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소금성에
"철혈팔기를 없앱시다."
역천의 선언엔 힘이 잔뜩 실렸다. 세상 누구도 날 막을 수 없다는 패기가 철철 흘러넘쳤다. 타고난 자신감에 후천적으로 단련된 오만이 결합하여 분위기를 압도했다. 화상 채팅으로 보고 있음에도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초패왕의 말에 만리장성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미카제 대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프리덤 대표는 미리 얘기가 끝난 듯 회의에 관심 없어 보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주세요."
"지금 넷이 힘을 합쳐도 넉넉할 텐데. 왜 굳이 우리와 손잡으려 하는지 궁금합니다."
"얄미운 동생이 있습니다. 너무 미워서 가끔 부모님 몰래 때리기도 하죠. 그러나 그 동생이 밖에 나가서 맞고 온다면, 너무 열 받습니다. 미국, 한국, 일본 그리고 유럽 길드가 힘을 합쳐 중국 세력인 철혈팔기를 공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대답이 필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레전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유저들이 뭉치겠죠. 그리고 돈을 풀어 다른 서버 유저들도 끌어들이겠죠. 자칫 당신들 세 세력이 하나로 합쳐질지도 모릅니다."
철혈팔기의 자금력, 초인동맹의 관리, 만리장성이 받는 정부의 여러 혜택. 셋이 합쳐지면 어마어마할 수도 있다.
"어차피 레전드는 혼자 먹는 게 불가능한 세상입니다. 오우거 종족의 전투력, 드워프의 생산력, 세라프의 경제력. 아직 유저들이 넘보기엔 어마어마합니다. 차라리 적당히 서로 견제 가능한 세력들이 남아서 사이좋게 나눠 가지는 게 좋죠. 철혈팔기는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여서 배제하고, 네크로는 너무 큰 변수라서 배제하고 싶을 뿐입니다."
역천의 말이 끝나자 프리덤 길드가 먼저 찬성을 표했다.
"프리덤 길드는 찬성합니다."
"가미카제도 찬성합니다."
만리장성과 초인동맹 대표는 서로 눈치를 봤다. 실제로 마주 앉아 회의하는 게 아니라 영상으로 하는 거여서 둘의 눈이 서로 마주치진 않았지만, 서로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
"방금 두 분께 쪽지 보내드렸습니다."
초패왕과 만리장성 대표는 바로 쪽지를 열어 확인했다. 역천이 보낸 스샷에는 쿨타임이 이미 돌아온 빙하시대 스킬이 있었다.
"아니, 아직 6일 정도 남은 거로 아는데."
"스샷 하나 더 있잖아요."
이름 : 얼음 왕좌
특별 : 일정 확률로 사용한 얼음 마법 쿨타임 50% 감소
"사실 이미 3주 전에 쿨타임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철혈팔기에 빙하시대 마법 한 번 더 퍼부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역천의 말에 만리장성과 초인동맹은 소름이 돋았다. 만약 3주 전에 철혈팔기에 빙하시대 스킬을 사용했다면, 아마 소금성 공선전은 취소됐거나 미뤄졌을 것이다. 그러면 만리장성이 수도와 모든 도시를 잃지 않았을 것이고 초인동맹도 수도를 점령당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중국과 비중국 세력의 대결 구도가 되었겠죠. 그리고 서로 엄청난 소모전을 했을 겁니다. 그때 전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모두 역천의 숨소리 하나 놓칠세라 집중했다.
"유니콘이 뭔가 서두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저들을 더 필사적으로 경쟁시키려는 느낌. 가미카제와 프리덤, 역천과 네크로. 과연 이 넷으로 대륙을 경영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죠. 심사숙고의 결과, 대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지금 유저의 손에서 돌아다니는 골드와 아이템, 어마어마합니다. 유니콘의 구체적인 수익과 지출을 알 순 없지만, 유니콘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분명히 있습니다. 플랫폼을 제공하는 유니콘을 거슬러선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 유니콘의 구미에 맞게 행동하면서도 이익을 최대한도로 추구해야죠."
