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동맹2
스위스 알프스산맥의 한 아담한 산. 고즈넉한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현대식 별장이 한 채 산자락에 자리 잡았다. 둥글둥글한 디자인이면 완만한 산세와도 어울릴 텐데, 별장은 네모반듯하게 지었다.
다행히 산에 어울리는 도색으로 너무 튀지는 않았다.
특별한 점이라면, 별장에 주차장이 안 보였다. 대신 헬리포트가 네 개나 있었다. 별장 앞을 흐르는 강에 다리조차 없어 공중으로만 방문할 수 있는 별장이었다.
특별한 날인지, 네 개의 헬리포트가 꽉 찼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헬리콥터가 착륙할만한 평평한 지형에는 예외 없이 한 대씩 떡하니 있었다.
"유니콘은 가속 페달만 계속 밟는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건 아닐 텐데."
이탈리아 총리로 당선된 적 있는 언론왕. 신문 광고는 물론 TV 광고나 여러 가지 간접 광고 수익도 근래에 눈에 띄게 줄었다. 처음에는 그저 반짝 효과겠거니 무시했는데, 레전드의 인기는 날이 가면서 점점 거세게 타올랐다.
"우린 아직 괜찮지만, 아마도 곧 자네 꼴 날 걸세."
독일의 모 회사. 영화 산업 관련해서 안 끼는 데 없는 문어발 회사다. 그러나 가장 핵심 사업은 렌즈 제작이었다. 렌즈 사업이 무너지면 회사도 끝이다. 다른 사업들은 그다지 경쟁력이 없었다. 렌즈로 회사 이미지가 좋은 덕분에 지금까지 이득을 봤는데, 렌즈 사업이 무너지면 경쟁자들에게 제쳐질 가능성이 크다.
"하하. 다행히 게임에서 석유는 안 나오더군."
친분 때문에 자리에 꼈지만, 가장 걱정이 적은 이탈리아 석유왕. 시작은 석유로 해서 아직도 석유왕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지만, 사실은 이탈리아 최대 자동차 제작 회사의 대주주였다.
"기뻐하긴 일러. 요새 젊은것들은 돈이 모이면 자동차 대신 캡슐을 사니까."
"석유 소모량이 줄어 환경 운동가 자처하는 멍청이들이 요즘 신났어."
별장에는 세계 주요 언론을 거머쥔 언론 거물이 여럿 있었고, 영화 관련 사업 헤게모니를 틀어쥔 유수의 미디어 제왕들도 모였다. 그리고 레전드에 생업을 위협받는 부호들도 모였다.
"지금에 와서 받아달라고 굽신거려도 소용없겠지?"
"돈이나 뜯어내려는 사기꾼 취급을 했었는데."
"제길. 인간의 기술이 아니야. 분명히 신의 정원에서 지혜를 도둑질한 게 틀림없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유니콘 초창기에 투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덕분에 레전드의 방향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뭐, 일단 형식이니까 1번부터 시작하지. 유니콘을 망하게 한다."
의장을 맡은 이탈리아 언론왕이 1번을 읊자 여기저기서 끅끅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나를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야."
"미국과 중국이 러시아랑 북한하고 손잡아도 유니콘은 어떻게 못 해."
파워가 크거나 막 나가는 국가들이었다. 둘 다 겸비한 나라도 있었다.
"2번. 유명한 게임 플레이어들을 매수해서 게임을 접게 하고 부정적인 인터뷰를 시킨다."
"돈이 문제야."
"네크로 그 친구만 해도 웬만한 스포츠 스타보다 훨씬 잘 벌어. 그리고 그 친구보다 훨씬 더 버는 유저도 많아."
"네크로는 돈 벌 줄 몰라. 내가 네크로 매니저라면 수익을 당장 50배 늘릴 수 있어."
"그러나 당신은 게임을 몰라. 네크로도 어쩌면 레전드의 가능성을 보고 수익보다는 장래를 보면서 인내하는 걸 수 있어."
"고작 개인이 뭘 안다고. 1억 유로도 안 되는 돈에 만족한 거지."
"3번. 유명한 게임 플레이어를 사고사로 위장해 제거한다."
