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하는 용암2
철혈팔기의 부길드장 베이는 왕의 혈통을 얻은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베이는 중국어에서 등이라는 뜻인데, 구어에서는 재수 없다는 뜻으로 통했다.
- 곡물 생산량이 30% 상승했습니다. 인구가 2만 명 증가했습니다.
작은 길드 길드장이었던 베이는 같은 대학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게임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차피 시험을 보고 60점만 맞으면 졸업장을 탈 수 있기에 공부는 뒷전이었다.
정말 우연히 절제의 무인 에픽 퀘스트를 얻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철혈팔기 세력이 이튿날 베이의 핸드폰으로 전화했고, 철혈팔기가 제시한 어마어마한 성공 수당에 눈이 멀어서 바로 대학을 자퇴했다.
철혈팔기로부터 받은 돈으로 해남과 진황도에 별장 한 채씩 사 놓고 부자들만 몬다는 스포츠카도 한 대 장만했다. 그리고 대당성세의 왕이 된 지금 열흘에 한 번씩 들어오는 세금도 꽤 큰돈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이름을 천하게 지어야 한다고 했어. 이름이랑 반대되니까. 한국의 네크로도 사령술사로 이름 지었는데 결국 성기사 됐잖아.'
네크로가 성기사와 사령술사의 혼종이라면, 전사 주제에 절제의 무인 에픽 퀘스트를 완성한 베이는 전사와 무인의 혼종이었다. 동해와 같은 내공 고수가 아니라 힘세고 맷집 좋은 외공 고수 느낌이었다.
왕이 된 후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혼자 다니지 못했다. 현실에서도 늘 사람 둘이 붙어 다니는데, 게임에서도 틈을 주지 않았다.
'만리장성에 가면 돈뿐 아니라 국가 간부도 될 수 있다던데. 내가 그때 며칠만 참았으면 몸값도 훨씬 높게 받아냈을 텐데.'
세상에 후회 약이 없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베이는 지금도 본인 나이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를 쉽게 거머쥐었지만, 씀씀이도 커지고 눈높이도 달라졌다. 철혈팔기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특히, 남동부로 가기로 했다가 갑자기 배를 사서 상대적으로 낙후한 북부로 온 일. 드래곤에게 된통 당하고 NPC의 반란으로 국가가 전복된 후 남동부로 가기로 정했다가 갑자기 변심해서 북부에 다시 둥지를 튼 일.
베이는 시종일관 남동부로 가자고 주장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저 지시를 받고 접속해서 시키는 대로 국정을 처리하고 세금을 분배하는 게 게임의 전부였다.
그래도 최근 들어 게임 시간으로 보름에 한 번씩 생산량이 껑충 뛰어 베이를 기쁘게 했다. 식량이 많아지면 인구가 늘고, 인구가 늘면 세금이 많아진다.
'스포츠카 새 걸로 바꿔야지. 이후 세금이 더 많이 들어올 텐데. 내 신분에 걸맞은 품위 있는 차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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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네크로 길드와 결별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기가 성숙한 건가?"
"가미카제 길드의 첩자가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역천이 북부를 상대로 빙하시대 스킬 사용할 거라고 합니다. 쿨타임은 대략 3개월에서 4개월 사이로 추정합니다."
"역천이 빙하시대를 사용하고 나면 바로 고구려의 성을 전부 함락해야겠군. 그런데 속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만리장성에서 견제를 약속했는데, 믿어도 될까?"
"만리장성을 믿는 게 아닙니다. 저들이 멍청이 아니라고 믿을 뿐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봐."
"대한제국은 그간 가미카제가 점령한 마을만 파괴하면서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머릿수는 오히려 역천 길드를 능가합니다. 우리가 도시를 공격할 테니 마을을 공격해서 견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마 만리장성이 역천 길드가 점령한 마을을 공격하고 대한제국은 가미카제 소유 마을을 공격할 겁니다."
