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라칸 레이드2
투라칸의 덩치는 예상외로 작았다. 물론, 작다고 해도 송아지 크기는 되었다. 이빨도 날카롭지 않고 발톱도 길지 않았다. 귀 끝이 살짝 처져서 온순한 느낌마저 들었다.
투명한 얼음을 깎아 만든듯한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아 인형 느낌을 풍겼다.
차분한 투라칸과 달리, 왕의 존재로 흥분한 늑대들은 평소보다 더 기승을 부렸다.
"제이크, 통계."
"122만."
평소보다 40만 이상 더 몰려왔다. 투라칸을 30분 막아내면 이들 모두 철수한다. 10만을 죽여야 물러나던 다른 때보다 언뜻 상황이 좋아 보였다. 늑대 10만을 죽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깐.
하지만, 투라칸 주변에 차갑게 흩날리는 얼음 가루만 봐도 30분 막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구룩 부족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전투 개시를 기다렸다. 평소와 다른 점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미리 목책에 올라와서 대기했다.
"수비를 여러 층으로 해서 시간 끄는 게 낫지 않습니까?"
네크로의 질문에 그웩이 대답했다.
"목책이 돌파당하면 누구도 투라칸을 막을 수 없어. 차라리 모든 수비력을 목책에 쏟는 게 답이지."
우오오올.
투라칸의 하울링은 날카로웠다. 새 수정구를 두 손으로 받쳐 든 가뭉의 입술이 모터라도 달린 듯 부르르 떨렸다.
극한영창. 유저인 네크로로선 꿈도 못 꿀 스킬. 파멸 급 마법을 익힌 대마도사만 익힐 수 있는 스킬로, 현재 유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세라의 장막."
검은 장막이 얇게 펼쳐져 목책을 감쌌다. 가뭉이 흑마술 계열이라고 해서 인형에 송곳 꽂는 이상한 스킬만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상' 스킬을 펼쳐냈다.
"공간을 이용한 마법이야. 상대의 공격을 여러 공간으로 분산하지. 창조한 공간들이 상대 공격을 수납할 수 없을 때면 마법이 깨져."
투라칸이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원래 늑대 걸음이 저런지, 투라칸만 특별히 품위가 넘치는 건지. 게다가 투라칸이 지나간 자리가 눈밭임에도 유달리 하얗게 자국이 남아 눈 부신 빛을 반사했다.
- 와, 저거 펫으로 키우고 싶다.
- 별풍 왜 없어? 오랜만에 힐링 되는 영상이야.
투라칸의 가슴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얼음처럼 투명하던 눈동자에 옅은 푸른색이 살짝 떠오르더니, 크게 벌린 투라칸의 입에서 하얀 서리가 쏟아졌다.
생방송 인공지능이 투라칸의 머리를 줌인했다가 쭉 줌아웃하면서 냉기의 브레스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정말 멋지게 연출했다.
그 모습에 채팅창이 출렁였다. 광고를 관리하는 인공지능이 때를 놓칠세라 황급히 광고를 삽입했다.
와인잔이 깨지듯, 세라의 장막이 맑은 파열음을 내며 바스러졌다.
"메익의 품."
네크로 일행에게 호감이 깊고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성직자 그웩이었다. 가뭉과 달리 영창도 없이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황금색 누런 불이 목책과 목책 위에 있는 사람들을 덮었다. 그러나 누구도 뜨거움을 느끼진 않았다.
목책을 얼리던 냉기의 브레스가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그웩이 불러온 신성한 불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연기도 남기지 못하고 신성한 불이 사라진 후, 목책 군데군데가 얼어 터지고 무너졌다.
"이러면 목책에 올라온 게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마법에 저항력이 있다네. 저들은 목숨을 걸고 목책을 지킨 셈이야.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네."
여자와 아이들까지 목책에 올라온 건, 목책의 저항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비록 게임이지만, 강대한 적에 맞서서 모든 걸 던지는 이들의 행동에 가슴이 뭉클했다.
