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하는 용암3
'드래곤 레어에서 훔친 골드를 벌써 반이나 탕진했다.'
물론 식량 사는 데만 써버린 건 아니었다. 꼭 필요하지만 재정 상태가 안 좋아서 미뤘던 사업들도 추진했다. 그땐 코볼트 먹여 살리느라 하루에 쌀 만 근씩 필요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코볼트들은 교대로 24시간 쉬지 않고 일했다. 이들이 길을 파는 속도는 힘없는 노인의 걸음보다 빨랐다.
"야마토 길드에서 식량 팔아달라고 한다고?"
"그래. 시장 가격보다 5% 비싸게. 그리고 비밀 지켜달래."
"거절해. 코볼트 1만6천이 곧 우리 식구가 될 거야. 게다가 역천이 언제 수작 부릴지 모르잖아. 곡물 수확량이 떨어질 걸 대비해야지."
야마토 길드의 요청을 별생각 없이 거절한 후 땅굴 파는 데 몰두했다. 하루에 최소 30킬로미터 이상 파는 코볼트이고, 네크로도 생각 못 한 점들을 고려해 동굴 벽을 단단하게 다졌다. 괜히 용암이 흐르는 중에 약한 곳이 터져서 샛길로 빠지면 퀘스트가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인간 NPC 대부분은 식량을 생산했다. 생산하면서 소모하고 소모하면서 생산하기에 실질적으로는 아주 적은 양의 식량을 먹어치우거나 오히려 남긴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코볼트는 소모만 하는 존재여서 숫자는 적어도 식량 비축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런 이유로 야마토 길드의 언뜻 보기에 정말 괜찮은 제안을 거절했는데, 야마토 길드는 오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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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샌 것 같습니다."
"우리 길드에 조센진에게 매수당할 사람이 있었는가?"
"우리 아니고 오신 길드나 한국 혹은 중국 길드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 길드는 역천 수하라는 얘기도 있던데."
"거짓말입니다. 한국이나 중국 여자들은 일본보다 더 심하게 남자를 싫어합니다. 다만, 큰 이익 앞에서 손잡을 가능성은 꽤 있습니다."
"다들 대책을 생각해."
"우리와 네크로의 관계를 이대로 유지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야. 국내 여론이 좋지 않아."
"차라리 국내 군소 길드에 도시를 넘길 걸 그랬습니다. 괜히 네크로나 초인동맹에 넘겨서 국내에서 질타받고 있습니다."
2인자 자리를 빼앗긴 남자가 앙심을 품고 성토했다.
"도시를 차지한 일본 길드가 가미카제 세력으로 편입하면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성 몇 개 가미카제에 넘기고 서부가 전장이 되는 게 욕 좀 먹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대머리가 비아냥거렸다. 일본 길드를 애초부터 배제한 건, 그 길드가 도시를 차지한 후 가미카제 쪽으로 넘어갈까 봐 겁나서였다. 넘어간 후 바로 성벽에 마나포를 설치하면 함락하는 데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
한국 길드와 중국 길드에 도시를 넘기고, 우르크에게도 도시를 빼앗기고. 중국 중소 세력에게 마을을 빼앗기고.
큰 그림을 그리느라 인내했던 시간이 높은 벽이 되어 야마토의 앞길을 막았다.
"가미카제도 한국 길드랑 손잡은 건 마찬가진데. 왜 우리만 갖고 지랄일까?"
"세력 비중을 보면 가미카제가 훨씬 강하게 보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미카제도 욕 안 먹는 건 아닙니다."
"그쪽은 왕의 혈통 못 얻었으니까 외국 길드랑 협력해도 이해한다는 분위기인가? 일본인들은 왕의 혈통을 얻고 일본인이 왕인 야마토가 완벽한 모습을 보이길 원하는 건가? 가미카제보단 우리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거겠지?"
누구도 길드장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비난 여론은 우리가 고구려를 쳐부수면 싹 사라질 거야. 고구려 수도를 함락하면 언론에서 우리가 한국이 세운 나라를 이겼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할 거야."
"가미카제에선 고구려가 아닌 WORLD가 순수 한국 길드의 나라라고 언플할 거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 우린 가미카제가 야마토 국에 들어오는 걸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할 거야. 그쪽에 재상 자리도 넘길 수 있다고 못 박을 테니까 언론은 걱정 안 해도 돼."
'게임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는데도 길드장 맡은 건 이런 이유구나.'
부족한 게임 지식 때문에 회의 때마다 설명하고 설득하느라 애먹었는데, 역시 자리를 덥히는 용도로 앉힌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고구려를 공격하는 건 예정대로 진행할 거고. 네크로 길드를 상대로 오신 길드 카드를 꺼내는 게 맞는지 고민해 봐."
"오신 길드는 세력이 5만 명밖에 안 됩니다. 평강 길드도 3만에서 4만 사이로 추정합니다. 맹강녀 길드 세력은 20만이나 되지만, 절반 이상이 삼대 세력에 중복 소속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론 10만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 10만은 아마 오신 길드나 평강 길드보다도 약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20만도 안 되는 오합지졸로 네크로 길드를 무너뜨릴 순 없어."
