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불 업그레이드
네크로 세력이나 가미카제 세력이나 철혈팔기와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가미카제는 직접 칼을 맞대고 전쟁까지 벌인 적 있고, 네크로 세력도 철혈팔기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에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런 둘과 철혈팔기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던 초인동맹이 빠지자 동맹군은 개판이 되었다. 전투 때마다 삐걱대는 게 일쑤여서 철혈팔기의 피해가 점점 늘었다.
그렇다고 두 세력을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두 세력이 사라지면 피해가 문제 아니라 우르크 성을 점령하는 것조차 실패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가미카제나 네크로 세력의 유저들에게 희생이 적고 얻는 게 많은 역할을 맡겨야 했고, 그건 철혈팔기 내부의 불만을 최대로 키웠다. 원래부터 중심을 잡는 유저가 없어서 세력 다툼이 치열한 철혈팔기 내부는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네크로는 텔레포트 쿨타임이 돌아오기 무섭게 고블린 부족으로 향했다. 시장에 들러 전에 못 보던 새로운 품목을 몇 개 보충하고 바로 고블린의 신을 찾아가 보석꽃 씨앗을 건넸다.
- 고블린 신의 퀘스트를 완성했습니다.
- 보상으로 '보석함'을 받습니다.
회한의 눈물처럼 감정할 필요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이름 : 보석함
등급 : 신화
능력 : 매일 한 번씩 선물 증정
"보석함 도움말."
- 높은 확률로 겉만 번지르르한 쓰레기를 생성합니다.
- 낮은 확률로 보석을 선물합니다.
- 극히 낮은 확률로 고품질 보석을 선물합니다.
영롱한 빛을 뿜는 보석함을 열었다. 안에는 반짝이는 붉은 보석 하나 있었다.
"아이템 확인."
이름 : 불타는 태양
등급 :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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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크가 백작 조건을 달성했다고?"
동맹군으로 파견한 유럽 유저 드레이크가 끝내 백작에 어울리는 국가 공적치를 달성했다. 성이 두 개여서 백작 작위를 내리기 적합했다.
"그래도 당분간 안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형 돌아오면 초인동맹에 식량 팔아야 하고, 그러면 초인동맹이 다시 돌아올 거야."
"철혈팔기 NPC들은 왜 아직도 폭동 안 일으키는 거야. 만리장성하고 동맹 깨지면 우르크 수도 함락해도 괜찮은데."
현실 시간으로 4개월짜리 동맹을 맺은 만리장성과 철혈팔기였다. 둘의 동맹이 깨지면 우르크 수도가 함락되는 게 차라리 나았다. 철혈팔기가 없이 만리장성과 가미카제가 서로 소모하는 건 네크로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김연이 설거지를 도맡았다. 예전엔 돌아가면서 했는데, 에픽 방패를 양보한 후부터 청소나 설거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광해에겐 재밌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 일이었다.
"제길. 힘이 약하니 나라가 있어도 돌아가질 못하는구나."
산책으로 소화를 촉진한 후 게임에 접속했다. 다시 빛을 내는 보석함을 열었다. 얼핏 보면 무척 아름다운 쓰레기를 길가에 버리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용암 드워프가 그새 마을을 옮겨서 지도가 밝혀지지 않은 곳으로 걸었다.
꽤 고생하고 찾아낸 용암 드워프의 새 거처는 새로운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래전에 머물렀던 곳을 다시 찾은 듯했다.
"오, 우리 드워프의 영원한 동맹 네크로 아닌가."
"얼음 럼주 가져왔습니다."
용암 드워프 장로들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달려들었다. 네크로가 공수한 럼주는 입안부터 화끈한 용암 드워프의 럼주와 달리 위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척 시원했다.
"역시, 얼음 드워프만큼 화끈한 놈들도 없었지."