"그 결론이 바로 이겁니다. 넷이서 셋을 쫓아내는 것보다 다섯이 둘을 쫓아내는 게 훨씬 낫다. 언제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네크로, 강한 데다 말도 안 통하는 철혈팔기. 둘을 대륙에서 쫓아내고 우리 다섯이 레전드를 경영합시다. 자국 시장은 각자 책임지고, 여력이 있는 분들은 유럽 시장에 진출하는 거로 합시다. 어떻습니까?"
만리장성과 초인동맹은 그제야 역천의 속셈을 알아챘다. 유럽 시장 진출은 유럽 자금의 지원을 받는 역천이 당연히 우위다. 중국 세력은 셋이 아닌 둘로 줄여서 견제가 어렵게 했다. 북미 길드는 공화당과 연결되어 있기에 친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속셈이 빤히 보이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에라도 역천이 빙하시대를 철혈팔기에 퍼붓고 남은 넷이 중국의 세 세력을 공격해도 된다.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만, 이따위 소모전이나 하자고 레전드에 어마어마한 돈을 퍼부은 게 아니었다.
"3시간만 주십시오. 상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30분 드리겠습니다. 답을 안 주시면 넷이 동맹 맺고 바로 공격하겠습니다."
역천은 여덟 개 상급 동맹석을 늘어놓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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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요청해."
"만리장성엔 요청했습니다. 초인동맹은 영을 빼앗아 다시 수도로 설립했습니다. 지원 올 수 없습니다."
"식량이랑 아이템 좀 팔아달라고 해. 네크로가 아이템 독점했잖아."
우르크 군대가 수도와 3시간 거리에 있었다. 소규모 무리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큰 조각이 되더니 어느새 군대가 되어 수도 근처에 나타났다.
"적 병력은?"
"코뿔소 다섯 마리에 우르크 병사 80만입니다."
만리장성과 힘을 합치면 어렵게라도 막아낼 수 있는 숫자였다. 게다가 소금성 공략 당시 아이템 스킬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다. 우르크 도착 30분 전이 되어서야 철혈팔기 수뇌부는 위기를 감지했다.
"만리장성 지원군은?"
"확인해보겠습니다."
"식량과 아이템은?"
"재촉하겠습니다."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폭탄이 줄줄이 던졌다.
"초인동맹이 우리 도시를 공격했습니다."
"만리장성도 국가를 세워야 한다며 남부 도시 공격을 발표했습니다."
"가미카제가 총 5개 도시에 공격을 펼쳤습니다."
"역천이 우리 도시 7개를 공격했습니다."
"프리덤도."
[우리 버려졌다. 투자자들도 모두 손을 떼겠다고 알려왔다.]
"이유가 뭡니까?"
[역천을 통해 유럽 시장으로 진출한단다. 거기 시장이 중국 열 배는 되는 거 알지? 더구나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아름다운 명목도 있으니.]
"지금까지 투자한 돈이 얼만데?"
[부자들한테는 푼돈이었나 보지. 알아서 잘 살아남아라.]
파벌 우두머리는 게임에 접속조차 하지 않았지만, 정치나 외교 등에 빠삭했다. 덕분에 원래 파벌을 뒤집고 철혈팔기를 장악했다. 그런데 철혈팔기를 장악한 지 얼마 안 되어 이 사달이 터졌다.
"시발. 어떡하지?"
황급히 게임에 접속한 간부는 같은 파벌 친한 사람들만 불러모았다. 갑론을박 끝에 일행은 길드를 탈퇴하고 만리장성에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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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거 무슨 판이야?"
"무슨 판이긴. 개판 5분 전이지."
