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상황1
가상현실 기기의 부팅이 12분 걸렸다.
'설마 기기가 고장 나거나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로그인 끝내고 게임에 접속하기 전, 대기실에서 고객센터로 연락했다.
"네. 가상현실 기기가 부팅이 12분이나 걸려서요. 혹시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닌가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가상현실 게임의 업데이트는 늘 가상현실 기기의 업데이트도 동반합니다. 업데이트 끝나고 첫 기기 부팅 시 클라이언트 업그레이드 시간이 소요됩니다. 이번엔 중앙섬의 수백 배 되는 대륙 하나 업데이트했기에 클라이언트도 상응한 대규모 업그레이드를 진행했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팔다리는 물론 손가락과 발가락 움직임까지 체크한 후 게임에 접속했다. 눈앞이 환해지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업데이트 전 로그아웃했던 은행 안이다.
'레벨이 23으로 변했다.'
원래 60이던 레벨이 33으로 바뀌었다. 성기사 레벨 대신 네크로맨서 레벨이 표시되었다.
'레벨이야 설렁설렁 해도 60 찍으니까. 숙련도에 신경 써서 랭크 올리는 데 집중하자.'
대부분 신규 유저가 아직 20레벨조차 이루지 못했다. 네크로는 30레벨대 사냥터 중 하나를 고르기로 했다. 네크로의 선택은 굶주린 불곰이 서식하는 사냥터. 주로 파티가 찾는 곳인데, 피통이 큰 편인 불곰 상대로 소형 파티를 맺어 싸우는 법을 익히기 좋은 곳이다.
반대로 말하면, 솔로 유저가 거의 없어서 빈대 붙으려는 시도가 없는 사냥터라는 뜻이다. 물론 파티로 들어와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초보 사냥터의 저렙 유저들처럼 들러붙는 일은 드물다.
불곰 사냥터에 도착하니 멀리 사냥하는 파티가 하나 보였다. 네크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냥을 시작했다.
키가 3미터 정도 되는 불곰에게 들러붙은 흡혈 좀비가 얼마 못 버티고 뜯겼다. 20센티는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발톱에 좀비 살점이 툭툭 떨어졌다. 해골 전사 역시 쉽게 부서지진 않았지만, 공격을 받을 때마다 튕겼다.
'소환수 넉넉해지면 사냥터 옮겨야지.'
좀비와 해골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숨죽이고 살금살금 접근했다. 소환수들이 아주 귀찮게 굴어줬기에 네크로의 접근은 무시당했다. 네크로는 지팡이로 불곰 뒤통수를 힘껏 때렸다. 불곰이 멈칫하더니 그대로 멈췄다.
현실이라면 불곰에게 몽둥이 들고 덤비지 못한다. 게임이기에 가능했고, 게임이었음에도 잠깐 망설였다.
불곰 뒤통수에 혹이 자라났다. 뇌진탕을 알리는 이팩트다. 뇌진탕으로 불곰이 경직 상태가 되었고, 그제야 해골의 비수가 불곰 가죽을 뚫고 살을 아프게 찔렀다. 좀비의 몽둥이도 퍽퍽 소리를 냈고, 흡혈 좀비가 이빨로 불곰 가죽을 뜯고 반쯤 썩은 혀로 피를 핥아댔다.
어그로를 많이 끌면 불곰과 육박전을 해야 한다. 스탯은 꿀리지 않지만, 네크로맨서라서 방어구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무기도 공격력이 형편없다. 그래서 네크로는 상태이상을 유발한 후 바로 뒤로 물러섰다.
"죽어."
불곰과 싸우느라 정신이 팔려 파티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18개월의 플레이 경험은 헛되지 않았다. 정면으로 덮쳐오는 전사와 무인을 무시하고 몸을 돌리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딱 소리와 함께 은신 스킬을 사용하고 접근하던 도둑 유저가 바닥에 쓰러졌다. 상태이상 혼절이다. 은신 상태이기에 카운터 판정이 내려졌다.
"시발, 고렙이야. 템에 속았어."
