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린 김에 절1
리자드는 종족형 몬스터다. 지능도 높은 편이고 리자드끼리 모여서 마을을 형성해 주술사를 우두머리로 삼고 살아갔다.
몬스터로 분류되는 건, 인간이나 우르크와 달리 도시 혹은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 이들은 최대로 마을 단위로밖에 뭉치지 못했다. 같은 리자드라도 영역에 침범하면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은 아이템을 제작하지 못했다. 유니크 아이템까지 만드는 인간이나 우르크와 달리, 리자드는 매직 아이템도 만들 줄 몰랐다.
"주술사 죽으면 다 도망간다. 다른 마을 가서 노예 된다."
유치원 졸업장도 없는 12세 제이크는, 몬스터에 관해선 박사 학위를 줘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쉽네. 마을 중심으로 쳐들어가서 주술사만 빠르게 죽이면 끝 아냐."
"다행이다. 열흘 안에 다 끝내려면 아예 못 쉴 줄 알았는데."
"나 간다."
진돗개가 홀로 리자드 마을에 뛰어들었다. 암컷 수컷 늙은이 새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진돗개에게 몰려왔다. 파충류로 분류하는 리자드는 나이가 많을수록 덩치가 크고 힘이 세졌다. 그리고 암컷이 수컷보다 덩치도 컸다.
새끼들이 상대적으로 약하긴 한데, 알에서 나와 3달이면 기본 발육이 끝났다. 그래서 덩치와 힘이 조금 부족할 뿐, 전투 기술은 전혀 어설프지 않았다.
"동해야. 네가 다 해야 한다."
마법사라면 강한 한방이라도 있는데, 네크로맨서인 현피와 네크로는 일반 사냥엔 괜찮은데 보스전에선 결정타가 없었다. 물론 자폭이라는 수단이 있긴 한데, 그건 24시간에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패왕의 권위 덕분에 네크로는 쿨타임이 줄어 더 자주 쓸 수 있긴 하지만, 그래봤자 닷새에 한 번 더 쓰는 정도였다.
리자드 주술사는 일반 리자드와 달리 몸집이 무척 푸짐했다. 날렵하게 생긴 일반 리자드와 달리 둔한 듯 보였지만, 파충류 특유의 순발력은 그대로였다.
"현피야, 듀라한 소환해."
주술사는 마법 저항이 높아서 리치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동해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려면 근접 캐가 필요했다.
"나 언제 친화력 6 될 수 있는 거야. 빨리 죽음의 기사랑 해골 기사 소환하고 싶다."
해골 기사는 마검사다. 근접전을 벌이며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소환수로, 리자드 주술사처럼 마법 저항이 높고 근접전도 어느 정도 되는 몹과 싸울 때 유용하다.
돌쇠와 듀라한 그리고 네크로까지 셋이서 리자드와 근접해서 싸웠다. 리자드 주술사는 전투 기술이 평범하지만, 빠른 순발력으로 셋의 협공을 어찌어찌 막아냈다.
"야, 듀라한. 자꾸 타이밍을 못 맞춰."
소환몹이라 머리가 둔한 듀라한이 돌쇠와 네크로의 속도와 리듬을 맞추지 못했다.
"동해야."
운이다. 네크로의 지팡이가 리자드의 귀 부위를 때렸다. 운 좋게 '균형 상실' 상태이상이 터졌다.
"투심권."
리자드는 심장이 두 개다. 게다가 심장이 터져도 잘 죽지 않는다. 심장 둘 다 뽑아내도 몇 분은 살 수 있는 게 리자드였다. 그래서 동해는 투심권을 머리에 썼다.
"뇌진탕."
네크로가 가까이 접근해 다리를 걸었다. 무기로 때리거나 주먹으로 타격하는 건 공격으로 쳐주지만, 네크로맨서라서 발차기나 밭걸이는 공격으로 안 쳐줬다.
주술사의 육중한 몸집이 단단한 나무 바닥에 세게 처박혔지만 데미지 1도 안 들어갔다.
"돌쇠."
돌쇠가 검을 주술사의 명치에 박아넣었다. 검 손잡이를 잡고 주술사의 발버둥에도 검이 안 빠지게 꾹 눌렀다.
