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린 김에 절2
"형, 빨리. 얘 피카 속성이야. 자꾸 번개로 마비 상태이상 준다고."
그리핀은 와이번과 달리 둘씩 짝을 지어 생활했다. 사자의 몸에 독수리 머리를 했는데, 암컷은 날개가 없고 수컷만 날개가 달렸다.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와이번처럼 절벽에 둥지를 만들지 않았다. 게다가 깔끔하기까지 해서 보름에 한 번씩 새 둥지를 만들어 이사했다.
그리핀 암컷은 마법을 사용하는 몹이었다. 주로 바람 속성이 가장 많고, 드물게 얼음과 불 속성도 있었다. 그리고 현재 진돗개를 괴롭히는 건 아주 드문 번개 속성의 그리핀.
그때 현피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핀이 버린 둥지를 인벤토리에 꽉 채워서 희망의 등대로 다녀오는 길이었다.
"리치 소환해. 진돗개 좀 도와줘."
마법 저항이 높은 리치를 소환해 진돗개를 도와줬다. 번개 공격에 마비가 된 상태에서 자기 머리통보다 더 큰 부리에 쪼이는 경험은, 아무리 게임이라고 자각해도 반갑지 않았다.
"형, 이번엔 꼭 성공하자."
그리핀 부리에 쪼여서 상의가 걸레짝이 되었다. 무인은 가죽 갑옷을 입을 수 있지만, 갑옷을 착용하지 않으면 민첩 보너스가 있었다. 다수와의 난투엔 갑옷을 입는 게 낫지만, 일대일에선 갑옷을 벗는 게 오히려 이득.
그리핀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두 앞발로 동해를 공격했다. 뒷다리로만 몸 전체를 지탱할 수 있는 그리핀이어서, 공격이 끊이질 않았다. 마치 권투 하는 캥거루가 연상되는 연타를 때렸다.
막고 피하는 데 정신없던 동해는, 결국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독수리를 닮은 머리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밑으로 꽂혔다.
"성공."
딱 소리와 함께, 네크로의 지팡이가 그리핀 부리와 충돌했다. 카운터 판정을 받은 그리핀은 뇌진탕 상태이상이 터졌다.
"투심권."
동해가 빠르게 다가가서 심장 부위에 투심권을 사용했다. 리자드나 와이번과 달리 그리핀은 심장 공격에 무척 취약했다.
"심정지, 혈관 파열."
머리나 심장에 혈관 파열 상태이상이 터지면, 늑대인간 정도 재생력이 아니고선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과연, 가슴 부위가 폭발하는 이팩트가 생기고 2초 뒤 그리핀이 죽어버렸다.
"교대다."
날개 달린 수컷을 해치운 후, 네크로가 터치했다. 방어구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네크로였다. 마법 능력이 없는 대신 전투 기술과 한방 공격이 강한 수컷은 몸빵이 어렵지만, 전투 기술이 약하고 마법 공격에 더 의지하는 암컷은 저항이 높은 네크로가 적격이었다.
번개로 아무리 지져도 효과를 보지 못한 암컷은, 화가 났는지 공격 타이밍이 아닌데도 네크로를 부리로 공격했다. 수컷보다 속도도 느리고 준비 과정도 좀 더 길고 공격력도 약했다. 수컷의 공격에 카운터 치는 건 성공률이 겨우 30% 정도지만, 암컷의 공격엔 100% 성공률을 자랑했다.
"하필이면 수컷 먼저 잡아야 하냐."
카운터에 맞아 상태이상을 얻은 암컷 그리핀은 동해와 진돗개가 순식간에 해치웠다. 암컷이 죽으면 수컷은 날아서 도망갔다. 퀘스트 아이템인 붉은 깃털도, 그리핀 알을 부화하는 소모성 아이템인 따뜻한 깃털도 수컷이 줬다.
암컷은 네크로가 나서면 아무 위험도 없이 잡을 수 있는데, 수컷이 못 도망가게 하려면 암컷을 살려둬야 했다.
"탱커 하나 영입하자. 아니면 캐릭에 불만이 많은 돗개가 지우고 새로 키우든지."
"일주일 동안 손가락 빨고 있으라고? 지금까지 쌓은 명성이랑 공적치는? 게다가 대주교의 축복을 다 버리라고?"
