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귀환3
"전략적 후퇴. 폭격 부대 준비."
저지선이 무너질 위험이 보이자 바로 후퇴를 명했다. 유저와 NPC 방패병이 번갈아 조금씩 후퇴했다. 유저가 물러날 땐 방패병이 버티고 방패병이 물러날 땐 유저가 막아섰다.
"마법의 세계."
수백 개의 검고 둥근 구가 생겨났다. 마법을 펼친 마법사들은 바로 그리핀을 타고 복귀했다. 수백 개 구가 마법을 무작위로 펼쳤다. 살상보다는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는 목적으로 줄을 세워 펼쳤기에 많은 뱀파이어를 죽이지 못했다.
"숲의 분노."
마법의 세계가 사라지자 약초꾼들이 궁극기를 사용했다. 이들은 전투 탈것인 외뿔 도마뱀 혹은 비늘소에 탑승했다. 마찬가지로 궁극기를 펼치자마자 뒤로 도망쳤다. 마법의 세계가 끝나자마자 속도를 올렸던 뱀파이어들이 다시 멈춰야만 했다.
소금성 안에 있으면 네크로 측은 미약한 버프를 받는다. 토템 주술사로 전직한 현피가 상급 토템 네 개를 소금성에 결합했다. 비록 성벽이 사라졌지만, 성벽 범위 안에서는 네 개 스탯이 조금씩 오르고 회복력과 저항이 미미하게나마 상승한다.
NPC까지 합치면 70만이 되기에 작은 차이가 쌓여서 큰 격차를 만들 수 있다.
'알고 안 들어오는 건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뱀파이어를 보며 네크로가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전장에서 싸우고 싶은데, 뱀파이어들은 급할 게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물러났다.
'성벽만 안 무너졌어도.'
성벽이 있다면 느긋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성벽이 사라진 지금, 전투가 길어지면 오히려 네크로가 불리하다. 유저들이 개인 사정으로 로그아웃한다면 전력 유실이 심하다. 특히 시차가 큰 유럽이나 북미 유저들은 재밌는 이벤트를 즐기려고 일부러 시간을 맞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에르제베트 역시 전투를 서둘러야 하는 사정이 있는 듯했다.
"피의 끈끈한 이어짐."
"제이크, 다미안. 무슨 스킬인지 알아?"
대답은 다미안에게서 나왔다.
"데미지를 복제하는 주술입니다."
암울한 상황이 되었다. 만약 A가 100의 데미지를 받았다고 하면, A는 100의 데미지를 받고 A와 한편인 자들은 50의 데미지를 나눠 받는다. A의 아군이 10명이라면, 아군은 5의 데미지를 받는 것이다.
스킬 설명을 들은 네크로는 머리 회전을 멈췄다. 잔뜩이나 고민할 게 널렸는데, 그 모든 고민을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할만한 치명타가 들어왔다.
데미지 1000을 받았다고 가정할 때, 500의 데미지를 수십만 아군이 나눈다. 한 명에게 0.1 정도만 돌아가는 것이다.
얼핏 미미한 데미지로 보이지만, 상대의 공격을 받는 유저가 10만이라면, 1만의 데미지가 들어오는 셈이다.
성벽이 있다면 공격을 받는 인원을 최소화하여 이 주술을 무용지물로 만들겠지만, 지금은 유저로 성벽을 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급과 중급 뱀파이어들이 끝내 움직였다. 성벽이 사라진 소금성을 반원으로 둘러 전투 면적을 늘리려 했다.
그때 네크로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벽 없애고 바로 이 스킬 썼으면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을 텐데? 메익의 품 스킬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고 하기엔, 아무리 에르제베트라도 메익의 품이 펼쳐질 걸 확신하는 건 무리다.'
작은 의심의 씨앗이 네크로의 뇌리에 심어졌다. 매우 중요하다는 느낌에 네크로는 생각을 억지로 이어갔다.
'마법 거울의 쿨타임이 20분이었어. 그걸로 현피가 2번이나 스킬을 막아냈지. 그땐 심장이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스킬을 바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때 드레이크와 50분 가까이 싸웠다. 모두 현피가 두 번이나 에르제베트의 무시무시한 주술을 막아낸 덕분이었다.