"드워프의 보물 말입니다. 지옥불 스킬 완성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거? 불의 정령왕의 축복을 받거나 용암석을 먹이면 되는데. 용암석을 먹이려면 세월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많이 먹인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무슨 뜻입니까?"
"점점 수준 높은 기운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그냥 용암석은 먹일수록 효과가 떨어질 거야."
"불의 정령왕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알기론 대륙에 불의 정령왕이 없어. 불의 드래곤들이 다른 드래곤보다 약한 이유가 그거지. 기운 모아주는 정령왕이 없으니까 똑같은 숨을 쉬어도 다른 드래곤이 더 강해져."
"용암석을 사고 싶습니다."
"팔 수 없는 물건이야. 대신 낚시를 허락하지. 직접 잡아서 챙기는 것까지 뭐라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동맹이라고 가장 좋은 낚시터를 소개해줬다. 당분간 숨어 지내야 하기에 네크로는 제이크와 함께 낚싯바늘에 염어를 끼우고 플레어 웜 낚시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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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만 쓴 네크로가 용암에 풍덩 뛰어들었다. 제이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런 네크로를 바라보았다.
왕관의 화염 절대 면역과 파괴 불가 때문에 화염 데미지는 안 받는다. 제이크가 걱정하는 건 네크로의 생명 안전이 아니라 정신 상태였다.
"어떻게 잡아도 잡아도 플레어 웜이 계속 나올 수 있지? 분명히 뭔가 비밀이 있어."
새빨간 풍경에서 하는 낚시가 질려버린 네크로가 갑자기 혼자 외치더니 다른 아이템을 다 벗고 모자만 쓴 채 용암에 뛰어들었다. 팬티 하나 걸치고 무척 멋있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용암에 뛰어드는 장면은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게 했다.
화염 면역이지 호흡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기에 네크로는 자주 용암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끔 네크로를 공격하려던 플레워 웜은 망치에 몇 대 얻어맞고 뻗어버렸다. 그런 플레워 웜은 제이크가 낚싯줄로 감아서 뭍으로 끌어올렸다. 낚시 스킬을 보유한 네크로도 못 부리는 묘기였다.
놀랍게도 용암 안에서 네크로는 시야를 확보했다. 게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에서 설사 용암에 잠수해서 살아남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바위가 녹은 고온의 용암 속에서 시야를 확보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용암 속에는 수많은 염어가 살았고 그런 염어를 먹이로 하는 플레어 웜도 가득했다. 플레어 웜은 매우 공격적이진 않아서 열 마리 정도 만나면 한 번 싸웠다. 동서남북 방향을 못 가리고 정처 없이 헤엄치다 보니 특이한 지형을 발견했다.
- 용암석 탄광을 발견했습니다.
- 플레어 웜은 염어뿐 아니라 용암석을 먹으며 성장합니다. 지금까지 얻은 용암석은 플레어 웜이 미처 소화하지 못한 것으로, 하급으로 분류합니다.
- 용암 드워프가 찾는 금속을 아주 낮은 확률로 채취합니다.
- 유저가 소유할 수 없는 탄광입니다.
그대로 수면에 떠 오른 네크로는 지도에 점 하나 찍어 위치를 표기했다. 용암에 데미지를 안 입지 열기 영향도 안 받는 게 아니기에, 뭍으로 올라간 네크로의 몸은 무척 뜨거웠다.
몸이 식기를 기다려서 아이템을 착용한 네크로는 노를 저어 십만 용암 드워프가 모여 사는 마을로 향했다.
"장로님, 절대 부서지지 않는 금속에 관한 단서를 찾았습니다."
럼주를 마시던 드워프 장로가 잔을 바닥에 떨궜다. 채 반도 못 마신 럼주가 바닥을 적시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정말인가?"
네크로의 손을 덥석 잡은 장로의 눈에서 용암이 흘렀다.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원하는 걸 우리 능력 범위에서 다 들어주겠네."
