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으로2
퀘스트 상대는 해적 필수템인 가죽 바지만 입고 근육투성이 상체를 드러낸 흰 수염 노인이었다. 보는 순간 삼국지의 황충이 생각났다.
"도전합니다."
네크로가 나섰다. 진돗개와 현피 그리고 동해가 옆에서 구경했다.
노인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무투장에서 62번의 싸움을 경험한 네크로는 노인이 보여준 빈틈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네크로가 공격을 펼치기 직전 그 빈틈이 사라졌다.
'우르크들보단 낫다.'
실제 전투력은 몰라도 싸우는 '기술' 자체는 우르크보다 낫다. 그러나 역시 데이터 축적이 적어서인지 어설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늦게 빈틈을 거뒀으면 네크로가 속임수에 넘어갔을 거다.
'정공이다.'
체력 개념이 없는 게임이다. 네크로는 주로 다리로 공격하며 정공으로 나갔다. 공격에 상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피며 필승 조합을 구상했다. 예상외로 높은 네크로의 힘과 적당한 민첩, 그리고 빠른 반응으로 노인은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함정을 파자.'
다리만 노리며 낮은 발차기만 하던 네크로가 갑자기 옆구리를 노렸다. 그러며 허리에 힘을 줘서 일부러 상체가 흔들리게 했다. 내내 수비만 하던 노인이 기회다 싶었는지 철판교 수법으로 뒤로 누워버렸다.
네크로의 오른 다리가 지나가고 노인의 몸이 빠르게 되감기 한 것처럼 일어섰다.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빠른 정권 찌르기를 펼치려 했으나 이미 타이밍 계산을 마친 네크로의 돌려차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노리는 네크로의 왼발을 노인은 다시 철판교 수법으로 피해버렸다.
'못 피할 줄 알았는데.'
우르크들은 꼼짝 못 하고 당하던 수법이었다. 그런데 노인은 속임수에 넘어갔음에도 빠른 반사신경으로 피해버렸다.
즉각 균형을 잡은 네크로는 철판교 자세로 뒤로 누워서 미처 일어나지 못한 노인의 배를 내려 차기로 공격했다. 아치형 다리처럼 뒤로 누워 두 손과 두 발로 몸을 지탱하던 노인이 그대로 몸을 뒤집으며 옆으로 피했다. 위로 향하던 배꼽이 밑으로 내려갔다. 두 손만 떼면 머리 박기와 비슷한 자세가 되었다.
'언제까지 피하나 보자.'
네크로는 발을 바꿔가며 내려 차기를 연속 펼쳤다. 노인은 네크로의 공격 리듬에 맞춰 계속 빙글빙글 돌았다.
"형, 공격 멈춰 봐."
동해의 말에 네크로는 내려 차기를 멈췄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리듬에 맞춰 몸을 뒤집었다. 잠깐 멈춰서 엇박자를 준 네크로가 다시 공격했을 때, 노인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내가 졌네."
우울하고 축 처진 목소리.
- 첫 도전에 퀘스트를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모든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숙련도 상승 폭이 어마어마했다.
"형, 나 마스터 됐어."
동해가 황급히 매직 아이템 철연화를 벗어 인벤토리에 넣고 유니크 아이템 권왕의 유산을 착용했다.
"태극심법."
시스템 보정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동해가 눈을 살포시 감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더니 동해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와, 이거 대박. 내공이 조금 올랐어."
"친화력이 오른 거야. 소수점 아래로 오르면 스탯에 표기되지 않으니까 친화력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여."
스킬 하나만 마스터 직전인 진돗개가 자극을 받고 퀘스트 NPC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전사 직업 퀘스트를 주는 NPC는 없었다.
이름 : 명경지수
분류 : 투구 - 전사
등급 : 유니크
능력 : 광전사 스킬 지속 시간 2배
특별 : 광전사 스킬 후유증 30% 완화
넷이서 처음으로 여왕개미를 잡았을 때 얻은 유니크 투구였다. 네크로가 투구를 감정하고 진돗개에게 넘겼을 때, 진돗개는 엉엉 울었다. 특정 직업에 특정 스킬이어서 가격은 다소 적게 받을 수밖에 없지만, 돈 많은 유저들이 경쟁 붙으면 현금으로 천 이상 나가는 아이템이었다.
