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는 버그 유저
"놀랐습니다. 지금까진 제가 일방적으로 연락했던 것 같은데."
반형운이 잘생긴 미소를 지었다. 커피숍에 있는 여자들은 물론이고, 일부 남자의 시선도 반형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어붙은 심장이 유니크 아니고 레전드더군요."
네크로도 방송이나 뉴스로 얼굴이 조금 팔렸지만, 반형운 덕분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 제가 요즘 벌려놓은 일이 많아서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요. 얼마 원하시죠?"
'진짜 어려운가 보구나. 예전 같으면 먼저 거절하기 힘든 가격을 제안하고 그 승리감을 즐겼을 텐데.'
역천 길드는 단기간에 수십 개 길드를 밑에 뒀다. 그 때문에 돈 나갈 데도 많고 신경 써야 할 일도 엄청났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도 반형운은 광물 대부분을 길드 창고에 쌓아두면서 때를 기다렸다.
"용병으로 뛰어 주시면, 싸게 1억에 드리죠."
반형운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웃는지 정색하는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어정쩡한 얼굴도 잘생겨 보이는 건, 하늘이 불공평하다는 증거였다.
늘 갑의 위치에서 살아왔던 반형운은 광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큰 충격을 받았다. 기분이 나쁘면서도 마음 한쪽이 시원해지는 모순되는 느낌을 애써 지우며 광해의 의도를 분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신선하군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어떤 몹을 잡으려고 하는데,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일정에 따라 움직여 주면 당장 '얼어붙은 심장'을 1억에 넘겨드리죠. 그리고 몹을 잡아 나온 아이템 중 우리에게 필요 없는 건 우선 구매권을 드리겠습니다."
"고민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아쉽지만, 일정이 촉박해 오래 못 드리겠습니다. 내일까지 답변 주시지 않으면 다른 사람 찾겠습니다."
2시간 후 반형운이 거래에 동의한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문자가 도착하고 5분도 안 되어 현금 1억이 담긴 상자가 광해가 사는 집으로 배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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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저 남자 너무 잘 생겼어."
"소개해줘?"
"아니. 난 아빠처럼 덩치 큰 남자가 좋더라."
역천의 용병은 철갑으로 몸을 꽁꽁 감싼 기사였다. 전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네크로는 몇몇 아이템이 유니크 등급임을 확신했다.
"자, 출발합시다."
철벽은 전설 목걸이 불타는 심장을 착용했고, 트롤의 심장은 바미에게 양도했다. 여섯 유저와 다섯 용병은 드래곤 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 게임 진짜 재밌네요."
역천은 의외로 활기찼다. 드물게 만난 이벤트 몹 오우거 주술사를 잡고 신나서 스샷을 찍어댔다.
"숙영지가 제일 재밌어요. 정말 상상도 못 한 존재들이 많네요."
유일하게 용병이 없는 철벽을 위해 숙영지마다 들렀지만, 철벽을 마음에 들어 하는 용병도 없고 철벽 마음에 드는 용병도 없었다.
"근데 네크로 님은 전투에 별로 나서지 않네요?"
"드래곤한테 영혼까지 탈탈 털렸거든요. 언데드가 뚝딱 쉽게 만드는 것 같아도, 해골 기사나 죽음의 기사 정도 되면 정말 만들기 힘들어요. 그리고 그런 우두머리가 받쳐줘야 밑에 등급 낮은 언데드들이 안 죽고 잘 버티거든요. 지금은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쉽게 죽어버려서 숫자가 모이지 않아요."
"우리 길드에서 네크로 님을 롤모델로 제작 네크 셋 키우고 있는데요. 아무리 노력해도 언데드가 모이지 않더군요.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초반에 이벤트로 죽음의 기사 하나 얻었습니다. 그때 친화력이 부족해서 죽음의 기사를 만들 형편도 안 됐을 때죠. 이 게임은 현실과 흡사해서 노력이나 실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어요. 운도 확실히 따라줘야죠."
