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먹다2
"다들 아이템 경매장에 올릴 때 익명으로 올려. 5% 수수료 아끼지 말고."
경매장 수수료를 없앤 대신, 익명일 때 2% 받던 걸 5%로 늘렸다.
"형, 너무 조심하는 거 아냐?"
성필이는 자장면을 후루룩 흡입해서 몇 번 씹어 꿀꺽 넘겼다.
"저번에 OB 하부 길드에서 길드 이름만 듣고 정보 조회하더라.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지만, 구성원이 넷이고 길드장이 전문 랭크의 만렙 전사라는 것까지 알더라니까."
"형, 우리끼리 서로 필요한 아이템 교환하는 건 어때?"
"나쁘진 않은데, 아직은 좋은 아이템 쓰지 마. PK 당해서 아이템 드랍하면 정말 기분 더럽거든. 그리고 진짜 필요한 아이템은 귀속 서비스 사용해. 아이템 수준에 따라 시스템이 알아서 가격 매길 거야. 해지하는 데 똑같은 비용 드니까 신중하게 결정하고. 내 유니크 두 개는 18만이야. 절대 도둑맞거나 드랍하지 않고, 내구도 0이 되어도 수리하면 쓸 수 있어. 오래 쓸 아이템이면 돈 안 아깝긴 해."
"이번에 형 덕분에 꿀 빨았잖아. 우리 상납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현성이 농담했다.
"성 상납은 정중히 거절한다."
"형. 깜빡이 좀 키자. 농담은 좋은데, 변화가 너무 격렬해."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났건만, 최근 광해의 변화는 '격렬'했다.
식사 끝내고 그릇들을 밖에 내놓았다. 바로 가상현실 기기에 들어가려는 성필이를 광해가 제지했다.
"밖에 나가 좀 걷자. 근접 캐는 몸이 불편하면 반응이 느려져서 타이밍을 못 맞춰. 그럼 전투 내내 손해 보거든. 나도 예전에 기기 부팅한 후 라면 만들어 먹고 바로 접속했는데, 소화 시키고 들어갔을 때보다 사냥 속도가 확실히 차이 나더라. 그리고 껌 하나씩 씹어. 껌 씹으면 소화 빨리 된다더라."
밑으로 내려가며 보니 60대로 늘린 PC에도 손님이 꽉 찼다.
"현성아, 보통 사람들이 게임 얼마나 오래 해?"
"보통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길게 해도 네 시간 못 넘더라. 머리 아파서 계속하기 힘들대."
"초반엔 다 그럴 거야. 나도 처음엔 머리 아파 혼났어. 저 형이랑 늑대왕 세트 모으는데, 로그아웃하고 싶은 걸 오기로 참았지. 저 형 네크로맨서 주제에 나보다 더 잘 뛰어다니는 거야. 그래서 이를 악물고 버텼고, 요즘은 게임 해도 머리 안 아파."
"난 하루에 6시간이 적당하대. 의사 말로도 너무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 되니까 적당히 하라고 그러더라."
지팡이에 익숙해져 일행의 빠른 걸음에도 뒤처지지 않게 된 동해가 말했다. 늦어도 두 달이면 지팡이 버리고 걸을 정도로 회복한다고 의사가 장담했다.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다시 피시방 꼭대기의 거주 공간에 돌아왔다.
"자, 시작부터 아주 좋아. 모두 이 게임으로 돈 벌어서 집 사고 차 사고 장가가자."
예전과 달리 광해가 나서서 모두를 격려했다. 정말 현실적인 구호를 끝으로 각자 기기에 몸을 눕혔다. 광해는 혼자서 스킬 숙련도 올리고 남은 셋은 몰려다니며 사냥했다. 광해와 달리 소환 네크를 선택한 현성은 하루에 3시간씩 게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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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레전드의 막무가내 이벤트에 유저들이 뿔났다.
근래 세계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 타이틀을 달고 승승장구하는 레전드의 거침없는 행보에 깊은 태클이 들어갔다. 그 이유는 바로 유니콘 사의 방만한 운영.
