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제베트
"오빠, 요새 자꾸 전화하는 여자 누구야?"
"전번에 방송 같이 찍은 연예인. 너랑 동갑이더라. 엄청 밝은 애니까 너랑 친구 하면 좋겠다 싶어서."
"새언니 후보야?"
"그런 거 아냐. 걔도 어린 나이부터 연습생 하면서 힘들게 살았다고 하더라. 네 또래는 널 이해 못 해. 아직 자신과 많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거든. 그런데 얘라면 너랑 말이 잘 통하겠다 싶더라. 그리고 우리 팀 팬이래. 생방송 꼬박꼬박 챙겨봤다더라."
"근데 오빠 박아람 전화번호는 받아놨어?"
"아니. 왜?"
"오빠보다 몇 살 많지만, 얼굴도 이쁘고 몸매도 좋고. 뉴스 댓글 보면 전부 칭찬이야. 올케언니로 딱이다 싶어서."
"백만 원짜리 옷으로 치장한다고 사람도 백만 원 되는 게 아니야."
"오빤 왜 말을 어렵게 해?"
"겉만 보고 사람 판단하지 말라고. 향수로 덮은 악취는 시간이 흐르면 섞여서 더 더러운 냄새가 돼."
"국왕 전하, 팬입니다."
방송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예전에도 토크쇼 한 번 나갔지만, 그땐 레전드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크로의 화제성에 레전드가 업혀 가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이젠 레전드 유저가 천만 명을 돌파했다. 비록 중앙섬은 별도 서버라지만, 1서버부터 6서버까지 유저들이 모두 몰리는 대륙은 단일 서버였다.
그 레전드의 인기에 이번엔 네크로가 얹혀갔다. 네크로나 연예인에 관심 없는 사람도 레전드 최고 유저 출연이라는 말에 방송을 챙겨봤다.
"감사합니다. 세금 많이 내주세요."
축구부 에이스가 갑자기 공부해서 명문대 입학하고 대기업 못지않은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성공이 보장된 길을 차버리고 게임에 올인했다. 그리고 게임에서도 성공했다. 전함을 26억에 판 이외에도 레전드 아이템을 팔아서 10억 넘는 돈을 챙겼다. 정말 인간극장이 따로 없었다.
레전드 아이템 판 돈은 대부분 레전드에 재투자했지만, 그런 부분까지 방송에서 밝히진 않았다.
왕궁 대전에 들어가니 유저들이 미리 와있었다.
"안녕하세요. 임명식 때만 연기하시고, 지금은 편하게 대해주세요. 임명식은 유니콘이 홍보 영상으로 쓸 거거든요. 적당히 알아서 각색할 거지만, 과한 연기는 자제해 주세요."
미리 리허설도 했다. 유저들이 준비한 대사가 괜찮다 싶어 임명식을 시작했다. 먼저 네크로가 유니콘이 특별히 띄워준 장황한 텍스트를 읽었다. 네 유저는 한쪽 무릎을 꿇고 네크로의 긴 연설을 꾹 참고 들어야 했다.
"나 네크로 국왕의 이름으로 '꽃돼지'에게 남작 작위를 내리노라."
"전하의 성은에 이 한 몸 다 바쳐 보답하겠습니다."
"나 네크로 국왕의 이름으로 '소물이예'에게 남작 작위를 내리노라."
"귀족의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나 네크로 국왕의 이름으로 '해신잡는귀병대'에게 남작 작위를 내리노라."
"국왕과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나 네크로 국왕의 이름으로 '돌잡이'에게 남작 작위를 내리노라."
"분신쇄골 간뇌도지하여 보가위국하겠습니다."
"빨리 소도시로 키워서 자작 작위를 얻어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군대는 안 늘이나요?"
"아직 때가 아닙니다. 북부 우르크는 호전적이고 동부와 남부 우르크는 약탈을 즐깁니다. 그러나 중부와 서부 우르크는 인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쉽게 전쟁하지 않습니다. 용병 길드를 통해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니 동향이 심상치 않을 때 군대를 확충할 겁니다."
