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웜 레이드1
"뭡니까?"
"다음 단계 준비."
드워프 지휘자는 네크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도면에 고정한 눈엔 작은 흠이라도 찾아내 을을 혼내주겠다는 갑의 각오가 듬뿍 깃들었다.
'그래, 당연히 저대로 그레이트 웜을 묶어두고 일방적으로 데미지만 입힐 수 없었겠지.'
가슴에 묵직하게 품었던 불안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퀘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과정이 너무 순조로웠다. 내심 대처할 수 없는 돌발상황이 터질까 봐 늘 불안했다.
드워프들은 다음 단계를 알고 준비까지 마쳤다고 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레이트 웜이 독을 살포하자 땅 두꺼비들이 기절했다. 땅 두꺼비들은 갈고리로 끌려와 해독제를 먹고 빠르게 회복했다.
"이번엔 아니네. 잠시 쉬어도 괜찮네."
전투 망치를 잡고 튀어 나가려는 네크로를 드워프 지휘자가 말렸다. 과연, 전과 달리 그레이트 웜은 살포를 멈추지 않았다. 그레이트 웜 주변에 독으로 된 안개가 자욱했다.
"관통 대포 발사."
마법 대포인지 발사할 때 소음도 없고 반동도 없었다. 현대 병기에 익숙한 네크로는 가만히 있는 대포에서 미스릴 포탄이 빠르게 슉 나가는 모습이 되게 거슬렸다.
일부 실패했지만, 대부분 미스릴 포탄이 그레이트 웜의 몸에 반 이상 박혔다.
"마나포 발사."
초반에 온갖 공격으로 그레이트 웜의 반응을 볼 때를 제외하면 한가했던 마나포. 네크로에겐 며칠 동안 잊힌 존재였다. 존재감이 잠시 말살되었던 울분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마나포가 연신 빛줄기를 쏘아냈다.
"포열을 안 식혀도 괜찮습니까?"
"그건 열화 판이고. 저건 포열이 쉽게 달아오르지 않는다네."
그레이트 웜의 피통이 지속해서 내려갔다. 마나포는 그레이트 웜의 몸에 박힌 미스릴 포탄을 과녁으로 삼았다. 직접 공격은 아무 피해도 입히지 못했고 미스릴 포탄에 맞은 공격만 생명력을 깎았다.
"예상보다 더 강력하군. 미스릴을 녹이는 독이라니."
처음에는 티가 안 났지만, 독을 오래 살포하니 미스릴 밧줄이 점점 가늘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레이트 웜의 몸에 박힌 미스릴 포탄도 조금씩 가늘어지다가 밖으로 툭툭 뱉어졌다. 그레이트 웜을 속박하던 미스릴 밧줄이 완전히 사라지고 미스릴 포탄도 모두 제거한 후, 그레이트 웜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게 되네?'
물렁물렁한 지렁이 몸매는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머리를 쳐든 적도 없었다. 그러던 그레이트 웜이 몸 절반이나 꼿꼿이 세웠다. 위험한 적과 싸울 때 만전의 경계태세를 취한 뱀처럼, 그레이트 웜의 거대한 몸이 마천대루처럼 우뚝 일어섰다.
"각자 작전 지역으로 철수한다."
철로 만들고 미스릴을 도금한 마름쇠가 곳곳에 널렸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자기들이 뿌린 마름쇠를 밟아 가시에 찔릴 걱정이 없었다. 그레이트 웜을 상대로 만든 마름쇠는 가시 하나만 해도 네크로 크기였다.
네크로도 지휘자를 따라 철수했다. 한창 걷고 있는데 쿵 소리와 함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긴장하지 말게. 껍질을 다 버리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까."
십여 겹이나 벗은 껍질을 드워프들이 미스릴 실로 기워버렸다. 그 실들이 독에 모조리 녹았기에 저지력은 떨어졌지만, 십여 겹이나 되는 껍질을 벗어던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레이트 웜은 바로 일어나지 않고 독을 분출했다. 독을 넉넉히 분출한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독이 없으면 드워프들이 접근해서 괴롭힐 걸 알기 때문이었다. 특히 방어력을 낮추는 네크로와 생명력 회복을 억지하는 제이크의 공격에 경계심을 품었다.