현재 네크로는 매직 반 노말 반의 템 세팅이었다. 불곰 한 마리 잡고 낑낑거리는 듯한 모습에 이들은 네크로를 사냥터 잘못 찾은 생초보로 오해했다.
그러나 해골이나 좀비가 쉽게 안 죽자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네크로도 상황이 딱히 좋은 게 아니다.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기에 스킬 교체가 막혔다. 자폭 제외하면 공격 스킬이 없기에 시간이 흘러 좀비와 해골이 다 죽으며 네크로도 버틸 수 없다.
- 파티 요청이 도착했습니다.
"수락."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락했다. 제삼자라면 지원군이 온 것이고, 습격자들이 실수로 파티 요청을 보낸 거라면 그것대로 좋다. 같은 파티가 되면 전투가 멈춰질 것이고, 그럼 파티에서 방출되기 전에 스킬을 교체해서 자폭과 불사를 장착하면 된다.
"이런 개썅."
네크로에게 파티를 요청한 건 전사 유저였다. 전부 매직템이지만, 네크로가 전사 키워도 저렇게 할 것 같은 교과서적인 세팅이었다.
"먼저 당하셨나 봅니다?"
전사와 무인의 협공에 느긋하게 대처하며 네크로가 질문했다.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이것들 검은 백합 길드입니다."
울화가 치밀었다. 성기사 캐릭을 삭제하게 한 주범이다.
"절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죽이는 데 집중하세요."
몹이 아닌 유저들이라 네크로의 몽둥이질로 상태이상이 잘 터지지 않았다. 다행히 전사가 다리 빠른 사냥꾼부터 제거했기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대기실로 보내버렸다.
죽이기는 전사가 전부 죽였지만, 네크로도 근접 캐릭 둘에 도둑 하나를 잘 잡아둬서 전사를 도왔다.
"저는 네크로입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바로 불곰 사냥터를 떴다.
"진돗개예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전 26입니다."
"저는 29입니다."
"형이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친해지면 말 놓을게요."
"우리 늑대 숲으로 가요."
늑대 숲으로 가면서 진돗개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진돗개는 원래 도둑 캐릭을 키웠다. 길드원이 PK 당했다는 소식에 몰려가 복수했다. 그런데 그게 WM 하부길드였을 줄이야. OB 길드 영역과 더 가까운 곳이어서 WM 관련 길드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길드원 한 명에 천 골드씩 배상하는 거로 용서받았습니다."
천 골드면 80만. 듣는 네크로 배가 막 아픈 금액이다.
"저는 제 장비를 전부 처분해서 다른 길드원들 비용을 장만해줬고, 길드를 탈퇴한 후 혼자서 WM 하부길드 유저들만 PK하고 다녔죠."
"대단하시네요."
"사람들이 말렸어요. 하지만 그땐 너무 열 받아서 멈출 수 없었죠. 결국 정체가 들키고 도시 벗어나면 PK 당하는 통에 캐릭 삭제하고 전사로 갈아탔습니다."
진돗개가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한 달 동안 게임을 못 하면서 화도 많이 삭고 그래서 그냥 평범하게 게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이지랄 되었네요. 그냥 곱게 죽어주면 되는데, 제가 성깔이 좀 있는 편이라."
1일1살남 때문에 남성 유저를 파티에 받고 사냥하며 실력을 가늠한 뒤, 파티에서 쫓아내고 PK 하는 악랄한 수법에 진돗개가 걸려들었다.
네크로와 진돗개는 서로 친구추가했다. 예전 성기사 캐릭 포함 첫 친추.
VR 게임을 할 땐 돈 버느라 다른 유저들과 일부러 거리를 뒀다. 우르크 마을마다 드랍률이 다르고, 레어 아이템 잘 주는 마을이 따로 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알아낸 정보를 공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가 외침 스킬 2개 익혔습니다. 하나는 상대 움직임을 느리게 하는 디버프 외침이고, 하나는 아군에게 랜덤 버프를 하나에서 셋 주는 버프 외침입니다. 네크로맨서랑은 궁합이 정말 잘 맞죠."
"전 파티 몇 번 해본 적이 없어요. 조금 버벅거려도 이해해줘요."