'어떻게 회복했는지 모르지만, 얀의 심장을 타락시키려고 장미꽃을 꽂고 수십 년 기다렸다. 신이 이름을 찾았다는 말에 무척 급한 기색이었다.'
문득 아까 시작할 때 에르제베트의 손에 들려있던 커다란 장미가 생각났다. 꽃송이보다는 가시에 더 눈길이 가는 본말도치의 꽃이어서 인상이 남았다.
'숲의 여왕 혈통의 심장을 어떻게 얻었는데 미처 타락시키지 못한 건가? 그래서 대주술을 연이어 사용하지 못했을까?'
"우자르. 다음 주술을 펼치려면 얼마 기다려야 하지?"
"23시간 정도 더 흘러야 한다."
"드래곤도 대마법을 연속 사용할 수 없는 건가?"
"드래곤이라면 세 번까지 연속 펼칠 수 있다."
"추종자 소환."
전투 상황이기에 타이탄 다섯 기, 철갑 기사 300기, 철갑 전사 400기에 강철 골렘 3000기가 한꺼번에 나타났다.
"연미진."
제비 꼬리를 연상케 하는 'V'형 진식을 펼친 추종자들이 유저를 에워쌌다.
"추종자를 기준으로 방패병은 추종자 뒤에서 버틴다. 성기사와 전사 유저는 추종자 앞에서 적을 막다가 위험하면 후퇴한다. 용병과 소환수는 개인 판단에 맡기겠다."
'정상 상황이라면 에르제베트는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 메익의 품도 다 사라진 지금 성 밖에서 종속자로 근접 유저들만 상대해도 쉽게 처리한다. 분명히 심장이 말썽일 거야. 전투를 오래 할 수 없거나, 특정 시간에 심장이 반항할 수도 있어. 모험해야 하나?'
네크로는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대로 수비만 하다가 에르제베트가 물러나도 나쁠 게 없다. 그러나 지금 초인동맹이나 철혈팔기는 물론, 가미카제마저도 네크로의 국가를 무너뜨릴 능력이 있다. 거기에 에르제베트라는 폭탄 하나를 더 안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실패하면 끝장이지.'
소금성을 빼앗기면 네크로의 국가는 반드시 망한다. 유저들은 아직 탄광이나 광산을 빼앗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NPC인 에르제베트는 어쩌면 오아시스의 탄광과 네사모의 광산 소유권을 강탈할지도 모른다.
"신의 불, 천벌, 도발."
철벽의 스킬에 하급 뱀파이어 수십 마리에 드레이크 몇 마리가 걸려들었다. 그렇게 전투는 전혀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시작됐다.
'에르제베트의 통제력도 생각보다 낮다.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라는 말인데, 그렇다고 내가 쉽게 생각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스턴, 처리해."
철벽은 저택 지하에서 에르베제트와 싸울 때보다 훨씬 성장했다. 공중에서 몸을 던진 드레이크를 방패로 완벽히 막아냈다. '절대 밀리지 않음' 옵션에 당해 관성을 무시하고 멈춘 드레이크는 눈 깜빡일 힘조차 사라졌다. 무인과 도둑들이 주먹으로 때리고 비수를 약점에 박으며 드레이크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마찬가지로 도발을 익힌 성기사들이 드레이크나 하급 뱀파이어를 끌어왔지만, 그 숫자는 한둘에 불과했다. 신의 불과 천벌의 도움이 없는 도발은 강력하지 않았다.
철벽은 유니콘을 타고 달리면서 뱀파이어가 단단히 뭉친 곳을 찾아 도발 스킬로 진형을 흩어버렸다.
적은 죽는 족족 사라졌고 유저는 10분 뒤에 부활했다. 근접은 후유증이 사라질 때까지 쉬어야 하지만, 원격은 스탯이 하락해도 깐죽대며 공격하고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피의 이어짐으로 아군이 받는 데미지가 총 50% 늘었다. 우자르의 무지개 버프와 소금성 자체 버프 덕분에 어느 정도 해소했지만, 여전히 네크로 측의 열세였다.
"지휘 전권을 다미안에게 넘긴다."