갑자기 늘어난 유저 규모로 교만해졌는지, 아니면 첫 이벤트였던 개미굴 이벤트로 재미를 보고 자신감이 팽창했는지. 유니콘 운영팀은 유저들의 현재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다소 미욱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설정상 대륙을 지배하는 우르크 제국의 전초부대가 중앙섬 외곽을 차지하고 있다. 남부의 극히 일부만 제외하면 인간 세력은 포위된 셈이다. 그런데 포위만 하고 있던 우르크들이 갑자기 인간 도시 중 세 도시를 공격했고, 현재 점령하고 있다. 반면, 모든 세력을 동원한 우르크들의 도시와 마을엔 병력이 전혀 줄지 않아 유저들의 원성을 샀다.
레전드 출시 첫날부터 게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했다는 WM 길드의 충성 유저 한 명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피의 장벽이나 남부 항구는 유저가 별로 없거든요. 둘 세금 합쳐도 저희 길드 절반도 안 돼요. 두 곳의 길드는 현질과 토벌 퀘스트로 부족한 골드를 보충받거든요. 이번에 셋 다 점령지를 잃었다지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 저희 WM 길드입니다. 아무래도 여성 길드가 1위 먹으니 운영팀이 불편했나 봅니다.]
└ 또야? 뭔 피해 의식이 ㄷㄷ해.
└ 레퍼토리 안 바뀌네. 원래 꿀 더 빨았으니까 피해도 큰 거겠지.
└ 능력으로 꿀 빤 게 왜요?
└ 아니지. 능력이 더 강해도 남들과 똑같이 빨아야지. 안 그럼 불평등 아닌가요?
└ 어차피 게임으로 돈 버는 건 극소수 재능충이야. 외국 회사에 현금 꼬박꼬박 갖다 바치는 매국노들아, 정신 좀 차려라.
└ 유니콘 한국 회사 아님?
└ 기자가 소설 썼네. 아무리 모자란 애라도 어떻게 저런 발언 하냐?
└ 하루도 빠짐없이 게임 했다잖아. 부모 등골 빼먹는 애면 충분히 저럴 수 있지.
└ 지금 남성들이 느끼는 역차별도 마찬가지죠. 늘 받던 혜택 못 받으니까 그게 차별로 인식되는 거예요. 서로서로 양보하며 삽시다.
└ 어떡하지? 운영팀 팀장 여잔데. 그것도 미혼의 여전사야.
반 실장은 기사 댓글을 읽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실장님, 왜 굳이 이런 식으로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고려신문은 믿고 거른다는 댓글이 계속 달리고 있습니다."
"거른다면서 왜 댓글 단대? 그냥 말뿐이야. 개돼지들은 늘 씹을 게 필요해. 그걸 잘 던져주는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런 댓글은 밑에 욕설 리플 잔뜩 단 다음 운영 규정 미준수로 함께 삭제하라고 했잖아."
"계속 분란만 일으키면 회장님 선에서 제재가 내려오지 않을까요?"
"제재? 지금 내가 데리고 있는 기자들 조회수가 다른 기자들보다 평균 30%나 더 높은데? 내가 친손자 아니라 원수놈 자식이라 해도 제재는 못 해. 이 신문사 회장님 거 같지? 아냐, 돈과 권력 것이야. 둘 합치면 뭐다? 자본이지."
커피잔을 코밑에 대고 향을 한참 음미한 후, 입에 조금 부어 넣었다. 커피는 아직 입에 머물러있고 향은 코끝에만 맴도는데, 반경운의 마음은 이미 취했다.
"공산주의가 예전에 어떤 거였는지 알아? 웃기게도 말이야. 공산주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러시아나 중국이나 북한 아냐. 그 맞은편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미국이지. 미국의 학자들이야말로 공산주의를 가장 철저하게 해부한 전문가들이라고."
"공산주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급진 사상들 핵심이 뭔지 알아? 편 가르기야. 공산주의는 편을 어떻게 갈랐느냐면, 무산계급과 자본가로 갈랐어. 쉽게 말하면 돈 없는 놈과 돈 많은 놈. 무산계급은 거지 말하는 거 아냐. 생산 수단이 없는 존재를 일컫는 거지. 소작농은 생산 수단이 없어. 땅이 지주 것이니까. 노동자 마찬가지야. 공장 시설은 공장주 거니까. 목장에서 일하는 놈들도 마찬가지지. 남을 위해 일해주거나,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들을 무산계급이라고 묶어놓은 거야."