"형, 언데드 불러줘. 나도 빨리 마스터 되고 싶다고."
"그러지 말고 마을 수련장이나 이용해."
마을의 수련장은 기력 회복이나 스킬 쿨타임 감소 등 면에서 도시 수련장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더 나은 선택이 없는 진돗개는 골드로 결제하고 밤새 수련장에서 파멸의 돌풍을 수련했다. 쿨타임이 엄청 긴 광전사보다는 파멸의 돌풍이 마스터 숙련도 찍는 게 더 빠르다.
전함이 해적 마을의 2백 명이 넘는 사람을 싣고 떠나기 직전 진돗개는 마스터 랭크를 겨우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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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장벽에서 붉은 광물로 제작한 용골, 중심 도시에서 잔다크가 찾아낸 항해일지와 나침판. 항해일지를 참조해 남부 항구의 조선소에서 거친 바다를 견뎌낼 배를 제작했다. 당연히 붉은 광물로 만든 가볍고도 튼튼한 용골을 뼈대로 했다.
"두 번째 용골은 의뢰했습니까?"
"네. 경험이 축적되어 첫 번째보다는 하루 단축될 겁니다."
"PM 길드에서는 연료 수급을 제대로 하고 있죠?"
"배가 만들어지기 전에 연료가 먼저 준비될 겁니다."
그간 PM 길드만 알고 있던 사냥터가 있었다. 남부 항구에서 배를 타고 더 추운 남쪽으로 가면 갑자기 나타나는 펭귄섬이라는 얼음섬. 펭귄과 물개 그리고 강철게가 있는데, 그중 강철게가 광물을 드랍했다.
그 광물을 센 불로 녹이면 대형 함선에서 사용하는 연료로 변했다.
'이건 사실 비밀이랄 것도 없는데. 설마 펭귄섬 던전도 알고 있을까?'
펭귄섬 지하에는 강철게 보스가 있는 지하 던전이 있다. PM 길드에서도 아는 사람이 다섯밖에 안 된다. 발견은 쪼꼬미가 했지만, 공략엔 최소 다섯 명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비밀을 공유했다.
"네크로라는 유저는 여전히 찾지 못했나요?"
"최선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어느 마을이든 들르기만 하면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어쩌면 네크로의 세력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이미 대륙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WM 길드에서는 네크로와 관련한 단서를 최대한 많이 모아주십시오."
'개소리. 배가 만들어지려면 아직 한 달이나 더 걸린다. 게다가 조선소도 남부 항구에밖에 없고 선원 NPC도 남부 항구에만 있다. 지금 바다에 떠 있는 유저가 있다면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
잔다크는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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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살이 느릿느릿 날아갔다. 저렇게 느려서 어떻게 맞출 수 있나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정확히 머리와 몸통이 이어지는 부위에 명중했다.
성체 고래 크기의 참다랑어가 작살을 벗기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연이어 몸에 꽂힌 작살들 때문에 점점 힘이 빠졌다.
해적 출신 선원들이 작살에 동여맨 밧줄을 당겼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참다랑어의 힘을 소진하려는 목적이다. 밧줄을 건드려도 별 반응이 없을 때 모두 힘을 합쳐 참다랑어를 갑판으로 끌어올렸다.
"이거 한 열흘 먹겠는데."
진돗개의 감탄이 무색하게도, 점심에 건져 올린 참다랑어는 저녁에 뼈만 남았다. 회로 먹고 삶아 먹고 구워 먹고 소금 뿌려 해풍에 말려 먹고.
"형. 대륙은 게임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현실적이란 말이 사실인 것 같아. 중앙섬에서 먹은 음식들보다 훨씬 맛있어."
"게임에서 술 먹으면 안 취하겠지? 대륙 가면 술 마음껏 마셔야겠다."
진돗개 말에 네크로가 비웃었다.
