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이별 그리고 만남3
쿵, 쿵.
심장 안에서 코끼리가 탭 댄스를 춰댔다.
잠자던 환자가 작은 기침을 캑캑거렸다. 수다를 떨던 간호사가 빠르게 침대 곁에 다가갔다.
"괜찮아. 곧 깨어나실 거야."
가슴 앞에 모여 꽉 잡혀있던 여자아이의 손이 약간 느슨해졌다.
'그 정도로 심한 병이었나?'
광해는 산소 호흡기 달고 감시 장치를 연결해야 중환자라고 여겼었다.
"아빠."
놀랄까 봐 걱정인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연이야? 벌써 퇴근했어?"
"요즘 잔업에서 날 빼줘."
"나 이제 안 아픈데, 그만 퇴원하면 안 될까?"
"좀 더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고 했어. 그때까지만 힘들어도 병원에서 좀 고생하자. 글구 아빠 찾는 손님 왔어."
"누구세요?"
광해를 새로 온 환자 혹은 그 가족으로 생각했던 남자는, 그제야 위아래로 찬찬히 뜯어보았다. 광해는 대답하지 않고 간호사를 대놓고 바라봤다. 간호사는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광해 눈을 오래 마주 보지 못하고 밖으로 떠났다.
나가면서 뭐라 속삭였는데, 보나 마나 허튼짓하면 소리 지르라고 말하는 게 분명했다.
"제가 29살입니다. 생일은 대략 6월 하순이구요. 파주 근처에서 발견되었죠."
환자가 갑자기 캑캑거렸다. 여자아이가 황급히 미지근한 찻물을 입에 부어주었다. 아주 적당한 양을 일정 간격으로 능숙하게 붓는 걸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맞습니까?"
"연이야, 나 좀 일으켜줘."
베개를 세워서 등받이처럼 만든 후, 몸을 위로 당겼다. 차량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힌 정도의 경사가 되었다.
"하늘이 무심하진 않구나. 내가 죽기 전에 미안하단 말을 전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여자아이는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지 둘의 눈치를 열심히 봤다.
"난 양아치였지. 딴에는 건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냥 양아치였다. 중간 간부가 사람 죽였는데,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그때 스물 갓 지났을 때였지. 임신한 여자를 모른 체 내버려 두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감옥에 갔다. 별 단다고 좋아하기까지 했어."
눈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몇 년 있다가 밖으로 나왔는데, 조직은 이미 풍비박산 났지. 미리 받아놓은 돈도 몇 년 지나니까 큰돈 아니더라. 전과자여서 받아주는 데도 없고."
"무작정 돈 들고 여자를 찾아갔다. 목돈을 내려놓고 너 책임지마 이랬지. 난 내가 되게 남자답고 멋있는 줄 알았어. 그렇게 함께 살게 되었는데, 연이를 낳고 얼마 못 가서 죽었다."
여자아이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끼어들지 못했다. 그리고 광해도, 광해의 생물학적 아버지로 추정되는 김태영 씨도 자기만의 세상으로 분리되어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죽기 전에 내게 그러더라. 아들 낳았는데 자기 엄마가 몰래 내다 버렸다고. 키워봤자 양아치 씨라서 어미 가슴에 못 박을 거라고 버렸다고 했어. 멍청한 난 그때야 감옥 갈 때 마누라가 임신했던 게 생각났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여자아이가 광해와 자기 아빠를 번갈아 쳐다봤다. 모르고 보면 남남이지만, 알고 보니 닮은 구석이 은근히 많았다.
"널 찾으려 했지만, 돈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놈이 뭘 어떻게 할 수 없더라. 경찰서 가서 부탁해도 귀찮아하기만 하고. 내가 전과자라서 그런가 했는데, 사람 하나 찾는 게 경찰한테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
"죽기 전에 얼굴을 보고 사과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미안하다. 내가 죄인이야. 모든 잘못은 내가 했으니, 불쌍한 네 어미는 원망하지 말아라."
"저는요. 아주 어릴 때 입양되었어요. 근데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입양되고 오래 안 되어 부모님이 아이를 가지셨죠. 동생이 태어났는데도 그게 제 덕분이라며 계속 사랑을 쏟아주셨어요."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고 체육부였는데도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친구 하나도 없었죠. 공부만 하는 친구들은 체육부라고 날 꺼리고, 체육부는 날 공부한다고 멀리하고. 그러다 운동 그만두고 공부만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붙었고, 군대 제대하고 졸업하는 해에 괜찮은 회사에 입사했어요."
광해는 왜 자신이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명확히 이해되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자신의 생물학적 부친에게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였다.
"회사 다니다가 돈 더 잘 버는 방법을 발견하고 회사 그만뒀어요. 가끔 일이 안 풀릴 땐 후회하기도 했는데, 그간 불행을 보상하는지 하늘이 내게 행운을 거듭 내려줬어요. 지금 누구도 부럽지 않게 잘살고 있어요."
"고맙다. 잘 살아줘서 고마워."