진돗개가 씩씩거리며 현피의 태클에 저항했다.
"그럼 투덜대지나 말든가."
"너나 네크로 형이랑 너무 차이 난다고 징징거리지 마."
둘이 습관적으로 투덕거리자 네크로가 나섰다.
"그만하고 둥지나 찾아다녀. 채집은 제이크에게 맡기고."
수컷의 몸에서 붉은 깃털과 따뜻한 깃털을 뽑아낸 후, 제이크가 암컷 그리핀의 머리에 칼을 댔다.
"귀걸이. 레어 귀걸이야."
웬만한 유니크 아이템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레어 귀걸이였다.
"깃털도 다 된 거지?"
"다 모았어. 곧 내 유니크와 만나게 되는구나."
"난 늑대인간이 준 송곳니 귀걸이랑 어금니 귀걸이가 더 궁금해. 도대체 어떤 옵션일까."
흥분한 일행은 그리핀 둥지를 찾느니 마느니 하다가 도시로 돌아갔다. 알이나 따뜻한 털보다 둥지를 엄청 많이 수집했기에 딱히 아쉽지도 않았다.
###
"시발. 이게 게임이야?"
"형, 새삼스럽게 왜 그래. 두 달째 보는 풍경인데."
"너도 아까 참치회 먹어봤잖아. 맛은 그렇다고 쳐. 어떻게 식감까지 구현했냐?"
"안 그래도 내 여동생 요즘 다이어트 핑계로 자꾸 캡슐 차지하려고 그래. 오냐오냐 키웠더니 오빠를 아주 봉으로 알아."
"게임에서 먹었다고 정말 식욕이 줄어?"
"시발, 게임에서 먹고 식욕이 살아나서 예전보다 더 처먹지. 한 달에 3킬로나 쪄놓고, 게임 시간 늘려야 한다고 지랄이야."
OB 소속 유저와 길드에 들지 않고 솔로잉만 고집하는 유저는 현실에서 아는 사이였다.
"근데 너 최신 버전으로 바꿨다면서?"
"응. 머리가 전혀 안 아파. 그래서 요새 기기 놓고 자주 싸워. 내가 옛날에는 게임 기껏해야 3시간 했거든. 근데 요즘은 12시간 해도 멀쩡해."
"나두 바꿀까? 근데 우리 길장이 바꾸지 말고 기다려보래."
"형 같은 고수가 게임 시간 늘면 나보다 훨씬 이득이잖아. 하루에 레어 하나만 더 먹는다고 생각해 봐."
"요샌 레어 가격 내려갔다. 유니크가 오히려 오르고."
"유저들 수준이 그만큼 올랐다는 뜻인가?"
"수준 말고 소비 능력이 올랐어. OB 길드원이 올린 거면 잘 입찰하지 않아 익명으로 올리느라 5% 손해 보기도 하고."
'병신 새끼. 집 알고 전화번호 아는데, 내가 대신 팔아준다고 해도 아이템 맡기는 일 없으면서. 지가 사기꾼이라고 남도 다 사기꾼인 줄 알지?'
배 얻어타려고 술도 사고 게임에서도 50골드 상납한 유저는 속으로만 욕했다. 역천 길드는 2백 골드 받고 대륙행 티켓을 팔았다.
단, 삼대 길드 유저들은 공짜로 해주는 동시에 지인 유저 세 명씩 공짜로 태울 수 있는 혜택도 줬다.
'술값 합치면 결국 달라진 게 없어. 게다가 비위까지 맞춰줘야 하고.'
"그거 알아? 길드 곧 6레벨 나온대. 그럼 길드원 천 명까지 받을 수 있어. 너 생각 있으면 언제든 내게 문자나 톡 보내. 내가 추천하면 웬만큼 병신 아니곤 뽑힐 거야."
"형 은혜는 내가 평생 못 갚을 거 같아. 6레벨 나오면 부탁할게."
그러나 속마음은 달랐다.
'문자? 톡? 시발 새끼. 나 정도 실력이면 니들이 청하러 와야지. 술 얻어먹으려고 지랄이네.'