"보자마자 알았어요. 솔로잉만 고집하는 유저랑 파티 플레이 많이 하는 유저는 쉽게 구분할 수 있어요."
"어떻게 구분해요?"
늑대 숲에 도착한 후, 진돗개는 자신이 잘 아는 사냥 포인트가 있다며 네크로를 안내했다.
"파티 플레이 주로 하는 유저 대부분은 최소 레어 하나 맞춥니다. 안 그럼 다른 파티원에게 얕보인다고 생각하죠. 파티 들어가기도 힘들고요. 몇만 원이면 레어 하나 살 수 있기에 두세 개까지 맞추는 유저가 대부분이에요. 그리고 아이템 색도 깔맞춤 합니다. 파티원들끼리 색을 맞추는 거죠. 염색 서비스가 유료라지만, 풀로 하는 데 몇천 원밖에 안 하니깐요."
"고작 그걸로 확신해요?"
"그 외에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파티 플레이하는 사람은 주변을 자주 둘러봅니다. 그러나 솔로잉하는 사람은 그러지 않죠. 누구 눈치 볼 일이 없으니깐요. 그리고 게임 1년 정도 하면 눈썰미가 생기죠. 아이템 외관만 봐도 대충 어떤 아이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수련자 세트 착용하신 거 보니까, 레벨보다 숙련도 더 신경 쓰시는 분 같습니다. 파티는 레벨이나 랭크만 보지 숙련도까지 따지진 않죠."
"캐릭 이름 바꾸는 서비스가 없으니 거대 길드랑 척지면 캐삭밖엔 답이 없네요."
바꿀 수 있다면 굳이 새로 키울 필요도 없었다. 스킨마저 바꾸면 그냥 다른 사람이니까.
"그래도 초보자 버프라고 해서 캐릭터 생성 한 달 동안 스킬 숙련도가 빠르게 올라요."
"그거 그냥 헛소문 아녜요?"
"유니콘 개발팀에서 흘러나온 소스라고 합니다."
둘 다 1년 이상 게임을 한 유저라 화제가 동나지 않았다.
"여긴 삼각 교차로라고 해서, 세 무리가 돌아다닙니다. 빨리 잡고 싶으면 마중 나가면 되고, 느긋하게 잡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가만있으면 됩니다."
60마리 정도 되는 늑대 무리가 다가오자 진돗개는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투쟁의 외침."
네크로와 해골, 좀비에게 무작위로 버프가 걸렸다.
"혹시 버프 사라지면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저 패시브로 '쌈닭' 있습니다. 적이 많을수록 스탯을 비롯해 제게 전반적인 버프를 주는 스킬입니다. 저는 그냥 늑대 몰린 곳으로 가서 싸울게요. 전체적인 건 네크로 님께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저도 소환수 컨트롤 못합니다. 각자 알아서 싸우죠."
돌멩이 하나 주워서 늑대에게 던진 진돗개는 달려오는 무리에 마중 나갔다.
"분노의 외침."
스킬 범위가 꽤 넓은지, 대부분 늑대가 느려졌다.
해골과 좀비들이 알아서 늑대 무리를 덮쳤다. 네크로 역시 내구도만 높은 지팡이를 들고 달려갔다.
"힘 네크였어요?"
"네? 제작 네크인데요."
"아니시구나. 예전 중국 게임에 있었는데, 네크로맨서가 힘만 올려서 만렙 되면 근접전 했거든요."
"20인 풀 파티보다도 사냥 속도가 빠르네요. 여기서 손발 맞추고 사거리로 갑시다."
"사거리?"
"거긴 네 무리가 옵니다. 그리고 직접 전투는 그만하시고 언데드 제작하시죠. 숙련도가 더 필요하신 분 같은데."
이미 절반 정도 늑대가 땅에 누웠다. 진돗개는 네크로 예상보다 훨씬 실력자였다. 매직으로 아이템을 맞췄고 타격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늑대를 쉽게 잡았다.
능숙한 솜씨로 배를 가르고 가슴과 입천장에 구멍 냈다. 처음엔 하나에 1분씩 걸렸는데 이젠 1분에 몇 마리씩 해낼 수 있다. 인간형인 우르크보다 거부감도 덜해 네크로의 손속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손질'을 끝낸 사체들을 모아놓고 주문을 외웠다.