"적당한 지능을 갖춘 상대는 참 쉽다네. 분명히 드래곤보다 더 강하지만, 함정에 잘 걸려들지 않는 드래곤과 달리 그레이트 웜은 설계하기 쉽지. 좀 더 똑똑하거나 멍청했으면 독을 분출하지 않고 껍질 벗는 데 전념했을 거야."
똑똑하면 드워프들이 철수하는 걸 알아차리고 독 분출을 멈췄을 거고, 멍청하다면 독을 분출해 드워프들의 재공격을 막을 생각도 못 했을 거다.
"미스릴도 얼마 없는데, 참 잘된 거지."
미스릴이 얼마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골짜기와 비슷한 지형의 끝에 미스릴로 만든 거대한 조각물이 있었다.
"미끼야. 미스릴로 지금까지 큰 피해를 입었기에 미스릴 조각상을 보면 파괴하고 싶을 걸세. 우린 미끼를 이용해 함정 파는 거고."
쿵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거리가 꽤 되어 땅의 흔들림이 덜했다.
"아마 껍질 다 벗는 데 하루 정도 걸릴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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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자고 일어나니 알람 울리기 2분 전이었다. 알람을 취소한 광해는 샤워도 하고 면도도 했다. 핸드폰에 인터뷰를 요청하는 문자가 여럿 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들은 발신자 제한으로 돌려버렸다.
"형. 야마토가 우릴 공격할 작정이야."
"올 게 드디어 오는구나. 수비하고 상대 수도까지 밀어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해야 해?"
진돗개는 야마토랑 완전히 척지는 게 탐탁지 않았다.
"게시판에 각 국가 유저에게 길드 선호도를 조사했는데, 한국은 역천이 1위고 우리가 2위였어. 대한제국이 3위고. 역천이 27% 지지율이었고 우린 23% 그리고 대한제국이 19%였지."
평강 길드가 15%로 4위였다.
"일본은 말이야. 가미카제가 69%고 야마토가 25%였어."
"투표 조작된 거라고 하던데? 우리나라도 평강과 대한제국은 계정 여러 개로 투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그러더라."
"국가마다 백만 명 이상이 투표했어. 조작해봤자 몇 퍼센트 할 수 있을까? 하여튼 야마토가 나라를 세우고 일본인 국왕을 보유했음에도 일본에서 지지를 못 받고 있어."
"그거랑 지금이랑 무슨 상관이야?"
"야마토는 초반에 가미카제랑 비슷했어. 그런데 대륙 진출하던 찰나에 역천이 야마토의 배를 모조리 가라앉혔어. 그때 일본 언론이 득달같이 야마토를 물어뜯었지."
"후에 야마토가 나라를 세우고 확장할 땐 언론이 엄청 춰올렸어. 그런데 역천의 빙하시대 때문에 도시를 우리에게 넘기고 마을이 공격받아도 무시할 때부터 언론이 또 돌아섰지."
"유저들만 투표한 건 아니지만, 유저들도 비슷하게 각 길드를 지지한다고 보면 돼.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야마토는 작은 땅에 만족해야 할 거야. 그러나 야마토의 야심은 작지 않아. 다른 길드들은 대륙섬에서 템 얼마 얻었는지 감추려 애쓰는데 야마토는 자랑 못 해서 안달이었어."
야마토가 마나 동결로 고구려 수도를 함락했더라면, 불리한 여론을 뒤집고도 남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식이 새서 되레 당했다. 자금 소모를 줄이려고 도시와 마을을 양보했던 게 가시가 아닌 비수가 되어 야마토를 찔렀다.
"형 얘기는, 야마토가 우릴 제물로 삼아 국내 여론을 유리하게 바꾸려 한다는 거야?"
"우리 도시랑 마을 다 빼앗은 후 적당한 대가를 주고 초인동맹의 수도도 함락하겠지. 그렇게 되면 대륙 서부를 혼자 차지하고 유리하게 여론 조성할 수 있어."