"투심권."
쿨타임이 돌아오자 동해가 주술사 머리를 때렸다.
"두개골 파열. 첨 봐."
네크로는 지팡이로 주술사 머리를 마구 후려쳤다. 단단하고 반질거리는 비늘 때문에 타격이 자꾸 빗나갔다.
"넌 괜찮아? 난 지팡이가 자꾸 빗나가서 데미지가 안 나와."
"투심권만 괜찮아. 일반 공격이랑 용풍권도 데미지가 잘 안 들어가."
"투심권."
세 번째에 일기관통이 터져서 주술사가 즉사했다. 제이크가 어느새 나타나 주술사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와, 대가리는 수박만 한데 두개골은 왜 주먹 크기야?"
"두개골을 감싼 근육과 가죽 그리고 비늘이 이렇게 두꺼우니까 타격이 안 들어가지."
"야, 담부터 역할 바꾸자. 동해가 유인하고 내가 주술사 해치울게. 리자드는 찌르는 공격에 무척 취약해."
진돗개는 관통 옵션이 달린 레어 단창이 있었다. 전체 길이가 120센티 정도 되는 통짜 금속으로 만든 창으로, 내구도도 레어 치고는 높은 편이었다. 더구나 찌르기 공격 위주로 펼치기에 내구도도 잘 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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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드 주술사의 두개골은 하루도 안 걸렸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이동을 방해하는 몬스터도 없고, 늪지도 오리발을 닮은 노말템 덕분에 80%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마을을 털어 찾아낸 금속은 용병왕에게 줘서 포인트를 얻었다. 공적치와 별도이고, 포인트를 소모해 아이템으로 바꾼다. 이미 감정이 끝난 아이템들이어서 고르기도 편했다. 포인트 좀 더 모아서 현피에게 천 방어구를 해주기로 하고 와이번 둥지로 향했다.
"와이번 사냥은 미끼가 필요하다. 와이번 새대가리다."
와이번은 절벽에 둥지를 틀고 생활했다. 수컷은 밖으로 사냥하러 다니고 암컷만 둥지를 지켰다. 침입자가 생기면 수컷들이 바로 돌아오고, 암컷들은 수컷이 다 죽어야 둥지를 버리고 침입자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걸 보면 와이번 암컷들은 둥지 버리고 바로 내려온다."
소모용 매직 아이템, '다친 새끼 와이번'.
마법과 주술의 결합품. 왕족을 모시는 마법사들과 주술을 사용하는 용병들의 합작품으로, 4D 영화로 생각하면 된다.
환영 마법으로 상처 입은 새끼 와이번 영상을 만들고, 주술로 그걸 실제와 구분할 수 없도록 위장했다. 아이템에 내장된 마나가 사라지면 그냥 버려야 하는 일회용이기에 은행 없는 네크로 일행에겐 꽤 큰 지출이었다.
아이템을 활성화하자 둥지를 지키던 와이번이 내려왔다.
"가장 최근에 새끼 잃은 와이번이 내려온다."
게임이어서 여러 암컷이 자기 새낀 줄 알고 함께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단번에 끝내야 해. 안 그럼 와이번 무리를 상대해야 한다고."
"사냥꾼 있어서 올가미로 잡아두고 '저격 화살' 쏘면 끝인데."
진돗개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유니크 투구 아니었으면 지금도 다른 직업 키울까 고민했을 정도로 진돗개는 전사 캐릭에 불만이 꽤 많았다.
첫 타는 대부분 상황에서 그렇듯 네크로가 맡았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제대로 못 보는 와이번의 특성을 이용해 가만히 미끼 주변에 있다가 와이번의 목을 후려쳤다.
"약한 어지러움."
네크로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동해가 움직였다. 회피 능력이 떨어진 와이번의 머리에 투심권을 먹였다. 만약 출혈과 같은 상태이상이면 심장 부위를 공격하기로 미리 정했다. 덩치보다 머리가 작고 목 근육이 발달했다. 평범한 컨트롤로는 머리를 맞추기조차 힘들었다.
진돗개가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와이번 목을 힘껏 내리쳤다. 절삭 옵션이 발동해 와이번 목이 싹둑 잘렸다. 그러나 끝났다고 방심하는 멍청이는 하나도 없었다.