대륙의 아이템 드랍률은 중앙섬보다 높았다. 노말과 매직은 중앙섬이 훨씬 높지만, 레어와 유니크의 드랍률은 대륙이 몇 배 높다고 유니콘 개발팀이 정기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래서 돈 쓰고 사기꾼 비위 맞추며 아득바득 대륙으로 향했다.
- 업데이트 공지입니다. 서비스 멈춤 없이 패치 완료했습니다.
- 대륙과 중앙섬을 잇는 포탈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포탈을 활성화한 유저들은 막대한 개인 명성을 한 달에 걸쳐 얻습니다.
- 포탈을 활성화한 유저가 소속한 길드는 즉시 막대한 길드 명성을 얻습니다.
- 대륙 유일의 인간 도시 '희망의 등대'는 아직 소도시 등급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포탈이 활성화된 관계로 은행이 생겼습니다.
- 포탈이 활성화된 관계로 각종 직업 길드들이 생겼습니다.
- 중앙섬의 주민 NPC들이 일정 기간을 걸쳐 대륙으로 이동합니다. 퀘스트 NPC를 포함한 게임 진행에 필요한 NPC들은 중앙섬에 남습니다.
- 주민 NPC가 주던 능동형 퀘스트와 돌발 퀘스트들은 퀘스트 NPC가 전부 담당합니다.
- 희망의 등대 시장이 확장되었습니다.
- 희망의 등대에 잡화점이 다수 생겼습니다.
- 희망의 등대에 대장간이 다수 생겼습니다.
- 희망의 등대에 시약 상점이 다수 생겼습니다.
뭐가 생겼다는 메시지들이 쭉 이어졌다.
- 희망의 등대를 사수하라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최근 영역을 빠르게 확장한 희망의 등대에 불안을 느낀 몬스터들이 매달 25일에 최소 수십만 규모로 희망의 등대를 3일에 걸쳐 공격합니다.
- 새로운 직업 창공의 기사와 전투 마법사가 생겼습니다. 60레벨 이상 마스터 랭크 이상 유저에 한정해 단 한 번의 전직 퀘스트를 드립니다. 창공의 기사는 와이번을 탈것으로 삼은 기사 직업이고 전투 마법사는 그리핀을 타고 싸우는 마법사입니다.
-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려면 도시 공헌도, 귀족 사회 공적치, 국가 공적치 및 개인 명성이 필요합니다.
기다란 메시지의 끝은, 2개월 동안 배를 타고 대륙에 이른 대다수 유저의 가슴을 후벼 파는, 눈에서 눈물 뽑고 심장에서 피 짜내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살인 충동도 일으켰다.
- 중앙섬과 대륙 간 포탈 이용료는 100골드입니다.
###
사람 열이 누워도 될 정도로 큰 술상. 하이힐을 신은 여자 넷이 올라가 춤을 춰도 끄떡없는 든든하고 비싼 물건이었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정열적인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최신 아이돌 노래에 맞춰 몸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가슴을 쓰다듬기도 하고 허벅지 살을 쓸기도 하며 유혹의 춤을 췄다.
펑 소리와 함께 샴페인이 하나 터졌다. 하얀 거품이 날리며 옷이 흠뻑 젖으며 속옷이 밖으로 비쳤다. 그러나 누구 하나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오히려 섹시한 표정으로 샴페인을 뿌리는 남자에게 환한 웃음만 보여줬다.
"자. 오늘은 두 발로 걷는 놈이 개새끼야. 저 방문은 기어나가든지 실려 나가든지, 양자택일이다."
양주에 소주 그리고 맥주에 사이다까지 섞은 폭탄주가 맥주잔에 담겨 한 바퀴 쭉 돌려졌다. 폭탄주 파도타기가 끝나자 반경운은 돈지갑 안에 가득한 5만 원 지폐를 허공에 던졌다.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도 돈 줍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 술 먹어서 이름 생각 안 나네. 그쪽 피해액 추정치가 얼마라고?"
퇴근하고 운전해 집으로 가는 와중에 갑자기 불려온 남자는, 처음 보는 광경에 잔뜩 졸았다. 성형인지 화장발인지는 모르지만, 미인대회 나가도 될 것 같은 몸매와 얼굴을 갖춘 여자들이 방을 꽉 채웠다.