활을 쏘고 단창을 던지는 자들은 여전히 목책 위에 남았고, 남은 자들은 방패와 무기를 꼬나들고 목책이 무너진 곳으로 분산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지휘자도 없는데 알아서 자기 자리를 잘 찾아갔다.
"투라칸은 어디로 올까요?"
"투라칸은 늑대들의 왕이야. 품위를 아는 자이기에 수하들이 먼저 자리를 만들어야 안으로 진입한다네."
"돌쇠, 저기 세 곳을 막아."
가장 먼저 뚫린 곳으로 투라칸이 난입한다. 일단 함정과 거리가 먼 곳은 돌쇠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했다.
"목책이 뚫린 적 있습니까?"
"매번 뚫렸지. 다행히 신의 가호로 늘 투라칸이 밤의 결정을 못 찾고 후퇴했네."
30분이 되면 투라칸은 후퇴해야만 한다. 투라칸에게 돌파되어도 시간만 잘 끌어주면 된다는 뜻이다.
'이건 게임이야. 지금까지야 그런 식으로 진행했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개입으로 투라칸이 밤의 결정을 찾아낼 수도 있어.'
목책과 해자는 늑대의 푸른 피로 얼룩졌다. 그러나 전황은 구룩 부족에게 점점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늑대들은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듯 몸을 계속 던지는데 구룩 부족의 공격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었다.
목책이 더 많이 무너지면서 목책에서 살상을 담당하던 구룩들이 칼과 방패를 들고 구멍을 막아야 했다. 가끔 위급한 상황에 늑대를 부둥켜안고 해자로 뛰어드는 구룩도 있었다.
"현피, 도발하자."
브레스 하나 쏟아내고 얌전히 있는 투라칸을 도발하기로 했다. 투라칸을 처음 상대하는 거긴 하지만, 지금이 도발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느낌이 팍 왔다.
"마법탄, 대폭발, 파괴의 광선."
남은 두 스킬은 근거리 마법인 충격파와 목숨 부지용 마법인 순간 이동. 마법탄이나 대폭발은 투라칸에게 별 피해를 주지 못했다. 파괴의 광선은 원래 공격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현피의 마법은 투라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대폭발로 투라칸 주변의 늑대들이 광폭화 저주에 걸렸고, 그중 하나가 투라칸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현피, 계속 도발해. 저놈이 돌파한 후 너를 찾게 만들어."
마법탄과 대폭발은 쿨타임이 돌아오는 대로 펼쳤고, 쿨타임이 아예 없는 파괴의 광선을 투라칸 주변 늑대들에게 쏘아냈다. 공격력은 없지만, 가끔 광폭화 저주에 걸리게 만들어 투라칸의 화를 점점 더 거세게 돋웠다.
"돌파당했네. 이제부턴 각자 생존해야 하네."
목책이 무너지면 미래가 없는 것처럼 모든 걸 내걸고 지키던 구룩 부족은, 목책이 돌파당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한 곳에서 물꼬가 터지자 여기저기에 연쇄반응이 일어났고, 어느새 늑대들이 여러 군데로 목책 안에 진입했다.
목책이 가장 크게 무너진 곳으로 투라칸이 몸을 날렸다. 현피는 투라칸이 있는 곳으로 조준도 없이 마법을 난사한 후 바로 그리핀을 타고 도망쳤다.
투라칸의 눈이 밝은 빛을 잠깐 머금었다. 그리고 반투명한 빛줄기가 현피를 향해 쏘아졌다.
"순간 이동."
빛줄기에 적중당한 그리핀은 곧바로 역소환 되었다. 게임 설정에 따라 상처가 다 낫기 전에는 현피의 소환에 응하지 않는다.
순간 이동으로 착지한 현피는 철벽이 있는 곳으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달렸다.
"돌쇠."
긴말이 필요 없이, 네크로의 뜻을 알아차린 돌쇠가 투라칸 앞을 막아섰다.
"후퇴."
그러나 리치 세 마리와 듀라한 다섯 마리가 순식간에 바닥에 눕자 네크로는 바로 후퇴를 명했다. 대신 신의 회초리를 들고 직접 투라칸에게 덤볐다.
- 사망하였습니다. 바로 부활하시겠습니까?
