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2
유니크 망치는 천만 원에 팔렸다. 수수료 떼고도 8백만 원. 레어 아이템도 처분하고 가진 아이템과 골드 전부 백만 원 정도에 처분했다.
'다음에는 도둑이나 무인 키울까?'
빈털터리 캐릭터를 삭제하고 백화점에 갔다. 부모님이 입을 회색 청바지 그리고 코트 한 벌씩 사고 동생에게 줄 패딩도 샀다. 사은품으로 따뜻해 보이는 짧은 목도리 두 개 받았다. 부모님 연세 생각해서 옅은 남색으로 골랐다.
인터넷으로 한우 세트 주문해서 부모님 집에 배달시켰다. 저녁 시간 전에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코멘트도 달았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후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곱게 포장한 선물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장거리 버스를 탔다.
"엄마, 형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따뜻하게 반겨줄 거란 생각과 달리, 문을 열어준 동생은 대뜸 고개 돌려 고함부터 질렀다. 광해는 바깥 날씨보다 훨씬 차가운 집안 냉기를 감지했다. 공감 능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눈치까지 밥 말아 먹진 않았다.
"동해야. 어머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형은 왜 왔어? 우리 걱정 말고 서울에서 열심히 해서 혼자 성공하라니까."
흐트러진 꼴을 못 보는 어머니건만, 지금 집 꼴은 광해 기준으로도 꽤 지저분했다. 몇 년 전 입주할 때 바른 벽지가 벌써 색이 바래면서 음울한 분위기를 돋웠다.
"무슨 일이세요?"
풀이 죽은 어머니와 화가 머리꼭지까지 솟은 동생 대신 그나마 침착해 보이는 아버지한테 질문했다.
"니 어미 보증 섰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보증까지. 그냥 보증 선 거였으면 집안 분위기가 이토록 어수선하지 않겠지. 분명히 빚진 누군가가 튄 게 틀림없다.
"액수가 커요?"
"크진 않아. 집 정리하고 동해 차 정리하면 얼추 갚을 수 있다."
"얼마예요? 이 집 아버지 퇴직금으로 산 거잖아요. 그리고 동해 차 없으면 돌아다니기 불편해 어떡해요."
동해는 어릴 적 사고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아이들 놀림 때문에 중학교까지만 다녔고, 외출을 극도로 꺼렸다. 광해가 월급 차곡차곡 모아서 차 한 대 뽑아준 후부터 외출이 잦아지고 사람도 밝아졌다.
"형. 형 벌어서 나 차 사주고 가게 대출 갚는 데 보태고. 게다가 달마다 생활비도 꼬박꼬박 보내왔잖아. 양심 있으면 형 돈 더 못 써. 월세 살고 나도 가게 나가 일하면 되니까 형은 빠져."
"가족끼리 그런 게 어딨어. 정 그러면 네가 빌린 셈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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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분위기를 내는 사무실. 단순히 인테리어만 보면 사무 공간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반 전무. 이번 유니콘 사의 가상현실 기기 심사가 통과될 것 같다고?"
질책성이 다분한 아버지의 말에 고려신문 반 전무는 휑한 머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모든 수단을 썼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아들이라고 봐주는 사람 아닌 거 알지? 아들이 반 전무 하나인 것도 아니고. 요즘 많이 해이해진 것 같아. 여자 찝쩍댄다는 소문만 무성하고."
소파에 반쯤 뉜 몸은 힘없어 보였지만, 목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우렁찼다.
"누가 되지 않게 깔끔히 정리하겠습니다."
"반 실장. 가상현실 기기 심의가 통과되면 어떨 것 같아?"
반 전무의 아들, 그러니까 회장 손자다.
"회장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신문사가 크게 흔들릴 것 같습니다."
"헛소리. 회장님이 계시는데 우리 고려신문이 왜 흔들려?"
아버지의 불같은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반 전무가 황급히 말을 끊었다. 그러나 곧 삼십을 바라보는 반 실장은 겁이 없었다.