"실력이 부족하면 운이 박처럼 터져도 실패하겠죠. 결국엔 실력이 밑받침돼야 인생이든 게임이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습니다."
네크로와 역천은 의외로 말이 잘 통했다. 둘이 같은 말을 하진 않는데, 서로 알아듣고 공감했다.
"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역천의 범위 마법이 위력적이어서 전투 시간을 꽤 단축했다. 친화력 10의 얼음 마법사 위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순수 위력만 따지면 불 마법사나 번개 마법사 밑으로 치는 얼음 마법사인데, 템을 제대로 맞추니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젠 뭘 잡는지 알려주실 수 있죠?"
"트롤왕 미노칸입니다."
"설마. 잡은 후 또 드래곤이 나타나서 싹 죽여버리는 건 아니겠죠?"
"다행히 미노칸은 드래곤과 관련이 없습니다."
투라칸을 잡은 후 네크로 일행이 드래곤에게 몰살당한 일은 한동안 꽤 큰 화제가 되었다. 기간제 퀘스트 때문에 정신이 없는 네크로에게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미노칸은 대부분 원소에 강하지만 유독 얼음 마법에 약합니다. 엄동설한에 이은 빙하시대면 미노칸의 저항과 재생 능력이 봉인되다시피 할 겁니다. 그럼 우리가 쉽게 잡을 수 있죠. 역천 님이 아니면 얼음 마법사 다섯 명 정도 구할 예정이었습니다. NPC로 말입니다."
"그래도 제가 확실하죠. 친화력 10인 마법사는 몇 없을 겁니다. 오늘 밥값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절대 수호."
역천의 용병이 스킬을 사용했다. 용병이 죽기 전에 어떤 공격도 역천에게 닿을 수 없는 절대 수호.
"엄동설한."
역천을 중심으로 찬 기운이 스멀스멀 퍼졌다. 역천은 손가락을 쭉 뻗어 온도를 가늠하며 마법을 사용할 시기를 가늠했다.
"빙하시대."
마법을 펼친 역천은 눈을 크게 뜨고 마법의 효과를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하려 했다.
차가운 북풍이 불어왔다. 북풍은 혼자 오지 않고 수많은 얼음 알갱이를 데려왔다. 얼음 알갱이들은 땅에 떨어지기 바쁘게 녹아버렸다. 그러나 북풍이 계속 불면서 기온이 내려갔고, 알갱이가 점점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다들 저항이 엄청 높네요."
파티라고 해도 빙하시대 마법의 직접 피해만 안 받는다. 빙하시대 마법으로 떨어진 기온의 영향도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강철의 성소가 저항을 많이 올려주긴 하죠."
"강철의 성소 사용 전에도 제 저항이 꽤 올랐는데 말입니다. 성기사 스킬인가요?"
"거짓말하고 싶진 않네요. 비밀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속이기 싫었다.
무척 넓은 범위가 기온이 빠르게 내려갔다. 참지 못한 미노칸이 동굴에서 뛰쳐나와 역천을 공격했다. 마법 사용자인 역천을 죽이면 마법이 빠르게 거둬지고 기온이 다시 올라갈 수 있음을 미노칸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도발. 아씨, 실패했어. 나 잠깐 상태이상."
도발에 실패하면 분노 혹은 혼란 상태이상에 빠졌다. 몹과 달리 유저는 스킬 실패 확률이 올라갔다.
이성이 높은 몹일수록 도발에 잘 저항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도발이 실패한 적은 거의 없었다. 도발에 걸린 후 빠르게 빠져나가는 몹은 있었어도.
진돗개는 양손 검으로 트롤왕의 몸에 상처를 냈다. 검날이 떠나는 순간 상처가 사라졌지만, 이런 과정이 반복하며 몹의 재생력을 낮췄다.
현피는 마법탄과 파괴의 광선으로 저주를 씌우려 애썼다. 어차피 현피의 공격으론 트롤왕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차라리 약화 저주를 거는 게 훨씬 도움이 됐다.
