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굴 던전
"말세다 말세. 레전드의 운명을 정하는 이 어마어마한 회의에 머리 긴 기집이 웬 말이냐."
배틀넷이 다짜고짜 시비 걸었다. WM의 길드장 잔다크는 그저 이를 갈 뿐 대응하지 않았다. 우르크에게 도시를 빼앗기면서 가장 큰 손해를 본 게 WM이다. PM도 우르크 마을 토벌 퀘스트를 주던 NPC가 사라져서 급히 남부 항구를 되찾아야 하고 WM도 중심 도시의 탈환이 급하다.
유독 현질에 많이 의존하던 배틀넷의 OB 길드만 배짱 놀음 가능한 상황.
PM의 길드장 쪼꼬미가 둘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WM만큼 시급하진 않지만, OB나 WM보다 결속력이 약한 PM이다. 두 길드는 확실한 이념으로 정신 무장했고, 장기간 그걸로 길드원과 하부 세력을 단합했다. 그러나 PM은 지금까지 이득으로 길드원을 잡아뒀다. 더 이득이 되는 곳이 있으면 얼마든지 떠날 철새들의 집합소다.
만약 둘이 다퉈서 연합이 성사되지 못하면, 가장 먼저 흩어질 길드는 PM이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길어지면 WM이 버티지 못하고 다른 도시를 거점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도시인 중심 도시보다 다른 도시들은 길드가 가져가는 세금 비율이 낮다. WM으로선 어떻게든 중심 도시를 탈환해야 예전의 성세를 이어갈 수 있다.
시간만 끌면 OB 천하가 될 수도 있는 상황. 쪼꼬미는 이 자리에 나온 배틀넷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제 저녁밥 산다고 전화했을 때, 배틀넷은 동생들 잔뜩 데리고 나타났다. 쪼꼬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밥도 사고 술도 사고 룸도 가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썼다.
그러고도 연합하자는 말에 콧방귀만 뀌었는데, 갑자기 오늘 협상 장소로 나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 종잡을 수 없어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아이고, 오셨군요."
잔다크를 슬쩍슬쩍 찌르며 약 올리던 배틀넷이 갑자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새로 나타난 유저에게 인사했다. 딱 얼마 전 쪼꼬미를 비롯한 PM 길드 핵심들을 불러내 WM과 전면전 해달라고 부탁할 때 그 얼굴이었다.
'역천 길드. 늑대왕 세트.'
오늘 자리는 역천 길드라는 의문의 세력이 마련했다. 그리고 나타난 역천 길드의 길드장은 늑대왕 세트를 보란 듯이 걸치고 나왔다.
네모난 탁자에 둘러앉았다. 당연하게도 배틀넷과 잔다크가 마주 앉았다. 쪼꼬미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찬찬히 뜯어봤다. 성형한 것처럼 잘생겼는데, 성형 유저의 반 박자 늦은 표정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잔다크만 해도 말이 표정보다 조금 빠르다.
'원판이 저렇게 생겼으면, 많이 따묵었겠는데.'
"역천 길드를 이끄는 역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건, 대륙 진출을 위한 연합을 구성하기 위함입니다."
"우릴 여기로 모을 자격이 있나 모르겠네요?"
잔다크가 까칠하게 나왔다. 배틀넷의 도발을 참으며 삭이던 화를 만만해 보이는 역천에게 쏟아냈다.
"자격을 일찍 물으시지 그랬습니까. 그럼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해 드렸을 텐데. 여기 두 분 앞에서 길드 비밀이 다 까발려져도 괜찮으신가 봅니다."
역천이 느긋한 미소로 대응했다. 잔다크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아까 배틀넷의 비굴한 태도만 봐도 OB 길드가 역천에 무슨 약점이 잡혔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그럼 WM 길드의 어느 비밀을 저 남자가 알고 있을까?
'말도 안 돼. 중요한 비밀은 날 포함해 아는 사람이 몇 없어.'