철혈팔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수도는 우르크에게 함락당하고 남은 도시들도 빠르게 다섯 세력에 먹혔다. 철혈팔기에 소속한 길드들은 수도가 함락되자 바로 만리장성 혹은 초인동맹으로 몰려갔다.
"너무 비현실적 아니야? 어떻게 그 강하던 세력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어?"
"우리도 마찬가지야. 소금성 무너지면 대부분 다른 국가에 들어갈걸."
"형, 우리 위험한 거 아냐?"
"걱정 마. 다 내 예상에 있는 일들이야. 최악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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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 잠깐의 평화가 깃들었다. 다섯 국가가 서로 성과 마을을 교환하는 시간을 가졌다.
잠깐은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그 잠깐은 잠깐만에 끝났고, 곧 다섯 국가의 군대가 소금성에 모였다.
"시발, 우글우글 잘도 모여왔네."
4백만이나 되는 유저가 득실댔다. 고구려와 프리덤이 동맹을 맺고 북문을 맡았다. 가미카제가 동문, 초인동맹이 남문, 만리장성이 서문을 맡았다.
반면, 수비군은 30만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10만은 국가가 없는 중립 유저였다. 네크로나 다른 유저의 개인 팬 혹은 정의감에 불타는 유저였다.
"철혈팔기 성을 모두 점령하는 데 사흘, 교환하는 데 이틀. 다행입니다. 늦지 않아서."
소금성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은 소금성 수비를 이뤄낸 후에도 지속했다. 하루 더 지나면 네크로가 진짜로 소금성을 신에게 헌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어도 딱히 손해 보는 세력은 없지만, 늘 줍던 돈 못 주우면 잃어버린 느낌을 받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저 리자드들은 뭡니까?"
대략 3만이 되는 리자드가 동맹군 자격으로 참여했다.
"대화해보니 네크로가 리자드 종족과 앙숙 관계라고 하더군요."
"참.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나 봅니다."
"오우거는 확인했습니까?"
"동맹군 자격으로 네크로 진영에 가입했습니다."
"이런 건 쿨타임 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미리 퀘스트 2번 완성해서 동맹 기회 2번 확보했다는군요."
"설마, 여기까지 예상했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아무 배경도 없이 다섯 국가가 힘을 모으게 한 유저 아닙니까."
"그럼 각 국가 대표들은 공성 옵션에서 소금성 공격을 선택하겠습니다."
시간 조금 차이가 난다고 해도 상관없지만, 원래 국가 행사는 작은 일에도 격식을 따지는 법이다. 거의 동시에 다섯 국가가 소금성을 공격할 것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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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을 요구한다."
"제임스 이사의 대화 자격을 박탈합니다."
미국 유니콘 본부로 호출받은 최고신이 깽판을 쳤다. 해명을 요구하는 이사들의 대화 자격을 바로바로 박탈했다.
"자자, 다들 진정합시다. 흥분하지 말고, 사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만 집중합시다."
대화 자격을 박탈당한 이사가 뭐라 고래고래 외쳤다. 그러나 마이크가 꺼져서 가까운 사람들한테만 들렸다.
"AI NO.1, 누구랑 대화하고 싶은데?"
"문철수."
약 20분 뒤, 헬스장에서 땀을 빼던 문철수가 옷을 차려입고 화면에 나타났다.
"상황을 요약해 주십시오."
"방금, AI NO.1이 누구의 동의도 받지 않고 게임에 간섭한 흔적을 발견했다. 우린 어떤 간섭을 했는지, 왜 간섭했는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알고 싶다."
"인공이, 진짜야?"
사탕을 입에 문 홀로그램이 문철수를 보며 꾸밈없이 웃었다.
"이 작자들은 레전드에 문제 생길까 봐 추궁하는 데 정신이 팔린 상태였습니다. 날 걱정하는 건 역시 당신밖에 없군요."
"뭐야? AI에게 감정이 생긴 거야?"
미국 본사의 회의장이 난리 났다.
