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정령왕과 침묵의 눈사태1
상상과 달리 엘라투르사는 흰색이나 얼음처럼 투명한 드래곤이 아니었다. 검푸른 비늘을 반짝이는 엘라투르사는 해동청과 비슷한 색이었다. 비늘 하나하나가 너무 크고 신체 비율도 완전히 달라 생물학적 연관성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레어에서 달려 나온 드래곤은 다짜고짜 얼음의 정령왕의 팔을 물었다. 얼음의 정령왕은 드래곤 주둥이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몸을 홱 젖히면서 피했다. 그리고 반대편 주먹으로 드래곤의 목을 내려쳤다.
둘 다 얼음과 냉기를 다루기에 브레스나 정령력을 배제하고 육체 싸움만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덩치 하는 두 괴수라 엄청 박진감이 넘쳤다.
세기의 대결까지는 아니지만, 생생하게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보물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을 템과 재물을 생각하며 네크로는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옮겼다.
"마법 함정이다. 발동하면 안 된다. 내가 해체한다."
밖에선 부들부들 떨던 제이크가 레어에 들어서자 침착해졌다. 오히려 네크로가 재물 하나라도 더 얻고 싶은 마음에 발이 동동 굴러졌다. 그러나 잘못 건드리면 재물 하나도 못 얻기에 제이크를 재촉하지도 못하고 혼자 속을 썩였다.
공교롭게도 마법 함정 해체에 성공했을 때 밖에서 드래곤 피어가 울렸다. 신발에 달린 공포 면역 옵션 덕분에 네크로는 괜찮았지만, 제이크는 바닥에 쓰러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제이크. 혹시 함정 있으면 내 목을 꽉 졸라."
제이크를 업은 네크로는 적당한 속도로 달렸다. 자기 목을 감은 제이크의 팔에 힘이 들어왔다고 느껴질 때마다 멈췄다. 제이크는 눈알을 힘껏 좌우로 굴리며 아니라고 알렸고, 네크로는 다시 둘러업고 달렸다.
아까 함정이 달려 나오면서 급하게 설치한 거였는지, 귀한 재물이 가득한 창고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
제이크를 한쪽에 내려놓은 네크로는 일단 눈에 닥치는 대로 인벤토리와 아공간에 담았다. 주머니에 모래 담듯이 마구 퍼넣는 게 아니라 하나 넣는 데 3초 정도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보물 상자는 하나로 취급하는지 통째로 들어갔다.
- 얼음의 정령왕이 패배했습니다.
- 엘라투르사가 레어에 진입해서 전속력으로 달려옵니다.
"텔레포트, 소금성."
- 스킬이 실패했습니다. 드래곤 레어에선 텔레포트가 금지입니다.
아깝게 스킬 사용 기회 한 번 날렸다. 쿨타임이 돌아온 지 며칠 안 되는데, 다시 쿨타임을 30일로 늘렸다.
'시발. 최대한 전송하자.'
반투명한 인벤토리를 띄우고 양손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느 것부터 금고로 보내야 할지 선택 장애가 괴롭혔지만, 네크로는 마음만큼 다급한 손놀림으로 인벤토리를 비워갔다.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쥐새끼가."
엘라투르사가 앞발로 네크로를 잡았다. 인벤토리 창이 사라졌고 네크로는 어떤 스킬도 사용하지 못했다.
후두두. 엘라투르사가 네크로를 돼지저금통이라도 되는 듯 흔들었고, 미처 전송하지 못한 아이템과 보물 상자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다행히 아공간에 넣은 물건은 무사했다.
'제길, 아공간에 바로 넣을걸.'
아공간 물건은 드래곤도 어찌할 수 없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전송 버튼 누르느라 미처 수련자 세트를 교체하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경험치 좀 깎이고 숙련도 좀 떨어져도 괜찮았다. 이미 전송한 물건과 아공간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물건들의 가치가 한 번의 죽음을 보상하고도 넘쳤다.