"술주정뱅이는 맹물 마시고도 취한다더라."
"난 술을 맛으로 먹는 사람이라고. 맛있게 먹은 술은 간으로 가지 않아."
"간으로 안 가는 게 문제야. 간으로 가서 분해해야 문제 안 되는 거지."
진돗개 덕분에 한바탕 웃었다.
"대형 괴물 포세이돈이 있는 지역입니다."
전함 선장으로 임명된 해적 선장이 아래턱을 덜덜 떨며 말했다. 대형은 네크로도 웬만하면 피해가고 싶지만, 이곳에서 연료를 보충하지 못하면 영원히 바다에서 표류해야 할지도 모른다.
"포세이돈에 관한 정보."
"그 괴물을 보고 살아남은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알려진 거라곤 소용돌이를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괴물이란 것뿐입니다."
소용돌이 일으키는 능력 때문에 포세이돈으로 불렸다.
"소환."
돌쇠와 세 마리 리치 그리고 다섯 마리 듀라한. 그 외에는 0.1초 정도 시간을 지연시켜줄 움직이는 장애물뿐이다. 수백 마리나 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상대에겐 아무 위협도 주지 못한다.
"미안. 기기 검사하는 거 일일이 확인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약속 시각보다 훨씬 늦게 현피가 접속했다.
"괜찮아. 어차피 보스몹과 싸울 때 네크로 형 빼곤 다 미만잡이니까."
"시벌. 더럽게 위로 잘 된다."
진돗개와 현피가 보자마자 가볍게 투덕거렸다.
"우리 가는 길에 대형 괴물이 여섯이나 있어. 오늘 전투 결과에 따라 이후 한 달 동안 우리 기분이 결정돼. 오늘 결과가 좋으면 희망찬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고, 오늘 결과 나쁘면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는 게 아닌지 마음 졸이며 하루가 일 년처럼 길게 느껴질 거야."
네크로의 말에 진돗개가 울상이 되었다.
"형. 여긴 경매장도 없고 은행도 없어. 캐릭 삭제하고 게임 접더라도 이 투구는 꼭 팔고 죽어야지. 안 그럼 죽어서도 눈을 못 감아."
마스터 랭크를 이뤄 유니크 아이템을 착용한 지 겨우 열흘인 진돗개였다.
'죽음의 군단'은 쿨타임이 돌아오지 않았다. 설사 돌아왔다고 해도 선원들까지 다 죽일 수 있기에 사용할 수 없다. 게임이 아니라면 배를 조종하는 법을 배워 직접 항해해도 되지만, 유저인 넷은 방법을 알아도 배를 조종할 수 없다.
"옵니다."
각오를 채 다지지도 못했는데, 괴물의 영역 외곽에서 재수 없이 포세이돈을 맞닥뜨렸다.
"작살 발사 준비. 보이는 즉시 명령 기다리지 않고 발사한다."
공포에 질렸는지 괴물이 해수면에 떠오르기도 전에 작살 몇 개가 발사되었다. 새로 갑판장이 된 대머리 해적이 채찍으로 실수한 자들을 마구 후려쳤다. 저렇게 맞아서라도 정신 차려 목숨 부지한다면 부들부들 떨다가 그냥 목숨 잃는 것보단 낫다. 비록 NPC들이지만, 거주 지역을 떠난 순간 리젠 없이 사망이다.
"돌쇠. 작살과 선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단, 너만은 예외다."
네크로도 돌쇠가 자기 지시를 이해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른 놈들은 다 죽어도 괜찮지만 넌 죽지 말라는 뜻인데, 긴장한 나머지 네크로도 더 명확히 서술할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웬만한 풍랑에도 평온하게 항해하던 전함이 좌우로 흔들렸다. 갑판에 있던 선원 태반이 버티지 못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이쪽이다. 반대편 작살을 모조리 이쪽으로 끌고 와라."
괴물이 나타난 반대편은 황급히 장전한 작살을 뜯어낸 후 발사기를 반대편으로 끌고 왔다.
"나 이젠 오징어 못 먹을 것 같아."