사실 야마토가 점령한 성과 마을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공격받았다. 북부나 동남부보다 전투가 드물었지만, 네크로 말처럼 이쪽 우르크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마을을 대형으로 점령했고 명성치와 국가 공적치도 기준을 넘은 유저 넷이 남작으로 임명됐다. 남작이 되니 인구가 늘고 특산품이 생길 확률이 높아졌다. 그리고 철공소나 채석장처럼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특수 건물을 짓는 권한도 생겼다.
"다미안, 국정은 너에게 맡긴다. 우린 얀을 구하러 출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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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우리 왕국에 유저 숫자가 그새 14만이나 늘었대."
"왜?"
"방송이 자막 입혀서 해외까지 나갔어. 형 이미지 지금 짱이라고."
"설마? 방송 때문에 유저 유입이 늘었다고?"
"음식점들이 몇천씩 주면서 방송에 맛집으로 출연하려고 애쓰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우리 국가는 지금 맛집으로 인정받은 거야."
"철벽 빨리 탈것 장만하고, 형 드래곤도 빨리 레벨2 만들어야 하는데."
"난 페가수스 너무 이쁘더라."
"그거 얻느라 역천이 길드원들 데리고 열흘 고생했대."
"와이번은 너무 징그러워. 그리핀은 귀엽긴 한데 마법사만 얻을 수 있고."
"솔직히 우리도 와이번 다른 거로 바꾸고 싶어. 전투 탈것은 이동 거리도 멀고 전투에도 참여하는데 와이번은 하루에 얼마 안 가면 파업해."
정확한 건 아니지만, 30리 정도 날면 와이번은 파업 상태다. 잡화점에서 파는 비싼 먹이를 먹여야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전문 탈것은 속도가 빠르잖아."
"빠르긴 빠르지. 그래도 우린 전투 탈것이 좋아."
"형, 그 푸른 꽃잎 무슨 옵션이야?"
"민첩 상승, 회피율 상승, 명중률 상승."
"이건 사냥꾼이나 도둑 옵션인데?"
"근접한테도 도움은 돼. 사냥꾼에게 딱이긴 하지만."
잡화점에서 구매한 지도를 이용해 제이크가 길을 찾았다. 네크로가 우르크를 최대한 피하는 루트를 짜라고 했다. 우르크와 만나면 네크로는 타케팅이 안 되어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소규모라면 넷이 간단히 해치울 텐데, 대규모라면 보스급 우르크도 있어서 힘들었다.
"저기서 로그아웃하자. 저녁에 식사 약속 잡혔어."
"갑자기?"
"전번에 방송할 때 만난 함우진 선수 그리고 아이돌하고 식사 약속 잡았어. 너희도 함께 가자."
"우리가 거길 왜 가."
"뿜뿜이 자기 팀 언니들 다 데리고 나오겠다던데. 너희가 싫다니 나도 강요할 생각 없어. 나랑 철벽만 가야겠어."
"형, 우리 미용실 다녀와야겠는데. 머리도 정리하고 피부 관리도 받아야 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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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리더 소영이가 젤 이쁘더라."
현피는 청순파.
"난 메인 댄서. 웃는 게 정말 이뻐."
진돗개는 슴가파.
"뿜뿜이라는 애가 그래도 가장 밝고 괜찮더라."
동해는 분위기파.
"난 우진이가 괜찮더라. 남자답고 진중하고."
네크로는 의리파.
"아니. 래퍼 언니는 왜 찬밥이에요?"
"너무 세."
"나 기에 눌려서 존댓말 했잖아."
"함 선수도 래퍼한테만 존댓말 하더라."
"근데, 돗개는 여자친구 있는 거 아녔어?"
"얼마 전에 차였어."
"왜?"
"시간 자주 못 내니까 애정이 식었냐면서 헤어지자던데."
"그래서 바로 헤어졌어?"
"응. 예전에는 꾹 참으며 비위 맞추려 노력했는데, 지금은 그게 힘들어. 결혼하고 맨날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진저리나더라."
"우리 너무 게임 폐인 같지 않아?"
"왜?"