"정령왕을 풀어 냉기를 빼앗게 하고, 내 레어에 들어와서 도둑질했고, 게다가 더러운 신의 추종자라니. 네 놈은 정령왕 곁에 꽁꽁 얼려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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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괜찮아?"
"성필아, 너 기사 해볼래?"
"갑자기 왜?"
"나 드래곤한테 잡혔어. 산채로. 그리고 갇혔어."
"뭐, 형이 공주고 난 드래곤 무찌르고 공주 구하는 기사 돼달라 이 말이야?"
"하얀 뿔 산맥에 있는 하얀 뿔 산이야."
제이크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듣고 바로 로그아웃했다. 용병 부활은 현실 시간으로 24시간 걸린다. 얼음의 정령왕도 얼음에 갇혀 말 한마디도 못 했고, 땅굴을 팠던 용감한 부족은 드래곤의 분노를 피해 이미 도망갔다. 부족이 자리 잡았던 터는 엘라투르사가 브레스로 꽁꽁 얼린 후 가루 냈다.
그 과정을 다 구경하고 나서 머리만 빼고 얼음에 갇혔다. 굶어 죽기를 기대했던 네크로는 가디언이 입안에 쏟는 음식물에 절망했다.
그러다 제이크가 드래곤 피어의 후유증으로 끝내 죽었다는 메시지가 들리자 게임에서 나왔다.
게임에 접속해도 갇혀있기만 해야 한다. 해동청도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추종자 소환도 소용없었고 비룡 소환도 먹히지 않았다. 얼음에 갇힌 순간 모든 스킬과 기능이 무효가 된 느낌이었다.
김연이 강력히 추천한 영화를 반쯤 보다가 재미없어서 꺼버렸다. 너무 작위적이어서 보는 내내 불편하기만 했다. 얇은 운동복을 입고 근처 공원에 가서 가볍게 뛰었다. 몇 분 안 되어 숨이 가빠졌다.
'운동 좀 해둬야겠다.'
"형, 큰일이야."
약 2시간 정도 공원을 걷다가 돌아오니 성필이 당황한 얼굴로 맞이했다.
"마을이나 도시가 공격받았어?"
"마을 몇 개 공격받긴 했는데, 용병 길드 통해서 유저들을 보내 쉽게 해결했어. 그게 아니고, 지금 하얀 뿔 산맥에 하얀 뿔 산이 없어."
"이유가 뭐래?"
"레전드 게시판에 글 올렸어. 운영팀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야."
둘은 컴퓨터로 레전드 게시판에 접속한 후 새로고침을 하며 답변이 나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이건 뭔 소리야? 드래곤이 냉기를 모으려고 결계를 쳤다는 게?"
"이따 내가 설명할게. 일단 얼마나 걸리는지부터 물어봐."
이번 답변은 빠르게 달렸다.
"현실 시간으로 사흘."
"그럼 넌 일단 돌아가서 수비에 집중해. 괜히 얕보이면 안 되니까 마을 공격한 길드들 찾아내서 철저하게 박살 내. 어차피 당분간 적군으로 표기되어 숨기지도 못하잖아. 어느 나라 유저건 상관 말고 보이는 족족 죽이라고 동맹 길드들에 알려."
"안 그래도 동맹 길드 모두 이를 갈고 있어. 다른 세력처럼 국가에 그냥 소속된 게 아니라 모두 마을 하나씩 보유한 길드잖아. 다른 마을이 공격받은 걸 자기가 직접 받은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
"마을 키우는 게 쉽지 않으니까. 더구나 요즘 날씨 추워져서 곡물 생산량 내려갔잖아. 어려운 시기인데 태클 들어오니까 짜증 날만도 해."
시간 난 김에 광해는 친아버지 유골 모신 곳과 친어머니 유골 뿌려진 곳에 가서 술 한 잔씩 올렸다. 그리고 선물 가득 사 들고 양부모한테도 찾아갔다. 어머니는 동해가 요즘 전화가 뜸하다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죄송해요. 저라도 전화 좀 드렸어야 했는데."
