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먹다1
"미안하다. 이사는 너희가 좀 고생해줘. 나 지금 에픽 퀘스트 가장 중요한 고비야."
이사를 셋에게 맡기고 광해는 먼저 피시방에 갔다. 미리 비워둔 기기에 누운 후 방음 버튼을 눌렀다. 네크로의 대화가 가상현실 기기 밖으로 전해지지 않도록 보호막이 쳐졌다.
"약속 시각에 맞춰 왔군. 귀족들의 귀감이 되는 행동이야."
우르크들은 농사와 수렵과 채집으로 식량을 장만한다. 농사보단 수렵과 채집의 비중이 훨씬 크고, 수렵과 채집에 어업은 없었다. 그래서 우륵하이의 부두는 관리를 받지 못해 무척이나 황폐한 모습이었다.
한껏 차려입고 코쿤 공작을 마중하러 나온 일행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시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돌쇠는 대기 명령을 내려 여관방에 두고 왔다. 부두에는 네크로와 집정관, 그리고 집정관의 친위대 열여섯만 있었다.
말없이 기다리니 멀리에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거의 항공모함 크기의 전함이었다. 우르크들의 생활 수준을 보면 저게 가능할까 싶기도 했지만, 게임이기에 그러려니 이해했다.
"제국 최강의 전함 '저항의 외침'이다. 우크로는 처음 보지? 송곳니 보면 중앙섬에서 태어난 것 같으니까."
우르크들은 송곳니 길이로 나이를 가늠했다.
네크로는 우륵하이로 향하다 만난 첫 우르크 마을에서 본 우르크의 외양을 따라 했다. 하필이면 어린 우르크를 따라 해서 송곳니가 짧았다.
배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부두에 정박했다.
"배에 올라가서 코쿤 공작에게 인사하자."
짐을 내리려고 설치한 널빤지를 통해 배에 올랐다. 기다란 송곳니를 자랑하는 코쿤 공작이 운동장처럼 넓은 갑판에서 일행을 맞이했다.
"제국의 샛별이자 우륵하이의 수호자 게룬 백작 아닌가. 젊은 나이에 제국을 위해 만리타향에서 헌신하니, 그야말로 귀족들의 귀감 아니겠는가."
"제국의 기둥인 공작이 훨씬 대단하다. 위험한 바다를 헤치고 중앙섬까지 온 그 용기에 거듭 찬사를 보낸다. 여긴 우륵하이 무투장에서 63연승 기록을 세운 우크로 백작이다. 나이 어리다고 만만하게 보면 나처럼 낭패 본다."
네크로의 62연승 제물이 게룬 백작이었다.
"폐하의 은총이 미처 닿지 못한 이곳에서도 우크로같은 용사가 태어날 수 있다니. 다 같이 용기의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자."
네크로는 눈치를 보며 다른 우르크들을 따라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우르크의 기도문을 전혀 읽지 못한 네크로는 다른 우르크들이 뭐라 웅얼거릴 때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선 쉽게 넘어갔는데, 현실은 달랐다. 정확히 따지자면 '가상현실'이지만.
"이놈 첩자구나."
기도가 끝나자마자 코쿤 공작과 게룬 백작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네크로가 모르는 지식. 우르크들이 모여서 기도하면 서로 마음이 연결된다. 기도가 끝날 즈음이면 모두 한마음 되는데, 유독 네크로만 거기서 빠졌다.
네크로 직업이 정통 성기사라면 허공에 뜬 텍스트를 읽어서 위기를 모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크로는 사령술사와 성기사의 혼종이고, 표면에 드러난 직업이 사령술사다.
언데드 제작할 때 사령술사 문자는 읽을 수 있지만, 성기사 문자는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눈앞에 뜬 텍스트를 읽지 못하고 정체를 들켜버렸다.
우르크 중에도 황실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그런 자들은 기도를 거부하는 거로 황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그래서 코쿤 공작과 게룬 백작은 네크로도 그 부류라고 생각했다.