길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발톱이 몸에 닿은 순간 네크로는 죽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네크로는 최상급 기사들이나 보여주던 오라가 투라칸의 발톱에 투명하게 서려 있는 걸 발견했다.
"부활."
귀한 4등급 언데드 8마리의 목숨과 네크로의 살신성인 덕에 현피가 무사히 철벽 근처까지 도망갔다. 신의 회초리가 내구를 자동으로 회복하고, 일부 템이 용병 길드에서 얻은 내구도 회복 템이기에 수리비는 얼마 들지 않는다.
"철벽, 우선 신의 분노부터."
혹시라도 전투 경험이 적은 철벽이 실수할까 봐 네크로는 파티 채널로 일깨워줬다. 굳이 신의 분노를 가장 먼저 펼치게 한 건, 신의 분노가 쿨타임이 가장 길기 때문이었다. 다른 특별한 이유는 따로 없었다.
"신의 분노."
아니나 다를까. 신의 분노는 실패했고 철벽은 아주 짧은 경직 상태를 경험했다.
"성화."
철벽의 갑옷과 방패와 무기가 신령한 불길로 뒤덮였다. 네크로는 투라칸의 눈에 언짢은 기색이 어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교도 심판."
사실 쿨타임이 좀 되는 이교도 심판을 먼저 사용하는 게 맞다. 성화는 지속형 스킬이고 쿨타임이 없기에 언제 사용해도 된다. 그러나 투라칸의 눈빛에 겁먹은 철벽은 수비와 공격에 도움이 되는 성화부터 펼쳤다.
"천벌."
"도발을 광역 말고 단일로 맞췄지?"
"네, 도발."
꽤 귀찮게 굴었던 현피마저 무시하고 협곡으로 향하려던 투라칸이 머리를 돌렸다. 이빨을 드러내며 입술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린 투라칸이 도발 스킬을 저항하지 못하고 철벽을 덮쳤다.
"신의 분노."
정작 투라칸이 공격하자 철벽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쿨타임이 돌아온 신의 분노를 정확히 펼쳤다.
"영광일섬."
투라칸이 접근해서 철벽을 공격하려는 순간 영광일섬을 펼친 동해는, 투라칸의 앞발질에 대기실로 이동했다. 대기실에 도착한 동해는 황급히 26억으로 검색해서 생방송을 시청했다.
"이교도 심판."
신의 분노는 실패했지만, 이교도 심판이 성공했다. 아주 짧은 순간 신성 마법으로 투라칸을 속박했다.
"광전사."
광전사 스킬을 사용한 진돗개가 무기를 버리고 투라칸을 부둥켜안았다. 사전에 계획하면서도 이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정확히 투라칸이 속박당해 반항 능력을 잃었을 때 진돗개가 레슬링 기술로 투라칸을 옭아맸다.
"도발."
도발은 상대 이성을 지우고 흉성을 불러일으키는 스킬이다. 동해 공격에 세게 얻어맞고 이교도 심판에 걸려든 후 진돗개가 엉겨 붙자 화가 잔뜩 난 투라칸은, 연타로 들어온 철벽의 도발 스킬에 이곳에 온 목적까지 잃을 정도로 분노했다.
"간다."
인벤토리에서 배불뚝이 어항을 꺼내 밀봉을 푼 네크로가 구덩이에 물을 쏟았다. 투라칸과 접촉한 물이 빠르게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투라칸의 한기에 얼음이 깨지고 바스러졌다.
"형, 꼭 성공해야 해."
진돗개가 투라칸의 냉기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대기실로 돌아갔다. 진돗개의 시체는 얼음과 마찬가지로 조각조각 부서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피야."
"파멸의 광선."
현피는 약화 저주 하나만 보고 쿨타임이 없는 파멸의 광선을 연거푸 펼쳤다.
"신의 분노. 걸렸다."
삼세판이라고, 세 번째 신의 분노가 투라칸에게 먹혔다. 신의 분노로 저항이 떨어진 투라칸은 저주 저항에 실패하여 광폭화와 약화 저주 모두 걸렸다.
"제이크, 이걸 잡고 계속 물이 흘러나오게 해."
