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이면 전생에 부부
"오빠, 모르는 번호로 전화 들어왔어."
"나두."
똑같은 모르는 번호로 다섯 모두에게 전화가 들어왔다.
"동해, 현성이 그리고 성필아. 부모님들께 전화해서 혹시 문제 있는지 알아봐. 난 이 번호에 전화해볼게."
[끝내 통화되었네요. 네크로 유저 맞으시죠?]
"맞습니다. 누구십니까?"
[배틀넷입니다. 원래 OB 길드 세웠던 사람입니다.]
"제 번호는 어떻게?"
[수소문해서 어렵게 알아냈습니다.]
전화번호가 유출되어 인터넷에 돌아다녀서 다섯 모두 전화번호를 바꿨다. 이러면 굳이 바꿨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용무가 있습니까?"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데요. 지금 계시는 곳 말씀해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제주도입니다."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김연이 손가락으로 'OK' 모양을 만들어서 부모님들 모두 무탈하다고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광해는 전화를 끊어야 하나 고민했다.
[저녁에 시간 내준다면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이틀 뒤에 서울로 갑니다. 급한 일 아니라면 그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전화로 하긴 좀 그래서 그럽니다. 시간 많이 뺏진 않을 겁니다. 그럼 허락한 거로 알고 출발하겠습니다. 저녁에 봅시다.]
광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뭐 이런 놈 다 있나 싶기도 했지만, 광해보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찾아오겠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놈 발은 그놈 몸뚱이에 달렸으니까.
"오빠, 호신용 무기 같은 거 준비해. 딱 봐도 이상한 사람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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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느낌의 일식집. 방음을 잘했는지 손님들이 다 점잖고 조용한지,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광해는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를 살폈다.
하나는 덩치가 좀 있고 인상도 센 편이었다. 역천처럼 여유가 느껴지는 강자의 얼굴이 아니라 성질대로 자란 철부지의 인상이 더 강했다.
하나는 점잖은 인상이지만, 약아 보였다. 계산적인 사람으로 보였는데, 예전의 광해랑은 다른 느낌이었다. 광해는 효율을 따지는 계산이었고, 또래로 보이는 저 남자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으로 보였다.
"배용숩니다. 이광해 씨 맞죠?"
"맞습니다."
"여긴 내 후뱁니다. 내가 성질 급해서 설명을 잘 못 하거든요."
"조세영이라고 합니다. 위명이 자자한 분을 직접 만나다니 영광입니다."
배용수의 입가에 언뜻 못마땅한 기색이 서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협상 상대를 춰주는 걸 거슬려 하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 형님이 OB 길드장 자리를 양도하고 잠적한 적 있습니다. 그게 역천의 음모였다면 믿을 수 있습니까?"
"글쎄요. 전혀 들은 소문이 없어서 뭐라 하기 힘드네요."
"술 마시는 자리에서 WM 길드 애들이 먼저 와서 시비 걸었고, 술김에 누군가가 땅콩을 던졌습니다. 그게 전붑니다. 여자들이 먼저 몸싸움 걸었고 우린 그저 멱살 잡는 여자들을 밀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걸 고려신문에서 기사 엄청 올려서 이슈화했고, 덕분에 우리 모두 곤욕을 치렀습니다. 결국 무죄를 인정받고 다들 무사히 풀려났지만, 역천의 음모에 길드가 해체되었죠."
'제멋대로 살아온 놈들이군. 자기들 사정을 내게 공감해달라고 강요하는구나. 이런 놈들은 대체로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 말이 안 통하는데.'
비즈니스를 하려면 자기가 내놓을 거, 상대에게 원하는 거, 이 두 가지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협력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분위기 조성하고 사연 만드는 놈들은 협력 과정에서도 계약대로 안 하고 작은 이득을 취하려고 발악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천 길드에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조사해보니 장난 아니더군요. 역천은 친일파 가문의 대표 격인 고려신문 회장 손자였고, 일본 최대 길드로 꼽히는 가미카제 길드의 후원을 백억 이상 받았습니다."
'사실일 가능성이 크구나. 아까 시비 얘기할 때랑 달리 목소리에 자신감이 실렸어.'
"상대가 하도 대단해서 저희가 참으려 했는데, 형님이 분을 못 참고 투자를 결심했습니다. 단기간에 역천 길드를 따라잡으려고 이미 십억 이상 쏟아부었고, 추후에도 투자를 계속할 예정입니다. 역천 길드에 심은 정보원들이 며칠 안에 역천이 국가를 선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급히 이광해 씨를 만나려 했습니다."
"안타깝네요. 왕의 혈통은 이미 복용했습니다."
"그 정도 정보는 저희도 알아냈죠. 저희가 원하는 건 이광해 씨가 우리 길드에 소속되어 왕이 되는 겁니다."