포세이돈의 정체는 전함보다 조금 작은 대왕오징어였다. 비록 몸 일부만 수면에 드러났지만, 게임이다 보니 바다에 잠긴 부분도 명확히 잘 보였다.
"가장 좋기는 소용돌이 일으키기 전에 해치우는 거야."
"발사, 이 멍청이들아. 뇌가 불알에 달렸냐?"
괴물이 나타나면 자유 발사라고 했는데, 모두 얼어붙어서 작살이 하나도 날아가지 않았다. 다행히 성격 포악하고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갑판장이 빠르게 정신 차리고 채찍으로 갑판을 두드렸다.
원리는 모르지만, 작살들은 오징어 몸에 푹푹 박혀 들어가서 잘 빠지지 않았다.
"형, 설마 저놈이 머리 쓰는 건 아니겠지?"
"간단하고 명확하게 핵심만. 지금 전투 상황이야."
"저대로 바다 밑으로 내려가면 배가 뒤집히지 않을까?"
"그렇진 않을 거야. 배가 뒤집히기 전에 작살 발사기가 먼저 뜯기겠지."
뒤늦게 반대편에서 건너온 발사기들도 갑판에 고정되었다. 다시 작살을 장전한 후 발사기로 쏘아냈다. 수많은 작살을 몸에 꽂고도 괴물은 별 반응이 없었다.
"소용돌이다. 소용돌이가 왔다."
괴물이 왜 반격도 없나 했더니, 전함이 작은 종이배로 보일 정도로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키느라 가만히 있던 거였다.
"다들 밧줄 당겨라. 괴물을 전함에 붙이고 공격한다."
전함과 괴물이 점점 가까워졌다.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몸을 빼려 했던 괴물도 배와 함께 점점 빨라지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밧줄 꽉 잡아라."
배가 흔들리면서 균형 잡기도 힘들었다. 저 거대한 물살에 사람이 빠지면 살아날 궁리도 말아야 한다.
"형, 우리 둘이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나도 갈게."
"같이 가자. 나도 자폭 한 번은 쓰고 죽자."
동해와 현피도 자진해서 나섰다.
"진돗개야, 날 일단 던져줘."
진돗개가 네크로를 잡고 힘껏 던졌다. 겁먹지 않고 몸을 쭉 편 네크로는 대왕오징어 위에 무사히 안착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던진 현피는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답공보."
현성이 허공을 밟으며 달려가서 현피를 안고 오징어 위에 내렸다.
"형 탓에 내공 다 썼어."
마지막으로 진돗개가 점프했다. 버그 보상으로 받은 레어 신발이 도약력을 강화해준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오징어 위에 올라탔다.
"자폭 같이 쓰자. 진돗개는 우리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살 좀 파줘."
"광전사."
광전사 스킬을 사용한 진돗개가 한 손에 검 하나씩 들고 오징어 등을 팠다.
"얘 소용돌이 빼고 별 재주 없는 것 같은데."
"전함 아니라 작은 배였으면 우린 이미 수장됐어. 소용돌이만 해도 대단한 거야."
3분 뒤, 진돗개 몸이 작아졌다. 사람 둘이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구덩이지만, 대왕오징어 덩치에 비교하면 그냥 살갗 좀 긁힌 정도로 보였다.
"셋 세고 스킬 쓰는 거야. 리듬 잘 타야 해."
현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화력이 4 되어 이젠 현피의 자폭도 무시할 수 없다.
"하나, 둘, 셋. 자폭."
"자폭."
자폭의 후폭풍이 겹치면서 엄청난 데미지를 생성했다. 멀찍이 도망쳤던 동해와 진돗개도 후폭풍에 휘말려 바다에 빠졌다.
그리고 AI가 개발팀의 좀비들을 긴급소집했다. 자폭의 후폭풍 공진에 의한 초대형 괴물의 즉사 현상을 시급히 해결해야 했다.
"형, 우리 구해줘."
대왕오징어가 버그로 즉사하며 소용돌이가 사라졌지만, 짧은 시간 동해와 진돗개는 멀리 쓸려갔다.
"비룡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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