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합류
산적 수염을 깨끗하게 밀어버린 문 팀장은, 오랜만에 입어서 몸에 끼는 양복 때문에 숨이 막혔다. 왜 여자들이 코르셋 코르셋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유니콘이 아무리 글로벌 기업에 한국 기업문화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해도, 사장이 주최하고 유니콘 본부의 고위급 여럿이 참여한 회의에서 일개 개발팀 팀장이 후줄근한 복장으로 참여할 순 없었다.
'이런 불편한 자리엔 왜 부르는 거야. 이런 게 싫어서 개발팀 맡았는데.'
미국과 유럽에서 온 유니콘 직원들은 몸에 딱 맞는 양복에 구두마저 슬리퍼처럼 편해 보였다. 저들은 매일 6시간에서 8시간 정도만 일하고 남은 시간은 헬스나 휴식에 할애한다고 들었다.
'저런 새끼들은 아침도 스테이크 썰고 지랄이겠지?'
AI는 30여 개 언어를 습득했다. 그런데 유독 문 팀장과 대화가 잘 통했다. 최초의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셋이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이었기에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추측했다. 실상은 창조자인 셋도 AI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지만.
"문 이사."
사장의 나직한 목소리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건방진 새끼가 사장님 부름에도 대답 안 하는 거야?'
"거기, 문철수."
"네, 사장님."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문 팀장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제부터 자넨 문 이사야. 유니콘 한국 지사 개발 이사 문철수 씨."
숨쉬기 힘들게 조여오던 양복이 갑자기 오래전 휴일에 집에서 뒹굴 때 입었던 추리닝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그새 살찐 발을 아프게 옥죄던 구두가 실내화처럼 편해졌다.
갑갑하게 누르던 회의실 천장이 청명한 가을 하늘로 변했고, 건방져 보이던 유니콘 본사 직원들이 하나같이 자애롭고 친절한 사람이 되었다.
"평생 회사와 사장님께 충성하겠습니다."
"그럼 여기 비밀 엄수 서약에 사인하게. 바로 하진 말고,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이 없는지 잘 살펴보고."
문 이사는 내용을 빠르게 훑은 후, 자신이 입만 잘 단속하면 해가 될 게 전혀 없음을 확신했다. 사장이 변심해 결정을 철회하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인을 서둘렀다.
"문 이사. 블록체인 기술을 잘 알지?"
"네, 사장님. 사실 기술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저 개념적인 건데요 뭘."
"그래. 개념만 이해하면 어려운 것도 없지. 가상현실이 거기에서 아이디어 따온 건 잘 알지?"
"네. 서버가 아닌 클라이언트에서 대부분 기능을 주관할 수 있도록 짜는 거로 하나의 운영체제에 수많은 유저를 수납할 수 없었던 문제점을 해결했습니다."
기존의 게임은 해킹이나 여러 가지 우려 때문에 유저의 핵심 정보는 전부 서버에서 저장하고 관리했다. 클라이언트는 바뀌어도 아무런 문제 없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데이터들만 저장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부 게임 매니아들은 클라이언트의 이미지 파일을 수정하는 거로 해괴망측한 캐릭터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게임사들도 여러 가지 조치로 클라이언트를 최대한 보호했다. 그러나 서버도 심심하면 털리는 마당에, 유저 컴퓨터에 있는 클라이언트까지 철저히 보호하는 건 불가능했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더군."
안타깝게도, 서버의 역할을 약하게 만들어 수십만은 물론 수백만 규모의 유저도 같은 맵에서 활동할 수 있게 만든 대신, 유니콘 사는 게임을 통제하는 능력도 상실했다.
게임을 감시하는 AI가 있지만, AI가 생각하는 불법 행위와 유니콘이 생각하는 불법 행위는 너무 달랐다. 유니콘의 이익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닌, 레전드라는 세계의 인과율을 어기는 행위만 AI는 불법으로 여겼다.
"요새 코드는 대부분 인공지능이 쓴다지?"
