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라칸 레이드
우두머리 늑대는 주술 늑대의 죽음을 확인하고 슬프게 울부짖었다. 게임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실감 나는 모습이어서 동해는 몸도 일으키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정신 차려!"
어느새 달려온 진돗개가 우두머리 늑대를 바닥에 쓰러뜨린 후 양손의 비수로 사정없이 쑤셨다. 우두머리 늑대가 물고 할퀴며 최대한 반항했지만, 힘이 8 이상인 진돗개의 속박을 벗어날 수 없었다.
"투심권."
제대로 머리에 때린 투심권이 출혈을 일으키며 우두머리 늑대가 빠르게 식어갔다.
광전사 스킬이 남은 진돗개는 우두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늑대 상대로 조금 더 날뛰었고, 동해는 두 늑대 사체를 네크로에게 배달했다. 네크로가 사체 손질을 시작할 때 접속자가 늘기 시작했다.
"네, 시약 가격이 어마어마하죠. 다행히 우리 네크로 님은 도시 공적치랑 여러 친밀도가 높아서 훨씬 싼 가격에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인 유저들이 도매하는 가격보다는 못해요. 유니콘에서 상인 유저를 비롯한 마스터 랭크 찍기 힘든 직업군들을 위해 희망의 등대 진입 장벽을 좀 낮췄으면 합니다."
진돗개가 시약 가격이랑 이름을 곁들여 해설에 나섰다.
그때 두 번째 늑대 무리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다.
"형, 좀 서둘러."
네크로는 조금 빠르게 주문을 외워 리치를 불러왔다. 뼈로부터 희미한 실루엣이 생겨서 점점 뚜렷해지다가 끝내는 리치가 되었다. 잘 될 것처럼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푱 하고 연기와 함께 사라진 적도 있어서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 얘네 대부족 같은데? 두 무리가 합쳤어."
먼저 공격했던 무리에서 살아남은 늑대들이 새로 온 무리에 흡수되었다.
"철벽, 도발해. 빨리 처리하고 움직이자."
철벽이 급히 천벌, 도발, 신의 분노 3종 세트로 전투를 속행했다. 원래는 포위만 하고 뭔가 기다리는 기색이던 늑대들은 도발에 끌려 일행을 덮쳤다.
현피가 대폭발과 마법탄 그리고 충격파 세 마법을 적절하게 섞어서 늑대들에게 저주를 안겼다. 저주 때문에 약해진 늑대는 동해의 손에 죽었고, 광폭화 저주로 동료들을 공격한 늑대는 같은 편에게 물려 죽었다. 늑대들은 같은 편이어도 동료를 공격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처단했다.
듀라한까지 일으킨 네크로도 무기를 들고 근접전투에 나섰다.
"신의 회초리. 네크로 님의 지팡입니다. 상태이상을 유발하는 옵션이 붙어있죠. 지금 저 눈알이 양쪽으로 돌아가는 늑대 있죠. 저거 스턴 걸린 겁니다. 그리고 방금 이마에 혹 부은 늑대는 뇌진탕이 온 겁니다."
스탯뿐 아니라 생명력이나 방어력도 떨어진 진돗개는 네크로 뒤를 졸졸 따르며 마무리만 했다. 스탯이 떨어진다고 컨트롤까지 영향받진 않았다. 양손 검으로 네크로의 지팡이가 때린 늑대만 베어버리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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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지친다."
생방송은 이미 중단했다. 계속 몰려오는 늑대들과의 전투가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새로움이 없었다. 온갖 자극에 길든 시청자들은 금세 익숙해져서 지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투 때문에 정신이 없다며 양해를 구하고 생방송을 껐다. 종료 직전 시청자도 30만 정도밖에 안 되어 광고 띄울 일도 없었다.
"제이크."
"몰이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지금까지 늑대들이 달려온 방향으로 분석하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북쪽이다."
지금까지 늑대들은 동, 서, 남 세 방위로부터 나타났다. 늑대가 머리를 써서 함정 판 게 아니라면, 북부로 가는 게 안전하다.