"아버지. 우리 고려신문뿐 아니라 모든 언론사가 흔들립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전문가들 공동 소견입니다."
전문가에 약한 반 전무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옛날엔 사람들이 정보 습득하는 경로가 적었습니다. 그땐 신문에 거짓 뉴스 하나 실어서 대중을 기만하고 선동하는 거 아주 쉬웠지요. 다만, 안타깝게도 서로 살 잘라 먹느라 연합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눠 먹기엔 파이가 너무 작았다.
"그러다 인터넷 시대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아주 간편하고 쉽게 정보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시민기자니 뭐니 하는 얼뜨기조차 언론인입네 하면서 기사를 인터넷에 마구 싸 갈겼죠. 다행히 그때 대형 언론사들이 정신 차리고 카르텔을 형성했습니다. 자본과 수십 년 쌓아 올린 영향력으로 인터넷 언론을 선도하기 시작했죠."
"지금 언론은 우리 손에 거의 장악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상현실 기기가 나오면, 가상현실 네트웍이 인터넷을 대체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거 겨우 게임 기기 아니냐? 게임이나 하는 폐인들 때문에 헤게모니가 이동할까?"
"아버지. 유니콘 사는 국제적인 그룹입니다. 그 뒤에 얼마나 대단한 자본들이 있는지 아버지도 소문 들으셨을 겁니다. 그런 자들이 고작 게임 출시해서 방구석 폐인들 곰팡이 낀 돈이나 뜯어내려고 했겠습니까?"
아들의 반박에 반 전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상현실 기기가 컴퓨터를 대체할 겁니다. 지금 모든 인터넷 사이트와 콘텐츠는 MS사의 OS에 제한받습니다. 2D 혹은 2.5D의 그래픽. 가끔 3D를 구현하긴 하지만, 그걸 제대로 지원할 정도로 네트웍과 컴퓨터가 발전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상현실 기기는 클라이언트가 더 많은 일을 하는 식의 프로토콜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컴퓨터처럼 작게 만들 필요도 없으니 하드웨어의 제한을 덜 받습니다. 게다가 가상현실 물리 엔진이 기기 자체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서버는 그저 클라이언트에 기본 정보만 전달하면 됩니다. 클라이언트가 정보에 따라 직접 콘텐츠를 생산합니다."
"가상현실 기기가 할 수 있다면, 컴퓨터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반 전무는 자신한테 불리한 말만 하는 아들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 때문에 힘듭니다. 인터넷은 OSI 프로토콜 대신 TCP/IP 프로토콜을 사용합니다. 이론과 실제 응용 사이에 갭이 존재하죠. 그걸 모두 뒤집고 처음부터 하긴 힘듭니다. 반면 가상현실 기기는 새로운 프로토콜로 처음부터 쌓아갑니다. 야금야금 현재 WWW로 대표되는 인터넷의 지분을 갉아먹겠죠. 그 첨병 역할을 하는 게 가상현실 게임입니다."
반 전무는 구체적인 건 못 알아들었지만, 핵심은 파악했다. 모 스마트폰이 독자 노선으로 시장 일부를 침식했던 것처럼, 가상현실 기기가 똑같은 짓을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가상현실 기기가 스마트폰보다 훨씬 위력적이라는 겁니다. 스마트폰은 기존 인터넷 환경에 기생해야 했습니다. 반면, 가상현실은 자신의 네트웍으로 인터넷을 대체하려고 하죠. 사태의 핵심은 더 나은 기술이 낡은 기술을 대체한다는 게 아닙니다. 인터넷엔 주인이 없지만, 가상현실 네트웍은 유니콘이라는 주인이 있다는 게 관건입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이라고 손 놓고 있다간 큰 낭패를 볼 겁니다. 회사를 평가할 때 현재만 보는 게 아니라 잠재력과 장래성도 함께 보니 말입니다. 고려신문이 쓸모없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순간 수많은 벗이 등 돌릴 겁니다."