"최대 몇 마리까지 가능합니까?"
"제작이라서 제한 없어요."
"사기네요. 잘 죽지도 않고."
"1레벨부터 시작해서 15레벨이 최대치죠. 키워봤자 한 번 죽으면 끝이고."
"믿음직한 분과 파티해서 마음이 든든한지 전투가 잘 풀리네요. 생명력 회복도 빨라진 것 같고 방어력도 높아진 것 같고."
네크로는 속이 뜨끔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삭제한 캐릭터 스킬이랑 스탯을 그대로 받아 꿀 빠는 게 알려지면, 유니콘 사에 신고할지도 모른다.
"네크로맨서 이번에 '죽음의 지휘자'라는 스킬이 새로 나왔더군요. 언데드를 지휘하는 스킬입니다."
"제작 언데드에겐 안 먹혀요."
"제작이 사기긴 사긴가 봅니다. 게임사에서도 견제하는 걸 보면."
새로 만든 해골과 좀비를 노말템으로 무장하고 한참 쉬다가 새 늑대 무리와 싸웠다. 다 해치우고 나서 한참 쉬면 또 새 늑대 무리가 왔다.
"게임이 즐겁네요. 사실 처음 몇 달만 즐겁다가 그 뒤부터는 길드 형, 동생들 때문에 마지못해서 했었는데. 최근엔 게임 안 접는다는 오기 때문에 하는 거였고요. 게임 접으면 지는 느낌이라, 억지로 즐겁게 하려고 노력했죠."
광해도 딱히 게임이 즐거워서 한 건 아녔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시작했고, 회사를 그만둘 핑계로 게임을 계속했다. 실질적으로 회사를 쭉 다니면 40대에도 가능할지 의문인 수익을 올리기도 했고.
"아직 학생인가요?"
"대학 안 가고 몇 년 부모님 도와 가게를 했는데, 최근 가게 내놨어요.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요. 어차피 새로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게임에 올인하려고요. 얼마 전 유니크 아이템 만 골드에 팔리기도 했잖아요."
게임으로 돈 버는 건 실력뿐 아니라 운도 필요하다. 네크로는 선뜻 응원하기 힘들었다.
진돗개의 외침 스킬은 정말 유용했다. 늑대들의 움직임이 느려진다는 하나만으로 사냥이 엄청 수월해졌다. 심지어 성기사 60레벨 때 사냥하던 속도보다도 훨씬 빠르다.
"당분간 여기 짱 박을까요?"
"레벨이야 각자 좋은 사냥터 아는 데 있을 테니, 당분간 여기서 살죠."
늑대 레벨이 낮아서 경험치는 야금야금 들어오지만, 스킬 숙련도는 장난 아니게 올랐다. 해골과 좀비는 약하지만, 미친 듯이 날뛰는 진돗개 덕분에 절반 정도 해치우고 바로 제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거리 갑시다. 오늘 컨디션이 좋은지 평소보다 전투가 쉽게 풀리네요."
성기사의 오라 스킬 네 개 덕분에 진돗개가 마음껏 날뛰었다. 파티원의 데미지 일부를 분담하는 희생의 빛 스킬도 오랜만에 유저 상대로 빛을 발했다.
"저는 새벽까지 하는데, 진돗개 님은 괜찮아요?"
둘뿐이지만, 네크로도 오랜만에 하는 파티 사냥이 즐거웠다.
"저 백수예요. 이걸로 돈 벌어서 장가가야죠. 새벽이 아니라 점심까지도 문제없습니다."
저녁 먹느라 안전지대에서 로그아웃하고 다시 들어왔을 땐, 너무 잡아서 늑대가 귀여운 강아지로 보이기 시작했다. 100마리가 넘는 해골과 좀비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심지어 잡는 속도가 너무 빨라 일부 늑대 사체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늑대왕 사냥할까요?"
간에 좋은 음식을 먹었는지, 진돗개가 로그인하자마자 대뜸 늑대왕 잡자고 제안했다.
"늑대왕 세트, 초보들이 환장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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