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면2
제주도의 바다는 푸르렀고 제주도의 밤도 푸르렀다.
"놀러 좀 다니자고. 맨날 먹기만 하고, 제주도까지 온 보람이 없잖아."
"성필 오빠. 먹는 게 남는 거야."
"우린 키 클 나이 이미 지났다고. 먹어도 남는 게 없어."
"헤헷. 나 지금 161이야. 정말 꿈 같아."
19세까지 153으로 살았던 김연은 갑자기 크는 키가 무엇보다 기뻤다.
"어제 파도 때문에 낚시하러 못 갔잖아. 오늘은 낚시하러 가자. 성필이 회 뜰 줄 안다면서?"
"그냥 아는 정도야. 잘 뜨진 못해. 회를 걸레짝 만들 가능성이 커."
"회는 내가 잘 뜨지. 싱싱한 놈 잡아 오기만 혀."
성필이 아버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외동아들이 대학 안 간다고 고집부렸고, 고등학교 때까진 흥미를 보이던 가게 일을 점점 싫증 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속을 썩이다가 갑자기 게임 하겠다고 선언하더니 가게 할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왔다.
그게 모두 덩치 큰 듬직한 청년 덕분이라는 걸 아들에게 전해 듣고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회가 아니라 자기 살이라도 떠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르신들은 온천 예약해뒀습니다. 잠시 후 차가 태우러 올 겁니다. 저흰 낚시하러 먼저 출발할게요."
배를 타고 멀리 나갔다. 핸드폰마저 안 터지는 맑은 바다에서 전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고기와 힘과 기술을 겨뤘다.
"오기 전에 제이크한테 기술 배우고 올걸."
현성이 정신 놓고 아무 말이나 마구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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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전화번호 제대로 구한 거 맞아?"
배용수는 전화기를 소파에 팽개치고 화를 버럭 냈다. 그래도 큰돈을 만지면서 예전보다 말투가 조금 고와졌다.
"전화번호는 확실합니다. 폰팔이 정보는 경찰보다 더 확실해요."
"뭐지? 길드 찾아가도 로그인 안 했다 그러고. 전화해도 터지지 않고. 혹시 정보 새서 몸값 높이느라 일부러 전화기 꺼놓은 건가?"
"형님. 그보다는 역천 길드가 왜 국가를 선포하지 않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중심 도시, 남부 항구, 피의 장벽 모두 점령했고 왕의 혈통도 얻었겠다. 희망의 등대를 수도로 나라 세우면 되는데 엄청 미적거린단 말이지. 그쪽이 일본이랑 컨넥션 있다고 했잖아. 혹시 국가를 일본에게 양보할 생각 아닐까?"
"그럴 생각이면 돈 나가는 중앙섬 도시는 왜 점령합니까?"
"몸값 올리려는 거 아닐까? 쪽바리들한테 좀 더 뜯어내려고."
'개 눈엔 똥만 보인다더니. 역천을 자기 수준으로 보는구나.'
"형님, 어차피 지금은 네크로 유저 영입해도 소용없잖아요."
"멍청한 새끼. 곧 우르크 제국이 무너져. 그때가 되면 일본과 중국이 대륙으로 진출할 거야. 일본이나 중국 다른 세력에 포섭되기 전에 우리가 손 써야 한다고. 길드 추스르고 설득하려 했는데, 이 새끼가 갑자기 실종 놀이 하네?"
"형님, 그렇게 되면 역천이 짱 아닙니까? 네크로한테서 26억 주고 전함 샀잖아요."
"거기에 쪽바리하고 손잡으면 중국도 당분간 대륙으로 진출 못 해. 남부 항구 조선소가 밤마다 불이 환하다더라."
"형님, 내부자 정보가 맞는다면, 붉은 광산의 지하 드워프가 마나포도 만들고 있답니다. 전함뿐 아니라 일반 배도 대포 달고 다닐 것 같습니다."