- 용암 드워프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 용암 드워프는 탄광에서 채취한 용암석을 네크로의 무기 스킬 '지옥불'을 완성할 때까지 제공합니다.
- 최강의 금속으로 만든 장갑을 네크로에게 제공합니다.
성격이 급한 용암 드워프답게 3분도 안 걸려 계약을 끝내고 5분도 안 되어 계획을 짰다. 그리고 30분 뒤에 수만 명 드워프를 모아 일하러 떠났다.
"이걸 복용하시게."
- 소모형 아이템 '장인의 혼'을 복용했습니다.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게임 시간으로 10일 동안 드워프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목표 지역에 도착한 네크로는 드워프 장로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다. 스킬만 생긴 거지, 그 스킬을 활용하는 방법은 전혀 몰랐다.
네크로 혼자서 '저수지'를 열 개 만드는 사이에 수만 명 드워프가 겨우 30개 정도 만들었다. 드워프의 보물과 드워프 스킬을 결합하니 망치질로 바위를 깎아내는 게 이로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베어 먹기보다 쉬웠다.
"쉬면서 구경하게나."
드워프들이 '물길'을 만들어 고인 용암을 '저수지'로 인도했다. 물길을 꽤 깊고 넓게 팠기에 염어나 플레어 웜도 무사히 용암을 따라 저수지에 도착했다.
어느 정도 용암 수위를 낮춘 후 굴착기를 닮은 기계를 동원해 용암을 퍼서 물길로 보냈다. 어떻게 계산했는지 몰라도, 저수지가 모두 꽉 찼을 때 용암을 모두 퍼낸 자리에 용암석 탄광이 나타났다.
"여기서 기다리면 되네."
수만 명의 드워프가 깊이 얼마 안 되는 탄광에 달라붙어서 '확장' 공사를 했다. 순식간에 입구가 세 개 되었고 깊은 굴이 파였다. 장로들이 뛰어다니며 벽에 갖가지 기호를 그렸다.
"어느 방향으로 어떤 각도로 얼마나 깊이 파야 하는지 적은 거야. 세상에서 가장 우수하고 함축적인 드워프 문자야."
국뽕은 게임 NPC인 드워프도 피해 가지 못했다.
"와, 평소 얻었던 용암석보다 훨씬 대단해."
그 대단한 용암석들이 네크로의 무기에 닿는 족족 먼지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뽕 따러 간 처녀의 마음이 뽕나무에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드워프들의 마음도 용암석에 있지 않았다.
"불괴금을 찾아내는 놈에겐 럼주 백 통을 준다."
최강의 금속에 드워프들이 지어준 이름은 불괴금이었다. 용암석을 바구니째 네크로에게 전달하면서도 드워프들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게임 설정상 비매품이어서 네크로에게 안 팔았던 것이지, 드워프들에게 귀한 물건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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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은 지치지도 않아?'
로그아웃해서 한잠 푹 자고 다시 로그인하니 용암석이 풍년에 볏단처럼 쌓였다. 그냥 드워프의 보물을 용암석 더미에 던져서 알아서 흡수하게 하고 싶지만, 용암석을 갖다 댈 때마다 하는 질문에 '예'를 선택해야 비로소 용암석을 흡수했다.
"이제부턴 중급은 가져오지 말고 상급만 골라서 와."
어느 정도 흡수한 후 드워프들이 와서 용암석을 수거했다. 네크로 눈엔 달라진 게 없는데 제작 참여자인 용암 드워프에겐 뭔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심 봤다!"
- 내구도가 깎이지 않는 금속을 발견했습니다.
- 어마어마한 발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 달에 걸쳐 명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 당신의 명성은 지나가던 드래곤이 인사를 건넬 정도가 되었습니다.
불괴금을 발견한 드워프의 작업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파이어 뱃과 비슷한 체형의 용암 드워프는 스팀팩이라도 맞은 듯 곡괭이를 정신없이 휘둘렀다.
