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린 김에 절
'다행이다. 용병은 같은 편으로 인정하는구나.'
레전드의 2년도 안 되는 역사에서 추락사가 사인이 된 유저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네크로는 아마 셋이 최초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AI의 예측대로 비룡이 역소환된 후 셋 다 추락 데미지로 죽었다.
다행히 제이크는 전투형 용병이 아니기에 유저를 제외하면 누구도 공격할 수 없도록 설정의 보호를 받았다. 파티 시스템에서 소환수 및 용병 시스템을 분리하면 죽음의 군단이 공격했겠지만, 현재는 임시 조치만 취한 관계로 살아남았다.
"형, 차라리 시작하자마자 죽게 놔두지. 그랬으면 지금쯤 부활했을 거 아냐."
불사 패시브로 먼저 부활한 현피가 툴툴거렸다. 진돗개와 동해는 아직도 대기실에서 카운트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추락사니까 아이템 드랍 안 했잖아. 죽음의 군단에 죽었으면 아이템 한두 개 사라졌을지도 몰라."
"오, 또 레어다."
제이크가 신발에 이어 가슴 보호대를 뜯어냈다. 현피의 주의력이 아이템 수거하는 제이크 쪽으로 가자 네크로도 자기비판을 이어갔다.
'오늘 얻은 교훈이 참 많구나.'
네크로는 다시 머리를 쓰고 계획을 짜고 결과를 계산하면서 게임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러나 같은 파티원마저 죽이는 '죽음의 군단' 스킬은 뇌리에서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수련자 세트를 착용하지 않았기에 자폭도 최대한 자제하려 했다. 해골 제작과 좀비 제작의 숙련도가 오랜 기간 제자리걸음하고 있었기에 숙련도에 관한 집착이 알게 모르게 커졌다.
'보스몹이 너무 강하다.'
코쿤과 게룬은 갑옷이나 투구 대신 예식용 복장을 했다. 그래서 자폭에 이은 죽음의 군단 소환에 반항도 못 하고 죽어버렸다. 사실 코쿤이 보스몹보다 훨씬 강한 존재인데, 네크로가 그런 내밀한 사정까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문 팀장이 상부 지시에 마지못해 AI를 설득했다. AI는 인과율의 반발을 무릅쓰고 보스몹에게 유니크 무기를 들려주고 레어 방어구를 입혀줬다.
그래서 원래는 머리 하나는 전사, 머리 하나는 주술사여서 다양한 스킬로 유저를 괴롭혀야 할 보스몹이 전사 특성만 발휘했다.
유니크 무기와 레어 방어구가 보스몹과 만나니 그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죽음의 군단이 200 미만이 되었다.
수준 이하의 공격은 아예 데미지를 주지 못하고, 조금 높은 수준의 공격도 금세 회복했다. 아주 훌륭한 공격은 똑똑한 보스몹이 피하거나 막아냈다. 800 이상의 고급 언데드를 갈아 넣고 나서야 겨우 저항과 재생력 등이 떨어져서 어렵게 잡아냈다.
'일단 레벨업에 치중해서 80 만든 후 숙련도를 올리는 데 신경 쓰자.'
유니콘이 수작을 부려 오우거 보스몹만 특별히 강해진 건데, 네크로는 오판하고 말았다. 이후에는 퀘스트보단 몹을 잡아 레벨 올리는 데 치중하고, 빨리 그랜드 마스터 랭크를 달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형, 유니크. 유니크 떴다."
몽둥이려니 했는데, 예상외로 투구가 떴다. 그것도 머리에 쓴 투구를 벗겨낸 게 아니라, 두 머리 중 하나의 가죽을 벗겨내니 유니크 투구로 변했다.
"해골에 육망성. 형, 이거 내꺼 맞지?"
투구 자체가 해골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고, 정수리 부위에 육망성이 그려졌다. 보스몹 몸에서 유니크 아이템이 나오기 시작하자 네크로도 고민을 멈추고 제이크에게 집중했다.
"시발, 두 개 증발했다."