"근데 파열의 계곡은 왠지 늑대들이 오는 쪽에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재미는 있는데, 매일 이렇게 싸우라고 하면 힘들어요."
철벽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수련장을 통해 마스터 랭크 찍고도 며칠 더 수련했다. 그땐 대륙으로 가고 싶어 안달이었고, 대륙에 처음 가서 상대했던 고블린이나 우크 그리고 리자드 등은 무척 재밌었다.
횟수는 많지 않지만, 와이번이나 그리핀을 상대한 경험도 무척 새롭고 즐거웠다. 그런데 이놈의 에픽 퀘스트로 만난 늑대들은, 왜 대한민국 딸 가진 아빠들이 늑대를 조심하라고 했는지 뼈저리게 알려줬다.
"이렇게 질긴 놈들은 나도 처음이야."
네크로의 목소리에도 힘이 조금 빠졌다. 지능도 높은 늑대들은 한두 무리로 일행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대여섯 무리가 힘을 합쳤다.
"철벽의 도발 아니었으면 우리 말라 죽었어. 민첩도 좋아서 도발로 끌어들이지 못했다면 죽이기 몇 배는 어려웠을 거야."
늑대에게 포위된 채 시간이 흘렀다면 훨씬 많은 늑대 무리가 왔을 테고, 일행은 결국 지쳐서 저항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늑대가 아닌 존재의 흔적을 발견했다. 추적할까?"
"해. 늑대보단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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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통할까?"
흔적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나무로 쌓은 목책이 있었다. 높이가 8미터에 육박하여 늑대 할애비가 와도 넘기 힘들어 보였다.
"목책을 쌓았다는 건 약하다는 뜻이야. 아니면 숫자가 적다는 뜻이지."
"우르크 마을의 울타리보다 훨씬 든든하고 이쁘게 쌓았어. '언어'만 통하면 말이 통할 거야."
상대가 인간에게 적대적이 아니더라도, 말이 안 통하면 부질없었다.
"저기, 누구 없어요?"
나무인지 뼈인지 모를 작대기를 든 괴인이 목책 위에 나타났다. 얼굴과 손바닥을 제외하면 엄청 긴 털로 덮였다. 눈발이 흩날리는 침엽림에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인간인가?"
"그렇습니다. 늑대 무리에 쫓기다 이곳으로 왔습니다."
"안에 들일 테니, 허튼짓하지 않길 바라네."
"퀘스트의 일환인가?"
"아닐걸. 그럼 이 부족을 찾으라는 퀘스트가 먼저 생기겠지."
"필수는 아니지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레전드엔 능동형 퀘스트 엄청 많잖아."
미처 주의하지 못했는데, 목책 앞에 해자가 있었다. 12미터 길이의 목책 문이 천천히 누우면서 해자의 다리로 변했다. 일행이 지나자 다리는 다시 문이 되었다.
"와, 낭만적이야."
굵은 통나무로 정교하게 지은 집들이 안에 잔뜩 늘어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눈사람이 있었고, 처마마다 창이나 몽둥이로 써도 될 정도로 굵은 고드름이 줄지었다. 지붕 위에는 덩치가 작은 털북숭이 종족이 두껍게 쌓인 눈을 청소했다.
"온천도 있어."
"온천 아냐. 그냥 물인데 추우니까 김이 생기는 것뿐이야."
샘이나 우물은 예외 없이 김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구룩이다."
"저는 일행의 대표로 이름이 네크로입니다."
"안에 들어간다."
다른 통나무 집들도 꽤 컸지만, 목책 문을 지키던 병사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대형 극장보다 더 커 보였다. 문만 해도 코끼리 두 마리가 어깨동무하고 드나들 정도 크기였다.
"반갑네. 어느 방향에서 왔는가?"