"반 전무. 이번 사안이 얼마나 중대한지 알겠나?"
"회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제 능력으로 막을 일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형제 중에서 가장 앞서갔는데, 이번 일로 점수가 단단히 깎였다.
"알아. 난 자네가 유니콘 사와 부딪치며 반 실장처럼 깨닫길 바랐네.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임을 알아채길 바랐지. 나아가서 대책까지 세워오길 바랐는데. 이번 일로 자네한테 실망이 크네. 다음 회장은 손주들 속에서 골라야겠어. 자식 중에선 반 전무가 그나마 제일 괜찮았는데."
"넌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냐?"
밖으로 나온 반 전무는 아들을 책망했다.
"아버지. 제가 보고서 세 번이나 올렸는데 안 보셨지 않습니까."
"손주 중에서 회장 고르면 넌 형님 아들한테 안 되는 거 알지?"
"그 새끼가 난 놈은 난 놈이죠."
"어떻게든 내가 회장 되어야 너도 회장 될 수 있다. 명심해."
"그러니까 제가 중요하다고 올린 보고서는 잘 읽어보시지 그랬습니까."
"지금부터는 네 말 귀담아들으마."
"밑에 애들 데리고 계획 몇 개 짰습니다. 그 신인 여배우는 정리하시고 일 좀 합시다. 큰아버지가 회장 되면 우리 가족은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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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으로 생긴 빚 1억1천 대신 갚아드리고 통장에 5천 남았다. 동해를 장가보내려면 최소 5억 없으면 힘들다. 집도 있어야 하고 체인점 하나 해서 사장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니 1억1천 날렸다고 속상해할 시간도 없다. 캐릭 삭제하면 30일 동안 새로운 캐릭을 만들 수 없지만, 각 직업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레벨업 계획도 짜야 한다.
장거리 버스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원단 냄새에 기름 냄새가 섞인 오묘한 향취. 이 냄새를 맡을 때마다 두근거렸었다. 멀든 가깝든 여행을 뜻하니까.
[속보] 온라인 게임 시장 점유율 78% 레전드. 곧 가상현실 게임 출시?
저 온라인 게임에는 스마트폰 게임이 포함되지 않았다. 언론들은 누군가를 띄우거나 깎아내릴 땐 늘 저런 식으로 통계 수치를 비튼다. 비록 대부분 뉴스는 팩트를 말하지 않지만, 뉴스가 담은 거짓을 통해 저의와 팩트를 대충 유추할 수 있다.
기사를 클릭하니 레전드를 가상현실 게임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가상현실 기기의 안전성 심의는 이미 통과했고 곧 첫 물량이 한국 시장에 출시된다.
'한국 사람들 성격에 궁금해서라도 한 번은 해볼 거다. 가상현실 기기 사서 피시방처럼 꾸리면 대박 나지 않을까?'
그때 핸드폰이 따르릉 울렸다. 버스에 동승한 사람들 눈이 광해에게 쏠렸다. 갑작스러운 주목에 광해는 부담을 느꼈다. 딴엔 평범한 벨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관심 끌 줄은 몰랐다.
"여보세요."
[혹시 레전드 게임에서 '성기삽니다', 크흡, 죄송합니다. '성기삽니다' 유저분 맞으신가요?]
목소리가 이쁘다.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고객 상담원 10085번입니다. 전화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유니콘 한국 지사에서 가상현실 게임 출시 이벤트로 유저들 중에서 무작위 추첨을 했는데요. '성기삽니다' 님이, 크흡, 당첨되셨습니다. 푸흐흐.]
의외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목소리가 예뻐서인지 이벤트 당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기분 상할 일 많았는데도 화나지 않는 걸 보니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죄송합니다. 이벤트에 당첨된 고객님에겐 가상현실 기기가 무료로 제공됩니다. 회사로 오셔서 직접 계약서에 서명하셔도 되고요. 설치 기사님이 방문해서 설치할 때 계약서에 서명하셔도 됩니다.]