"네크로 길드는 NPC가 주축인 용병 길드를 장악했습니다. 의뢰 형식으로 일반 유저를 움직여 늘 일정 수준 이상의 전력을 유지합니다."
"게임 먼저 시작한 놈들이라 특혜를 많이 받고 있어."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유니콘의 제안을 대부분 부유 국가가 거절했습니다. 뇌물이 잘 통하는 한국 정부만 받아들였는데, 이런 차이가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별거 아닌 놈들인데, 늘 한둘이 문제야. 네크로도 그렇고 역천도 그렇고. 2년 정도 지나면 우리도 특별한 유저가 생길 것 같은데, 둘 다 머리 쓰고 상황을 잘 이용하는 놈들이라서 2년 안에 무너뜨릴 수 없는 세력을 이룰 것 같단 말이지."
역천에 대해선 대머리도 비슷한 평가였다. 그러나 네크로는 다르게 생각했다.
'네크로는 임기응변이 뛰어날 뿐, 멀리 보는 전략적 안목은 없다. 그게 아니면 전함을 팔지도 않았을 것이고 광산도 팔지 않았겠지.'
대머리는 네크로를 적절히 압박한 후 몰래 네크로의 탄광을 사들일 계획을 세웠다. 본가에서 네크로의 탄광을 사들일 수 있게 돕는다면, 사생아인 대머리를 가문에 정식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차후 야마토 세력의 일인자 자리도 노려볼 희망이 있다.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하려면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네크로가 뭔가 눈치챘다면 우리 수도나 도시를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성패를 떠나 네크로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하긴 합니다."
"좋아. 공성전에 소용없는 기마대를 남겨 만일을 대비하고, 그 미친년들을 충동질해서 네크로를 공격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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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 코볼트는 네크로가 로그아웃해도 일한다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알테르 회산에 도착하고 열흘 되는 날 이미 90%에 가까운 성과를 이뤄냈다.
"용암이 힘을 잃지 않으려면 깔때기 모양으로 만들어야 한다."
코볼트가 어떻게 깔때기를 아는지 궁금했지만, 아마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깔때기로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볼트들은 뒤로 돌아가면서 동굴을 다듬었다. 알테르 산 쪽의 동굴은 좁게, 용암을 끌어올 화산 쪽은 조금씩 더 넓게 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 10%를 정말 느린 속도로 완성했다. 동굴이 넓어져서 시원했던 가슴이 느려진 시공 속도에 갑갑해졌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완성에 다가갔다. 식사 때를 잊고 로그아웃 안 해서 전화 오는 일이 자주 생겼다. 마지막 10%를 완성하는 데 무려 열흘 시간이 걸렸다.
"이 벽을 부수면 용암이 들어온다. 우린 먼저 간다."
빨간 코 코볼트들이 정말 빠른 속도로 달렸다. 총 4백 킬로미터라고 하니, 아마 전속력으로 달려도 하루 걸릴 것 같았다. 네크로는 느긋하게 앉아서 제이크의 신호를 기다렸다.
- 용병 제이크가 공격받았습니다.
기다리던 신호가 끝내 왔다. 드래곤도 제이크의 은신술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이크가 자해하는 거로 신호 주기로 했다. 빨간 코 코볼트들이 전부 동굴을 벗어난 걸 확인한 제이크가 비수로 자신을 찔러 신호를 보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다만, 불멸의 미스릴 왕관을 미처 귀속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우연히 다른 이유로 죽어 투구를 드랍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추락 데미지로 유저가 죽는 것처럼, 충돌 데미지로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최고신이 그렇게 박하진 않겠지.'
심호흡을 한 네크로는 드워프의 보물로 벽을 때렸다. 수백 번 때리니 망치 머리를 감았던 태풍이 벽으로 옮겨갔다. 태풍이 사라지자 망치 머리가 바로 하얀 눈으로 덮였다. 네크로는 무기를 인벤토리로 집어넣었다.
태풍에 계속 흔들리던 벽이 끝내 무너졌다. 시뻘건 용암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네크로를 덮쳤다. 데미지는 전혀 안 들어왔지만, 더운 건 정말 더웠다. 얼음의 정령왕 축복 덕분에 추위와 더위를 잘 안 탄다고 했는데, 용암 온도는 추위나 더위 범주가 아니었다.
'입 벌리면 용암이 배에 들어갈까?'
튀어나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누르고 입을 꾹 다문 네크로는 용암의 급류에 휘말렸다. 네크로가 특별히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는데 가장 빠른 용암 속도가 시속 160킬로 정도가 된다고 했었다. 지금 네크로를 품고 달리는 용암은 체감으로 그보다 훨씬 빨랐다.
여긴 누구? 나는 어디? 빨간 건 하늘, 하얀 건 용암, 파란 건 구름.