"용암석 이제부턴 최상급만 가져와라."
대형 양계장 달걀처럼 쏟아지던 용암석이 뚝 끊겼다. 반 시간이나 한 시간에 하나씩 용암석이 네크로 앞에 배달되었다. 심심한 나머지 네크로는 레전드 게시판에 접속해 유저들이 남긴 글을 읽었다.
게시글을 10페이지 정도 읽으니 대륙 정세가 손금 보듯 환했다. 정보의 질이 부족하고 과장된 부분이 꽤 있지만, 거품을 다 걷어내면 내밀한 사정은 몰라도 표면에서 흘러가는 모양새는 대충 각이 나왔다.
'우르크 수도 1차 공격에 실패했다.'
네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니 우르크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현금으로 골드를 구매할 수 있는 유저야 성이나 마을에 그렇게 집착하진 않지만, 도시와 마을 그리고 인구가 생산력과 직결되는 우르크는 하나라도 지켜내려 애썼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우르크 병력이 많은 쪽은 뭉그적거리며 공격에 소극적이었고 다른 곳에서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혹시 병력을 빼가기라도 하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우르크 수도 근처까지 진격한 동맹군은 공격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우르그르의 수호를 받는 수도 성벽을 넘지도 못했다.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사용한 대마법들은 우르크 주술사의 대주술에 막혀버렸다.
우르그르는 직접 수비에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신기를 통해 우르크의 회복력을 높이고 스킬 쿨타임을 줄여줬다.
'한 달 정도만 버티면 동맹이 깨진다.'
동맹이 깨진 후 일정 기간이 지나야 새로 동맹을 맺을 수 있다. 그게 아니면 두 국가가 단번에 4개월짜리 동맹을 맺지 않았을 것이다. 동맹이 깨지는 시간에 맞춰 수도를 함락하면 가미카제가 만리장성을 신나게 두드릴 수 있다.
철혈팔기가 미적거려도 상관없다. 수도 함락 의지가 없으면 모두 빠지면 된다. 전력을 다시 추스른 우르크가 가장 먼저 공격할 건 풍요로운 지역을 점령한 철혈팔기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철혈팔기가 망하고 만리장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데.'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왕왕 가장 어렵다. 경쟁이 존재하는 환경에서 내게 가장 좋은 건 남한테 그다지 좋지 않거나 몹시 나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철혈팔기는 쉽게 무너지지도 않지만, 무너진다면 가미카제가 단독으론 최강 세력이 된다. 골치 아프기는 가미카제도 마찬가지지.'
철혈팔기의 목표는 네크로 개인이다. 가미카제는 한국 시장이 목표다. 지금이야 야욕이 한풀 꺾였지만, 레전드 최강 세력이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역천도 노선 정한 것 같고.'
역천은 현재 무척 적극적으로 우르크 공략에 나섰다. 빨리 우르크 사태를 끝내고 만리장성과 철혈팔기가 가미카제와 싸우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아가서 네크로까지 공격하기를 원하는 듯했다.
네크로만 공격하는 건 굳이 둘이 힘을 합치지 않아도 되었다. 철혈팔기는 물론 만리장성도 쉽게 볼 적이 아니다.
한판 싸움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네크로가 필패다. 여러 서버가 섞여서 접속 시간을 통일하기 힘들다. 순수 중국 유저인 두 대형 세력과 단합력을 비교할 수 없었다.
"럼주 100통!"
평소 같으면 작업을 멈추고 술판을 벌여도 백 번 벌였을 드워프들이 술을 꾹 참고 일에 열중했다. 매사 저 부지런함을 발휘했으면 광부 직업에서도 드워프가 코볼트를 압승했을 것이다.
- 최상급 용암석을 소모하겠습니까?
손을 놀려 '예' 버튼을 눌렀다.
- 작가의말
보석함 개그. 마음에 들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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