"구체적인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쪼꼬미가 기회다 싶어 나섰다. 배틀넷은 완전히 무릎 꿇은 것 같고 WM도 가시만 세웠지 속은 이미 허하다. PM 길드의 몸값이 좀 더 오를 수 있는 상황으로 여겨졌다.
"대륙으로 향하는 항로를 개방하는 퀘스트 마지막 단계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단계만 이루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를 끝내면 모두 저와 함께 대륙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대륙에 첫 유저가 도착하는 순간, 60레벨 제한이 풀리고 마스터 다음 단계가 업데이트될 겁니다."
쪼꼬미는 다급하게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PK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두 길드보다 PM의 정예들이 훨씬 탄탄한 실력을 쌓았다. 현질이나 골드 수익에 밀려서 아이템이 부족하긴 하지만, 숙련도나 전투 실력 그리고 게임에 대한 이해는 PM이 훨씬 앞선다.
레벨 제한이 풀리면 당분간 PM이 남은 두 길드를 압도할 수 있다.
'기회다. 너무 쉽게 동의하면 파이가 작아진다. 일단 고민하는 척하자.'
"OB에서 배신 안 한다고 어떻게 믿어요? 저긴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동네인데."
쪼꼬미가 생각에 잠긴 듯 보이자 잔다크가 나섰다.
"OB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장담할 수 있죠."
"하하. 사장님. 기집 말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 우리 길드는 지금까지 신용으로 먹고산 길듭니다. 신용 빼면 시체란 말도 있지요."
배틀넷의 다급한 태도에 쪼꼬미는 뭔가 있음을 눈치챘다. 역천이 잡은 배틀넷 혹은 OB 길드의 약점이 바로 이들이 배신할 수 없는 이유다. 그게 뭘지 무척 궁금해졌다.
"못 믿겠어요. 자기 말을 뒤집은 게 한두 번이어야지."
"그럼 중심 도시부터 탈환하면 되죠. 이렇게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역천의 말에 배틀넷과 쪼꼬미가 다급해졌다.
"사장님. 기집들이 배신 훨씬 더 잘합니다."
"얼마 전 PM하고 OB 모두 WM 길드와 대규모 길드전 벌였습니다. 저들이 중심 도시만 탈환하고 모른척하면 우린 손 빨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때 역천이 쪽지 한 장을 잔다크에게 건넸다. 쪽지를 본 잔다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잔다크도 원판이 미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성형한 눈코입이 따로 노는 미세한 차이가 사라질 정도.
"뜻에 따르겠습니다."
잔다크가 연합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사장님, 저는 애저녁에 동의했습니다."
배틀넷이 자신의 충신 지위가 흔들릴까 걱정이라는 듯 다급히 말했다.
'시발. 코가 꿰었구나. 우리 길드 비밀도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결속력이 가장 약하고, 돈 좀 찔러주면 불 새끼들 천지니.'
"훌륭한 일 하시려는데 어찌 철없이 반대하겠습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말을 마친 쪼꼬미는 어제 배틀넷과 그 동생들을 접대한 게 생각나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이미 다 된 밥인 줄도 모르고 물 긷고 장작 패며 나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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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길드의 연합에 관한 기사 내보냈어?"
반형운. 30대 초반 나이에 고려신문 상무를 맡은 금수저들도 부러워하는 순금수저.
일단 얼굴이 잘생겼다. 돈이나 권력 때문에 마지못해 몸을 허락받는 다른 수저들과 달리, 얼굴만으로도 여자들한테 먹히는 마성의 남자.
공부도 잘했다. 명문대야 있는 집 자식이라면 지체아 아니면 갈 수 있는 대한민국. 그러나 수석으로 가는 건 딴 나라 얘기였다.
게다가 운동도 잘했다. 야구, 축구, 농구. 가끔 자선 경기에 초청받기라도 하면 은퇴한 프로나 현역 상대로도 실력을 뽐냈다.
"지금 퇴고 중입니다. 요즘 그쪽에 실적이 밀려서 인턴 기자들까지 이를 가는 분위기라, 단어 하나 두고 멱살 잡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참. 그냥 오타 없이 내보내면 되지. 뭘 또 그렇게까지 정성을 쏟아."