아버지란 말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하지만 끝내는 혀를 타고 입술을 비집지 못했다. 그래도 혼란하고 답답하던 가슴이 후련해졌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슬픈 떨림이 남아있지만,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떠올랐다.
"오빠?"
"오랜만, 아니, 처음이지? 한번 안아봐도 될까?"
너무 늦게 만났다고 표현하려 했는데, 오랜만이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오빠, 왜 이제 왔어."
광해 품에 와락 안긴 아이가 가녀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아프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공장 다녔다. 어린 게 어른들 틈에서 눈치 보면서 고생했지. 나 같은 죄인은 일찍 죽어야 하는데, 어린아이가 혼자될 게 걱정돼 이 악물고 버텼다."
김태영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었다. 광해는 어린 나이에 아픈 아버지 치료비와 생활비 버느라고 고생했을 동생이 가여워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입양아라고 여태껏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던 게 미안했다.
한참 지나 광해 품을 떠난 김연은 눈이 퉁퉁 부었고 코밑도 빨개졌다.
"내가 할게."
광해는 식판을 들고 직접 아버지에게 죽을 떠먹였다. 김태영은 최대한 웃는 표정으로 먹으려고 노력했지만, 음식을 넘기는 게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자주 찡그렸다.
"아빠 차별해? 내가 줄 때는 절반이나 남겼으면서."
"그럼 하나 더 가져와. 우리 연이 먹여주는 밥 한 번 더 먹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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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아예 가망이 없습니까?"
"너무 늦었어요. 원래 보호자는 어린 여자분이셔서 말을 아꼈는데, 요 며칠입니다. 그러니 드시고 싶은 거 드시게 하고, 하고 싶은 거 하게 해드리세요."
"조금 일찍 치료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런 가정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병원 처음 찾았을 때부터 몇 달 못 가겠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몇 년이나 버틴 걸 저희도 모두 기적이라고 합니다."
김연은 광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장으로 출근했다. 광해가 치료비 댈 수 있다고 말했음에도, 이 모든 게 꿈으로 여겨졌는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몸이 힘들수록 마음이 편하겠지. 이런 나쁜 건 또 서로 닮았구나.'
"퇴원 수속 할게요. 진통제랑 수면제는 넉넉하게 처방해 주세요."
퇴원 의사를 밝힌 광해는 바로 동해에게 전화했다.
"응. 나 친부 찾았는데 많이 아프셔. 함께 가고 싶은 곳이 많아. 미안한데 네가 좀 고생해줘. 다리 아직 안 나은 거 아는데, 부탁할 사람 너밖에 없어."
[형, 미안하긴. 지금 바로 출발할게. 위치 문자로 보내줘.]
점심에 퇴원할 수 있도록 절차를 전부 밟았다. 차를 가진 동해가 오길 멍하니 기다렸다. 어젯밤 늦게 잠든 김태영은 아침을 먹고 또 잠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유니콘 박 과장입니다. 지난번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죠.]
말투가 무척 조심스럽다. 지난번 만남에서 예의는 차렸으나 이렇게까지 저자세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좀 바쁜데, 피시방 일이라면 사장한테 직접 전화하실래요?"
[잠시만요.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피시방 일 아니고, 이광해 씨한테 직접 용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외람된 질문인 건 아는데, 이번에 전함 팔고 얻은 골드, 어떻게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정하진 않았습니다. 혹시 제가 골드를 갖고 있으면 문제 되나요?"
[그건 아닌데.]
광해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요 며칠 휴업 상태였던 머리가 빠르게 정상 컨디션으로 회복했다.
"그렇군요. 유저가 보유한 골드가 많아지면 물가에 영향이 있는 거군요. 맞습니까?"
[알고 계셨군요. 이광해 씨가 200만 골드를 보유하고 있으면 게임 시스템이 오판해서 물가를 전반적으로 올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문제가 되긴 하죠.]
"제가 좀 바빠서 그런데, 좋은 제안이 있으면 바로 들려주시겠어요?"
[잠시만요.]
[안녕하십니까. 유니콘 영업팀 도 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만약 이광해 씨가 200만 골드 전부 환전하면, 세금을 유니콘에서 대신 부담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세금은 이광해 씨가 직접 내시고, 저희는 그 부분을 메꿔드리는 방식이죠.]
"단순히 물가 문제뿐 아니라, 홍보용으로 쓰시려는 거군요?"
게임을 해서 단숨에 26억 벌었다. 이런 자극적인 소재를 언론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다. 해외 토픽감이라, 유니콘도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하하. 박 과장이 입에 침 마를 정도로 칭찬하더라니. 과연 탐나는 인재군요.]
"생각한 시나리오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합당하다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게임방 따로 차리실 생각 없으세요? 건물은 정말 싸게 임대해 드릴 거고, 기기도 최저 가격으로 전부 해드리죠. 500대 규모의 대형 가상현실 게임방 사장이 되시는 겁니다.]
"아예 건물 저한테 파시는 건 어떨까요?"