"우리 방금 아이돌이랑 저녁 먹고 돌아왔잖아. 근데 돌아오자마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게임에 접속했어."
"아이돌이랑 저녁 먹으면 게임 못 한다는 법이 생겼어?"
"그게 아니라, 보통은 술 더 마시거나 노래방 가는 게 정상 아냐? 이런 날은 게임이고 뭐고 다 잊고 정신줄 빠지게 놀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돗오빠. 얀 빨리 구하고 싶지 않아? 다미안 너무 불쌍하잖아."
"어차피 게임이잖아. 우리가 실패만 안 하면 구해내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돗오빠 생각보다 냉혈이었네. 영지 언니한테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얘기해줘야겠어."
"현피야, 속도가 느리다. 허벅지에 힘을 꽉 줘. 얀을 빨리 구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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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백조 호수.
"그냥 번역하지 말고 블랙스완이라고 할 거지. 백조인데 검다고 하니 너무 이상하잖아."
"근데 저 섬으로 어떻게 가지?"
"저 배를 타면 바로 뱀파이어 식탁에 올려지겠지?"
"배를 빼앗아도 바로 들킬 거고."
"여긴 군대를 끌고 와서 밀어버려야 하는 곳 아닐까?"
"헤엄쳐도 바로 들키겠지? 저 블랙스완들도 몹으로 보이니까."
"잠깐 기다려 봐. 나 지금 뭔가 생각날 것 같아."
네크로의 말에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개미굴 공략할 때 말이야. 부화장을 찾아 개미 알을 깨서 여왕개미 빼고 남은 개미들을 유인했거든."
"여기랑 상관없잖아."
"그냥 현피가 광대 스킬로 뱀파이어로 분장한 후 우릴 포로처럼 끌고 배에 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어."
"나 스킬 숙련도 낮아서 들킬 것 같은데?"
"해보자. 안 되면 다른 방법 생각하고."
며칠 동안 달리기만 해서 일행 모두 인내심이 바닥났다. 당사자인 현피만 애처로운 눈으로 반대했다.
"이 기회에 스킬 숙련도 올리는 거야."
일행은 아이템을 모두 벗었다. 현피가 앞장서고 넷 모두 최면에 걸린 연기를 하며 어기적어기적 뒤를 따랐다. 용병들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제이크만 동행했다. 성직자인 그웩도 문제고, 바미와 그렉은 인간이나 우르크도 아니어서 의심을 살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여섯이 배에 오르자 대화도 없이 바로 출발했다. 한껏 긴장했던 현피가 한시름 놨다. 배는 빠르고도 평온하게 호수 표면을 미끄러져 갔다. 섬에 도착한 후 제이크가 현피 뒤에서 방향을 지휘했다.
"직접 가시겠습니까?"
으리으리한 저택에는 문이 여럿이었다. 제이크는 크고 화려한 정문 말고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쪽문을 선택했다. NPC는 시스템 보정으로 이런 부분에서 유저보다 훨씬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일행은 의심 없이 제이크의 지휘에 따랐다.
"그래. 특별하니까."
뱀파이어로 분장한 현피가 꽛꽛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해서 그런 건데 오히려 뱀파이어라는 신분에 걸맞은 말투로 보였다.
문을 지키는 하인들이 바로 문을 열어줬다. 쪽문으로 들어간 곳은 말라비틀어진 가시나무와 꽃도 못 피운 채 축 늘어진 꽃나무들만 가득했다.
제이크가 낮은 목소리로 현피에게 방향을 알려줬다.
"여기 비밀 문 있다."
"내려간다. 제이크는 문을 열어."
일행은 빠르게 아이템을 착용했다. 제이크 역시 늑대의 감각 목걸이를 비롯한 아이템들을 착용했다. 조심스럽게 여기저기 만지더니 바닥이 움직이며 검은 아궁이가 나타났다.
제이크가 앞장서고 일행이 뒤따랐다. 보통 던전이나 동굴은 빛이 없어도 시야에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영원한 암흑 던전처럼 시야가 제한되었다.
"횃불 없어?"
"준비 안 했지. 인벤토리 넉넉한 것도 아니고."