그 뒤로 제이크가 두 곳에 칼을 댔는데, 김 새는 소리와 함께 너덜너덜한 가죽만 남았다. 보스몹이어서인지 성공률이 꽤 높던 제이크가 쓴잔을 연속 마셨다.
"유니크 두 개면 딱히 나쁘진 않은데, 보스몹의 강함에 비교하면 좀 너무한 것 같아."
마지막으로 제이크가 오우거의 몽둥이를 수습했다. 유니크 양손 검과 마찬가지로, 제이크의 손이 닿자 무기 크기가 줄어들었다.
"개인 정보."
이름 : 네크로
성별 : 남
레벨 : 74
랭크 : 마스터
"야, 나 원래 71렙인데 지금 74 됐어."
"어, 형. 나도 지금 73렙이야."
10분 시간을 채워 로그인한 동해와 진돗개도 레벨을 점검했다.
"난 72.","나두."
"나 레벨 3개 정도 올라갔고, 현피는 2개, 너희 둘은 1개씩 올라갔구나. 80레벨까지 올리는 데 반년 정도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이러면 최소 석 달이면 가능할 거 같아."
인과율을 건드리는 바람에, 그 반동으로 보스를 잡은 넷에게 경험치를 무척 후하게 줬다. 현피가 다른 둘보다 레벨이 더 높은 건, 불사 패시브로 죽음으로 인한 경험치 하락 페널티를 안 받기 덕분이었다. 대륙부터는 죽으면 경험치가 일부 소실되고, 심하면 레벨도 내려갔다. 그간 현피가 가장 많이 죽었는데, 오히려 경험치는 덜 죽은 둘을 역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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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퀘스트 오우거 숲 정복을 완료하였습니다.
- 후속 퀘스트 포탈 활성화로 이어집니다.
- 포탈은 신에게 도전하다가 버림받은 오우거 종족이 만든 마법과 주술의 결합체입니다.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 마법 재료와 주술 재료가 필요합니다.
- 마법 재료 '그리핀의 붉은 깃털' 30개가 필요합니다.
- 주술 재료 '와이번의 왼쪽 눈알' 50개가 필요합니다.
- 마법 재료와 주술 재료의 충돌을 조화할 매개체 '리자드 주술사의 두개골'이 10개 필요합니다.
신전에서 퀘스트를 갱신하고 밖에 나가자마자 찾는 사람이 가득했다.
"네크로,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는가?"
- 퀘스트 용병왕의 부탁이 생성되었습니다.
- 리자드는 절대 녹슬지 않는 금속을 모으는 습성이 있습니다. 물의 기운을 듬뿍 담은 이 금속은 가볍고 튼튼하며 내구도를 자체로 회복하는 특성을 갖췄습니다.
- 수리비 때문에 늘 적자에 시달리는 용병왕은 오래전부터 수리가 필요 없는 무기와 방어구로 용병들을 무장할 염원을 품었습니다.
- 용병왕은 몬스터들과 무수한 전투를 벌이면서 모아둔 무구를 당신에게 보수로 내놓을 의향이 있습니다.
- 반복 퀘스트입니다. 퀘스트 완성 시 용병 길드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네크로, 귀 잠깐 빌려주시게."
- 퀘스트 궁정 마법사의 의뢰가 생성되었습니다.
- 그리핀은 예로부터 마법사들의 친한 동료였습니다. 육체적인 능력이 부족한 마법사들의 보호자이며 안락한 이동수단입니다. 노련한 그리핀은 흔들림 없는 비행으로 마법사가 비행 중 마법을 사용하게 합니다.
- 그리핀의 알, 그리핀의 알을 부화하는 소모용 아이템 그리핀 둥지와 그리핀의 따뜻한 깃털을 얻어온다면 마법사들이 만든 여러 마법 장신구를 보수로 내놓을 겁니다.
- 반복 퀘스트입니다. 퀘스트 완성 시 국가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네크로, 그대에게 믿음을 줘도 괜찮겠는가?"
- 퀘스트 기사단장의 믿음이 생성되었습니다.