침묵이 흘렀다. 이익을 위해선 처자식도 버릴 수 있는 냉혈한도 있지만,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길 정도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드물었다.
"이것도 기각이야. 중국이나 일본이 멍청해서 역천이나 네크로에게 손을 안 쓴 건 아니야."
"만리장성이 초인동맹 돈줄 막았다가 유니콘의 경고를 받았다더군."
유독 만리장성만 에픽 퀘스트 아이템을 못 얻은 이유가 있었다. 초반부터 여러 부정당한 수단으로 상대를 견제한 만리장성에 유니콘이 게임으로 응징했다.
"4번. 우리도 레전드에 투자한다."
"누구에게 투자해야 할까?"
"5번은 없겠지? 있다고 해도 당장 지워버려."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원하던 방안이 나오자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투자 대상자는 다섯이다."
다들 입을 다물고 조용히 기다렸다. 어차피 다들 다섯 정도 생각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순서다.
"1번. 역천 길드."
1번을 외친 후 짜증 날 정도로 텀이 길었다. 발표자도 확고하지 않다는 뜻이다.
"왜 네크로가 아닌 역천이야? 누가 봐도 네크로가 컨트롤이 훨씬 쉬운데."
"역천이 대한제국을 흡수했다. 전투력 1위와 2위 세력이 합친 거지. 그리고 네크로는 영토만 넓지 실질적으론 도시 열 개 정도에 마을 몇 개 점령한 수준이다. 기타 세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돈은 문제가 아니다. 네크로가 역천 수준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 이해했어."
"2번. 가미카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심지어 독일 출신들도 이마를 찌푸리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싫은 건 싫은 거고 일은 일이었다.
"설마, 가미카제랑 역천 사이에서 고민했던 건가?"
"마음으로 원하지 않으면 일할 때 괴롭다는 거 알아. 하지만 지금은 개인감정을 최대한 배제하자고."
"회개하지 않은 전범국을 지원한다면, 우리 회사 이미지 괜찮을까?"
"중국이 알면 맨날 물고 늘어질 텐데."
가미카제라는 이름에 반감을 품는 것도 있었지만, 가미카제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세력을 지원하면서 받을 이미지 타격을 걱정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실력만 보면 철혈팔기랑 비슷한 가미카제가 최고야."
"길드 이름은 못 바꾸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쾅쾅 두드리거나 다급하게 똑똑 거린 건 아니지만, 노크에서 다급함이 물씬 묻어났다.
"들어와."
"죄송합니다. 급한 소식이어서 실례를 무릅쓰게 됐습니다."
"괜찮아.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가미카제가 길드 문양을 전범기로 정했습니다."
"알았어."
소식을 전한 중년이 밖으로 나가자 의장이 가미카제를 굵은 펜으로 지워버렸다.
"일본 요즘 상황이 안 좋은가 보군."
"남과 나눠 먹을 생각도 못 하는 걸 보면, 일본 경제가 통계보다 훨씬 안 좋은 것 같군."
"뭐. 통계 수치는 조작했을 수도 있지. 중국이나 일본 통계는 참고용이야."
"3번은 북미 길드 프리덤이다."
"거긴 미국 정부 손때가 묻지 않았나?"
"정확히는 공화당이지. 근데 다음 대선은 민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군."
"그렇다고 해도 공을 꽤 많이 들여야 하는데. 네크로보다 위에 놓은 이유는 뭔가?"
"네크로는 일인 길드에 일인 국가야. 프리덤은 체계가 이미 확립되어 장악도 빨라. 그리고 그쪽은 미국의 인재들이 아주 과학적인 관리를 하고 있지. 네크로는 우리 젊을 때 방식이야."
"4번은 네크로다."
"전투력이 약한 게 큰 흠이야."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우리가 세워야 해. 단점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시간이 걸린다는 거고, 장점은 네크로를 허수아비 만들고 우리가 세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
"조직을 제대로 구성하기 전에 네크로가 빠져버리면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도 있다는 점 명심해."