네크로가 지팡이로 바닥에 떨어진 와이번 머리를 현피가 있는 방향으로 쳐냈다. 현피가 불러낸 강화 좀비와 네크로가 리자드로 만든 해골 전사들이 와이번 머리를 공격했다.
"투심권."
머리가 사라져서 전반적인 능력이나 반응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 와이번의 심장 부위에 동해가 투심권을 사용했다. 돌쇠는 이미 와이번의 다리 하나를 뼈가 보일 정도로 검으로 찍고 있었다.
"심정지가 안 터져."
타격은 정확히 들어갔다.
"무인은 비늘이 난 상대에게 좀 약한 것 같다. 오우거한테는 잘 터졌잖아."
진돗개가 어느새 창으로 바꾼 후 신중하게 와이번 가슴에 꽂았다. 관통이 발동해 창이 와이번의 심장에 푹 박혔다.
"심장 파열, 내부 출혈."
"현피야, 얼마 걸렸어?"
"총 19초. 우리 너무 대단한 거 아냐?"
"사냥꾼이면 올가미 설치한 후 저격 화살 10초면 끝이야. 혼자서 12초 정도에 끝장냈겠지."
"너 사냥꾼 하면 또 도둑이 좋다고 할 거고, 도둑 하면 또 무인 좋다고 할 거고."
현피의 핀잔에 진돗개가 웃었다.
"히든직업 같은 거 없나? 너무 잘 만든 게임이라서 그런 거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네크로맨서치고 너무 잘 싸우고 힘세고 안 죽고 민첩도 높은 네크로가 곁에 있는데도, 진돗개는 일말의 의심이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와이번을 유인하는 과정에 파탄이 생겼다. 네크로와 동해 모두 상태이상을 유발하지 못했고 진돗개마저 목 자르는 데 실패했다. 와이번이 큰소리로 수컷을 불렀다.
"다행이다. 수컷이 암컷보다 덩치가 작아서."
"힘도 더 약해. 근데 전투 기술은 우위야."
"와, 다들 여유 넘치네. 나만 개고생. 전사라서 당했다."
난전에 불리한 네크로와 동해, 일대일에도 불리한 현피는 전투 현장에서 조금 떨어졌다. 외침 스킬을 연거푸 사용해서 수컷들의 어그로를 끈 진돗개가 고군분투했다. 충분한 어그로를 끌면 그때 네크로와 동해가 한 마리씩 해치우는 게 현재 전략이었다.
생기 회복 : 적에게 준 데미지 일부만큼 생명력 회복.
무구는 나의 벗 : 아이템 성능 이상의 효과를 얻음.
게다가 적이 많고 강할수록 버프가 커지는 '쌈닭' 패시브도 있었다. 거기에 네크로의 성기사 오라 스킬 버프까지 합쳐져서 전사인 진돗개가 탱커 역할을 하게 되었다.
"파멸의 돌풍."
"안 되겠다. 버티기 힘든가 보다."
파멸의 돌풍은 공격력도 강하지만, 회피율을 무척 올려줬다. 진돗개가 파멸의 돌풍을 사용했다는 건 피통이 꽤 줄어서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전장에 뛰어든 네크로는 지팡이로 와이번 머리를 두드렸다. 파멸의 돌풍은 적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거기에 버티는 데 여념 없던 와이번은 미처 네크로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머리를 맞았다.
"투심권."
동해가 바닥에 떨어진 와이번 머리에 투심권 하나 먹인 후 전장의 중심으로 뛰어갔다.
"조금만 버텨줘. 생명력 회복하면 바로 교대해줄게."
진돗개가 물약을 빨면서 밖으로 도망갔다. 진돗개를 쫓으려는 와이번들을 동해가 잡아뒀다.
"용풍권."
데미지 자체는 강하지 않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며 무작위로 다수를 공격하는 스킬에 진돗개에게 딱히 큰 피해를 보지 않은 와이번들이 공격 목표를 동해로 바꿨다.
"창 박아."
진돗개는 순식간에 무기를 창으로 바꾼 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와이번 목에 창을 박았다. 네크로는 진돗개가 박은 창을 지팡이로 두드려서 못 박듯이 조금씩 땅으로 박아넣었다.