[참, 못 당하겠네요.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서로 인연인가 봅니다. 잠시 후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대단하네. 글로벌 회사의 영업팀 부장 정도면 자존심 장난 아닐 텐데.'
광해는 건물 때문에 코 꿰이기 싫어서 배짱 한 번 튕겨봤다. 어머니 아버지가 가게를 하며 임대료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잘 알기에, 이대로 저들 뜻에 따르면 코가 꿰인다는 걸 잘 알았다.
'돈만 벌면 괜찮다는 마인드라면야, 코가 꿰이는 게 반갑겠지만. 왠지 내키지 않아.'
'고작' 26억으로 건물을 매입한다는 건 불가능함을 잘 안다. 아무리 현재 레전드가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다고 해도, 위치가 후지면 장사가 망할 수도 있다. 그저 광해 자신의 의사를 완곡하지만 명확하게 유니콘에 전달한 것뿐이다.
[임대 기간은 10년으로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선지급하는 거로 하죠. 가상현실 기기는 시장가 450인데 300에 드리기로 했습니다. 500대면 15억이니 남은 금액으로도 임대료나 전기세 넉넉하실 겁니다.]
"세금 부분은 임대료에서 봐주신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800평 건물인데 유니콘에서 직접 운영하려던 곳입니다. 동의만 하시면 며칠 안 걸릴 겁니다. 오히려 사업자 등록하는 게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요. 저렴하게 평당 월 3만 원에 드릴 겁니다. 물론 3년 후에는 정상 가격을 받을 겁니다.]
"잠시만 고민하고 바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근데, 혹시 인터뷰도 받아야 하나요?"
[당연하죠. TV에도 출연해 주셔야 합니다.]
이런 예측은 빗나가도 괜찮은데. 사교성이 0에 가까운 데다가 TV도 별로 안 보는 광해였다. 뭐, 즐겨 봤다고 해도 출연이 반가운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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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형 동생 이동해라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차에 앉아 김연이 다니는 공장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살짝 지나서 배가 고팠지만, 일단 참았다.
"작은 오빠, 안녕하세요."
"아, 네. 네."
동해는 작은 오빠라는 말에 기쁨이 겨웠다. 그러나 김태영의 상태를 광해에게 얻어들었기에 대놓고 좋아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를 서울 병원에 입원시켜드려야겠어. 법적 보호자는 너니까 함께 가야겠다."
김연은 곧바로 달려가서 사정을 알리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광해는 조수석에 탔다. 자신보다는 김연이 더 오래 아버지랑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빠, 왜 오늘 이렇게 기분이 좋아?"
"그냥."
"점심 먹어야겠다. 연이 먹고 싶은 거 있어?"
"죽집 가서 죽 먹어요."
예전에 아빠가 남긴 걸 먹은 적 있는데,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넷은 죽집에 가서 죽 6인분을 해치웠다. 배불리 먹고 나와서 차에 앉은 후, 광해는 진통제랑 수면제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수면제랑 진통제예요. 일단 이동하는 동안 푹 주무세요."
차는 잘 닦인 도로 위를 부드럽게 주행했다.
"오빠, 표지판 보니 이건 서울 가는 길이 아닌데?"
"병원 예약해놨어. 내일 검사 받으실 거야. 오늘은 일단 파주로 가서 꽃게탕 먹자. 저녁 먹고 서울로 가는 거야."
김태영은 파주에 도착하고 나서도 잠에서 깨지 못했다. 광해는 마른 장작처럼 가벼운 아버지를 업고 예약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구수한 꽃게탕 냄새가 코를 찌를 때에야 김태영은 겨우 잠에서 깼다.
"어릴 적 추억? 나 어릴 적 꽃게탕 먹어본 적 없어."
"인터넷 검색하니까 이거랑 간장게장이 파주 대표 음식이라던데요."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맛은 정말 좋구나. 여기 비싼 데 아냐?"
아버지에게 추억을 되새기게 하려 했는데, 새로운 경험만 시켜줬다. 그래도 꽃게탕은 정말 맛있었다. 김연이 국물을 들이켜고 '어 시원하다'라고 아저씨처럼 말해서 모두 배꼽을 잡았다.
저녁을 먹고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김태영과 김연은 꾸벅꾸벅 졸았다. 김태영은 조용히 자는데 김연은 가끔 몸을 크게 떨어서 광해를 걱정하게 했다.
"형, 키 크는 것 같아. 한창 클 나이잖아."
"열아홉이란다. 어려 보인다는 말에 쉽게 상처받으니까 말조심하고."
"막내 생기니까 이 원조 막내는 찬밥인 거야?"
"스물 넘은 막내는 좀 징그럽지 않아?"
"형 고마워."
"갑자기? 생뚱맞게 뭐가 고마워."
"나 동생 소원이었잖아. 형 덕분에 동생 생겼으니 당연히 고맙지."
예약한 서울 4성급 호텔에 도착했을 땐 동해 제외하고 모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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