- 와이번은 비상 기사단의 상징이었습니다. 와이번을 타고 창공을 누비는 비상 기사단은 우르크와의 전쟁에서도 최고의 전공을 세운 최강 기사단이었습니다.
- 와이번의 알, 와이번의 알을 부화할 소모용 아이템 화염석을 얻어온다면 오랜 세월 귀족가에서 수집한 귀중품을 대가로 내놓을 겁니다.
- 반복 퀘스트입니다. 퀘스트 완성 시 개인 명성과 귀족 사회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짧은 상의를 거쳐 퀘스트를 받기로 했다. 어차피 포탈 활성화와 겹치는 퀘스트이고, 반복 퀘스트라는 건 시간제한도 없다.
퀘스트를 받은 후 각자 NPC들을 찾아 정보를 수집했다. 퀘스트 NPC가 필요한 정보를 대부분 주는 중앙섬과 달리, 필수 정보를 제외하면 아무리 중요해도 NPC가 먼저 알려주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퀘스트 NPC가 아닌 자에게서 훨씬 중요한 정보가 나올 때도 있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그러는 네크로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레전드 게임 유저명 네크로 맞으시죠?]
날카롭고 딴딴한 목소리. 유니콘 영업팀도 아니고 인터뷰했던 기자도 아니고 토크쇼 녹화했던 방송국 담당자도 아니다.
"네, 맞습니다."
[일전에 네크로 님을 인터뷰했던 고려신문입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내일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장소 말씀하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급한 일이신가요?"
이미 12시가 지났기에 크리스마스다.
[그렇군요. 크리스마스에 남자가 남자 보자고 하면 오해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네크로 님에게 나쁜 일은 절대 아닐 겁니다.]
"아침 9시에 봅시다.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퀘스트 정보까지 다 모으니 새벽 2시가 되었다. 네크로는 먼저 로그아웃해서 세수만 하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커다란 침대와 가상현실 기기가 놓인 방은 여전히 여유 공간이 넉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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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입니다."
광해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아침 9시에 처음 보는 남자가 현찰 1억을 내밀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선 잠깐 이용당하다가 죽는 조연들이 주로 이런 돈을 받았다.
"제가 성격이 좀 급한 편이어서."
남자가 겸연쩍은 미소를 띄웠다. 눈 주위에 유독 주름이 많은 걸 보면, 마음고생이 심해 보였다. 제대로 잠을 못 자서 눈 주위 살이 급격히 빠진 사람의 인상이었다.
"상황부터 설명해 주시죠. 거액이라고 모든 사람이 전후 사정 무시하고 받는 건 아닙니다."
"제가 역천 길드와 악연이 있습니다. 역천 길드에 복수하려고 큰 노력을 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역천 길드가 삼대 길드와 어울리더군요. 게다가 얼굴이 잘생긴 덕분에 전면에 나서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것 같더군요. 실질적으로야 꼭두각시겠지만, 함께 복수하려던 사람들이 다 포기했습니다."
'거짓말이다. 눈동자 움직임이 정상 아니다.'
눈알이 자꾸 왼쪽 오른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미리 준비한 거짓말이 아니라,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지어내는 말이라는 뜻이었다.
"저는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큰 투자로 작은 이익을 얻는 건, 아주 멍청한 짓이죠. 100억 투자해서 일 년에 1억 벌었다면 그건 사업가로서 자격이 없는 겁니다. 자본의 속성이 그렇죠. 100억으로 10억 버는 놈 앞에서 100억으로 9억 버는 놈은 패배자입니다."
"들은 내용만으론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이 길어졌군요. 저는 역천 길드에 복수하려고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입하는 건 실패한 투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다 적당한 타협안이 떠올라서, 그 타당성을 네크로 님과 함께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이 1억 현금은 그냥 드리는 겁니다. 실패하셔도 네크로 님이 가지시면 됩니다. 대신 성공하셔도 제가 추가로 드릴 건 없습니다."
"너무 일방적인 이득 아닌가요?"