"배가 총 몇 척이래?"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역천 혼자서도 일본과 중국 모두 견제할 능력이 될 겁니다. 일본이나 중국 배엔 대포가 없거든요. 임잰왜란 왜놈들 꼴이 나는 겁니다."
"임진왜란? 그게 뭔데?"
"조선 때 일본이 쳐들어왔는데, 이놈들이 배로 사람 날랐습니다. 조선이 대포를 단 전투함으로 운송선을 빵빵 깨부숴서 왜놈들이 바다에 익사한 게 한둘이 아니었죠."
"역천 이 새끼 볼수록 물건이란 말이야. 26억 주고 전함 하나 샀다고 했을 때 대가리에 구멍 났나 싶었지. 시발, 그 새끼한테 약점 잡혀서 굽신거렸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안 와. 어디 킬러 같은 거 고용해서 못 해치우나?"
"형님, 그런 건 영화에서나 가능합니다. 실제로 청부업자들은 대부분 양아치여서 의뢰자 돈 뜯어먹고 잠적합니다."
"거절할 걸 대비해서 주먹 좀 쓰는 애들 준비해두는 게 좋겠지?"
"형님. 지금 네크로가 인터넷에서 모함하고 전화로 욕했던 WM 미친년들 상대로 소송 중입니다. 괜히 이때 건드렸다간 폭탄처럼 터집니다. 역천이 기자들 동원해 일을 키워버리면 우린 손도 못 쓰고 궁지로 몰립니다."
"시발. 쉬운 방법은 다 못 쓰고. 손발 묶어놓고 무슨 일 진행하란 말이야."
"힘으로 패던 걸 돈으로 패야죠. 돈이 주먹보다 훨씬 매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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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님, 대략 엿새 있으면 우르크 제국이 해체된다고 합니다."
"그래. 계속 통화해서 확실한 시간 알아내."
"그런데 너무 조심하는 거 아닙니까? 국가 안 세우고 시간 끌다가 네크로 유저가 배용수에게 포섭되면 희망의 등대에서 전쟁이 날지도 모릅니다."
"호랑이가 왜 똥개 밑으로 들어가?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네크로 유저가 왕의 혈통 안 복용하고 내게 팔았으면 100억이라도 줬을 거야."
반형운은 네크로가 왕의 혈통을 복용한 건 왕이 되겠다는 의지라고 분석했다. 비록 세력이 전혀 없어서 누군가를 등에 업지 않으면 왕이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네크로라면 뭔가 기발한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고 여겼다.
"그 부분은 저도 의문입니다. 어차피 언제 마시든 상관없는데, 왜 미리 마셔서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무기 하나를 없앴을까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왕의 혈통이 왕의 혈통을 마신 유저보다 훨씬 가치 있음은 멍청이만 아니면 알 수 있다. 네크로가 지금까지 이룬 일을 보면 멍청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본인이 왕이 되겠다는 생각이지. 전함이나 광산과 달리 왕의 혈통은 돈 받고 팔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선이 확실한 사람이야. 팔아도 될 물건과 팔면 안 되는 물건을 확실히 구분하잖아. 얼어붙은 심장을 내게 1억에 넘긴 것만 봐도 배포도 엄청 큰 편이고. 내게 필요한 물건이라 소문내고 경매장 올리면 최소 10억 받을 수 있는 물건이야."
9억은 최 비서에게도 엄청 큰돈이었다. 네크로의 배포에 최 비서도 조금은 감탄했다.
"요새 반푼이가 살아나는 것 같다고?"
"제 멍청한 사촌 동생 통화 시간이 몇 배로 늘었더군요. 중국 쪽이랑 붙어먹는 것 같습니다."
"은밀히 소문내. 회장님 귀에 들어가게. 그럼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어."
일본과 친하고 중국은 물론 미국까지 적으로 보는 회장님이라면, 반경운이 중국과 손잡으려 한다는 소문만으로 다리 하나 분지를지도 모른다.