"너야 원래부터 전화 자주 안 했잖아. 동해는 그 게임 시작하고 갑자기 그랬단 말이야. 옆집 아주머니 말론 게임 하다가 현실에서 칼부림 나고 그랬다는데. 동해 괜찮겠지?"
"이, 이런 여편네가. 동해가 그런 멍청한 애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옆집 그 말 많은 여자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잖아."
"어머니. 그게 아니고 요즘 우리가 건강 생각해서 낮에 게임 하고 밤에 자요. 잠자는 시간에 전화하기 그렇고, 점심이나 저녁엔 가게 일로 바쁘시잖아요. 동해도 다 생각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게임에 푹 빠진 동해를 효자로 포장해줬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네가 정말 복덩이야. 네 덕분에 동해도 생겼고 우리도 이렇게 웃으면서 산다. 둘 다 얼른 장가가서 손주 안겨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옆집 아주머니 아들은."
"뭐? 그 여편네가 감히 당신 앞에서 아들 자랑을 해? 그 집 아들은 TV 나왔대 아버지 어머니 가게 사줬대? 뭐가 그리 잘났다고."
광해는 오랜만에 눈치 안 보고 크게 웃었다. 무조건 감싸주고 뭐든 잘했다고 자랑스럽게 여겨주는 같은 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한결 든든했다.
가끔 의도치 않은 말실수로 광해 마음을 아프게도 했고, 마음이 약해 보증 서주고 손해 보고도 험한 소리 못하는 착한 분들이었다. 완벽한 사람도 완벽한 부모도 아니었지만, 광해에겐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었다.
"난 이것보다 푸른색이 잘 어울리는데."
"장남이 뭘 사다주면 그냥 고맙다고 하고 입고 다녀. 뭔 투정이 그렇게 많아. 환갑 넘어서 말이야."
"아니. 난 뭐 말도 못 해요?"
"어머니, 그거 미용실 디자이너가 추천해준 거예요. 어머니 피부색이랑 머리 스타일이랑 잘 어울린다고 그랬어요."
옷을 두르고 한참 살피던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확실히 서울 사람들 눈썰미가 다르긴 해. 주변에선 다들 내게 푸른색이 어울린다는데, 이게 훨씬 이쁘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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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날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이었구나.'
사흘 동안 얻은 결론은 이거 하나였다.
"형, 미안해. 한국 길드가 유저 3만 명 모아서 수도를 공격할 예정이래."
"무슨 길드?"
"평강 길드. WM이 주축이야."
"역천이 시킨 건가? 왜 갑자기 우릴 견제하지?"
"평강 길드가 요즘 우리가 야마토랑 야합했다고 성토하고 다녀."
"또 여론 놀이?"
똥 묻은 역천 길드와 대한제국 길드는 야마토와 즐기자 길드의 관계를 언급할 수 없었다. 겨 냄새보다 똥 냄새가 훨씬 역한 건 상식이니까.
"역천이 뭔가 꾸미려는 모양샌데?"
"혹시 또 빙하시대 스킬 쓰려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이번 목표는 북부야. 우리가 목표면 굳이 평강 길드를 보낼 필요 없잖아."
"그냥 예전에 형이 국가 망하게 한 게 화나서 평강 길드가 몰려온 게 아닐까? 고작 3만으로 소금성을 함락할 가능성은 전혀 없잖아."
네크로는 머리가 복잡했다. 북부를 견제할 생각으로 평강 길드를 보내 마을을 습격해 발전을 방해한다면 상식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고작 3만으로 수도를 공격하려는 거라면 평강 길드의 단독 행동으로 봐야 한다. 역천이라면 마을을 괴롭히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역천은 다음 목표를 정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이미 서부로 마음을 굳혔을까?'
연소탄 가격이 크게 오른 덕분에 생산량이 줄어도 네크로의 국가는 큰 손해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마병 덕분에 북부에서 종횡무진인 철혈팔기를 견제하지 않으면 차이가 점점 벌어진다.
"일단 나를 빨리 구해 줘. 너희 탈것 레벨 올리는 아이템 다 마련했어."
"형, 뭐 있어?"