두 시간 좀 더 되는 시간 용암에 쓸려 동굴 벽에 무수히 부딪혔다. 다행히 만약을 대비해 아이템을 물리 방어력으로 맞췄기에 용암이 아닌 물리 충돌 데미지로 죽는 불상사를 면했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용암에 둥둥 떠 있는 네크로를 제이크가 낚싯줄로 감아 끌어냈다.
네크로를 꺼낸 제이크는 다시 낚싯대를 휘둘렀다. 쭉 뻗어 나간 낚싯줄이 어떤 아이템을 감았다. 느긋하게 릴링해서 아이템을 끄집어낸 제이크가 열기 때문에 손대지 못하고 바로 네크로에게 넘겼다. 네크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템을 받아 습관적으로 인벤토리에 넣었다.
- 질주하는 용암을 얻었습니다.
- 퀘스트를 완성했습니다.
- 다음 목적지는 대륙 남부의 대륙섬, 분노의 대지입니다.
계속 머리가 멍했다. 2시간에 걸쳐 이해할 수 없는 정보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관계로 정신이 없었다. 진돗개가 자꾸 뭐라고 말을 거는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대답할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 용암이 차오르자 죽은 화산이라던 알테르가 심장이 뛰는 것처럼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록 밴드의 드럼 사운드를 닮은 박자에 맞춰 알테르 산 전체가 약동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메인 보컬이 감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클라이맥스를 정성 들여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불새들이 보글보글 끓는 용암에 뛰어들었다. 기대했던 치킨 냄새는 나지 않았다. 불새들은 싱싱해 보이는 용암에서 헤엄쳤다.
- 생명력 넘치는 신생아 화산의 기운을 받아 세 마리 불새가 불사조로 진화합니다.
- 불사조의 존재를 감지한 불의 드래곤 파르투티어가 접근합니다.
드래곤이라는 말에 네크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이크 숨어."
그러면서 불멸의 미스릴 왕관을 벗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정신이 채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수련자 세트를 장착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자기 할 일을 일단 마치고 보니, 붉은 코 코볼트들은 모조리 바닥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고, 불새와 세 마리 불사조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음, 생명력 넘치는 용암이군. 이 용암을 네가 만들었느냐?"
기초공사는 불새들이 해놓고 땅굴은 코볼트가 팠다. 네크로는 그저 숟가락을 얹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다만, 숟가락을 얹을 존재는 네크로밖에 없었다.
"마음에 든다. 상처 치료하기도 딱 좋군. 네게서 저 용암을 사겠다."
다른 드래곤들보다 인상이 엄청 흉악하다고 느꼈는데, 자세히 보니 몸 여기저기 비늘이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지고 난리가 났다.
"이건 대가다."
쿵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물체가 땅에 떨어졌다. 파르투티어보다 덩치가 반밖에 안 되는 작은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발톱의 길이나 굵기 그리고 특별히 날카로운 이빨을 보니 작다고 업신여길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변이 드래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물리력이 엄청 강한 특이종이다."
"꼬마가 뭘 좀 아는군. 드래곤의 수치로도 불리지. 아무 종족하고 교배해서 저급한 씨를 여기저기 뿌리는 멍청이기도 하고."
숙영지에서 봤던 드래곤의 피를 물려받았다던 전사가 갑자기 생각났다.
시체를 던져준 파르투티어는 용암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용암에 잠겨 몸의 상처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드러난 머리 비늘이 점점 밝은 빛을 뿜었다. 아무래도 치료 효과가 무척 좋은 것 같았다.
- 초보자를 위한 팁. 타이탄을 제작하십시오.
레벨이 낮던 시절에 가끔 초보자를 위한 팁이라고 정보를 준 적이 있었다.
'최고신, 고마워.'
드래곤의 뼈는 금속이다. 게다가 타이탄을 만드는 핵심 재료인 드래곤 심장 가루도 몸 안에 가루가 아닌 고체 상태로 존재했다.
"추종자 제작, 타이탄."
에르베제트를 잡으며 모은 진영기와 드래곤 산맥에서 몹 잡으면서 모은 영기가 소모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드래곤의 사체가 사라졌다. 비수를 꺼내 들고 호시탐탐 노리던 제이크가 낙담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드래곤 사체에 칼을 댈 영광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는데, 만질 틈도 안 주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돗개야, 무슨 일인데?"
"게임 안에서 잠잤어? 왜 대답 안 하는 거야?"
"나 지금 드래곤이랑 있어. 그러니까 짧게 말해."
"헐, 형도 참 대단하다. 또 얼음에 갇힌 건 아니지?"
"아냐. 무슨 문제 있냐니까?"
"일본의 오신이라는 세력하고 평강 길드 세력 그리고 중국에 맹강녀라는 것들이 손잡고 오아시스 공격했어."
"과거형이네?"
"오합지졸이라서 순식간에 해치웠지. 다미안이 개박살 냈어."
"좋은 구경 놓쳤구나."
"우리 생방송 했거든. 다시 보기로 구경해도 돼."
"음, 나 대충 보름은 되어야 돌아갈 것 같아. 그때 보자."
네크로는 코볼트들과 함께 땅굴로 이동했다. 몹과 전투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기에 느린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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