"계약이요?"
[대단한 건 아니고요. 가상현실 기기는 뇌파를 비롯한 여러 생체 신호를 통해 게임 캐릭터를 제어하는 방식입니다. 그 과정에 정보 전달의 손실이나 생체신호를 잘못 해석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용자에겐 전혀 해롭지 않고요. 그저 컴퓨터 사용하시는데 OS가 에러 일으키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저희 직원이 댁에 방문하셔서 게임 정보와 무관한 생체신호 처리 로그 파일만 가져다가 분석할 겁니다.]
"제가 캐릭터 갓 삭제했는데요. 복구 신청할 수 있나요?"
캐릭 없는 걸 알면 당첨에서 누락시킬까 봐 걱정되었다.
[복구 신청하시면 일주일 걸립니다. 가상현실 기기로 접속하시면 한 달 제한과 상관없이 캐릭터를 새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단, 새 캐릭터를 만드신 시점부터 기존 캐릭터를 복구하고 싶어도 절대 안 된다는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 광해가 선뜻 동의하자, 유니콘 사에서는 집 주소를 비롯해 필요한 개인정보를 적을 파일을 메시지로 보냈다. 서식대로 작성한 후 메시지로 답신한 광해는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을 안고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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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버리셔야겠는데요."
오토바이 헬멧 정도, 기껏 양보해도 컴퓨터 본체 정도 크기로 예상했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광해는 1층에 거주하는 고시생을 찾아가 침대를 2만 원에 팔아넘겼다. 고시생은 원래 쓰던 퀴퀴한 냄새가 밴 침대를 광해 도움으로 버린 후 광해가 쓰던 깨끗한 침대로 바꿨다.
"알뜰하시네요."
"다들 이리 살지 않나요?"
"남자는 좀 어렵죠. 남자가 쩨쩨하게, 남자가 되어서는. 이런 말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니까 가끔 손해인 줄 알면서도 못하게 되더군요.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으면 편하게 살 텐데."
설치는 순식간에 끝났다.
"여기 푸른 버튼 보이시죠? 한 번 눌러보세요."
푸른 버튼을 누르자 가상현실 기기가 침대처럼 변했다. 등받이가 완전히 누웠고 발을 대던 부분이 떠올랐다.
"이건 침대 시트입니다. 가상현실 기기에만 사용할 수 있는 시트죠. 저 상태에서 시트까지 깔면 완전 침댑니다."
침대는 과학이었다.
"이건 매뉴얼입니다. 대부분 쓸모없고. 키와 체중에 따른 등받이 각도에 관한 부분만 참고하시면 됩니다. 눕는 게 편하다고 오해하실 수 있는데, 비스듬히 눕는 게 훨씬 편합니다. 물론 잘 때는 평평하게 눕는 게 최고지만요."
받을 걸 다 받은 후 계약서를 꼼꼼히 읽었다. 뜻이 모호한 부분은 영문 계약서를 찾아 독해했다. 딱히 사고에 관한 면책 조항이 없는 걸 확인한 광해는 유니콘 사의 자신감에 매료되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부터 느낌이 좋더라니. 왠지 대박 날 것 같아.'
"전기세. 제길."
설치 기사가 떠난 후 매뉴얼을 꼼꼼히 살핀 광해는 전기 소모량을 보고 욕지거리가 나왔다. 가상현실 기기 혼자서 서버 몇 대 분량의 전기를 소모했다.
'이판사판이다. 딱 석 달만 하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회사 다닌다. 사장님이 그때 날 좋게 봐주셨으니, 사정하면 매정하게 내치진 않으실 거야.'
부팅에 5분이나 걸린 기기에 몸을 뉘었다.
- 작가의말
그간 감기로 하루에 16시간 잤습니다. 문피아 접속해서 글 올리고 바로 컴퓨터 껐습니다. 댓글 확인 오늘부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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