동해는 내공이 빙한기공으로 변하면서 위력이 급증했다. 냉기가 내부로 스며들면서 데미지도 강해지고 부가 효과도 엄청 좋았다. 게다가 트롤왕이 얼음에 약하다는 설정이어서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바미는 레어 도끼로 미노칸을 기계적으로 찍었다. 바미는 창을 사용하고 창과 관련한 스킬만 익혔기에 도끼로는 일반 공격밖에 할 수 없었다. 대장간에서 만든 창은 바미의 규격에 맞지 않았다. 몹이 드랍한 템이어야 사용자에 맞춰 크기를 조절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창을 드랍하는 몹은 엄청 드물었다.
"얼음의 창."
길이 3미터 정도 되는 얼음의 창이 소환되어 미노칸의 복부를 관통했다. 웬만한 몹이었으면 치명상이었겠지만, 트롤왕은 힘 한 번 끙 주는 것으로 얼음의 창을 바스러뜨렸다. 언제 뚫렸느냐는 듯이 복부의 상처가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네크로의 지팡이가 적절한 속도로 미노칸의 목을 때렸다. 키가 3미터 정도이긴 하지만, 등이 구부정해서 목을 때리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상태이상, 약한 경직."
상태이상이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일행 모두 공격 강도를 높였다. 그 모습을 보며 역천이 감탄을 뱉었다.
"마치 네크로 님이 상태이상을 일으킬 걸 미리 안 사람처럼 움직이는군요."
"역천 님 용병 정말 강하군요."
기사로 보이는 역천의 용병은 트롤왕이 도망도 못 가게 꽉 잡아뒀다.
"'쐐기 박기'라는 스킬인데, NPC 전용 스킬입니다."
상대를 다리 하나 못 움직이게 묶어두는 스킬로, 유저는 배울 수 없었다.
역천 덕분에 정말 싱겁게, 샌드백 때리듯 미노칸을 두드려서 피통 0으로 만들었다. 현피는 무속성 말고 얼음 마법 선택할 걸 하면서 후회했고, 진돗개도 '마법사 사기야'를 남발했다. 사실 역천의 얼음 마법도 큰 역할을 했지만, 용병이 미노칸을 꼼짝달싹 못 하게 시종 잡아둔 게 더 컸다.
이름 : 트롤왕의 반지
분류 : 반지
등급 : 유일
능력 : 생명력 자동 회복, 상처 자동 치유
특별 : 얼음 마법에 적중하면 아이템 효과 약화
"그리고 재료 아이템인 트롤왕의 심장과 고운 뼛가루를 드랍했습니다."
"아깝네요. 쉽게 잡아서 그런지 전설템 안 주네요."
"역천 님 혹시 흥미 있나요?"
"아니요. 딱히 필요한 템은 아닙니다."
"그럼 이 반지는 진돗개가 쓰는 거로 하자. 심장이랑 뼛가루는 내가 보관할게."
"그웩."
"현성네 피씨방이 가는 게 좋겠습니다."
현피가 헤벌쭉 웃으며 트롤왕의 동굴로 들어갔다.
- 신의 흔적을 수습하였습니다.
- 고요한 정신은 신을 믿는 자들에게 힘을 줍니다. 신전 관련 직업의 버프 스킬 위력이 강화됩니다.
- 신의 흔적을 수습한 유저 '현성네 피씨방'에게 보상이 내려집니다.
- 버프 스킬의 효과를 50% 추가 적용받습니다.
"오빠, 퀘스트 기간이 사라졌어."
길드 채널로 철벽의 말이 들려왔다.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마지막 신의 흔적을 찾는 덴 시간제한이 없었다.
"그만큼 어렵다는 거겠지."
일행이 퀘스트에 관해 토론하는 사이, 네크로와 제이크는 미노칸의 사체를 손질했다.