"2백 골드씩 받아서 대략 46억 정도 벌었습니다."
"시발 새끼. 난 놈은 난 놈이야. 너 욕한 거 아니니까 계속해."
네크로에게서 26억에 사간 전함을 이용해 46억 매출을 올렸다.
"배 여러 척 건조하고 길드 유지하는 비용 등을 빼면 순이익이 10억 정도 됩니다."
36억을 투자해서 몇 달 만에 10억의 수익을 냈다. 반경운의 기준으로는 정말 성공한 투자였다.
"약 80만 골드의 이득을 전부 상인 유저를 통해 시장과 잡화점에서 파는 물품들을 긁어모으는 데 사용했습니다. 시약 상점들도 아침에 문 열자마자 닫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골드를 사서 추가로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됐고, 결론만 말해."
"유형의 손해는 일단 5억에서 10억 사이로 추정합니다. 푯값으로 꽤 많은 돈을 벌어드렸거든요. 현재까지 레전드에 투자한 총금액이 70억 정도로 계산됩니다. 현재 길드 연합의 가치 등을 환산하면 약 8억 정도의 손해로 의견이 몰렸습니다."
"다만, 이번 실패한 투자로 민심이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쌓은 이미지가 다 무너졌죠. 200골드가 정말 싼값이라고 언플했는데, 그게 독 바른 비수가 되어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오빠. 왜 어려운 말 쓰고 그래. 우리가 겨우 올린 분위기 다 다운됐잖아."
반경운은 지갑에서 백만 원 수표 하나 꺼내 직원에게 줬다.
"고생했고, 내일 휴가 내고 가족이랑 제주도 여행이나 다녀와."
갑자기 불려와서 시발놈이라고 계속 욕했던 남자는 미안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구십 도로 허리를 꺾고 우렁찬 감사합니다로 반경운의 기분을 허공에 뜨게 만든 후, 화려하지만 숨 막히는 공간을 빠져나갔다.
"봤지? 70억짜리 프로젝트를 내가 1억으로 파투 냈다 이 말씀이야. 근데 왜 잔이 다 비어 있어?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
"내가 어디서 실수했지?"
"네크로 유저를 경쟁 적수로 여기지 않은 게 패착입니다."
반형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냐. 난 그를 아주 높게 평가했어. 그러나 함께 있는 유저 셋이 평범한 자들이라고 방심했던 거지. 사자가 양 세 마리 데리고 뭘 할 수도 있는 거였어."
"상무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굳이 묻지 말고 편하게 얘기해."
"머리 좋은 거랑 공부 잘하는 거랑 게임 잘하는 건 아무 상관 없습니다."
"나도 아는 얘기야."
"머리로만 아시는 것 같아서요. 여길 보세요. 전부 명문대 졸업하고 공부 잘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성공한 사람뿐입니다. 여기 게임 잘하는 사람 있어요?"
학창시절 다들 학원과 과외 때문에 잠잘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게임은 결국 수학이야. 사람이 짠 거라고."
"레전드 게임은 인공지능이 설계한 거라는 소문이 예전부터 돌았습니다."
"내부자는 뭐래?"
연락책은 반경운을 보좌하는 최 비서의 사촌 형인 최 비서. 사촌이지만 개와 고양이보다 사이가 더 나쁜 둘이다. 곧 설에 가족들 모일 때 비웃음당할 걸 생각하니 이부터 갈렸다.
"게임 출시한 후 입사한 자여서 잘 모릅니다. 대신 희망의 등대 지배 길드가 될 수 있는 편법을 알아냈습니다."
반형운이 벌떡 일어서서 창문에 다가갔다. 엉거주춤 궁둥이를 의자에서 떼고 일어서던 자들이 서로 눈치 보다가 다시 착석했다.
"유니콘에서 일부러 날 밀어주는 거 맞지?"
"그건 저도 잘."
"내년이면 일본이랑 중국이 대륙에 상륙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 지나면 PK 제한 풀어버리든지 완화할 거야. 머릿수로는 우리가 최약체니 키워주려는 목적인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입사 2년 차가 무슨 수로 그 어려운 정보들을 알아낸단 말이야."
반형운은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나를 주인공으로 가정하고 계획을 짜."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