반형운의 사무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고루하다. 오래된 통나무 책상, 튼튼하지만 디자인만으로도 요즘 제품 아님을 알 수 있는 구식 의자.
옷걸이도 통나무를 깎아 만든 수제품. 게다가 옻칠이 일부 벗겨지기까지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펜 수십 개.
전부 회장이 반형운에게 준 선물이다. 본인이 쓰던 책상과 의자 그리고 펜들을 물려줬다. 신문사 사주가 자신이 현역 뛸 때 쓰던 펜을 물려준 것만 봐도 다음 혹은 다다음 회장은 무조건 반형운이라고 여겨도 된다.
아들과 다른 손자들은 반 사장, 반 전무, 반 실장, 반 과장 이런 식으로 호칭하는데, 유독 반형운만은 '내 새끼'다.
"경운이가 요즘 많이 기어올라. 일단 이번은 경고로 하고, 한 번만 더 기어오르면 하수구에 처넣어야지."
"아예 싹을 자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함께 자란 정이 있지. 아버지가 회장 되면 집과 회사에서 쫓겨날 불쌍한 인생들이야. 그전까진 좀 누리게 해야지."
반형운은 술에 취해 혀가 풀린 사람처럼 나른한 어투로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술이나 약을 한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무력해 보이는 말투다. 그러나 저 물렁한 혀로 무수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수많은 적수를 바닥에 쓰러뜨렸음을 비서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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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받아."
진돗개와 동해는 앞장서서 싸웠고, 소환 네크인 현성은 개미 사체를 네크로 쪽으로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동해는 캐릭터 명도 동해다. 처음 접하는 가상현실의 충격에 이름을 정하라고 할 때 엉겁결에 자기 이름을 댔다. 원래 생각해둔 캐릭터 명은 장이풍이었다고 한다. 장삼풍 형 장이풍이라고 나름 고민해서 만든 건데, 이름을 변경할 수 없는 레젠드 특성상 게임에서도 자기 이름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
현성이 캐릭터 명은 '현성네 피씨방'이다. 다들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고 놀려댔지만, 현성은 자신 인생의 첫 모험이었다며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현피야, 너 그러다가 친화력 대신 힘만 오를 수 있어. 그러니 적당히 해. 돌쇠가 시체 잘 나르고 있으니까."
"나도 형처럼 조폭 네크 하려고 힘 키우는 중이야."
"현피야, 조폭 네크는 다른 거야. 네크로 형은 힘 네크지."
삼대 길드가 갑자기 연합 성명을 발표해 레전드 유저 대부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일부 게시판도 전혀 안 보는 초보 유저 제외하면, 모두 기적이라고 입 모아 경탄했다.
연합한 세 길드는 골드를 풀어 중형 길드들을 포섭했다.
길드는 갓 창설했을 땐 20명을 수용한다. 2레벨이 되면 30, 3레벨은 50, 4레벨은 100, 5레벨은 200명 수용할 수 있다. 중형은 4레벨을 일컫는 말이다.
덕분에 한동안 뜨거웠던 개미굴 던전이 찬밥이 되었다. 스킬 수련의 최적 지역이라 삼대 길드가 독점하다시피 했었다. 이들이 사라지자 기회다 싶어 포탈 타고 개미굴 던전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현피야, 저기 벽 보이지? 한 번 두드려 봐."
현피가 네크로가 가리킨 벽을 두드리자, 벽이 슬쩍 흔들렸다.
"형, 대단하다. 어떻게 도둑도 아닌데 세 번에 한 번은 맞지?"
"시간이 오래서 나도 제대로 기억나진 않아. 너희도 보물 방 위치 잘 기억해둬."
"삼대 길드는 그간 꿀 얼마나 빨았던 거야. 그쪽은 도둑 유저도 있으니까 지도도 다 만들었겠지? 그냥 매일 돌면서 수금하면 되는 거 아냐."