"거인 좀비 만드는 건가요?"
"아뇨. 죽음의 기사 만들 겁니다."
좀비를 먹어야만 움직이는 거인 좀비보단 죽음의 기사가 훨씬 유용했다. 이번에 만든 죽음의 기사는 말을 타고 대검을 들었다. 뚝쇠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속성은 저주였다.
"이만 헤어져야겠네요. 나쁘지 않은 거래였고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탈것 페가수스를 소환한 역천이 용병까지 태우고 훨훨 날아갔다. 일행도 급하게 기온이 비정상적으로 내려간 트롤왕의 영역을 벗어났다.
"우린 어떻게 해?"
"일단 드래곤 로드 레어로 가보자. 정보도 거의 없는데 직접 눈으로 보면서 상황 파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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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비서. 네크로 유저 뒤를 캐는 건 그만둬."
"알겠습니다."
"대신 네크로 캐릭터를 캐. 아무리 봐도 수상하단 말이야."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령술사인데 근접 전투가 무척 뛰어나. 근데 그게 그저 컨트롤이 좋은 게 아니라 공격 스킬을 사용하는 느낌이야."
"사령술사는 근접 공격 기술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법사라면 '마법 멸살' 스킬을 쓰면 일시적으로 근접 캐릭이 되긴 해. 하지만 사령술사는 그런 스킬 자체가 없단 말이지."
"혹시 의심 가는 거 있습니까?"
"잘 모르겠어. 다만 네크로 유저가 사령술사 스킬 외에 다른 직업 스킬을 익혔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해. 제작한 언데드가 우리 길드 사령술사들 언데드보다 훨씬 잘 안 죽어. 처음엔 성기사 캐릭의 버프인 줄 알았는데, 성기사 캐릭이 쓰는 다섯 액티브 스킬 중에 버프 스킬이 없었어."
최 비서는 중요한 일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네크로 유저의 약점을 잡아 입맛대로 부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이득. 약점이 잡혀 고분고분한 배틀넷 배용수나 잔다크 김혜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반면 약점을 잡히지 않은 차세형은 늘 머리를 굴려 이득을 취하려고 해서 관리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반형운의 사무실에서 나온 최 비서는 바로 유니콘 정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식 중인지 꽤 시끌벅적했다. 최 비서는 상대가 조용한 곳으로 옮길 때까지 인내를 갖고 기다렸다.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네크로 유저, 예전에 WM 때문에 캐릭터 삭제한 적 있다고 생방송에서 말한 적 있잖아요. 혹시 삭제한 캐릭터가 무슨 직업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이미 기록도 안 남아 있을 겁니다.]
"예전에 인사팀에서 특별한 유저들 정보를 따로 정리한 거 있다면서요?"
[거긴 네크로 유저 신상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은 저도 꽤 의문입니다. 저 정도 유저라면 전에도 두각을 전혀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왜 네크로 유저는 그 명단에 없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최비서는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뻐근하던 뒷목 근육이 순식간에 풀리면서 시원한 기운이 뒤통수를 치고 올라갔다.
"그 정보를 정리한 두 직원은 실수를 저질러 회사에서 잘렸다고 했죠?"
[네. DB의 유저 정보를 잘못 건드려서 인공지능에게 DB 접근 권한을 전부 회수당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회사 그만두게 되었죠.]
"그 두 사람 이름이랑 전화번호, 그리고 인적사항을 최대한 상세하게 조사해서 보내주세요.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알아보겠습니다.]
'네크로 유저 코를 꿰기만 하면 상무님은 날개 돋친 호랑이가 된다. 상무님이 네크로 유저를 꺼리며 밑에 두려 하지 않아. 하지만 배용수나 김혜영처럼 약점을 잡고 부리는 것까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그때 최 비서의 전화가 울렸다.
"그래, 배용수 집안이 힘을 써서 감옥에서 꺼냈다고? 알았어. 다른 약점 없는지 최대한 빨리 알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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