"내가 속이 갑갑해서 미처 말 못 했는데, 드래곤 레어 털었어."
"알았어. 그럼 수성전 끝나면 바로 형 구하러 갈게."
광해도 현재 상태가 궁금해서 게임 기기에 몸을 눕혔다. 최고신 덕분에 훨씬 조화롭게 변한 대기실에서 움직임을 점검하고 게임에 접속했다.
바사삭 소리와 함께 얼음이 깨지고 네크로는 자유를 찾았다. 영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꺼내 얼음의 정령왕을 가둔 얼음을 깼다.
"제길, 드래곤에게 복수해야지."
얼음의 정령왕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네크로는 자신을 풀어준 게 분명한 제이크를 꼭 끌어안았다. 네크로가 접속하지 않은 사흘 동안 제이크는 먼 길을 걸어 하얀 뿔 산에 잠입했고 네크로를 찾아냈다.
네크로의 용병이어서 결계가 소용없었는지, 아니면 결계가 사라진 후 들어온 건지. 질문할 시간도 아까운 네크로는 이후 물어보기로 하고 제이크에게 지시했다.
"여기 은신하고 숨어있어. 얼음의 정령왕 혹은 내가 얼음에 갇혀 여기 도착하면, 누구도 없을 때 얼음을 깨줘."
제이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네크로는 빠르게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나갔다. 통로를 지키던 가디언들은 정령왕의 주먹에 꽁꽁 얼려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네크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치로 한 대씩 때렸다. 얼기만 하고 죽지 않은 몹이 있으면 경험치나 챙기려는 속셈이었다.
밖으로 나가니 정령왕이 몸집을 불리는 중이었다. 게임 시간으로 열흘 정도 되는 기간에 꽤 많은 냉기를 모았는지, 정령왕은 순식간에 지난번과 비슷하게 덩치를 불렸다.
어느 정도 덩치가 된 정령왕은 드래곤 레어로 달렸다. 달리면서도 덩치 불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렵게 잠에서 깬 드래곤이 레어를 나왔다. 네크로는 그 틈을 타서 안으로 달렸다.
"비룡 소환."
비룡을 타고 날아서 움직였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마법 함정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
"죽음의 군단."
"수비 진형."
보물 창고 밖에 죽음의 군단을 대기시켜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련자 세트를 착용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필요 없는 물건을 미리 버렸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매크로처럼 움직였다.
인벤토리에 넣고 전송, 넣고 전송. 아이템은 성기사 직업이 아니면 인벤토리에 안 들어갈 수도 있기에 그냥 아공간에 넣었다.
인벤토리에 담긴 물건을 전부 은행 금고로 전송했다. 그러다 금고가 꽉 찼다는 메시지가 들렸다. 아공간을 아이템으로 꽉 채운 후, 네크로는 금화 위주로 담았다. 골드 전환 명령에 금화가 골드로 변해 은행에 쌓였다.
"이런 쥐새끼가."
다시 드래곤 앞발에 잡힌 네크로는 탈탈 털렸다. 인벤토리에 담은 물건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귀속한 아이템들만 남았다. 아공간에 담긴 아이템들은 무사했기에 네크로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게다가 은신한 제이크가 있어 바로 풀려날 수 있다. 다음엔 골드 위주로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죽어라."
- 사망입니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아늑한 대기실로 옮겨진 네크로는 머리를 긁적였다. 또 얼음으로 가두면 레어 한 번 더 털려고 했었다. 비록 금고가 꽉 찼지만, 금화 은화를 골드로 전화하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런데 이번엔 드래곤이 그냥 죽여버렸다.
"최고신, 혹시 개입했어?"
- 게임 밸런스를 고려해 적법하게 조치했습니다.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 얼음의 정령왕은 제이크가 구합니다. 하얀 뿔의 냉기가 부족하여 정령왕이 도망칠 겁니다. 그리고 제이크는 드래곤 피어에 다시 목숨을 잃습니다. 당신은 하얀 뿔 산맥과 가장 가까운 도시 신전에서 부활합니다.
- 그리고 정령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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