50레벨 만렙을 달성한 돌쇠가 몸으로 함정을 때웠다. 함정 대부분은 물리 공격이고, 가끔 속성 공격이 섞이긴 하지만, 그냥 상태이상 유발을 목표로 하고 살상력 자체는 높지 않았다.
"돗개야, 잘 부탁해."
사채업자의 눈물을 착용한 진돗개가 상자를 열었다.
"제길. 매직하고 골드야."
"드랍률 올려주는 거지, 드랍 아이템 품질 향상엔 쓸모가 없는 모양이구나."
보물 방을 통해 사채업자의 눈물이 상자 열 때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이 증명되었다.
"부화장이다. 만세."
이젠 부화장도 리젠 방식이다. 여왕개미가 알이 아닌 개미를 직접 낳기 때문이다. 1분에 백 마리씩 한 시간이면 6천 마리를 낳는다. 온종일 낳는 건 아니긴 한데, 일단 시작하면 한 시간 연속 낳았다.
진돗개와 동해가 알을 대상으로 스킬을 수련했다. 진돗개는 외침 스킬 두 개와 파멸의 돌풍을 수련했고 동해는 용풍권을 연습했다. 상대 없이 스킬 펼치는 것보다 상대가 있으면 숙련도가 더 잘 올라간다. 알이 수천 개씩 있는 부화장은 둘에게 정말 좋은 수련 장소였다.
"쉬면서 천천히. 알이 다 사라지잖아."
알은 안에 있는 내용물을 훑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걸 네크로가 직접 해야 한다. 사체의 '손질'도 제작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 그래서 신나서 알을 터뜨리는 둘에게 좀 쉬라고 일렀다.
이미 네 번째 부화장이다. 소환수 카운터가 드디어 만을 넘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았다.
"도우미 씨, 합체 이벤트 안 합니까?"
- 한 번만 발동하는 특별 이벤트였습니다.
"보스 잡으러 가자."
만 마리가 넘는 언데드를 이끌고 공동으로 향했다. 네크로도 그렇고 초반 OB 길드도 그렇고, 24시간이 지나서 여왕개미가 리젠하는 타이밍에 공격해서 손쉽게 보스몹을 해치웠다. 그래서 AI는 여왕개미와 함께 수천 마리 개미도 리젠하는 형식으로 바꿨다. 가상현실이라기보단 게임스러운 대책이었지만, 개발팀이 설득에 성공했다.
"진돗개와 동해는 치고 빠지는 거야. 기력이나 내공 다 소모하면 바로 물러나. 현피는 마나 되는대로 언데드 소환해서 앞으로 내보내고. 일단 초반 싸움은 소환수들로 하는 거야."
돌쇠와 열둘의 듀라한 그리고 세 마리 리치가 앞장섰다. 그 뒤로 10레벨 미만의 해골과 좀비들이 미친 듯이 달렸다. 네크로도 앞으로 나서지 않고 연신 물약을 마셨다. 희생의 빛 덕분에 피통이 쭉쭉 내려갔다.
"둘은 놀지 말고, 죽은 개미 이쪽으로 좀 던져줘."
내공과 기력이 부족해 물러난 동해와 진돗개는 개미 사체들을 네크로 쪽으로 던졌다. 칼로 죽 긋고 손으로 쓱 훑으면 좀비 재료, 죽 긋고 쓱 훑은 후 껍데기까지 팍 뜯으면 해골 재료.
수십 개씩 모아놓고 주문을 외웠다. 좀비와 해골이 무더기로 일어나 바로 전장으로 달려갔다. 마나가 떨어진 현피도 개미 사체 줍는 행렬에 가담했다.
'죽음의 군단은 쿨타임 30일 제외하고도, 날 빼면 살아있는 걸 다 죽인다는 결함이 있어.'
파티원도 무시하고 소환자 제외 다 죽이는 게 죽음의 군단. 그리고 일정 범위에 생명체가 없으면 아주 잠깐 대기하다 바로 사라진다.
"형, 밀리고 있어."
"비룡 소환."
이번엔 얼음의 비룡이 나와 차가운 입김을 토했다. 냉기에 얼어붙은 개미들이 픽픽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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