잘라냈다.
"동해랑 현피는 몸통 담당. 우리 셋은 머리 담당."
동해는 투심권으로 심장을 노리고 현피는 마법으로 여기저기 두드렸다. 네크로와 철벽은 양쪽 관자놀이를 하나씩 도맡아 두드렸고, 진돗개는 광전사 스킬을 펼치고 스킬이 아닌 '기술'로 참수를 펼쳤다.
아무 시련도 없이 우크왕을 간단하게 해치운 후, 여전히 후퇴를 모르는 우크를 학살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크를 학살할 때, 네크로는 우크왕의 사체를 이용해 죽음의 기사를 제작했다.
"아니, 15미터 크기인데도 거인 좀비 못 만들면, 얼마큼 큰 걸 잡아야 된다는 거야."
친화력 8을 넘겼기에 거인 좀비나 해골용도 만들 수 있었다.
돌쇠는 합체 이벤트로 얻었기에, 네크로로서는 최초로 죽음의 기사 제작에 도전하는 셈이었다. 시약을 다 바르고 주문을 또박또박 외웠다. 해골 기사를 만들 때와 달리 심장이 엄청 두근거렸다. 딱히 다를 것도 없는데, 왜 심장이 이렇게 쿵쿵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안식을 뿌리치고 다시 눈을 뜬 기사여."
천이 넘는 언데드와 수천 마리 우크가 난전을 벌이는 전장보다 죽음의 기사 제작 현장에 더 많은 시청자가 관심을 가졌다.
희미한 실루엣이 떠오르자 채팅창이 난리 났다. 심지어 네크로 본인마저도 입을 딱 벌릴 지경이었다.
'돌쇠가 잘못된 건가? 아님 이놈이 이상한가?'
뚜벅이 돌쇠와 달리 이번 죽음의 기사는 말을 타고 나타났다. 눈구멍이 푹 파여 아무것도 없고, 그저 코로 푸른 콧김을 뿜어내는 시커먼 말을 탔다.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다리도 굵고 갈기도 억세고 꼬리털도 풍성한 말이었다.
돌쇠와 마찬가지로 전신 갑옷으로 꽁꽁 감싼 죽음의 기사는, 자루가 4미터 정도 되고 날이 1미터 됨직한 창을 들었다. 금속으로 된 창이지만 광택이 전혀 없어 플라스틱으로 의심되는, 외관이 조금 볼품없는 무기였다.
"너는, 뚝쇠다."
말을 보니 마구간이 생각났고, 마구간 하니까 말뚝이 생각났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죽음의 기사에게 뚝쇠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뚝쇠는 말을 달려 전장으로 달려갔다. 우크들 사이를 민첩하게 헤집는 말도 그렇고, 다루기 불편해 보이는 창으로 우크들 목을 꼴 베듯 쉽게 잘라내는 뚝쇠도 그렇고. 기사들만 충분히 모아도 웬만한 보스몹은 쉽게 처리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형, 제이크 칼 뽑았어."
오랜만에 제이크가 칼을 뽑았다.
"반지일까 장갑일까?"
제이크의 칼이 닿은 곳은 우크왕의 손가락이었다. 뚝쇠를 제작하고 왼팔만 사라지지 않았다. 전투는 언데드들에게 맡기고 모조리 우크왕 주변에 몰렸다.
"반지, 유니크닷."
옵션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반지는 웬만하면 기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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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거인의 반지
분류 : 반지
등급 : 유일
능력 : 힘과 체력 대폭 상승
특별 : 5분간 거인으로 변신 - 쿨타임 3일
"이건 진돗개 아님 철벽 건데."
"나 줘봐."
반지를 착용한 진돗개가 '거인 변신' 스킬을 사용했다. 6미터 정도 크기로 변한 진돗개가 다시 광전사 스킬을 펼쳤다. 진돗개의 몸집이 순식간에 2미터 정도로 줄었다.
"철벽이 써. 광전사랑 같이 못 쓰는구나."
분노의 철퇴는 유니크 무기 중에서도 최하급에 속한다. 자신만 좋은 템이 없어서 속상했는데, 엄청 괜찮은 유니크 반지가 생기니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더 열심히 할게요."
"평소처럼 해. 닭살 돋으니까."
그 외에 우크들이 드랍한 아이템도 많았다. 대규모로 뭉쳐서 이곳저곳 꽤 돌아다닌 무리라는 설정에 걸맞게 일반 우크들보다 아이템을 훨씬 줬다. 노말과 매직은 언데드 용으로 남기고 레어 템은 경매장에 싸게 올렸다.
"형, 이대론 광산에 묶여 게임 제대로 못 할 것 같아."
"조각상 후속 퀘스트를 역천도 지금 못 받고 있대. 이거 기횐데."