'전형적인 사기꾼들 패턴인데? 구구절절 사연 늘어 동정 얻고, 은근슬쩍 힘을 과시해서 상대 판단 흐리고.'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제게 뭘 줄 건지 확실히 말씀해 주세요."
대화를 주도했다고 여겼던 조세영이 살짝 당황했다. 지금까지 이빨 깐 게 전혀 소용없음을 느꼈다. 여태껏 어수룩한 사람만 상대해서 미리 짠 대로 술술 풀려나갔는데, 처음으로 벽을 마주쳤다.
"음, 그러니까."
말꼬리를 흐리며 조세영은 배용수의 눈치를 봤다. 조세영이 기세에서 완전히 밀렸다고 판단한 배용수는 자신이 나섰다. 이런 쪽으로는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왕이 되면 세금 0.3%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건 이광해 씨 몫입니다. 대신 모든 업무는 우리가 볼 겁니다. 왕이 직접 해야 하는 일들도 우리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세금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 현금으로 보상합니다."
"바지나 허수아비를 넘어 인형이 돼달라는 말이군요?"
광해는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으나 마지막에 소리가 살짝 커지는 걸 막지 못했다.
"왕이 되어 세금 공짜로 가져가고,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잠깐 일해주고. 남은 시간은 뭘 하든, 자유입니다. 이처럼 좋은 조건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역천 길드가 지배하는 희망의 등대를 탈환할 능력 됩니까?"
"국가 세우는 일은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조건에 따를지만 얘기하세요."
"시원하게 나오시니 참 좋군요. 거절합니다. 다시 같은 일로 연락 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광해가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떠날 때까지 배용수와 조세영은 아무 말도 못했다.
"저 새끼 지금까지 차 한 모금 안 마시고 젓가락 건드리지도 않았지?"
"네, 형님. 근데 그게 왜요?"
"시발, 대학 나오면 뭐해? 처음부터 우리 제안 다 짐작했고 거절할 생각으로 왔다는 뜻이잖아. 너 설마 사이비 대학 나온 건 아니지?"
"형님, 사이버 대학입니다. 그것도 엄청 어려운 거예요."
한편, 밖으로 나온 광해는 옷깃을 파고드는 바닷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직도 얕보이고 있구나. 길드 확장 고민해봐야겠다. 본인 실력도 중요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강함도 중요하다.'
0.3%의 세금을 조건으로 걸었다는 건, 광해가 절대 나라를 세우지 못할 거라고 여긴 탓이었다. 즐기자 길드가 대부분이 상인과 대장장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즐기자 길드 소속이었던 광부와 꽤 많은 대장장이가 길드 탈퇴한 것도 광해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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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택입니다. 이건 도청 안 받는 통화니까 조심할 필요 없습니다.]
"네, 네크로 유저 영입 실패했습니다. 애초에 거절할 생각으로 나왔더군요."
[전문가 분석이 빗나가길 바랐는데, 어쩔 수 없군요.]
호치택은 당나라 이 씨 후손이었다. 당나라가 망한 후 군벌들의 척살을 걱정해 성을 바꿨다. 전대 국가주석도 배출한 중국 유수의 명가였다.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여론 쪽에 힘을 더 싣고 영입에 힘쓰십시오. 역천 쪽은 우리가 견제하겠습니다.]
"역천의 해군 위력이 어마어마할 텐데요."
[시간이 흐를수록 차이가 줄어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지요.]
'시발 새끼. 무슨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해?'
[우리는 중국 유저의 이름으로 역천을 도발할 겁니다. 우리 길드가 직접 나서지 않고 중소길드들을 종용해 작은 사고를 일으킬 겁니다. 우리가 포섭한 에픽 퀘스트 받은 유저들이 왕의 혈통을 얻기를 기다리는 거죠. 열 받은 역천이 초인연맹과 철혈팔기가 대륙에 진출해 국가 세우는 걸 견제해주면 저희야 고맙죠.]
"우리 길드가 중앙섬에서 역천이 차지한 도시 세 개를 괴롭혀주는 건 어떨까요?"
[네크로 유저를 포섭했다면 그렇게 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역천이 남은 두 길드를 전력으로 견제하도록 우리가 숨죽여야 합니다.]
"일본 길드는 어떡합니까? 거긴 역천이랑 같은 편이니까 대륙에 가서 국가 세울 수 있잖아요."
[역천과 손잡을 길드가 왕의 혈통을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중간에 퀘스트 실패해서 페널티 받고 있습니다. 다른 길드가 왕의 혈통 마지막 퀘스트만 남겨두고 있는데,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성공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역천과 신풍은 일본 길드도 견제해야 합니다.]
"신풍이 가미카제 맞죠? 그들이 네크로 영입하면 어떡합니까? 네크로랑 역천이 거래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내가 역천이라면 네크로 유저를 영입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자를 키워줄 정도로 역천이 멍청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역천이 네크로를 영입하는 데 힘쓴다면, 우리가 걱정해야 할 유저 명단에서 지워도 됩니다.]