"내가 국가 세우면 우르크 제국의 해체가 늦어지거나 취소될 수도 있어. 우르크 제국은 싸울 상대가 없고 인구가 너무 많아서 해체하는 거잖아. 해체하기만 하면 다시 뭉치는 게 엄청 어렵지. 국가 선포하자마자 해상을 봉쇄하고 중국과 일본 배들은 다 가라앉혀."
"가미카제에서 마나포를 판매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투자했던 빚 모두 없애주는 조건이야. 그렇다면 생산 물량의 50%를 넘긴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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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운아."
"네, 회장님."
"나카타 상이 섭섭한 소리 하더라."
반형운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비록 회장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지만, 그게 회장의 권위에 도전해도 되는 면죄부는 아니었다.
"사람은 말이야.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받은 은혜보다 훨씬 많이 갚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은혜를 아는 자라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는 거야. 우리 집안이 오늘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건 나카타 상과 그 가문의 도움이 컸다."
"회장님, 우리 가문의 힘도 이젠 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려, 너무 어려. 머리는 누구보다 좋은데 연륜이 너무 부족해."
밭은기침을 뱉은 반 회장은 녹차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조조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내가 천하 사람을 배신할지언정, 천하 사람이 날 배신하는 건 안 된다."
반 회장은 말을 멈추고 자신이 한 말을 음미했다.
"비슷한 맥락이지만, 내가 얻지 못하는 걸 남이 얻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카타 상의 가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게 돈뿐이 아니고 다른 일본의 도움을 받는 가문들과의 연합 등도 포함된다. 만약 우리가 나카타 상의 가문과 연계를 끊는다면, 100에서 100을 빼서 0이 되는 게 아니다. 마이너스 100이 되는 거지."
반형운은 머리로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존심 혹은 자부심이라고 해야 할 무언가가 고집을 피워 거부했다.
"대한민국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거리를 두면 그쪽은 대체자를 찾는다. 부귀영화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우리한테 오던 지원이 우리 경쟁자한테 가게 된다고. 나카타 상의 가문은 그냥 동아줄이 아니다. 우리가 버리면 다른 사람이 그 동아줄을 잡고 더 높은 곳으로 간다."
나카타의 가문을 비롯해 대한민국에 드리워진 일본 동아줄은 많았다. 반형운의 집안은 그중 나카타 동아줄을 잡고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나카타 가문의 동아줄을 잡은 다른 자들은 고려신문의 눈치를 열심히 보고 고개를 조아리면서, 고려신문의 발길질에 차여 동아줄을 잡은 손이 풀리지 않도록 무척 조심했다.
비록 나카타의 가문을 상전으로 삼고 고개를 조아렸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동아줄 잡은 자들의 조아림을 받았다.
"한국이 아무리 날고뛰어도 땅이 작고 자원이 적어서 일본에 안된다. 경제 규모나 시장 규모 모두 일본보다 훨씬 작아. 이런 태생적 어려움을 떨쳐내고 지금 정도까지 성장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기적은 거듭 일어나지 않아. 이미 한국은 더 올라갈 데가 없다. 일본도 정점을 찍은 후 서서히 하강 곡선을 찍었다. 한국도 이젠 내려갈 일만 남은 거야."
반형운은 할 말이 많았지만, 입속에서 맴돌 뿐 밖으로 뱉어내지 못했다.
"사람들이 우릴 친일파라고 욕한다. 그건 시샘이 나서겠지. 그때 우리가 아니었어도 일본 바짓가랑이 잡고 애걸했을 놈들 천지였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일본과 미개한 조선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해줘서 한국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았다. 신문물을 받아들여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생각 대신 폭력과 파괴만 머릿속에 찬 놈들이 계속 설쳤으면 한국이 오늘 수준까지 발전하지도 못했겠지. 다 일본이 조선반도에 서구 문명을 가져다주고 사상의 변화를 일으켜서 오늘의 한국이 있는 거다."