말을 마친 네크로는 공중에서 드레이크들과 싸우는 해동청을 역소환했다.
"텔레포트, 에르제베트 근처로."
네크로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에르제베트 곁에 나타났다. 생중계를 지켜보던 모든 시청자가 깜짝 놀랐다.
축구 생중계 신호가 위성을 통해 전달되면 음성이 화면보다 4초 정도 빠르다. 동기화 작업까지 해서 조금 지난 화면을 송출한다.
마찬가지로 이번 생중계도 서버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로 전달하는 게 아니다. 전장에서 벌어진 모든 상황을 파악한 인공지능이 정보를 조합해 영상으로 만들어 송출한다. 서버에서 일어난 일이 잠시 텀을 두고 시청자에게 전달된다. 그 시간은 인공지능이 재주를 부리기에 충분히 길었다.
전 세계 수천만 시청자가 자신만 보고 있는 줄 모르고, 네크로는 유니콘이 띄워준 텍스트를 정성껏 읽었다.
"거짓된 신을 만들어 종족을 이룬 기형아야. 오늘, 네 심장을 도려내 신의 제단에 바치리라."
받아먹은 돈이 있으니 유니콘의 이런 요구사항을 거절할 수 없었다. 텍스트가 사라지기 무섭게 네크로는 래퍼로 변신했다.
"죽음의 군단. 해동청 소환."
지난번에 한 시간 가까이 고전했던 드레이크보다 훨씬 크고 흉하게 생긴 놈이 에르제베트의 곁을 지켰다. 에르제베트의 만류에 씩씩거리기만 하던 드레이크는 해동청이 나타나자 더욱 발광했다.
드레이크의 몸에 대고 있던 에르제베트의 손이 떠나자, 드레이크가 해동청에게 화살처럼 쏘아졌다.
네크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에르제베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다행히 격이 그레이트 웜 정도는 안 되어 죽음의 군단이 접근하자마자 죽어버리는 허망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게임이다. 이렇게 강한 상대를 그냥 보내지 않는다. 반드시 약점을 찾아낼 단서를 줄 것이다.'
드레이크는 앞다리가 짧고 가늘었다. 해동청 역시 앞다리가 뒷다리에 비교하면 가늘고 짧지만, 드레이크처럼 차이가 심하지 않았다.
비행은 해동청이 몇 수 위였다. 해동청이 은근슬쩍 내민 앞다리를 물려고 목을 쭉 내민 드레이크는, 'L'자로 꺾어 비행한 해동청에게 목을 물렸다.
해동청도 머리가 꽤 큰 편이지만, 드레이크의 굵은 목을 오래 물지 못했다. 적당히 굵어야 물고 늘어지기 딱 좋은데, 드레이크의 목은 굵어도 너무 굵었다.
앞다리가 약해서 목을 제대로 물기만 하면 드레이크를 쉽게 제압할 수 있는데, 역시 자연의 섭리는 하나를 주면 하나를 빼앗았고, 하나를 빼앗으면 반 개 정도는 줬다.
머리가 둔한 드레이크라도 똑같은 수에 마냥 당하진 않았다. 앞다리를 미끼로 내밀어도 걸려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해동청은 전술을 바꿨다. 몇 번 접전을 벌인 후 도망치는 척하면서 드레이크를 유인했다.
드레이크는 잡힐 듯 말듯 애태우는 해동청을 쫓아가며 점점 속도를 올렸다. 박쥐를 닮은 피막 날개여서 드레이크는 고속 비행할 때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비행형 그레이트 웜을 유인할 때 네크로를 태운 채 했던 어려운 동작을 펼치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갑자기 몸을 뒤집고 비행 방향까지 뒤집은 해동청은, 드레이크가 보기엔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등이 바닥을 향하고 배가 하늘을 향한 채 드레이크와 스친 해동청은 꼬리 중간을 억세게 물어버렸다.
해동청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사고를 멈춘 드레이크는, 꼬리에서 통증이 몰려왔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바로 굵은 뒷다리로 해동청을 걷어차서 꼬리를 문 입을 풀어야 했는데, 몸을 웅크리며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몸을 빙글 돌린 해동청은 주둥이를 살짝 풀어 밑에서 물었던 자세를 위에서 문 것으로 바꿨다. 드레이크의 뒷다리도 닿지 않는 곳으로 옮긴 후 턱에 힘을 꽉 줬다. 해동청의 금속 이빨이 드레이크 꼬리 비늘을 뭉개고 살에 박혔다.
