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웜 레이드5
"죽음의 군단."
3천 명으로 이루어진 죽음의 군단이 등장했다. 네크로는 공개적으로 죽음의 군단을 사용한 횟수가 2번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역천과 같았다. 빙하시대 쿨타임을 짐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미뤘던 역천과 마찬가지로, 네크로도 죽음의 군단 쿨타임을 숨기려 노력했다.
굳이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레이트 웜을 보자마자 숫자가 서른 정도로 늘어난 언데드 사제들이 다급히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문을 빠르게 마친 언데드 사제들은 불에 탄 화장지처럼 조금의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4백 정도의 기마 부대가 가장 먼저 공격했다. 그레이트 웜의 곁을 스친 기마 부대는 순식간에 백이나 줄었다. 기마부대의 뒤를 따른 도부수들은 거의 남지 않았다. 방패병과 창병들도 우르르 몰려가서 순식간에 뼛조각으로 변했다.
'아니. 분명히 주먹이 안 닿았는데 왜 죽어?'
게임이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의 차이가 너무 커서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도 소멸하는 언데드가 있었다.
대장군이 길이 4미터짜리 검을 뽑았다. 눈에 시퍼런 불덩이를 담은 채 검을 질질 끌면서 달려갔다. 독전대와 친위대가 그 뒤를 바싹 따랐다.
궁수들이 쏜 화살이 그레이트 웜 몸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드워프들이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던지듯 쏴댔던 쇠뇌나 바위들이 사실 꽤 귀한 물건이었음을 네크로는 그제야 깨달았다.
달려오는 대장군을 향해 그레이트 웜이 주먹을 내질렀다. 대장군은 거대한 주먹을 훌쩍 뛰어넘었다. 뼈다귀라서 도약력이 약할 거라는 편견을 완전히 깨버렸다.
뒤를 바싹 따른 독전관과 친위대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그레이트 웜은 대장군에게서 잠깐 시선을 뗐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대장군이 4미터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이거 동영상 진돗개한테 꼭 보여주자. 저게 진정한 참수 스킬이야.'
안타깝게도 엄청 잘 들어간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피통은 안 움직였다. 퀘스트 아이템이나 다름없는 에픽 비수 올빼미의 부리를 제외하면 3단계 그레이트 웜에게 누구도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칼날비."
제이크가 아주 짧은 틈을 타서 대장군이 공격한 반대편 다리에 비수를 꽂고 칼날비 스킬을 터뜨렸다. 그레이트 웜의 피통이 단숨에 69%로 내려갔다. 그림자 이동으로 도망친 제이크는 해동청을 타고 튀었다. 제이크를 어디엔가 내려주고 해동청이 돌아왔다.
'설마, 은신 스킬을 쓰고 지금도 해동청 타고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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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소식 먼저 전하겠습니다. 탄광이 게임 시간으로 한 달 정도면 고갈합니다."
"반가운 소식은 아니지만, 저희가 불평할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덕분에 그간 얼마나 편했는데요."
"그리고 길드당 마을 하나로 제한했는데, 그걸 이젠 풀겠습니다. 네사모 길드는 이미 마을 하나 도시 하나 점령했네요. 그래도 다들 마을 운영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절실히 느끼셨으니 함부로 확장하지 않으실 거로 믿습니다."
"초인동맹과 협약이 끝났습니다. 피혁에 최대치로 분배했던 세금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합니다. 각 길드는 주력 상품이 뭐고 생산량이 얼만지 정리해서 보고서로 올려주십시오. 최대한 많은 길드가 혜택받을 수 있도록 세금을 분배하겠습니다."
길드장 혹은 길드 대표들은 바로 길드 채널로 지시를 내렸다. 초반엔 회의라고 해봤자 모여서 대화나 하며 친분 쌓는 용도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모양새가 잡혔다.
"철혈팔기가 이쪽으로 접근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다들 혹시 들은 정보 없습니까?"
입이 싼 유저는 많았다. 레전드 게시판에서 말다툼하다가 홧김에 정보를 유출하는 유저도 있고 게임 안 주점 같은 곳에서 분위기에 취해 기밀을 누설하는 유저도 있었다.