"제가 원하는 건 이겁니다. 역천 길드와 길드 연합이 26억으로 산 전함과 남부 항구에서 건조되는 배에 2만 명 유저를 태우고 '희망의 등대'로 출발했습니다. 전함만 해도 유저 2만 명을 태우고도 남습니다. 이들이 유저 숫자를 제한한 건, 희망의 등대가 열악한 환경임을 알고 아이템과 여러 물품을 잔뜩 실었기 때문이죠. 저는 이 배들이 침몰했으면 합니다."
광해는 머리를 저었다.
"이런 의뢰면 1억이 적은 돈이죠."
"압니다. 그러나 고작 네 명으로 대륙에 최초 상륙한 업적을 세운 유저라면, 제 부족한 생각보다 훨씬 나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몰린 사람 같구나. 고작 게임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게임에서 뭔가 해서 현실에 영향을 끼치기 힘들 텐데.'
반대로 생각하면, 게임에서 상대에게 엿 먹이는 건 양심의 가책도 덜한 일이다. 게다가 OB랑 WM에게 엿 먹일 수 있으면 좋은 거고.
"원하시는 바가, 이번 항해로 길드 연합이 이익을 못 얻게 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거절합니다."
말을 마친 광해가 현찰 1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멍한 표정으로 광해를 바라보던 반경운은 뒤늦게 깨닫고 속으로 시발을 외쳤다.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녹음 내용을 쭉 들어본 반경운은, 그대로 펜 모양의 녹음기를 분질러 버렸다. 상대는 대화를 잘라서 이용할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코를 꿰는 건 실패했지만, 저 정도 머리 돌아가는 놈이면 어떻게든 반형운 그 개자식에게 엿 먹일 수 있을 거야. 좋게 생각하자.'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두 손이 자연스럽게 관자놀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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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할 말이 있어."
푹 자고 점심에 맞춰 일어난 셋과 밥 먹으면서 광해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나가서 어떤 유저로부터 의뢰를 받았어. 현찰 1억을 주고 우리에게 포탈을 빨리 활성화해달라고 그러더라. 넷이 똑같이 나누는 거로 하고, 당분간 게임 시간 늘리자. 다들 동의하지?"
"형이 더 먹어야지. 우리한텐 딱 고생한 만큼만 줘. 안 그래도 아이템 수익 똑같이 나누는 것 때문에 형한테 늘 미안했는데."
성필이 말에 현성이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평한 거랑 공정한 건 달라. 공정하게 하려면 공헌도를 매겨서 지분만큼 나누면 되겠지.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잖아. 그래서 우린 공평을 택한 거야."
"근데 누가 봐도 형이랑 성필이 형 기여가 우리 둘보다 크잖아. 그러면 불공평한 거 아냐?"
"일단 계속 공평으로 간다. 너희가 공헌이 적다고 생각하면 실력을 키워. 그리고 이런 분배방식 때문에 우리가 함께 일하는 게 불편해진다면, 그때 가서 방식을 바꾸면 되지. 어차피 어떻게 해도 공정하거나 공평할 수 없어."
"길드 연합이 언제 희망의 등대에 도착한대?"
"보름 남았어. NPC 선원들이 피로를 호소해서 섬에 내려 사흘 쉬었대."
"전함은 단독으로 운영해야 해. 다른 배들과 함께 움직이니 속도나 피로도 감소 등 우위가 전혀 없잖아."
진돗개가 길드 연합의 패착을 지적했다.
"전함은 다른 배들을 보호하는 전투용으로 쓰인 거야. 바다 괴물 사냥에 투입하고 정예들의 피로도를 낮추고. 유저 2만 명에 물품을 잔뜩 실었다고 들었어."
WM과 원한이 유독 깊은 성필이 젓가락을 놓고 힘차게 손뼉 쳤다. 길 가다가 금덩이 주운 사람처럼 기쁨이 넘쳤다.
"포탈 활성화해서 은행이 이어지면 쟤들 헛고생이잖아."
- 작가의말
공짜 돈 1억 생겼습니다. 제목과 달리, 엎드린 김에 절이 아니라 절하려는데 엎드려 달라고 부탁한 꼴이죠. 주인공 버프 너무 심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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