"그렇습니다. 저희는 코드가 무겁지 않게 다이어트 해주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업무량은 줄었지만, 작업 시간은 오히려 늘었죠."
"문 이사. 운영팀 팀장직을 좀 맡아주게."
"그럼 이 부장은요?"
"부팀장으로 보필할 걸세. 직무도 문 이사가 분명히 높으니 예전처럼 함부로 대하진 못할 걸세."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운영팀은 이예지가 정말 훌륭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대부분 남 사원에게 마녀라 욕먹으면서도 부장 자리까지 올라간 데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 부장은 맡은 임무만 잘하고 있어. 블록체인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뭐지?"
"저는 가상화폐 거래가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지금 레전드의 골드를 두고 전문가들이 투기 항목이네 아니네 말들이 많아."
"가격을 정하는 권한이 유니콘 손에 있는 한 투기 항목이 될 수 없잖습니까."
"조만간 그 권한을 놓을 거야. 시장경제에 맡기는 거지."
문철수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티를 안 내려고 애썼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그래. 레전드 세상의 경제 규모가 유저 1억으로도 흔들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네. 물론 유저들에게 공개한 부분은 그렇지 않지만, 숨겨둔 부분까지 합치면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을 거야. 그래서 경제를 완전히 개방하기로 했네. 일본과 중국이 대륙에 진출한 후 시기를 가늠할 예정이야."
"골드 가격은 그럼 AI가 정하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그 AI랑 말이 가장 잘 통하는 사람은 문 이사야."
묵직한 기운이 심장을 짓눌렀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순간에 딱 한 번 써먹으려고 자신을 이사 만들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사가 되면 평생 노후가 보장된다.'
저기 멋진 디자인의 양복으로 몸을 감싸고 수염을 정교하게 다듬은 본사 직원들처럼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몸에 쌓인 지방층을 얇게 다듬고 물렁물렁해진 근육에 탄력을 불어넣을 시간이 생긴다. 가끔 마구 날뛰는 심장에 휴식과 치유의 시간을 줄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AI랑 경제 관련해서 많이 대화하겠습니다."
통역 AI를 통해 둘의 대화를 오해 없이 전달받은 유니콘 본사 임원들이 품위 있는 박수로 문철수에게 찬사를 보냈다.
'게임으로 현 금융 시스템에 비집고 들어갈 생각을 하다니. 유니콘은 참 대단한 기업이구나.'
언젠간 현금이 없으면 레전드 골드로 결제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이라는 신에 비견하는 존재가 있는 레전드는 오류가 발생할 확률이 거의 없으며, 해킹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기득권자들이 판을 다시 짜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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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진짜 79레벨이야?"
"가짜야. 됐지?"
77레벨들의 질투에 화딱지가 난 네크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에 2레벨이나 올랐다는 거 아냐?"
"형, 혹시 그 반지 다음 달에 잠시 빌려줄 수 있어? 나두 폭렙 한 번 해보자."
"나야 언데드 수천도 있고 하니까 그만큼 버텼지. 너희라면 몇천 죽이고 끝이야."
사실 언데드보단 성기사 스킬의 도움이 컸다. 특히 네 개의 오라 스킬이 죽음의 군단에도 작용했고, 편제 패시브도 죽음의 군단 전투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기혈 패시브 덕분에 중반부터 피통이 계속 만땅을 유지하기도 했고.
"현피는 오늘부터 그리핀 타고 전투하는 훈련 해야지?"
"어, 형. 일주일에 한 번씩 테스트 있는데, 테스트 완료해야 자격이 생겨서 그리핀 타고 전투할 수 있어."
"진돗개랑 동해는 기사단에서 와이번 하나씩 얻어내서 탈것 만들 예정이고?"
"응.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한 번씩 시험을 봐. 그래도 매일 6시간 정도는 사냥할 수 있어."
"난 중앙섬 돌아가서 연이나 키울게."
"왜? 후속 퀘스트 안 할 거야?"