안에는 놀랍게도 인간임이 확실한 존재들이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덕분에 추위가 싹 가셨다. 그리고 부족 이름인지 종족 이름인지 모르지만, 구룩족의 족장으로 추정하는 털북숭이가 부채질로 더위를 물리치고 있었다.
"희망의 등대에서 왔습니다."
"진실."
검은 수정구를 앞에 놓은 눈썹이 붉은 늙은이가 말했다. 검은 수정구를 보니 퀘스트 아이템인 '밤의 결정'이 생각났다.
궁금증이 일긴 했지만, 일단 상황파악이 끝난 후에 질문하기로 했다.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군. 우린 수십 년 전에 쫓아오는 우르크 제국 군대를 막으려고 남았던 자들이야. 언제 우릴 데리러 오나 계속 기다렸는데, 이제야 만났군."
퀘스트가 뜨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봐도 메시지가 울리지 않았다. 이들을 반드시 희망의 등대로 데려가야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늑대에게 쫓겨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 상황 좀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서로 알고 싶은 걸 엇갈아 질문하도록 하세."
"오오, 신의 조각상이 신전에 안치되었단 말인가? 신의 이름은 찾았는가?"
"대주교가 불철주야 기도하고 있으니, 언젠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늙은이 중 하나는 신관 차림이었다. 희망의 등대에 처음 왔을 때 신관들이 입었던 해진 신관 복과 디자인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 잊힌 신의 조각상이 희망의 등대에 안치되었고 대주교도 생겼다는 말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뻐했다.
"파열의 협곡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파열의 협곡 입구야. 우리가 하는 일은 늑대들이 파열의 협곡에 못 들어가게 막는 것이지."
파티 채널에서 난리가 났다.
"불길하다 불길해."
"늑대 잡아 친밀도 올려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우리가 들어가려는 것도 방해할 수 있어."
"늑대가 파열의 협곡에 들어가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상대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한 후, 네크로는 모두의 의견을 조합해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늑대들의 왕 투라칸은 나이가 600살이 넘어. 예전에 300년 동안 서리의 용 아쿠라온스텐즈의 레어를 지키던 수문장이었어. 아쿠라온스텐즈는 투라칸에게 자유를 줄 때, '밤의 결정'을 얻어오면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한 적 있지."
"투라칸이 밤의 결정을 얻어서 아쿠라온스텐즈에게 바치면, 드래곤 산맥의 세력에 큰 변화가 생겨. 아쿠라온스텐즈는 드래곤 로드의 자격에 도전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드래곤 산맥이 또 전쟁에 휩싸이게 되네. 하지만, 우리에겐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네. 영생을 얻어 수십 배로 강해진 투라칸이 영역을 늘릴 거고, 지금까지 투라칸을 방해한 우리를 절대 살려두지 않을 거란 말이지. 방해하지 않아도 늑대의 영역 확장 과정에 살아남기 힘들고."
"밤의 결정을 먼저 찾아내면 되지 않습니까?"
"수를 헤아리기 힘든 검은 수정 중에서 어느 것이 밤의 결정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심지어 아쿠라온스텐즈조차 알지 못하네. 오직 늑대의 직감만이 밤의 결정을 찾아낼 수 있는데, 그것도 100% 신뢰하긴 힘들어."
- 서브 퀘스트 생성.
- 파열의 협곡에는 수를 헤아리기 힘든 검은 수정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밤의 결정'을 찾아내는 건 그야말로 '밤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 드래곤 산맥 모든 늑대의 왕 투라칸을 잡으면 목걸이 '늑대의 직감'을 얻습니다. 늑대의 직감을 착용하면 높은 확률로 '밤의 결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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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뒤에 투라칸이 직접 여길 공격하러 온다고요?"
"그렇네. 투라칸은 한 달에 한 번씩 직접 부하를 거느리고 여길 공격하지. 다만 소굴을 오래 떠나있으면 안 되니까 30분 정도 공격하고 돌아간다네."
"왜 그러는 거죠?"