조각상 다음 퀘스트는 '잊힌 신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었다. 드래곤 산맥에서 잊힌 신의 흔적 다섯 개를 찾아야 했다. 문제는 퀘스트 단서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시한부 퀘스트여서 함부로 받았다가 실패하면 커다란 페널티를 받는다.
이 퀘스트는 네크로가 역천보다 훨씬 유리했다. 감각계 도둑인 제이크는 늑대의 감각 덕분에 스킬 숙련도보다 훨씬 높은 위력을 보였다. 게다가 유저와 달리 제이크는 감각계 스킬 십수 개나 익히고 있었다.
감각계 도둑이 얼마 없고, 그 얼마 없는 감각계 중에서도 고수라 불릴 존재는 없었다.
"유니콘에 퀘스트 간격 늘려달라고 청원하자. 지배 길드들도 예전엔 현실로 한 달에 한 번 퀘스트 생겼는데 지금은 한 달에 세 번 생겨서 엄청 귀찮다고 불만이 많아."
"형, 이젠 지배 길드 WM밖에 없어."
"나라 세운다며?"
"여자의,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나라를 세우겠대."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런 정신 나간 여자가 천 명이나 된다니. 말세다."
"그렇게 간단한 일 아냐."
네크로가 셋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WM은 국가를 세울 정도 기틀이 없어. 중심 도시는 세금으로 투자금을 환수할 수 있지만, 피의 장벽과 남부 항구는 오히려 돈을 처넣어야 한다고. WM도 분명히 세 도시를 점령하고 나라를 만드는 게 손해라는 걸 알 거야. 더구나 대부분 주민 NPC가 대륙으로 넘어왔잖아. 중앙섬의 세금 수익이 확 줄었다고. 이번에 OB랑 PM이 해체한 핑계가 그거 아냐. 도시에 들어가는 투자금이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 없다고."
"형 말대로라면 WM은 왜 도시 셋 점령하고 나라 만들려는 거야?"
"이유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일 뒤에는 반드시 거대한 이익이 있어."
"형, 일본 유저들이 도시에 나타났어."
레전드 신문사의 뉴스를 훑어보던 동해가 소리쳤다.
"매일 물가를 체크해. 비록 직접 거래하진 못하지만, 저들이나 우리나 같은 시장 같은 잡화점 같은 시약 상점을 이용해. 저들이 물가나 여러 상황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을 순 없어."
일본 유저들의 진출은 물가를 비롯한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포탈 활성화 퀘스트를 완성하지 못해서 배 한 척을 타고 건너온 유저들 뿐이었다.
대신 현실 시간으로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방어전 퀘스트에서 일본 유저들의 광기를 제대로 확인했다. 성벽에 의지해 수비하는 게 아니라 밖으로 뛰쳐나가 백병전을 벌이길 좋아했다. 죽을 때까지 싸우고, 10분 뒤 부활한 후 장비 수리를 마치면 또 몹 무리로 돌진했다.
"왜 저런대?"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안전한 곳에 숨어서 싸우는 건 비겁한 행위래."
"게임을 게임대로 즐기는 건지, 게임에서 미치도록 진지한 건지 구분할 수 없구나."
"형, 근데 요즘 역천 길드 수상해."
"뭐가 수상한데?"
"길드원 벌써 800명이 됐어. 소리소문없이 말이야. 역천에서 길드원 모집한다는 소문이 돈 적도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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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비서. 이 계획 먹힐까?"
반형운은 어딘가 마음에 안 들었다. 반경운의 계책을 이용해 OB와 PM 그리고 그 하부 길드의 정예들을 흡수했다. 요즘 반경운이 맨날 술에 절어 산다는 말에 얼음을 품은 것처럼 가슴이 시원했다.
그러나 이번에 광산을 빼앗는 것을 목표로 세운 계획은 마음에 걸렸다. 계획서로만 봤을 땐 완벽한데,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큰 게 걸려서 내가 겁먹은 건가?'
"성공 가능성이나 명분이나 후폭풍 등 모두 고려하면 이만한 계획 없습니다."
최 비서는 부하들을 데리고 짠 계획의 성공을 자신했다. 반형운도 느낌만 안 좋은 거지 딱히 꼬투리 잡을 부분은 없었다.
"그 김혜영이라는 여자 잘 감시해. 가끔 전화해서 허튼 생각 못 하게 닦달하고."
"그리고 회장님이 일본에서 온 가미카제 길드원들 잘 보살피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반형운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뚜벅뚜벅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쪽 길드가 돈 얼마 퍼부었다고?"
"한화로 300억 퍼부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륙으로 300명밖에 못 보냈는가? 열등한 족속들이야."
"상무님, 회장님 귀에 들어가면 경을 칩니다."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은 반형운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예전에 은혜를 입은 건 나도 들어서 알아. 그런데 이미 갚을 만큼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해. 언제까지 허리 숙이며 머슴처럼 지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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