"우리가 반격해서 야마토 도시랑 땅 다 빼앗고 초인동맹 수도까지 가져오면, 야마토가 얻으려던 성과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 되겠네?"
"전부 내 추측이야. 정보가 부족해서 확신할 순 없어."
"우리가 수비만 하면 한국 유저들한테 욕먹겠지?"
"야마토가 기호지세인 것처럼, 우리도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야. 야마토가 공격하기만 하면 우리도 물러설 수 없어. 상대를 철저하게 박살 내야 해."
"형 올 때까지 최대한 버텨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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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의 어깨춤을 얻었습니다.
로그인하자마자 뜬금없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제이크, 뭐야?"
"그레이트 웜 껍질에서 찾아냈다."
골짜기와 비슷한 지형에서 드워프들이 여전히 작업하고 있었다. 그레이트 웜이 껍질을 다 벗고 천천히 기어오고 있었다. 마름쇠가 많이 박히면 멈춰서 독으로 녹였다. 다 녹이면 다시 앞으로 꿈틀거리며 기어왔다. 거대한 몸을 줄였다가 늘이면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지휘자에게 부탁해서 드워프 장인을 찾았다. 전투 상황이어선지 돈을 안 받고 공짜로 해줬다. 현찰 수백만 원을 절약한 네크로는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이름 : 드워프의 보물
분류 : 전투 망치
등급 : 신화
능력 : 타격 성공 시 일정 확률로 대상 방어력을 낮춤
능력 : 태풍
능력 : 급냉각
능력 : 급가열
능력 : 지진
특별 : 내구도 무한
'뭔가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옵션이 생길 줄 알았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결국 제이크의 비수가 해결책인가? 제이크가 감각계 도둑이 아니었다면? 내 사정을 고려해서 아이템이 비수가 된 건가? 아니면 드워프 중에 도둑 직업이 있는 건가?'
"이걸 착용하게."
가면이나 팔찌처럼, 평소에는 착용할 수 없는 이벤트 아이템이었다. 암벽 등반가들이 사용하는 특수 장비 느낌이 물씬 났다.
"내가 신호를 주면 뛰어가서 그레이트 웜을 공격하게. 그레이트 웜이 반격하면 우리가 위로 끌어올릴 걸세."
그레이트 웜이 오기 전에 연습했다. 드워프들이 전문가여서 그런지 오랜 기간 훈련했던 것처럼 손발이 착착 맞았다.
제이크 역시 네크로와 똑같은 비슷한 장비를 착용했다. 네크로와 달리 장비 구성이 꽤 단순했다. 게임 시간으로 하루에 한 번만 공격하는 제이크기에 네크로처럼 복잡한 장비가 필요치 않았다.
"유인한다."
골짜기에서 드워프들이 깨끗하게 철수했다. 드워프 사제와 주술사 그리고 마법사들이 그레이트 웜을 골짜기로 유인했다.
그레이트 웜은 타의로 몸이 골짜기로 향하는 것에 화가 났는지 꿈틀거림이 심해졌다. 그러나 결국엔 골짜기에 머리를 들이밀고 말았다.
골짜기 반대편에 있는 미스릴 조각상을 발견한 그레이트 웜이 만사 제쳐놓고 빠르게 전진했다. 단순히 미스릴로 만든 조각상이 아니라 그레이트 웜을 도발할만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네크로, 제이크, 공격."
드워프들이 설치한 장애물은 그레이트 웜의 속도를 조금씩 늦췄다. 그러다 골짜기 중반까지 오니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드워프 지휘자의 구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크로는 그레이트 웜의 등으로 힘껏 뛰었다.
네크로 발이 그레이트 웜의 등에 닿았을 때 제이크는 이미 칼날비 스킬을 펼친 후 드워프들에게 끌려 골짜기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드워프의 보물로 힘껏 내리쳤다. 열 번 정도 때리니 반투명하던 망치 머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스무 번도 안 되어 망치 머리가 변했다. 살짝 부풀었다가 원래 형태로 변했는데, 심장이 뛰는 그런 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숨을 쉴 때 가슴이 부풀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스킬 터질 확률이 올랐구나.'