"자폭."
더 좋은 기회를 엿보려 했는데, 그만 정체가 탄로 났다.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 네크로는 바로 자폭 스킬을 사용했다. 비룡의 투구 덕분에 친화력이 6으로 올라 자폭 위력이 훨씬 강해졌다.
'아까운 수리비.'
- 사망하였습니다. 부활하시겠습니까?
"부활."
"비룡 소환, 죽음의 군단."
입으로 불을 뿜는 비룡이 하나 나타났다. 몸길이는 12미터 정도고 커다란 날개 두 장 있었다. 유려한 몸 선과 달리 얼굴은 악귀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대략 15초에 한 번씩 입으로 화염 브레스를 뿜어냈다. 몸에 불 달린 우르크들은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바닷물도 불을 끄지 못했다.
죽음의 군단은 뼈에 살이 절반가량 붙은 천 명으로 이뤄진 군단이다. 대장군의 머리에 쓴 투구는 기다린 뿔이 여섯 개 있는데, 목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길었다.
병력 구성도 무척 탄탄했다. 백 마리 정도 유령마를 탄 기병이 있고, 방패병도 백 정도 보였다. 방패를 든 부대는 취향에 따라 도끼나 짧은 창이나 둔탁해 보이는 몽둥이를 들었다.
활을 든 궁수도 얼추 2백은 되는 것 같았다.
딱 봐도 마법사 느낌을 풍기는 놈도 열이 넘었다.
강한 몹들이어서 즉사한 놈은 없었지만, 가장 강한 코쿤 공작도 상태이상 3개나 걸려서 반항하지 못했다. 네크로는 주변 상황을 살피면서도 지팡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지팡이질과 죽음의 군단 대장군의 난자에 코쿤과 게룬은 빠르게 시체가 되었다.
게룬과 코쿤의 시체는 재빨리 리치로 만들었다. 현성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모은 미스릴 가루를 전부 소모했다.
'미스릴 광산이라도 하나 찾아야 하나.'
운이 없는지 지금까지 얻은 광석에서 미스릴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죽음의 군단은 배에 있는 사신단의 우르크를 모조리 학살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다 죽인 죽음의 군단은 오래 머물지 않고 쿨하게 사라졌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확인하고 나니 쿨타임 30일이 더욱더 아쉬웠다.
- 축하합니다. 항구도시 우륵하이를 단신으로 점령하는 업적을 세웠습니다.
- 반격의 여지도 주지 않고 집정관을 제거했습니다. 상자 등급이 판도라로 정해집니다.
- 제국의 공작 코쿤을 처치하고 전함 '저항의 외침' 소유권을 얻었습니다. '현황'을 외치면 현재 전함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황."
사신단을 실은 배답게 골드와 아이템 그리고 사치품이 꽤 많이 실렸다.
"인벤토리 자동 전환."
전함 주인이 되었기에 일일이 찾아내서 인벤토리로 옮길 필요 없이 자동으로 옮겨졌다. 비싸거나 귀한 물건은 골드를 소모해 은행 금고로 전송했다.
'2만 골드. 어마어마한 금액이긴 하지만, 스케일보단 너무 작은 액수야.'
끌고 온 전함에 미안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물론, 네크로가 사치품들의 어마어마한 가격을 몰라서 하는 투정에 불과했다.
실제론 황실에서 골드를 내리고, 코쿤 공작이 그 골드로 배에 실은 여러 물품을 구매했다. 그리고 착복도 조금 했고. 정확히는 조금 많이. 그러고 남은 현금이 2만 골드였다.
- 전함은 소환물로 분류됩니다. 역소환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역소환 지역에서만 소환할 수 있습니다.
전함을 역소환으로 사라지게 한 네크로는 우륵하이 시청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곳에 판도라 상자와 대량의 골드 그리고 희귀 광물이 행운아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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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던 우륵하이에 갑자기 수많은 우르크가 생겨났다. 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짜인 일정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자신들이 24시간 동안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일반 우르크들과 달리, 부활한 게룬 백작에겐 진실과는 조금 다른 기억이 주입되었다.