"그럼 게시판에서 일본 열심히 욕하고 사람 모으면서 레벨업만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역천 길드 정보 수집에 힘써주시고요. 첩자들이 전하는 정보를 그대로 믿진 마시고.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얘기하는지 분석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거짓말 한 자들과 역천에게 속아서 거짓 정보를 전달하는 놈들을 잘 구분한 후 어떻게 써먹을지 계획을 짜서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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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도착한 후 냉면이 유명한 고깃집에서 간단하게 뒤풀이했다. 즐거운 여행이지만 다들 조금씩 지쳐 있었다. 그래서 고기와 냉면으로 배를 채운 후 빠르게 헤어졌다.
"너도 피곤할 테니 그냥 들어가. 우리 알아서 택시 타고 버스 타고 집 간다니까."
동해가 운전해주겠다고 고집부리자 부모님이 말렸다. 현성이 부모님은 누나가 와서 차로 데려갔다. 성필이 부모님도 택시 잡아타고 떠났다.
넷은 동해 차로 집에 먼저 가고 광해는 따로 약속이 있어서 택시를 잡아탔다. 문자로 찍힌 주소로 가니 외관이 무척 고풍스러운 작은 커피숍이었다.
커피를 안 마시는 광해는 진한 커피 냄새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커피 냄새에 섞인 생나무 냄새가 광해 기분을 적절하게 조율했다.
"가끔 오는 커피숍입니다. 커피 맛보다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요."
역천의 잘생긴 얼굴은 몇 번 봤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여자가 저 정도로 생겼으면 뭘 요구하든 쉽게 거절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가 게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야.'
"배틀넷 만났더군요."
"그런 건 어떻게 알아냅니까?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럽니다."
"배틀넷이 우리 길드에 눈과 귀를 많이 심어뒀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죠."
"24시간 감시하는 건 국정원도 힘들 것 같은데요?"
"대부분 유저는 게임 접속이 규칙적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접속하지 않으면 알아보는 거죠. 너무 언짢게 생각할 필욘 없습니다. 모두 게임에 접속하지 않으니 궁금해서 알아봤고, 배틀넷이 정해진 시간에 접속하지 않으니 알아봤습니다. 공교롭게 다 제주도에 있더군요."
"커피숍은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분위기군요. 근데 당신 분위기를 보니 협박하려고 부른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협박보다는 간절한 부탁이라고 하는 게 어떻습니까?"
"거래가 아닌 부탁이라. 줄 게 없다는 말씀이군요?"
"구두로 약속할게요. 언제든 상응한 보답을 하겠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반형운은 자신감 넘치던 예전과 달리 꽤 망설였다. 본인 생각에도 지금 자신의 행동이 격 떨어진다고 여겼다. 그러나 최 비서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자니 이광해를 무시하고 나아가서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느꼈다.
"내일 우르크 제국이 해체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나라를 세울 겁니다. 국가 이름 '고구려' 어떻습니까?"
"괜찮네요."
영혼이 전혀 없는 대답.
"이광해 씨는 당분간 중앙섬에 가서 생활했으면 합니다."
"이유는요?"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그래도 예의상 말씀드려야죠. 중국 또는 일본 길드들이 이광해 씨와 접촉을 시도할 겁니다. 왕의 혈통이 총 8개 밖에 없거든요."
"단순히 그 이유라면, 누구와도 손잡지 않겠다고 약속드리죠."
"단순히 그 이유는 아닙니다. 네크로 유저가 희망의 등대에 있으면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전번에 포탈 뚫었던 것처럼, 드래곤 산맥을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는 길을 뚫을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겨요."
광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했다. 중앙섬에 가면 몹을 잡아도 레벨업이 안 된다. 우륵하이에 가서 유니크 템을 노릴 수도 있지만, 드래곤 산맥보다 드랍률이 형편없다.
"부끄럽지만, 왕이 되면 추방 기능이 있습니다. 전 대외적으로 저랑 네크로 유저가 사이 무척 좋다고 여겨졌으면 합니다."
"저만 가면 되나요?"
"일행도 함께 가주시죠. 이후 여력이 생기면 아이템이나 다른 보상을 꼭 하겠습니다."
"12시 전에 답변 드릴게요."
광해가 떠난 후 반형운은 손으로 자기 얼굴을 힘껏 쓸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제치고 바로 회장이 되려는 목표를 위해선 더한 일도 해야 한다.
'이따위 수준 낮은 협박밖에 생각하지 못하다니. 반성해야겠어.'
평소 마음에 들던 진한 커피 향이 갑자기 역겹게 느껴졌다. 시킨 커피에 입도 안 대고 반형운은 커피숍을 떠났다. 환한 얼굴로 좀 더 머물다 가라고 권유하는 사장님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도로변까지 나가니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밟아. 아무 고속도로나 올라서 힘껏 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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