"투라칸의 라이벌인 곰의 왕 레오칸이 있어. 투라칸이 소굴을 비우면 레오칸이 반드시 투라칸의 짝과 자손들을 죽일 걸세. 레오칸의 후계자가 투라칸에게 죽었거든. 한 달에 딱 하루 레오칸도 사정이 있는데, 그 틈을 타서 투라칸이 여길 공격하는 거야."
"제이크, 늑대 숫자."
"78만."
"다 죽어야 물러납니까? 아니면 일정 시간이 되면 물러납니까?"
"10만 정도 죽으면 물러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덥고 습한 늪지에서 뛰어다녔는데."
부슬부슬 내리는 눈은 분명 하얀색인데, 하늘은 칙칙한 잿빛이었다. 눈발은 한국에서 본 적 없을 정도로 굵었고 그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투라칸은 얼마나 강할까? 머리 두 개 달린 오우거보다 더 셀까?"
시청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진돗개가 불쑥 끼어들었다.
"네임드인데 배경 스토리까지 있어. 단순한 퀘스트 몹인 머리 둘짜리 오우거보다 당연히 강하지 않을까?"
그저 대치 중인데도 500만 시청자가 채팅창을 들깨 볶듯이 들들 볶았다. 30분 전에 구룩 마을의 풍경을 소개할 때부터 난리였고, 목책 밖에 늘어선 80만에 가까운 늑대들도 시청자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다.
"오늘 저희는 주역이 아닌 조연으로 이들의 수성전을 돕겠습니다. 화면도 저희가 아닌 전체적인 장면 위주로 내보낼 것입니다. 저희가 늑대 잡는 건 벌써 질리게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름 뒤 투라칸이 직접 올 때, 저희가 반드시 투라칸을 잡아보겠습니다."
우우우우우.
80만에 가까운 늑대가 동시에 하울링을 하자, 게임임을 알면서도 오금이 저렸다. 채팅창에서도 온갖 오타를 곁들인 '대박','소름','지렸다' 등 단어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슈슈슈슉.
구룩은 성인 평균 키가 2미터 정도 되는 큰 종족이었다. 그런 놈들이 자기 키와 비슷하게 큰 활을 만궁으로 당겼을 때 전해지는 전율은 늑대들의 하울링 못지않았다.
목책을 향해 뛰어오던 늑대 중 일부가 나무 화살에 맞아 그대로 땅에 박혔다. 바로 즉사한 놈도 있고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놈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화살에 맞은 동료를 본체하지 않고 목책을 향해 뛰기만 했다.
슈우웅.
늑대들이 가까워지자 화살보다 짧은 단창이 던져졌다. 무릎까지 닿는 긴 팔의 원심력까지 빌린 단창이 늑대 몸에 깊숙이 박혔다.
"대박, 미리 상의한 것처럼 같은 늑대를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어."
누가 큰소리로 지휘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수비전을 하도 치러서인지 타깃이 겹치는 일이 없었다.
"이 정도 조직력 아니면 드래곤 산맥에서 못 살아남겠지."
처음엔 무력이 약하거나 전사 숫자가 적어서 목책으로 보호했다고 생각했는데, 강하다고 해도 방심하면 생존을 보장하기 어려운 곳이 드래곤 산맥이었다.
"형, 늑대가 나무를 타."
정확히는, 목책에 발톱을 박고 느리게 위로 기어올랐다.
"이래서 해자를 저렇게 깊이 판 거였구나. 안 그럼 늑대 시체가 쌓여 사다리가 돼주겠다."
5미터 정도 길이의 나무 창을 든 구룩들이 기어오르는 늑대를 쿡쿡 찔러 해자로 떨어뜨렸다. 해자 아니었으면 늑대 사체가 쌓여서 목책이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웩 씨, 목책이 무너지기도 합니까?"
"가끔. 그럼 암컷과 새끼들이 목숨으로 그 구멍을 지킨다네."
네크로의 언데드들과 현피를 제외하면 모두 손 놓고 놀고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오히려 목책에 구멍이 뚫려 늑대가 안으로 들어왔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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