"어제 반란군과 싸우다 중상을 입어 정신을 잃었지. 코쿤 공작은 무사한지 모르겠군."
우르크들을 굽어살피는 용기의 신 우르그르의 보살핌으로 상처는 다 나았다. 게룬 백작은 친위대를 거느리고 반란군과 싸웠던 항구로 향했다.
"코쿤 공작, 어떻게 된 일인가?"
"반란군과 싸우다 내 충성스러운 수하들이 전부 죽었다. 그리고 저항의 외침도 바다에 가라앉았다."
"역시 용맹의 코쿤. 혼자서 반란군을 다 처리했구나."
"황제 폐하의 명을 전한다. 중앙섬의 모든 우르크를 거느리고 인간들의 도시 세 개를 점령해라. 각각 '중심 도시', '피의 장벽', '남부 항구'다."
중심 도시는 WM 길드 본거지, 피의 장벽은 붉은 초원 근처에 있는 OB 길드 본거지, 남부 항구는 PM 길드의 본거지다. 에픽 퀘스트의 유력한 경쟁적수인 세 길드를 우르크들을 통해 견제하려는 속셈이다.
"폐하께서 끝내 용단을 내렸군. 이 시간을 기다리느라 송곳니가 근질거려 죽을뻔했다."
말을 마친 게룬이 품에서 뿔로 만든 갈색 나팔을 꺼냈다. 청량한 뿌 소리가 멀리 퍼졌다. 곧 우륵하이에서 네 개 송곳니가 교차한 깃발이 솟아올랐다. 정해진 패턴에 따라 움직이던 우르크들의 동선이 변했다.
"멧돼지 기수들은 각 마을에 소집령을 전달하라."
뻐드렁니보다 조금 작은 멧돼지를 탄 기수들이 활짝 열린 성문을 지나 사방으로 달렸다.
"코쿤 공작도 이 전쟁에 참여할 텐가?"
"이번 전쟁은 모두 그대의 공으로 돌리고 싶다. 자칫 황실에 내 공으로 잘못 알려질까 경계되는구나."
"과연. 코쿤은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제국의 기둥이라더니. 깊은 생각에 감탄할 뿐이다."
게룬 백작은 곧바로 몸을 돌려 우륵하이로 돌아갔다. 약 2시간 지나서 커다란 멧돼지를 탄 게룬 백작을 앞세우고 우륵하이의 모든 우르크가 무기를 들고 출정했다.
이들이 출정하자 네크로의 가면이 부서졌다.
-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코쿤으로 변해 제국에 침투하는 경로가 완전히 막혔습니다. 자력으로 대륙에 이르면 퀘스트가 이어집니다.
원래 시나리오는 게룬에게 황제의 지시를 전달한 코쿤을 죽이고, 코쿤으로 변해 제국에 돌아가는 거였다. 공작인 코쿤이기에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고, 잊힌 신의 신전 위치를 코쿤의 권력으로 알아내는 게 원래 흐름이었다.
그런데 첩자로 오해받았고, 죽음의 군단을 불러 항해에 필요한 인원을 전부 몰살했다. 전함은 얻었지만, 게임이라고 해서 배가 알아서 길 찾고 노 젓는 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네크로는,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룰루랄라 흥겨운 노래 부르며 우륵하이에 무혈입성했다.
- 축하합니다. 단신으로 우륵하이를 연속으로 점령하는 업적을 세웠습니다.
- 점령 과정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상자 등급이 카오스로 정해집니다.
3천 골드와 여러 가지 광석이 담긴 커다란 상자, 그리고 최고 등급의 카오스 상자가 등장했다.
- 미구현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판도라 상자에서 레전드 아이템이 나왔다. 미구현이라면 설마 레전드보다 등급 하나 더 높은 아이템인가?'