"요즘 철혈팔기가 살아나고 있잖아. 만리장성이 그쪽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
"그래서 오히려 고구려를 약화하고 우리랑 고구려가 제대로 붙게 판을 만들려는 겁니다. 우리가 고구려를 견제하면 자기들은 쏙 빠져서 대한제국까지 불러서 철혈팔기를 상대할 계획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성을 함락하고도 우리가 네크로 길드를 상대할 여력이 남을까?"
"한국의 평강 길드, 중국의 맹강녀 길드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또 뭐지?"
"한국과 중국의 여권주의자들입니다. 여자랑 남자가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미친것들입니다."
"예전에 남자들이 피땀 흘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니 여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일어난 적 있었지. 여자들이 국가에 기여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건 아냐. 하지만 여자들이 한 기여도 결국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한 거 아냐. 남자 도움 없으면 국가에 기여도 못 하는 모자란 것들 아니냐고. 여자는 애 잘 낳고 젖 잘 나오면 그만이야."
"일본의 여권주의 성향이 강한 길드를 통해 평강 길드와 맹강녀 길드를 연락했습니다. 네크로의 왕국을 점령하면 여자들의 국가로 인정해 준다고 약조했습니다. 세 세력이 연합하여 네크로의 국가를 공격할 겁니다."
"네크로가 이기면 어떻게 되고 미친년들이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때 상황을 봐가며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발톱이 억세고 이빨이 날카로운 네크로를 곁에 두는 건 장구지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아. 괜찮은 계책이야. 그런데 첩자의 정보가 가짜고 역천이 우리 쪽에 스킬을 사용한다면?"
"똑같이 진행할 겁니다. 서부는 버린다는 마음으로 동남부에 모든 전력을 투입하겠습니다. 그리고 네크로의 국가는 인구가 800만이 넘는 거로 알려졌습니다. 갑자기 수확량이 떨어진다면, 북부처럼 NPC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세 세력의 연합에 더 쉽게 패배할 겁니다."
"네크로에 식량을 대량으로 주문해. 시세보다 5% 정도 더 비싸게 주고 사. 최대한 많이. 저들이 비축한 식량을 최대한 줄여. 그리고 역천의 동향을 엄밀히 감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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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역천은 평범한 아이템을 착용하고 전번에 얼렸던 숲과 가장 가까운 WORLD 소속 도시의 포탈에 나타났다. 국가가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기에 포탈로부터 나오는 사람에 대한 검문이 없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도시 밖에 나간 후, 페가수스를 불러 숲으로 이동했다.
'회복이 참 빠르네?'
지구라면 수십 년 걸려야 할 수준의 복구가 짧은 기간에 이뤄졌다. 얼음의 정령왕이 냉기를 흡수한 것과 푸레가 숲을 가꾼 사실을 모르는 역천은 그저 경이로운 회복력에 감탄했다.
"조금 더 올라가자. 그렇지. 전투 모드."
페가수스를 전투 모드로 전환한 후 역천은 세트 아이템과 쿨타임 감소 템으로 세팅했다.
"엄동설한."
온도가 쭉 내려갔다. 지난번보다 추워지는 속도가 빨라 만리동토를 바로 이어서 펼쳤다.
마나 물약을 삼킨 역천은 마나가 꽉 차는 대로 빙하시대를 펼쳤다. 마법을 직접 펼친 당사자에게 데미지 1도 안 들어가지만, 떨어지는 기온은 확실히 체감되었다.
- 얼음의 정령왕이 그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 정령왕이 냉기를 전부 흡수했습니다.
믿기 어려웠다. 동영상 되감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스킬 사용하기 전 상태로 돌아갔다.
- 정령왕이 성의 표시를 합니다.
- 얼음 마법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 얼음 마법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 얼음 마법의 빙결 효과가 심화합니다.
- 얼음 마법의 쿨타임이 소폭 감소합니다.
역천은 망연자실해 페가수스가 비행시간이 다하여 알아서 땅에 내려갈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드래곤을 비롯해 불가항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몹을 자주 봤던 네크로와 달리, 가볍게 자신을 무력화하는 몹을 처음 만난 역천은 마음의 타격이 컸다.