"너희 셋 도움 없으면 힘들어. 사냥 갈 데라곤 리자드 마을이 있는 늪지뿐인데, 거긴 사냥 효율도 낮고. 차라리 연이나 빨리 60레벨로 키워주고 마스터 만들어서 여기 데려오는 게 낫지."
"중앙섬 돌아가면 레벨업 못하잖아."
"괜찮아. 연이 60레벨 만들고 수련장에서 스킬 숙련도 올릴 거야. 너희가 탈것 다 얻는 때에 맞춰서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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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레벨 몇이야?"
"57."
"스탯 불러봐."
힘과 친화력은 3, 체력 4에 민첩은 2다. 반쪽짜리 성퀴벌레 테크를 택한 김연은 공격형 스킬이 꽤 많아서 친화력이 낮지 않았다.
"개미굴 요즘 사람 별로 없지?"
"거기 가려고? 요샌 상위 길드 여럿이 힘을 합쳐 80명 모아 도전하는 곳이야."
"자, 파티 맺자."
포탈을 타고 오아시스로 향했다. 신규 유저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2만여 유저가 빠져도 중앙섬은 여전히 북적댔다. 그리고 오아시스도 유저들 외면받는 건 여전했다. 템도 골드도 경험치도 제대로 안 주는 황무지, 60레벨에 마스터 랭크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개미굴. 근데 개미굴에서 내내 고생하는 것보다 우륵하이 사냥팀을 잡거나 대륙으로 가는 게 유니크나 레어 먹기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제이크, 길 찾아."
조용히 따라다니던 제이크가 앞장섰다.
"오빠, 소환수 안 불러?"
"네가 탱커하고 내가 딜러 하면 돼."
"시청자가 적으면 적자잖아. 근데 생방송 왜 계속하는 거야?"
시야 한쪽에 동해와 진돗개의 방송을 띄워놓은 김연이 질문했다.
"친숙감을 쌓는 거야. 가끔 대기업이 손해 보는 장사도 하잖아. 돈만 많이 벌어선 소용없어. 이름값이 밀리는 순간 시장 점유율도 밀리거든. 돈을 보지만 단순히 돈만 보지 않는 게 자본의 생존 방식이야."
현피의 그리핀 비행이나 동해와 진돗개의 와이번 비행 훈련도 60만 명 이상 봐줄 정도로 현재는 인기 방송이었다. 아직 비슷한 콘텐츠가 없고 경쟁 상대도 없어서 즐기자 길드의 채널이 독주했다.
"도발."
일개미 수십 마리가 몰려왔다. 게임에서 이름 '철벽'인 김연이 도발 스킬을 사용했다.
"오빠, 파티하니까 참 좋아. 혼자 할 때는 오래 버티기 힘들었는데."
네크로는 신의 회초리를 꺼내 일개미를 때렸다. 때리는 족족 상태이상이 걸려서 전투력을 상실했고, 네크로 혹은 철벽의 공격에 시체가 되었다.
"소환수 안 만들어?"
"응. 이제부턴 고급만 키우기로 했어. 후속 퀘스트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거거든. 저급 언데드는 외려 짐만 될 것 같아."
강화 좀비와 해골 마법사조차 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무슨 퀘스튼데?"
"드래곤 산맥 파열의 협곡에 있는 검은 수정 광산에 가서 잊힌 신의 모습을 만들 '밤의 결정'을 가져오라는 퀘스트야."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고 어렵게 느껴지는 퀘스트였다.
"숨겨진 방 찾았다."
그냥 네크로나 철벽이 몸으로 때워도 되지만, 제이크의 스킬 숙련도 향상을 위해 잠깐의 시간을 투자했다. 상자에서 골드와 매직 아이템이 나왔다.
그렇게 2시간 걸려 네크로와 철벽은 여왕개미가 있는 공동에 도착했다.
'억울해 죽겠구나. 내가 여길 보름 넘게 헤맸는데.'