"그래놓고 말하지. 너흰 잘못이 없다. 너희가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건 너희 탓이 아니다. 다 사회 탓이고 돈 많은 놈들 탓이다. 너희도 땅 있고 생산 설비 갖추고 자기 목장 있으면 저 부자들처럼 잘살 수 있다."
"부자들은 왜 잘 사냐? 그건 너희가 일한 성과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너희는 일한 것만큼 받지 못했다. 너희가 일한 것 대부분은 부자가 가져다가 호의호식한다. 너희는 멍청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이 모든 건 자본주의 잘못일 뿐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뒤엎자."
"그래서 자본주의 뒤엎은 나라들 어떻게 됐어? 미국도 초반엔 엄청 공산주의 경계했지만, 결국 시간이 증명했지. 공산주의는 다들 똑같이 잘살자고 주장한 게 아니라, 잘사는 놈 없애서 다들 똑같이 못살자고 주장했던 거야."
"지금도 똑같아. 딱히 여자들뿐 아니야. 서민 계층도 마찬가지지. 자기들 수준을 끌어올려 중산층이 되려는 생각보다, 재벌이나 중산층 끌어내려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려 발악하고 있어. 여자들도 남자들이 누리는 걸 똑같이 누리기 힘들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 이 사회의 재부는 유한하니까. 그러니까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것뿐이야."
남은 커피를 후룩 다 마셔버린 반경운은, 조금 쓴 맛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수컷들은 잘 뭉치지 못해. 자신들을 강자고 맹수라고 착각하지. 대부분 약자인 주제에 말이야. 그러나 이젠 본능적으로 안 거야. 똑똑해서가 아니라 실감 나게 점점 조여오니까."
"공산주의의 망령이 머리를 한 번 더 쳐든 거지. 핵심은 편 가르기야. 서민이라는 그룹을 남자 여자로 갈라버려야 해. 잘 가르는 놈이 쓸모 있는 놈이고 능력 있는 놈이야. 정치하는 놈은 어차피 다 똑같아. 야당이든 여당이든, 편 잘 가르는 놈을 찾아 부탁하게 되어있어."
반 실장의 말에 최 비서는 얼어붙었다. 뛰어난 견식이나 남다른 시선보다는, 말투에 박혀있는 악의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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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소문 들었어? 삼대 길드가 손잡고 우르크 몰아내려고 한대."
게임 안 하는 시간엔 레전드 게시판에서 살다시피 하는 동해가 말했다. 모두 스테이크 썰던 손을 멈췄다.
"불가능. WM과 OB는 그냥 한국과 일본이라고 보면 돼. 저들이 찍은 야동 봐주는 게 한계야. 그 이상은 절대 무리지."
성필이가 동해 말에 바로 반박했다.
"가능성 없는 거 아냐. 지배 길드가 퀘스트 실패하면 한 달 동안 '반란군'이 되어 모든 마을과 도시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 알지?"
성필이만 고개를 끄덕였다. 동해나 현성은 이런 세세한 부분을 알지 못한다.
"지배 길드가 도시 빼앗기면 길드 명성이 떨어져. 탈환하면 일부 복구할 수 있지만, 기간이 길어질수록 복구량이 줄어. 도시 3개 차지하면 왕국을 세울 수 있거든. 그때 명성 최저치 기준이 있어."
"중앙섬에 도시 열 개 넘잖아. 그런데 왜 누구도 왕국을 세우지 않았어?"
"도시는 게임 설정으로 달마다 들어가는 투자금이 있어. 세금이 부족하면 지배 길드가 감당해야 해. 도시 세 개 먹여 살리기엔 레전드 유저 숫자가 부족했지. 유저가 많아진 요즘이라면 가능할 것 같긴 하다. 다만 두어 달 유저들이 성장하길 기다려야지."
"솔직히 중심 도시 빼면 OB나 PM은 손해 아냐? 둘 다 유저 별로 없잖아."