제이크에게 어항을 맡긴 네크로는 신의 회초리를 들고 구덩이에 내려갔다. 얼음 반 물 반에 무척 추운 구덩이였지만, 저항이 서버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네크로는 쉽게 버텼다.
- 사망하였습니다. 바로 부활하시겠습니까?
"부활."
이 전투의 핵심은 철벽이다. 철벽이 죽으면 투라칸이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도 모른다. 네크로는 신의 회초리로 상태이상 유발을 노리면서도, 철벽에게 향하는 투라칸의 위험한 공격을 몸으로 막아냈다.
"상태이상 뇌진탕."
"신의 분노, 이교도 심판, 도발."
투라칸 주변의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은 깨지고 부서지면서 사라졌다. 물을 지속해서 붓지 않았다면, 지금쯤 웅덩이 안에 물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형, 나 왔어."
"벌써 10분이야?"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10분이 1분처럼 느껴졌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봐도 10분이나 뭔가를 한 기억이 없었다.
"투심권, 용풍권."
용풍권을 펼치며 쿨타임 돌아올 때마다 투심권을 사용했다. 번개 속성을 이용한 스턴과 방어력이 약한 몹에게 정말 잘 먹히는 '내부 타격' 패시브. 문제는 저항이 강해서 상태이상이 잘 터지지 않는다는 건데, 신의 분노와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 덕분에 투라칸의 저항이 점점 약해졌다.
"와, 징그러운 놈. 아직도 버티고 있어."
10분이 되어 부활한 진돗개는 80% 이상 남은 투라칸의 피통에 혀를 찼다. 그때 진돗개의 가세에 살짝 방심했던 동해가 다시 대기실로 떠났다.
"파멸, 파멸의 돌풍."
올곧은 용기를 든 진돗개는 바로 궁극기와 파멸의 돌풍 스킬을 사용했다. 방어력도 저항도 애매한 진돗개라 차라리 피통을 최대한 깎아놓는 게 최선이다.
진돗개가 잠시 투라칸을 잡아둔 틈을 타서 네크로는 신의 회초리를 인벤토리에 넣고 매직 한 손 지팡이를 꺼냈다. 투라칸의 저항이 꽤 떨어졌기에 공속 옵션이 붙은 매직 지팡이가 상태이상을 유발하기 훨씬 나았다. 양손 지팡이인 신의 회초리로 한 대 때릴 시간이면 매직 지팡이로 두 대 때릴 수 있었다.
진돗개도 얼마 못 버티고 대기실로 떠났다.
"이교도 심판."
신성 마법에 속하는 이교도 심판이 투라칸을 속박했다. 잠깐 움직임을 제한받았던 초반과 달리, 투라칸은 스킬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지 못했다.
"잘했어. 육박차륜진."
얼마 안 남은 강화 좀비와 듀라한, 심지어 해골 마법사와 리치들마저 달려와서 투라칸에게 엉겨 붙었다.
"대가리는 내놔."
네크로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대가리 쪽에 잡을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는지. 네크로가 매직 지팡이로 때릴 수 있도록 투라칸의 머리가 드러났다.
"형, 나 왔어."
"조금 멀리 대기해."
동해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리치 몇 마리만 투라칸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투라칸은 몸 주변으로 냉기를 방사하기에 저항이 약한 다른 언데드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잠시 후 진돗개도 부활했다. 그리고 마지막 리치마저 투라칸의 냉기를 버티지 못하고 얼음 조각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끼어들어도 되겠는가?"
성직자인 그웩, 흑마술을 사용하는 점성술사 가뭉. 남은 넷은 통성명을 하지 않아 이름조차 모른다.
"저흰 죽어도 부활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이 마을 안에선 정해진 죽음 외엔 받아들이지 않는다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작가의말
이번 편은 속도감이나 묘사가 제 마음에 꼭 듭니다. 읽는 분들도 같은 느낌인지 모르겠네요. 늘 이 정도로 글을 뽑아내고 싶지만, 장면이나 캐릭터에 따라 몰입감이 널뛰는 건 어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해결할 방법은 경험의 누적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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