다행히 제이크는 시야가 1미터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일행을 잘 이끌었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반복하고 가끔은 너무 낮아서 허리를 숙여야 하는 통로도 지났다.
"위에 저택은 속임수인가?"
"그건 아닌 거 같아. 뱀파이어 퀸이라는데 저택이 위장이면 여기에 몹이 많아야 하잖아."
"현피가 광대 직업 익혀서 참 다행이야."
"지난 퀘스트에서도 그랬고, 현피가 요즘 주인공 느낌이야."
"조연이 갑자기 주인공 느낌 풍기면 클리셰 당하던데."
"소리 낮춘다. 기척 발견했다."
대략 30평 정도 되는 방이었다. 방 중앙에 높이 쌓은 제단을 방불케 하는 조형물이 있었다. 그 제단 꼭대기에 일행이 영상에서 봤던 다미안의 딸 얀이 있었다.
열 살이어서 성징이 드러나지 않은 가슴에 붉은 장미 하나가 꽂혀있었다. 제단 주변에 뱀파이어로 짐작하는 몹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천천히 바닥을 쓸었다.
"제이크, 정보."
"종속자에 감염된 인간이다. 다미안과 달리 가망 없다."
다미안은 본인이 알아서 정신을 차렸기에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저 인간은 소금을 먹이면 바로 죽어버린다.
"오빠. 해동청 소환해. 해동청이 저놈 해치울 때 내가 얀 심장에 꽂힌 장미 뽑을게."
평소와 달리 철벽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다미안이 영상 보여줄 때 눈물까지 흘리며 통곡하더니, 얀을 구하는 데 지극정성이었다.
"해동청 소환."
"꺄웅."
해동청이 신나게 달려가 종속자의 다리를 물고 머리를 힘껏 털었다. 종속자는 반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해동청이 계속 뭔가 물어뜯어 내서 씹어먹는데도 몸엔 아무 상처도 없었다.
- 퀘스트를 완성하였습니다.
- 피 머금은 장미를 얻었습니다.
- 다음 퀘스트는 얀을 데리고 다미안에게 가야 단서를 얻습니다.
"흡혈귀 여왕 온다. 드래곤만큼 강하다."
"철벽, 방금 얻은 거 은행에 전송해. 그리고 얀 데리고 도망쳐."
피 머금은 장미를 금고에 전송한 철벽이 얀을 둘러업었다. 그때 얀이 미약한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당신들은?"
"다미안의 부탁으로 널 구하러 왔다."
"늦었어요. 날 두고 어서 도망치세요. 에르제베트의 목표는 타락한 저의 심장이에요. 제가 남아있으면 여러분을 쫓지 않을 겁니다."
"아니야, 얀. 네 아버지 다미안은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 내게 널 반드시 아버지에게 데려갈 방법이 있어."
"그게 뭡니까? 신의 기적이라도 됩니까?"
"네가 내 용병이 되면, 죽어도 부활할 수 있어. 그럼 우린 함께 네 아빠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네 아빠는 지금 소금성에서 널 기다리고 계셔."
"동의합니다."
"용병 의식을 시작한다."
다행히 뱀파이어 퀸이 오기 전에 용병 의식을 마쳤다.
"잡자."
네크로의 말에 진돗개가 펄쩍 뛰었다.
"형, 드래곤만큼 강하다잖아. 미쳤어?"
"드래곤은 답이 없어. 덩치도 크고 브레스도 피할 방법 없고. 그런데 뱀파이어 퀸은 사람 덩치야. 아무리 강해도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고. 그리고 어차피 도망치는 건 가망 없어. 여긴 상대 영역이라고. 그럴 바엔 싸워보는 게 낫지 않겠어?"
"얀, 뱀파이어 퀸은 무슨 약점이 있어?"
"심장이 약해요. 심장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 심장을 타락시켜 자기 심장을 대체하려 했어요. 난 숲 여왕의 혈통을 이어받았거든요."
"제이크, 뱀파이어 퀸 오면 바로 약점 알아내."
네크로의 심장이 전에 없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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