게다가 NPC의 입소문이라는 형식으로 숨기기 정말 어려운 정보들이 누설되었다. 탄광이 곧 고갈된다는 소문도 NPC들이 퍼뜨려서 진돗개가 알게 되었다.
"점령이 아니고 우르크 마을을 약탈했다고 합니다."
"돈이 궁한 모양입니다. 근데 왜 북부 도시나 마을은 포기하지 않는 걸까요?"
"뭔가 돈이 생길 구멍이 있나 봅니다. 그 구멍만 틀어막으면 다시 북부로 돌아가든지 북부 도시를 버리든지 하겠죠."
"북부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거기 온천수나 하나 확 터지지."
"역시, 형님은 스케일 참 크십니다."
철혈팔기가 이쪽으로 확장하는 게 아니라는 정보에 모두 큰 걱정을 내려놓았다. 철혈팔기의 3만이 넘는 기마병은 마을을 점령한 길드들엔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네크로 님이 돌아오면 도시 2개 점령할 겁니다. 그 뒤로 우리 길드는 도시를 점령하지 않겠습니다. 도시를 점령한 세력은 최대한 국가로 끌어들이고, 거부하면 공격할 겁니다."
"네크로 길드도 그만한 여력이 안 됩니까? 역천은 광산 하나 있는데 도시 30개나 점령했잖습니까."
"그거야 쪽바리들이 돈 대줘서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역천 사람 좋게 봤는데, 몹쓸 놈이더군요. 친일파 집안 핏줄이 어디 안 가네요."
"아마 레전드에서 돈 벌어서 마을 운영하는 건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대부분 골드 사서 운영비에 보태죠."
"다 네크로 님과 진돗개 님 덕분입니다."
"저희도 여러분께 의지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후에 북미나 유럽 그리고 동남아 길드들도 우리 식구가 될 겁니다. 중국이나 일본 길드도 웬만하면 받을 생각이니, 차별을 못 느끼도록 여러분이 힘써 주십시오."
"그런데 분명히 국가 일원이 되면 빈대 붙으려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자들은 초장부터 일벌백계해야죠."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힘을 키우면 됩니다. 웬만해서는 땡깡 부릴 생각 안 들게 힘으로 눌러야죠."
"맞는 얘깁니다. 무력은 최대한 자제해야겠지만, 게임에서 무력을 배제할 순 없죠."
"네크로 길드도 전투 길드원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벨 7이어서 5천 명을 받을 수 있잖아요."
"저희는 네크로 님이 거의 군대 수준이어서 딱히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하긴, 죽음의 군단 그거로 WM 쓸어버릴 땐 정말 통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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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군단이 쓰레기 스킬이 돼버렸어."
3분도 안 되어 몰살당한 죽음의 군단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15분 정도는 어떻게 시간을 끌어주지 않을까 했는데, 2분 버틴 것도 해골 궁수들이 반원형으로 진을 펼친 덕분이었다.
"해동청, 3번 가자."
3번 지역에 가니 철가시 나무숲이 어느새 복구되었다. 가짜 미스릴 조각상을 본 그레이트 웜이 해동청을 버리고 미스릴 조각상을 덮쳤다. 날개를 펼쳐 나무숲 중앙에 도착한 후 날개를 거두고 밑으로 내려갔다.
"걸렸어."
1번 지역에 있던 새장이 떨어져서 그레이트 웜을 가뒀다.
"야, 철과부 풀어."
철과부가 뭐냐 했더니, 거미 골렘이었다. 금속으로 만든 거미 골렘들은 나무껍질을 꼬아서 만든 튼튼한 밧줄로 새장과 철가시 나무를 서로 엮었다. 새장이 파괴되더라도 철가시 나무와 밧줄로 만든 더 큰 새장이 그레이트 웜을 기다린다.
"준비 엄청 빨리 끝냈군요."
"장비 복구로 숲을 회복했지. 20만이 넘는 드워프가 기운 고갈로 드러누웠어."
"얼마나 잡아둘 수 있습니까?"