"네크로가 국가를 해산하면 대안이 없어. 탄광 아이템 공개하고 여러 세력과 협상하던 걸 보면 야심이 없는 청년은 아니야."
"5번은 산투스다."
산투스는 유럽 서버 왕의 혈통을 얻은 스페인 유저였다.
"퀘스트 실패했는가?"
"성공해 오우거가 되었다. 지금은 왕이 되는 퀘스트 진행 중이다. 실패해도 계속 도전할 수 있기에 언젠가는 오우거 왕이 된다고 봐야지."
"성공했으면 쓸모없는 거 아닌가?"
"파괴용으로 써야지."
산투스는 이미 오우거 종족이 되었다. 경제활동과 거리가 먼 오우거 종족이다. 만약 산투스를 지원한다면, 레전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파괴용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오우거 종족 숫자가 얼마지? 드워프는 백만이 넘고 2백만이 안 되잖아."
"드워프보다 더 적을 거야. 대신 대륙섬을 차지한 드워프 인구가 빠르게 성장했다고 하더군. 오우거도 영역을 넓히면 숫자가 불어날 거야."
"게다가 인간과 우르크를 제외한 종족들은 돌멩이 없어도 서로 동맹 맺을 수 있어."
"왜 한 세력만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이지. 유한한 자원을 두고 다투는 밀폐한 세상이야. 어중간하게 여럿 손대서 좋을 게 없어."
"그럼 역천이 가장 낫겠군."
"가미카제는 우리와 손잡지 않을 가능성이 커. 게다가 전범기를 길드 문양으로 했다니."
"프리덤은 괜히 돈만 날릴 가능성이 커."
"네크로는 회수 가능성이 작다."
"산투스는 보험 삼아 지원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오우거니까 아이템밖에 지원할 게 더 있겠어?"
"그럼 역천과 일단 접촉하는 거로 하지. 최고 수준의 보안을 요구하네."
중요한 일을 마친 거물들은 전화기도 안 터지고 녹음 기능도 방해받는 밀실을 떠나 연회장으로 갔다. 연회장에선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이 진귀한 음식과 고급 와인 사이로 잔잔히 흘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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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가 도착한 후 7번의 전투가 있었다. 4승 3패. 얼핏 괜찮아 보이는 전적이지만, 전부 수성전이기에 승리해도 얻어지는 게 없었다.
대주술을 사용한 다미안과 우자르는 소금성과 오아시스로 돌려보냈다. 쿨타임이 돌아올 때까지 다미안은 국정에 몰두하고 우자르는 현피를 도와 길드를 관리하기로 했다.
"추종자 제작, 철갑 기사."
추종자는 장단점이 명확했다. 장점은 당연히 뛰어난 전투력이었다. 전투 기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정신 마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 남아도 백 명이 함께 싸우는 것처럼 투지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단점이라면 역시 투지였다. 타이탄은 그나마 괜찮은데, 철갑 기사는 무조건 죽여야 하고 철갑 전사는 무조건 버텨야 했다.
이기는 싸움에서는 추종자 덕분에 전투를 빨리 끝낼 수 있지만, 지는 싸움이나 팽팽한 상황에서 꺼내 들면 너무 잘 죽었다.
'보는 눈도 많고. 꺼낼 수 없구나.'
타이탄 숫자가 37기다. 게다가 절반 이상이 60렙 만렙을 찍고 스킬 하나씩 얻었다.
'우크 던전은 계속 비밀로 하자. 추종자 레벨 올리는 데 1층만 한 곳도 없어.'
3층에는 미쳐버린 오우거의 왕이 보스몹으로 나타났다. 죽여도 아무것도 드랍하지 않는 거지몹이어서 세 번 레이드한 후 포기했다. 네크로 없이 남은 넷이 한 번 레이드에 성공한 적 있는데, 역시 아이템을 얻지 못했다. 네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한 레이드여서 진돗개 일행도 더는 도전하지 않았다.
이제 철혈팔기의 수도와 성 두 개만 남겨뒀다. 게임에서 밤이 되어 우르크들이 행진을 멈췄다.