한편.
"이 정도면 쿨쿨 자고 있을 드래곤을 이길 수 있겠어."
얼음의 정령왕은 신나게 북부의 하얀 뿔로 달려갔다. 얼음을 깨고 나왔을 때와 달리, 엘라투르사는 정령왕이 레어에 침입한 후에야 감지하고 깨어났다. 미처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엘라투르사는 정령왕의 주먹에 골이 울렸다.
눈동자가 하얗게 돌아간 엘라투르사는 얼음의 정령왕을 덩치가 인간 갓난아기 정도로 작아질 때까지 팼다. 너무 작으면 냉기 모으는 속도가 느려져서 늘 적당히 팼는데, 선빵을 맞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손속을 과하게 썼다.
얼음으로 얼음의 정령왕을 얼려 하얀 뿔 산의 중심부에 가둔 후, 엘라투르사는 이성을 되찾았다. 정령왕을 패느라 부서진 동굴 때문에 가슴이 저렸다.
"집사. 검은 바위 부족을 불러서 레어 보수해."
눈만 노랗고 온몸에 잡털 하나 없이 까만 표범이 공손하게 인사한 후 레어를 벗어났다. 레어를 벗어난 표범은 게이트 마법으로 문을 만들어 검은 바위 드워프 부족을 방문했다. 드래곤 DC로 50% 할인을 받은 후 게이트로 드워프들을 레어로 옮겼다. 돌아온 레어에는 위대한 주인님의 모습이 사라졌다.
검은 바위 드워프들이 수리를 시작할 무렵, 엘라투르사는 대당성세의 수도 모르카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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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 길드에 속았다."
철혈팔기의 간부들이 하나같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봐. 지금 북부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어. 그리고 서부 날씨는 그대로야. 역천이 말했던 날짜는 이미 지났고."
얼음의 정령왕이 엘라투르사에게 잡히면서 다시 기온이 내려가는 건데, 드래곤에게 어마어마한 재물을 바치고 국고가 거덜 난 철혈팔기는 차분히 생각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북부를 포기해야 합니다."
베이의 말에 간부들이 눈을 흘겼다. 국가 정책을 손수 실행해야 하는 베이가 상황 파악을 하라는 의미에서 회의 말석에 앉혔다. 그런데 약관을 갓 넘긴 어린놈이어서 눈치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었다.
"이런 말 하기 분하지만, 역천 길드는 현재 레전드 최고 길듭니다. 빙하시대와 같은 어마어마한 재앙급 마법을 벌써 얻어낸 것도 대단하고, 마나포를 만든 것도 대단하죠. 1년 전에 천오백만 위안이나 투자해서 전함을 샀습니다. 그 전함이 지금까지 일억 위안의 효용 가치를 보였다는 게 전문가 견햅니다. 그 전함 덕분에 바다를 봉쇄해서 시간을 벌었고 마탄포를 연구해 마나포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지금 사안과 무슨 상관이지?"
"그런 역천이 집착하는 남동부. 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베이를 쭉 무시해왔던 철혈팔기 간부들은 그제야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됐다.
"그게 뭔데?"
"대륙 남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지진이 끊이지 않는 남부에 큰 보물이 숨어있다고 장담합니다."
"확실한 정보 아니고 그냥 추측이야?"
베이는 인벤토리에서 책 하나 꺼냈다. 왕 노릇이 하도 심심해서 잡화점이나 시장에 가끔 나오는 이야기책을 사들였다.
"이 책을 보면, '대륙 남부는 광산과 탄광이 가장 많은 곳으로 다양한 종족이 모여서 평화롭게 살았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지금 하얀 뿔 산맥에서도 찾고 있잖아."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드래곤이 없는 세상은 천국 같았다'라고도 적혀있죠."
간부들이 생각에 잠겼다. 베이는 기회다 싶어 득의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네크로 유저가 탄광을 보유했습니다. 탄광이 국가 지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모두 확인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누구도 네크로의 탄광을 빼앗을 생각을 안 할까요? 제 생각엔, 아직 개인이 소유한 탄광을 빼앗을 방법이 레전드에 없습니다."