기대감을 안고 그레이트 웜의 등을 두드렸다. 신나게 때리는데 갑자기 밧줄이 팽팽해지며 몸이 들렸다.
"지진이네. 본인도 피해 볼 수 있으니 잠시 이 상태로 있어야 하네."
지휘자의 말이 귓가에서 속삭이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 식충이들아, 공격을 쏟아부어. 그레이트 웜이 스턴 걸렸다."
지진이 그레이트 웜에게 스턴을 준 것 같았다. 스턴 상태는 방어력과 저항을 낮추고 회피율도 0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레이트 웜의 피통이 쑥쑥 내려갔다.
'뭐야? 피통이 꽉 찼네?'
1단계에서 40% 넘게 깎았던 피통이 꽉 찼다. 지금 새로운 공격으로 9% 정도 깎였다. 대략 7%는 제이크가 깎은 거고 남은 2%는 네크로와 드워프, 주로는 드워프가 깎은 거였다. 네크로는 방어력은 낮추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직접적인 데미지는 얼마 주지 못했다.
'설마 3단계가 있고, 3단계 시작 때 피통이 100%로 회복하는 건 아니겠지?'
비수의 회복 저지에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중간에 독을 뒤집어쓴 그레이트 웜에게 비수로 공격하지 못했기에 피통을 전부 회복했다.
지진이 끝나자 드워프들은 네크로를 다시 그레이트 웜의 등에 올려줬다. 망치 머리를 감싼 태풍이 그레이트 웜에게 옮겨가기 무섭게 드워프들이 네크로를 골짜기 위로 당겼다. 거대한 태풍이 그레이트 웜의 등에선 커 보이지 않았다. 0.1%에 가까운 피통을 깎고 태풍이 사라졌다.
"대기. 그레이트 웜이 독을 살포했네."
독의 부식력이 꽤 강한 편이어서 드워프들도 공격을 멈췄다. 쉬는 시간에도 드워프들은 투석기나 쇠뇌를 점검하고 문제를 발견하면 빠르게 해체해서 수리하고 다시 조립했다. 드워프치곤 감각이 '둔한' 부족들은 투석기의 포알이나 쇠뇌용 화살을 나르느라 여념 없었다.
"네크로, 공격."
훌쩍 등에 뛰어내린 네크로는 스킬 쿨타임이 돌아오지 않아 다소 밋밋해 보이는 망치를 내리쳤다. 딱히 데미지를 주려는 목적보다는 그레이트 웜의 방어력을 조금이라도 낮추려는 목적이었다. 아까 제이크의 칼날비 스킬이 7%나 깎은 거로 봐선, 피통은 회복했지만 방어력은 아예 회복을 못 했거나 아주 느리게 회복하는 것 같았다.
그레이트 웜이 앞으로 나갈 때마다 몸에 수많은 주름이 출렁였다. 다행히 땅의 정령왕의 축복으로 균형 능력이 향상했기에 잘 쓰러지지 않았다. 네크로의 컨트롤 덕분이 아닌 시스템 보정이었다.
망치를 규칙적으로 내려치다 보니 어느새 몰입했다. 그래서 밧줄을 당겨 몸이 허공에 띄워졌는데도 계속 망치질을 이어갔다.
"휴식 시간이네."
"저길 보게나."
양쪽으로 뚫린 골짜기라 딱히 입구라고 할 곳은 없었지만, 편의상 그레이트 웜이 진입한 쪽을 입구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제단을 만들고 드워프들이 굿판을 벌였다. 허무하게 흩날리다 사라지는 미스릴 가루가 네크로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반대쪽에서 그레이트 웜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혀서 전진을 방해하는 밧줄을 씹어 삼켰다. 방해를 다 떨친 그레이트 웜이 몸을 크게 압축했다. 마치 꽉 눌린 용수철처럼, 그레이트 웜의 압축된 몸에 깃든 거대한 힘을 네크로는 느낄 수 있었다.
그레이트 웜의 몸이 갑자기 쭉 늘어났다. 그러나 미스릴 조각상은 이미 종적을 감췄다.
사라진 미스릴 조각상은 입구에 급하게 지은 제단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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