"그레이트 웜이 독을 뿜으면 철과부들이 흡수할 걸세. 아까보단 훨씬 오래 버틸 수 있지."
네크로는 황급히 로그아웃했다. 배고픈 건 참을 수 있는데 방광 아픈 건 참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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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비."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했다. 피통은 25%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섯 번째에 피통이 31%에서 25%가 될 때부터 느낌이 좀 그랬다. 여섯 번째에 피통이 안 움직이는 걸 확인하니 속이 답답했다.
"해동청, 2번 지역으로 가자."
2번 지역은 처음이었다. 용암 드워프들이 용암 지형으로 만들었는데, 그레이트 웜이 날개가 생겨서 기존 안배를 전부 무력화했다. 급히 함정을 수정하여 날개 달린 그레이트 웜을 상대할 수 있게 바꿨다.
이젠 방향 전환 빼고는 해동청에게 꿀릴 게 없는 그레이트 웜은 바짝 뒤를 따랐다.
"네크로, 급반전."
드워프의 외침에 네크로는 바로 급반전을 지시했다. 해동청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허공에서 곤두박질쳤다. 해동청의 배가 하늘을 향했고 등이 바닥을 향했다. 꼬리와 머리의 방향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몸을 뒤집은 해동청은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비늘을 꽉 잡은 네크로는 용암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발사."
도룡노가 발사되었다. 해동청이 급반전하자 신형을 가까스로 멈췄던 그레이트 웜은 절묘한 발사 타이밍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기둥을 방불케 하는 화살이 그레이트 웜의 몸을 관통했다.
철컥 소리와 함께, 화살 양측에서 우산 살처럼 철근이 펴졌다. 조금 꿈지럭하더니 불판의 낙지처럼 줄어들면서 양쪽 우산 살이 그레이트 웜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저건 미스릴 조각상이 생명력을 부여받은 최후의 전투에나 쓰려 했는데."
드워프 지휘자가 안타까움에 손가락에 감은 수염을 힘껏 당겼다.
화살 여러 개가 몸에 박힌 후 양쪽에서 살이 나와 쉽게 뽑히지 않게 변했다. 이어서 화살에 연결된 쇠사슬이 빳빳해졌다. 여러 쇠사슬이 위아래로 출렁였고 그레이트 웜의 몸도 점점 큰 폭으로 출렁였다. 그러다 몸이 용암에 잠겼다.
"드래곤 잡는 방법이야. 저렇게 몸에 용암을 묻혀 굳게 만들어."
잠겼을 때 몸에 묻힌 용암이 허공에 떠오를 때 굳어버렸다. 그렇게 그레이트 웜은 점점 빵가루를 입힌 돈가스가 되었다.
"팔다리로 용암을 못 뜯어냅니까?"
"손발이 닿지 않는 곳이 있지. 쇠사슬이 끊어질 때까지 버틴 드래곤은 없었어."
그레이트 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점점 많은 용암을 묻혔다.
"독을 쓰면 어떻게 될까요?"
"쇠사슬이 끊어지면 용암에 잠기게 될 거야. 뜨거운 용암은 독에 강하지. 쉽게 벗어나지 못해."
"잠깐 쉬고 싶은데, 깨워줄 수 있습니까?"
게임 옵션에서 수면 상태로 바꿔놓고 적당한 곳에서 잠들었다. 24시간이 아니라 40시간이 넘었다. 틈나는 대로 쉬었지만, 그래도 피로가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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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의 시간이야."
네크로는 오래 자지 못했다. 현실 시간으로 2시간 정도 자고 알아서 깨어났다. 3시간 내내 용암을 바라보며 그레이트 웜이 깨고 나올까 봐 노심초사했다.
미스릴 조각상이 마치 사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갈고리로 그레이트 웜을 건져낸 후 용암이 굳은 딱지를 깼다.
"비수 공격."
목소리는 성악 발성이었다. 제이크가 비수를 꽂고 칼날비를 펼친 후 잽싸게 도망쳤다. 제이크가 떠나고 5초도 안 되어 용암 딱지가 후드득 떨어지며 그레이트 웜이 자유를 되찾았다.