동해 등과 함께 처음 왔을 때도 다섯 시간 정도 헤매고서야 공동을 겨우 찾아냈다. 그것도 네크로가 오른손의 법칙으로 깨달은 방법을 통해 빠르게 찾은 결과였다.
"잠시만, 여긴 소환수가 없으면 안 돼."
조금 뒤로 물러나서 소환수들을 불러냈다.
"오빠, 리치 만져도 돼?"
숙련도 향상으로 덩치가 커졌지만, 귀여운 실루엣이 어딜 가지 않았다. 예전에는 미취학 아동이라면 지금은 초딩 정도 크기라는 것만 달라졌다.
"물어."
네크로의 농담에 철벽이 뻗었던 손을 움츠렸다. 그러다 어깨를 떨며 웃는 모습에 속았다는 걸 알아채고 토라진 척 연기했다.
"와, 도대체 몇 마리야?"
"꽤 죽고 2천 마리 남았어."
남은 놈은 대부분 30렙 만렙의 강화 좀비와 해골 마법사다. 해골 전사와 좀비는 백 마리도 되지 않는다.
"어린진."
어린진은 네크로를 중심으로 하는 공격진으로, 적이 네크로에게 닿으려면 어느 방향으로 오든 최소 세 개 부대를 만나야 한다. 주장을 보호하며 적을 공격하는 공수를 겸비한 진형이다.
"도발!"
크게 외친다고 스킬 범위가 늘어나는 게 아닌데, 철벽은 목청껏 외쳤다. 여왕개미를 호위하던 개미 중 일부가 스킬에 걸려 진의 중심을 목표로 돌격했다. 그러나 강화 좀비와 해골 마법사로 이루어진 수비층을 넘지 못하고 체액을 질질 흘리는 사체로 변했다.
"천벌."
성기사의 신성 광역 공격. 공격력 자체는 별로지만, 천벌과 도발을 결합하면 어그로를 훨씬 잘 끌렸다.
"도발!"
어린진 때문에 중앙으로 오는 길이 평탄치 않았다. 거인 개미만 중앙까지 겨우 도착할 수 있었고, 남은 개미들은 중심에 접근하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관절을 때리면 안 돼. 관절보다 조금 낮은 곳. 약점은 보호되기 마련이니까."
네크로가 정밀하게 휘두른 유니크 무기에 거인 개미는 다리를 연속 잃었다. 물리 면역의 돌쇠가 주둥이를 봉쇄하고 남은 언데드들이 무차별 공격으로 순식간에 걸레짝을 만들었다.
"돌쇠, 한 놈 맡아."
최대한 조심했지만, 가끔 거인 개미 두 마리씩 난입하기도 했다. 돌쇠가 리치와 듀라한을 데리고 한 놈을 맡았다.
"공격받을 때 방패를 최대한 흔들어. 아무 소용 없을 수도 있지만, 시스템이 좋게 판단할 수도 있거든."
현실이라면 네크로가 거인 개미를 막아섰겠지만, 여기선 철벽이 탱커다. 네크로는 야비하게 뒤에 서서 기회를 엿보다가 거인 개미의 다리 하나를 부쉈다. 한쪽 다리만 연속 세 개 부수자 거인 개미가 탈선한 기차처럼 쓰러졌다.
"근데, 철벽이라는 닉네임이 남아있었어?"
"원래 쓰던 사람이 캐릭터 삭제했대. 만약 그 사람이 복구 신청하면 이름 바꿔야 한다고 그랬어. 캐릭 만든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니까, 안 바꿔도 될 것 같아."
철벽은 전투 이해가 빨랐다. 도발 스킬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 거인 개미 한 마리씩 불러올 수 있도록 노력했다. 덕분에 큰 위험 없이 개미 숫자를 차곡차곡 줄여갔다.
"60레벨 되면 수련장 가서 숙련도 올리자. 마스터 랭크 되면 바로 대륙으로 가는 거야. 템 맞추면 함께 에픽 퀘스트 하러 가자."
대답은 없었지만, 철벽의 방패가 더 신명 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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