"침략이 옳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 일본이 러시아 손에서 조선을 구해내지 않았다면? 중국의 자원을 가져가려고 조선에 철도를 깔고 심혈을 기울여 관리한 일본이 아닌, 미개하고 폭력적인 러시아 야만인들이 조선 땅을 점령했다면 어땠을까?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최악을 피해 차악을. 그때 조선의 상황에선 일본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할아버지. 그거랑 지금 일은 다릅니다. 레전드에선 내가 왕입니다. 왕의 혈통을 얻었고 바다를 제패할 힘도 갖췄습니다. 일본이 아니라 중국까지 견제할 힘이 있습니다."
"한국 유저는 100만 조금 넘고, 일본은 260만 정도, 중국은 320만에 육박한다."
눈에서 생기가 거의 사라진 듯 보이는 반 회장이었지만, 세상사에 관심을 끊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배용수라는 놈이 중국과 접 붙었다. 중국엔 세 개 세력이 있는데, 그중 가장 규모가 큰 만리장성이라는 길드의 사냥개가 되었지. 만리장성 뒤엔 중국 정부가 있다."
"다행히 중국은 세 개 세력으로 찢어져 서로 견제한다. 일본도 마찬가진데, 두 개 세력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최신 정보에 따르면, 가미카제가 아닌 다른 세력에서 왕의 혈통을 얻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렇다는 건?"
"도박할 때다. 나카타 상에게 모든 걸 배팅할 때지. 우리가 전력으로 도왔는데도 나카타 상이 왕의 혈통을 못 얻으면 어떻게 될까?"
"나를 왕으로 밀어주거나 네크로 유저를 포섭해야 합니다."
"네크로는 포섭 못 하게 방해하면 된다. 어차피 한국에서 우릴 배제하고는 일을 원활히 진행할 수 없다. 나카타 상도 성현의 말씀을 배운 사람이니, 우리한테 네크로 영입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진 못 한다."
"경운이가 요즘 중국 쪽과 연락이 잦은 것 같습니다."
"놔둬라. 경운이가 중국이랑 줄을 가져서 나쁠 것도 없지.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이 나이가 되어도 막막할 뿐이다. 일본보다 말이 안 통하긴 하지만,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두면 좋은 거다. 어차피 경운이는 네 상대가 못 되니, 일본 대신 중국과 손잡을 상황으로 몰리면 그때 네가 나서면 된다. 경운이는 네 대신 길 닦는 거로 생각하고 너그럽게 대해라."
결국, 준비했던 수많은 말을 모두 뱃속에 삼키고 머리만 조아렸다.
'나 아직 멀었구나. 연륜이나 경험이라는 건 무시할 게 못 되는구나. 김 비서는 사람이 방정맞아 멀리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구나.'
"가끔 말이야. 기사에 70% 진실에 10% 거짓을 섞어서 내보내 봐. 20% 진실은 감추고. 무엇을 감추고 어떤 거짓을 말하는지에 따라 사람들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관찰해 보아라. 네게 큰 도움이 될 거다. 그 부분은 김 비서가 잘하니, 필요하면 불러다 쓰거라. 나야 김 비서보단 의사가 더 필요한 사람이지."
"할아버지, 오래 사셔야 해요."
반형운의 진심이 전달되었는지 반 회장은 껄껄 즐겁게 웃었다.
"이눔아. 얼른 장가가서 증손주나 낳아야지. 내가 하필 네 꼬임에 넘어가서 혼인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이게 뭐냐. 경운이나 다른 놈들보다 먼저 결혼해서 아들 낳아야지. 안 그럼 속 썩일 일 많이 생긴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눈에 차는 여자가 없어서."
"하긴. 네 수준에 맞는 여자가 한국에 몇 있겠느냐. 그래도 좀 서두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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