"제이크, 비수 줘봐."
비수 옵션을 확인하니, 퀘스트 완성 후 소멸 옵션이 눈에 밟혔다.
"이 비수로 더는 데미지 못 주는 거 맞죠?"
"그래. 이제부턴 신의 힘으로만 그레이트 웜을 죽일 수 있네."
어차피 이대로 사라질 비수라는 생각에 네크로는 해동청에게 먹이기로 했다. 유니크도 레전드도 아닌 에픽템을 해동청은 기쁜 마음으로 넙죽 받아먹었다. 몇 번 우물거리다 꿀꺽 삼킨 해동청은 고치에 쌓여 역소환됐다.
- 68시간 후 4단계로 진화합니다.
그레이트 웜은 미스릴 조각상의 상대가 아니었다. 미스릴 조각상은 피통이 안 보여 데미지를 얼마나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레이트 웜은 피통이 뚝뚝 떨어졌다.
"왜 그냥 주먹질 발길질만 합니까?"
"서로 상충하는 존재야. 존재 자체가 상대를 부정해서 잔재주가 필요 없네. 오래 버티는 쪽이 이기는 거지."
그레이트 웜은 어느새 날개도 사라졌다. 조각상과 싸우면서 몸이 점점 전투에 적합하게 진화했다. 피통이 줄어드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미스릴 조각상의 피통이 보이지 않아 승패를 점칠 수 없었다. 마음을 졸이기 싫어서 드워프에게 질문했다.
"대장로님, 지금 전황이 유리한 겁니까? 돕지 않아도 될까요?"
"그냥 신의 뜻에 맡기게."
'저 내려치기, 시간 되면 연습해야겠다.'
미스릴 조각상이 주먹으로 그레이트 웜의 가슴을 내리쳤다. 팔꿉관절을 접었다 펴면서 가슴을 때리는 궤적이 망치 휘두르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레이트 웜은 수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미스릴 조각상의 머리나 어깨 가슴을 공격했다.
"신의 힘과 신성력은 다른 겁니까?"
"그래. 신성력은 신이 신도에게 허락한 힘이고, 신의 힘은 신의 힘이야. 저기 신관들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신성력으로 억지로 흉내 낸 힘은 그레이트 웜을 속일 수 있을 뿐, 상해를 입히지 못한다네."
네크로는 극장에서 뮤지컬 관람하는 듯 편한 얼굴로 구경하는 드워프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관객이 백만이 넘는다니. 뮤지컬 배우가 노래하다가 기절할 수도 있겠어.'
그레이트 웜의 피통이 지속하여 떨어졌다. 동시에 몸이 점점 전투적으로 변했다. 유저인 네크로는 피통이 3% 남은 걸 확인했다. 변화가 확연하던 처음과 달리 몇 번 공격해야 피통이 찔끔 줄었다.
"이럴 때 맥주가 있어야 하는데."
"맥주 안 가져왔나요?"
"반신을 상대하는데 아무리 과한 준비도 부족하게 느껴지지."
"저한테 맥주 몇 통 있는데, 드릴까요?"
"내가 맞아 죽는 꼴 보고 싶은 겐가? 드워프 없을 때 몰래 주게나."
마주 서서 때리기만 하던 미스릴 조각상이 갑자기 기술을 넣었다. 다리를 걸어 그레이트 웜을 엎어지게 한 후, 왼쪽 무릎으로 뒤통수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허리 부위를 눌렀다. 무릎과 손으로 그레이트 웜을 꼼짝 못 하게 누르고 남은 왼손으로 등을 강하게 때렸다.
'이젠 NPC랑 싸우면 이기기 힘들겠구나.'
기술의 정교함 뿐 아니라 반응 속도도 엄청 빨랐다. 어느새 그레이트 웜의 피통이 1%로 떨어졌다. 이대로 퀘스트 성공인 줄 알았는데,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하던 조각상이 고개를 돌리고 네크로에게 말을 걸었다.
"비수."
"네?"
"마무리엔 비수가 필요하다."
'시발, 좃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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