꼬리가 물린 드레이크는 착륙하려 애쓰고 해동청은 허공에 머무르려 애썼다. 하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기를 쓰고 내려가려 했고 하나는 입과 목에 힘을 주며 날개를 분주하게 퍼덕였다.
당연히 중력의 도움을 받는 드레이크가 우위였다. 해동청이 레벨4여서 힘도 드레이크가 더 셌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드레이크와 해동청이 바닥으로 향했다.
"끼욧."
에르제베트의 붉은 장미에 맞아 튕긴 대장군이 검 대신 7미터 길이의 창을 꺼내더니 이상한 외침과 함께 허공으로 던졌다. 실력인지 스킬인지 창은 정확히 드레이크의 두 눈을 관통했다. 왼눈으로 들어가 오른눈으로 나온 창은 드레이크의 피통을 많이 깎진 못했지만, 해동청에게 승기를 안겨줬다.
해동청은 드레이크가 눈을 잃은 걸 확인하자마자 주둥이를 풀었다. 드레이크는 위로 당기던 힘이 사라지자 바닥에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 드레이크를 놓고 밑으로 당기던 힘이 사라져서 몸을 조금 더 띄운 해동청은, 버둥거리기만 하는 드레이크를 목표로 내리꽂혔다.
해동청의 두 앞발은 정확히 드레이크를 관통한 창을 타격했다. 해동청의 무게와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강철 창이 세게 휘었다. 드레이크에게 손을 줘도 쉽게 뽑아낼 수 없게 만든 해동청은, 드레이크 등에 올라타고 두 앞다리로 머리와 목을 난타했다.
드레이크의 피통도 장난 아니어서 해동청이 드레이크를 때려죽이고 몸을 일으켰을 때는 죽음의 군단이 백도 안 남은 타이밍이었다.
"해동청, 에르제베트에게 브레스."
해동청이 두 앞다리를 넓게 벌렸다. 목과 가슴이 넓어지더니 뭔가 꿀렁거렸다. 예전에 브레스 사용할 땐 이렇게 요란하지 않았는데, 숙련도가 올라서인지 모션이 달라졌다.
연한 황금색 신성 브레스가 에르제베트의 몸에 닿았다. 그제야 에르제베트의 피통이 조금씩이나마 떨어지기 시작했다.
'드레스가 짧아졌다.'
드레스의 땅에 끌린 부분이 50미터에서 15미터 정도로 줄었다. 에르베제트가 스킬을 사용하며 소모한 게 틀림없었다.
'스킬 세 개에 35미터라면, 이젠 큰 스킬 하나만 남았구나. 스킬을 쓰게 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 바로 공격해야 할까?'
시간이 후딱 흘러 딱히 에르제베트의 약점을 찾아내지도 못했는데 죽음의 군단이 사라졌다. 죽음의 군단을 대가로 알아낸 거라곤 붉은 장미가 엄청 강한 무기라는 것뿐이었다.
'망설일 틈도 없다. 브레스를 맞은 에르제베트가 생명력을 회복할 수 없을 때 해치워야 한다.'
"강신."
네크로의 몸이 천천히 커졌다. 거기에 맞춰 아이템도 커졌다. 5미터짜리 에르제베트가 꼬마로 보일 정도로 몸을 키운 네크로는 멀미로 고생했다. 눈감고 싶은데 눈꺼풀은 물론 솜털 하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인간과 푸레의 피가 섞인 기형아구나."
"설마, 바알드로?"
"안타깝구나. 그때 나를 선택했으면 모든 종족의 배척을 받지 않았을 텐데."
"힘만 빌려준 게 아니라 강신했구나. 너도 한번 죽어봐라."
- 작가의말
전투 전에 주인공이 했던 대사는 인공지능이 준 겁니다. 텍스트 보면서 읽은 거였죠. 갑자기 중2력을 뽐내는 주인공에 어리둥절하셨던 분들 의문이 해소됐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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