- 미구현 아이템은 이미 존재하는 아이템입니다. 그저 클라이언트의 정보 부재로 해독할 수 없을 뿐입니다. 다음 부팅 시 클라이언트를 업그레이드하면 해결됩니다.
- 은행 창구에서 감정할 수 없는 등급의 아이템입니다. 대륙에 있는 현자급 NPC만 감정할 수 있습니다.
그때 길드 채널로 흥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와, 대박이다. 나 마을 점령했는데 2백 골드에 유니크 하나 먹었어. 최고급 다이아몬드 상자에서 나왔어."
"부럽. 난 260골드에 레어 하나."
"헐. 나도 유니크 하나 먹음. 나 지금 13레벨인데 이래도 돼?"
"성필이 유니크 축하하고, 동해 넌 지금 레어가 유니크보다 나아. 어차피 유니크 쓸려면 3달 정도 걸러니까. 그리고 현성이 넌 죽지 않게 조심해서 다음 마을로 달려. 중간에 딱히 사냥터는 없지만, 가끔 이벤트랍시고 인간형 몹이 나오거든."
"형 걱정 마. 나 네크로맨서야. 패시브로 불사 넣었다고. 죽으면 부활해서 달리고, 죽으면 또 부활해서 달릴 거야."
"미감정 아이템은 죽어도 쉽게 드랍하고, 도둑 유저의 소매치기에도 쉽게 털려. 그러니 1골드 소모해서 은행 금고로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아이템 얻을 때마다 길드 채널로 말하고, 들은 사람들은 아이템 금고로 보내라고 일깨워주고 그래."
길드 채널로 서로 대화하면서, 네크로는 소환한 비룡을 타고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비록 5분만 날고 역소환되었지만, 꽤 멀리 이동했다.
그렇게 넷은 미리 짠 동선대로 움직이며 골드와 아이템을 수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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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장벽은 주변에 불친절한 사냥터 붉은 초원밖에 없다. 남부 항구는 정기적으로 우르크의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PM 길드가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걷어갔다.
전시로 바뀌기만 하면 PM 길드의 권한이 일시적으로 강해졌다. 중고렙이 활동하기에 괜찮은 지역이지만, 정기적으로 고혈을 짜내는 PM 때문에 유저들이 꺼렸다.
세 도시를 제외한 남은 도시들은 지배 길드가 없다. 지배 길드는 우선 레벨이 5가 되어야 하고, 점령 퀘스트를 길드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기적으로 퀘스트가 발생한다. 퀘스트 실패하면 '반란군'으로 취급당하기에 초반을 제외하면 누구도 세금에 눈이 멀어 함부로 도전하지 않았다.
덕분에 WM 길드가 지배하는 중심 도시에 가장 많은 유저가 몰렸다. 지배 길드가 있는 도시는 다른 도시들보다 시설이 더 많고 아이템 품질도 훌륭하다. 게다가 중심 도시는 주변에 저렙부터 고렙 사냥터가 골고루 분포되었다.
새로 유입된 유저도 대부분 중심 도시에서 시작하기에, 만 명을 웃도는 유저들이 도시에 있었다.
그 도시를 헤아리기 힘든 숫자의 우르크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뭐야? 로그아웃이 안 돼."
- 돌발 이벤트입니다. 우륵하이의 지배자인 게룬 백작이 우르크 세력 대부분을 취합해 '피의 장벽','중심 도시','남부 항구'를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 5분 후부터 로그아웃 가능합니다. 단, 로그아웃은 전투 중 사망으로 간주합니다.
-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전투에 참여한 모든 유저에게 푸짐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수비에 성공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고렙 유저들은 WM 길드 하우스 쪽으로 슬슬 물러났다. 저렙 유저들은 성벽에 올라가 공격 한 번이라도 해서 전투에 참여했음을 인정받으려 애썼다.
똑같은 시각 피의 장벽과 남부 항구 역시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우르크의 방문에 몸살을 앓았다. 수성전이 처음인 유저들은 우왕좌왕 헤매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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