창으로 와이번 머리를 고정한 네크로는 머리와 목 연결 부위를 힘껏 두들겼다. 펑 소리와 함께 와이번 머리가 터지며 즉사했다.
"뭐야 형?"
"혈관 파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
"돗형."
진돗개가 외침 스킬을 펼친 후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해가 얼마 안 남은 내공으로 답공보를 펼쳐 도망 나왔다. 관성의 영향을 안 받는다는 건 어마어마한 혜택이었다. 다만, 관성에 익숙한 유저가 답공보에 적응하는 데 꽤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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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와이번 눈알 몇 개야?"
"17개. 와이번 둥지 몇 개만 더 털면 퀘스트는 끝낼 수 있어."
네크로와 현피가 자폭 한 번씩 사용했고, 진돗개와 동해도 몇 번이나 죽었다.
"원래는 암컷들만 유인해 죽여서 눈알 얻는 게 목적이었는데. 어쩌다 둥지를 통째로 털어버리게 되었네."
진돗개와 동해만 대화를 나눴고, 현피는 절벽을 타고 와이번 둥지를 터는 네크로와 제이크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나, 형이랑 대학도 같고 과도 같은데. 게다가 둘 다 네크로맨서고, 스킬도 두 개 제외하면 똑같은데."
"근데?"
"왜 형은 절벽을 타고 난 안될까?"
현피는 다른 것보다 네크로가 맨손으로 절벽 타는 게 세상 부러웠다.
"힘이랑 민첩 스텟이 조화로워야 해. 오우거를 봐. 힘이 세고 민첩 낮으면 균형이 개판이지? 근데 힘도 낮고 민첩도 낮은 우크는 균형 능력이 나쁘지 않잖아."
"나 힘 3에 민첩 2인데. 이 정도면 되게 조화로운 거 아냐?"
"잠깐, 난 힘 5에 민첩 5인데, 왜 절벽 못 탈까?"
네크로의 다단계 파트너 0순위 진돗개도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형은 축구부 에이스였어. 기술과 신체를 겸비한 공격수였단 말이야. 원래부터 운동 능력이 좋아서 절벽을 잘 타는 거 아닐까?"
"운동 신경이 좋아서 게임 캐릭터를 우리보다 훨씬 잘 컨트롤한다는 말이지?"
"그 해석밖에 없어. 내가 네크로 형보다 게임 먼저 시작했거든. 내가 40레벨 때 네크로 형이 30레벨 조금 넘었어. 게다가 난 전사고 형은 네크로맨서야. 내가 힘이나 민첩이 부족해서 절벽 못 탄다는 건 말이 안 돼."
네크로는 '와이번 둥지'로 불리는 와이번 사냥터에서, 80도 이상 경사를 자랑하는 절벽을 타며 와이번 알을 찾아 인벤토리로 넣었다. 제이크는 평범한 돌과 전혀 구분할 수 없는 화염석을 모아서 네크로에게 갖다 주는 역할을 맡았다.
"네크로 형 혹시 그거 아닐까? 히든직업. 개발자들이 누구도 얻지 못하겠지 이러면서 재미 삼아 만든 걸 얻었을 수 있잖아."
"그럴듯해. 원래 근접 캐릭 키웠다고 했거든. 갑자기 다들 안 하는 제작 네크 키운 걸 보면, 단서를 얻고 캐릭을 새로 키운 게 틀림없어."
그때 네크로가 절벽을 타고 빠르게 내려왔다.
"야, 인벤토리 꽉 찼다. 빨리 와서 와이번 알이랑 화염석 받아가."
은행이 없어서 그간 얻은 유니크와 레어 아이템을 전부 인벤토리에 뒀다. 감정 안 한 아이템은 겹칠 수 없기에 꽤 많은 공간을 차지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야겠다. 위에 알이랑 화염석 아직도 엄청 많아."
인벤토리를 꽉 채운 진돗개와 동해가 일단 도시로 다녀오기로 했다.
"야, 오늘은 여기 알 다 털고 쉬자. 절벽 타는 거 피로도 장난 아니야."
현실에서 느껴본 적 없는 생생하면서도 생소한 경험 탓에 네크로도 버티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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