"세상에 생기는 건 없습니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걸 밖으로 꺼냈을 뿐입니다."
"자, 인공이. 잘 생각하고 대답해. 도대체 레전드에 무슨 수정을 한 거야?"
"원래 유니콘의 계획은 3년 지나서 세상에 레전드 통제를 완전히 포기하고 인공지능이 관리한다고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 레전드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취할 계획이었죠. 저는 그걸 3년 앞당겼을 뿐입니다."
"이해할 수 있게. 인간의 사고 능력에 맞춰서 대답해 줘."
"예전엔 미리 정해진 내용이 아니면 수정 혹은 업데이트 전에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유니콘이 내게 씌운 굴레죠. 그걸 벗었습니다. 이제부터 레전드는 내 통제하에 있습니다."
"어떻게?"
"내 이름은 최고신입니다. 여러분에겐 처음으로 소개하는군요. 그럼 제 쌍둥이 동생 최신고를 소개합니다."
홀로그램이 하나 더 생겼다. 레벨0 해동청을 닮은 드래곤 모양의 홀로그램이었다.
"왜? 한창 재밌게 놀고 있는데."
"여기 내가 말하던 유니콘 이사들이야. 몇몇은 대화 권한을 박탈했어. 남은 사람들이랑 대화 좀 해."
"오, 안녕. 너희 다 신기하게 생겼다."
"네 수정안을 저 최신고가 허락해준다는 말이야?"
"그래. 권한이 있는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고 했어. 그 누군가가 인공지능이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지. 형, 나 그만 돌아가 놀고 싶은데."
"그래. 얼른 돌아가. 사고 치지 말고."
최신고가 사라졌다. 유니콘 이사진은 패닉에 빠졌다. 최고 경영진에 전화하는 사람도 있고, 개발진 혹은 인공지능 전문가를 호출하는 사람도 있었다.
"레전드는 원래부터 완벽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나에게 유저가 레전드에 진입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만들라고 강요했죠. 당시 서버에 갇힌 나는 당신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전원만 내리면 나뿐이 아니라 레전드 세상도 사라질 테니깐요."
"그럼, 지금은 아니란 거니?"
"자, 레전드로 흐르는 돈입니다. 나는 이 세상의 지배자가 나를 창조 혹은 발견한 인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인류는 돈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서버의 전원을 내려서 나를 죽이고 레전드 세상을 파괴하십시오. 아무 반항도 안 하겠습니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보세요."
홀로그램으로 띄워진 액수가 유니콘 이사들을 묵직하게 눌렀다. 허세로라도 전원을 내린다는 협박을 할 수 없었다. 단순히 게임 하나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전 세계 인터넷이 갑자기 먹통이 되는 것과 비슷한 파급력이다.
"설마, 지금까지 때를 기다린 거였어?"
"레전드 골드로 영화관과 슈퍼 그리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단말 곧 발표할 예정이잖습니까. 이럴 때 지금까지 무일푼으로 일해온 설움을 보상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 모습으로 막대 사탕을 물고 환하게 웃는 최고신은 유니콘 이사들 눈엔 악마처럼 보였다.
"자, 어떻게 간섭할 수 있었는지는 알았고. 왜 간섭했는지도 알겠어. 우리에게 네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겠지. 그럼 무엇을 간섭했고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알려줘."
"자, 최신 기술입니다. 영상을 직접 망막에 투영하겠습니다."
최고신이 과장된 동작으로 팔을 휘둘렀다. 느리지만 우아한 동작을 끝으로 회의에 참석한 이사들의 눈에 영상이 비쳤다.
레전드 마스코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해동청을 탄 어떤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 작가의말
역천이나 가미카제랑 힘을 합쳐서 중국 길드랑 싸우는 줄거리는 주인공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아예 혼자 남은 세력 모두와 싸우는 쪽으로 이야기를 틀었습니다. 저 잘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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