밤을 틈타 기마병으로 기습한 적 있는데, 우르크의 멧돼지 기수에게 처 발렸다. 젖니가 빠지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생선 가시 발라주는 엄마보다 더 깔끔하게 발랐다.
"이대로 수도를 잃으면, 철혈팔기는 우르크와 안 싸웁니다. 그냥 눈에 거슬리는 국가 찾아서 수도를 밀어버릴 겁니다."
"빙하시대 쿨타임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걱정되는 점이 있어요. 만약 우르크 수도 근처에 빙하시대를 사용하면 우르크들이 움츠릴지 더 기승을 부릴지 아시는 분?"
워낙 잘생긴 역천의 얼굴이 빛났다. 화면 보정이려니 생각하려고 해도, 다른 영상 회의에 참석한 자들의 얼굴을 보면 그게 또 아니었다.
"어떻게 되든, 우르크의 뒷심이 부족해진다는 뜻이니까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기승을 부릴 걸 대비해 지원 병력을 늘려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가서 함께 싸워주는 게 아니라 편제도 해야 하고 지휘 체계도 세워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80만 규모도 당하기 힘든데, 800만이 함께 출정하면 큰일 아닙니까."
우르크는 처음에 40만, 코뿔소가 죽은 후 60만을 동원했다. 그러다 연속 세 번 막힌 후 80만을 동원해 3연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근엔 다미안과 우자르의 대주술에 힘입어 80만 우르크를 절반 죽였다.
후퇴를 모르는 다른 우르크와 달리, 우르크 정예군은 50% 정도만 죽으면 빠르게 퇴각했다.
"제 생각엔 40만 규모가 여유 있게 운영할 수 있고, 60만은 빠듯하고 80만은 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내일 우르크가 100만으로 늘어나는지 아니면 계속 80만인지 보면 병력이 얼마 필요한지 대충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우르크는 800만 정예가 있지만, 군대가 출정하면 식량이 움직여야 한다. 군대 규모가 클수록 당연히 보급부대의 규모가 커지고, 보급 부대를 많이 운용한다는 건 식량 채집과 생산이 원활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기는 건 불가능하고, 우르크를 말려서 어느 정도 범위에 가둬 두고 소모하는 게 답인 것 같습니다."
"다들 동의하시니 저는 지시하는 시간에 빙하시대를 사용하겠습니다. 시간이 정해지면 말씀만 해주세요. 중요한 손님이 와서 이만 로그아웃하겠습니다."
'수도에 용기의 신 우르그르가 있을 텐데. 빙하시대가 방해받지 않을까?'
네크로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철혈팔기는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친 것 같고, 다른 세력들도 네크로와 마찬가지로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철혈팔기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역천, 프리덤, 만리장성이 세 방향에서 우르크 수도로 진격한다면 우르크의 전력을 엄청 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철혈팔기는 자기가 우르크 수도를 먹고 싶다는 욕심으로 세 동맹국에 출병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병력을 보내 자기 지휘에 따라 수비에 힘쓸 것만 요구했다.
전장이 여럿 되면 보급로가 여럿 되며 우르크 소모가 훨씬 강할 텐데. 철혈팔기는 우르크 정예가 수도를 코앞에 둔 지금도 욕심을 전혀 버리려 하지 않았다.
- 작가의말
이번 감기 힘드네요. 비축분 덕분에 글 계속 올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표현하려는 것과 줄거리의 분리를 목표로 한 글입니다. 줄거리는 주인공이 게임 하는 거지만, 그 과정에 인공지능과 가상현실게임의 출현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렵네요. 아직 뛰지도 못하는 놈이 고개 숙여 바라본 발밑 세상으로 날개 활짝 펼쳐 하늘을 날면서 본 세상을 표현하려니 똥줄이 탑니다. 한눈에 본 세상이 아니라 발품 팔아 돌아다니며 본 세상의 조각들을 어이 붙이려니 힘에 부칩니다.
이번 달 안으로 마무리는 할 것 같고, 다음 글은 무협입니다. 최근 얻은 무협에 대한 깨달음을 글에 녹이겠습니다. 그간 깨달음 몇 번 얻었었는데, 이번엔 제발 벽을 허물고 경지가 한 단계 올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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