"그렇긴 한데. 뭔가 떡고물이 있으니까 붙잡고 있는 거겠지. 200명 규모 길드를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우리 오아시스 먹을까? 어차피 길드 하우스 가진 건 우리밖에 없잖아."
"개미굴 때문에 노리는 놈들 많아졌어. 우리 넷이서 뭘 어떻게 한다고."
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다시 칼질을 이어갔다. 현성이가 우겨서 온 레스토랑은 가격 비싼 거 빼면 흠잡을 데 없었다.
"2차로 치킨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성필이는 비싼 가격 때문에 일 인분만 시켜서 배가 덜 찼는지, 치킨 뜯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치킨 먹으면 맥주 마셔야 하잖아. 맥주 마시면 나 운전 못 하는데."
"형, 내가 할게. 나 운전 경력 1년이야."
그렇게 레스토랑을 나와서 맛있다고 소문난 치킨집에 갔다. 동해에겐 주스를 시켜주고 셋은 생맥주 한 컵씩 주문했다.
"근데 형, 아무리 생각해봐도 WM이랑 OB가 하하 호호 손잡고 우르크랑 싸우는 그림이 연상되지 않아."
"PM이 중간자 역할을 잘해주면 되지 않을까?"
"글쎄다. 내 생각에 현재 손해가 가장 큰 길드는 WM이야. 셋이 연합하면 WM이 가장 많이 양보해야 하는데, WM 길드장이 말이 안 통하는 여자야."
"나도 소문 들었어. 상대 싸대기 하나 때리려고 볼기 석 대 맞아줄 정도로 깡다구가 있는 여자라고 소문이 자자해."
"우리 맨날 외식하고 중국집 시키고 라면 먹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
닭 다리 하나 잡고 맛있게 우물거리던 성필이가 말했다.
"집밥이 그립긴 한데, 밥할 줄 아는 사람 둘 다 게임 폐인이라서."
현성이 말에 광해와 성필은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뗐다. 광해는 혼자 살면서 정말 괜찮은 수준으로 요리할 수 있고, 성필이는 중학생 때부터 가게 일을 도우며 요리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형, 게시판에 익명 글 떴어. 삼대 길드가 만나서 담판한대."
배가 일찍 불러서 닭 다리 대신 스마트폰을 잡고 있던 동해가 말했다.
"다급하긴 다급했나 보다. 그런데 쉽게 합의점을 찾기 힘들 텐데."
"형, 우리 거기 가자. 개미굴. 삼대 길드 사라지면 거기 텅 빌 거 아냐."
삼대길드는 협약을 맺고 공평하게 한 길드가 하루씩 개미굴 던전을 차지하기로 했다. 보스몹 레이드 시간은 점심 12시 전으로 정했다. 12시가 되어도 보스몹이 없으면 그날은 아예 레이드 안 하는 거로 협의했다. 레이드 시간이 불규칙적이면 서로 힘들기에, 세 길드 모두 거기에 동의했다.
"거기 정말 좋은 곳이긴 해. 전투가 끊이지 않아 경험치 걱정 없고 스킬 숙련도 쑥쑥 오르지. 게다가 보물 방 함정만 제거하면 아이템이나 광석도 쉽게 얻을 수 있어."
"제발 셋이 연합해서 도시 공략하는 데만 신경 썼으면 좋겠다. 중간에 두어 번 실패도 하고."
"그런데 우리 보스몹 잡을 수 있을까? 삼대 길드도 가끔 실패한다잖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치킨은 뼈만 남고 맥주컵도 거품만 남았다.
"보스몹 잡을 수 있어. 나 혼자라도 승산이 큰 편인데, 너희 셋 도움까지 받으면 100% 장담할 수 있어."
동해가 운전하는 차로 돌아가며 광해가 말했다.
"형, 그럼 우리 아이템도 좀 맞춰야 하는 거 아냐?"
"잘 팔리지 않는 레어들 있잖아. 그거 착용하면 돼. 어차피 유니크 아니면 큰 도움도 안 돼."
- 작가의말
공산주의에 관한 관점은 반경운이라는 재벌 3세 입장으로 한 번 필터링 했습니다. 부를 이미 거머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싶어 각색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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