"네가 모르는 게 있는데, 드래곤 산맥의 광산을 네크로가 역천에게 팔았어. 구체적인 거래 내용은 모르는데, 빼앗을 방법이 없다면 네크로가 왜 역천에게 팔았겠어?"
"우선 그 광산은 네크로 개인 소유가 아니라 네크로 길드 소유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 유저들만 대륙에 진출했습니다. 역천은 네크로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광산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게 훼방 놓을 능력이 차고 넘쳤습니다. 10마리밖에 없는 그리핀을 사람을 보내 계속 타고 다니게 하면 광물 운송이 방해받겠죠? 그 외에도 많은 수단으로 네크로를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떠올린 걸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 못 했을까?"
"누가 먼저 행동에 옮기냐가 중요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각자 탄광이나 광산 하나씩. 어떻습니까?"
"무슨 소리야?"
"길드나 국가 소유 말고 개인 소유로 하자는 말입니다. 저를 빼고는 다들 믿고 부릴 사람 있잖아요. 저는 그저 조그마한 탄광이나 광산 하나로 만족합니다."
서로 눈길이 오갔다. 분석에 따르면 네크로는 탄광으로 돈을 얼마 못 벌었다. 네크로 길드가 소유한 도시에 연소탄을 공짜로 공급했다. 그리고 국가 소속 마을에 최저 가격으로 팔았고 친한 국가나 길드에는 시장 가격보다 3% 정도 싼 가격에 넘겼다.
연소탄을 캐는 광부에게 주는 일당, 탄광 소유자가 국가에 바치는 세금, 연소탄 판 돈에서 또 일부 세금으로 바치고 나면 남는 돈이 생각보다 소박했다.
그러나 철혈팔기 간부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국가체제는 사회주의를 따르지만,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따르는 중국이다. 시장경제에 따라 제 가격을 받고 팔 작정이었다.
"좋은 생각이야. 야마토 길드도 자꾸 남동부를 벼르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그쪽도 냄새 맡았을 가능성이 크구나. 그럼 야마토보다 먼저 남부 지진대와 가까운 지역을 점령해야겠어. 그리고 오늘 일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아무리 심복이라도 한 글자 누설하면 안 돼."
'흐흐. 아무리 개인 소유라 해도 국가에 소유세랑 판매세를 내야 할 거고. 그 추가한 세금의 0.3%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야. 이젠 배우 지망생 말고 진짜 연예인 만나야지.'
베이는 옛 길드원들을 부려 직접 탄광이나 광산을 소유하려 했다. 하지만, 레전드의 스케일을 접하고 어리석은 생각임을 인정했다. 소유하기도 힘들지만, 소유해도 지속하여 이익을 창출하기 힘들었다.
철혈팔기 간부들이 약속 안 지키고 탄광이나 광산을 베이에게 안 줘도 세금으로 이득을 얻는다. 베이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게 없었다.
'근데, 설마 이거 그냥 꾸며낸 이야기책은 아니겠지? 그러면 이후 발언권이 아예 사라지는데. 눈치 없는 척 끼어드는 것도 힘들겠다.'
- 작가의말
대략 여덟 달 전에 어떤 분이 여러 세력이 엉키는 걸 보고 싶었다는 댓글 남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뇌리에 박혔습니다. 그땐 능력이 몹시 부족해 원하는 바대로 써드리는 게 힘들었습니다. 허구의 소설이지만,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현판 쓰면서 가슴 아프게 하는 댓글이 가끔 달렸거든요.
이 글은 게임 소설이기에 지도자가 멍청할 수 있고, 독재도 가능합니다. 게임 잘하는 것과 공부 잘하는 건 분명히 차이가 있죠. 보다 욕망을 쉽게 드러내는 게임이기에 첨예한 모순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게임 하는 모습 외에도 이런 식으로 여러 세력이 얽히는 장면을 묘사하려 합니다. 대부분 주인공이 이득 보겠지만, 가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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