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과 반목1
"만리장성에서 고구려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습니까?"
정부의 간섭으로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은 세 세력은 회의 시간마다 싸웠다. 철혈팔기는 초인동맹과 만리장성이 역천과 손잡고 자신을 해치우려 했다는 점을 들먹이며 피해자를 자처했다.
물론, 남은 두 세력은 철혈팔기의 유치하고 멍청한 행동에 반응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가미카제 영토를 보세요. 빨리 제압하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교단에서 도시와 마을 숫자, 인구, 영토 크기 그리고 발전 정도로 점수를 매겨 식량을 분배합니다. 다음 분배에 가미카제가 초인동맹보다 많은 식량을 가져갑니다."
"그럼 철혈팔기만 빠지면 되지."
"빙하시대 스킬 쿨타임이 곧 돌아옵니다. 그 목표는 분명히 우리 초인동맹입니다."
"철혈팔기일 것 같은데. 생산량이 가장 높은 대륙 중앙에 사용하는 게 합리적이라 생각해."
초인동맹의 대표로 나온 초패왕은 이가 갈렸다. 만리장성 대표는 청장급 간부다. 현실에서도 권세를 부리는 자여서 안하무인이었다.
"철혈팔기라면 빙하시대에 당해도 계속 싸울 수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전에 초인동맹과 역천 그리고 네크로 세 국가가 세라프 식량을 모두 독점할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남는 식량을 더 높은 가격으로 팔아버릴 수 있었고, 하나는 세라프의 공급량이 적었다.
우르크 제국을 무너뜨리며 인간에게 배당된 식량이 늘었다. 우르크 몫이 인간 쪽으로 할당된 것이다. 자금이 부족한 국가는 할당받은 식량을 모두 구매하지 못했다. 그렇게 남은 식량은 아무나 구매할 수 있는데, 보통은 철혈팔기가 싹 쓸어갔다.
"식량을 전부 사지 않은 국가는 네크로, 프리덤, 역천 그리고 초인동맹이었지? 지금이라면 무리해서라도 모두 사갈 것 같은데."
만리장성 대표가 초패왕의 말을 부정했다.
"아이템도 구매해야 하고, NPC 부활에도 골드가 들어갑니다. 철혈팔기 빼고는 그 정도 자금력을 보유한 세력이 없습니다."
"역천은 가능할 것 같은데?"
"역천은 유럽 자금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 자네 말은 철혈팔기는 가미카제를 견제해야 하고, 초인동맹은 빙하시대 때문에 전쟁에서 빠져야 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만리장성이 단독으로 고구려를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특별한 아이템을 갖춘 유저를 지원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그건 상관없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면 되니깐요. 국가 공적치랑 전투 보상 빼고는 손해 보는 게 없으니 적당히 보상해주면 됩니다."
"그럼 문제 될 게 없잖아."
초패왕은 혀끝까지 튀어나온 욕을 억지로 참았다. 만리장성은 일 처리가 조금 느려도 멍청이는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대표가 바뀌면서 멍청한 소리만 해댔다.
"고구려를 쉽게 보지 마십시오.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이 게임에서도 재연되면 우리가 우스개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수백 년 걸렸다지만, 결국 고구려는 당나라에 멸망했잖아. 게임에서도 결국 현실과 똑같은 결과를 맞이할 거야. 9백만 중국 유저와 2백만 한국 유저가 붙으면 누가 이길지 뻔하잖아. 거기에 3백4십만 일본 유저를 보태도 끄떡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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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세 길드가 4개월짜리 동맹을 맺었다. 상급 동맹석을 많이 구하는 게 힘들어서 예상보다 동맹이 늦었다. 셋이 동맹을 맺은 지 사흘 되는 날, 역천의 빙하시대 쿨타임이 돌아왔다.
"시스템 보호가 끝나는 게 50일 정도 남았죠?"
"그렇습니다."
"게임 시간으론 5개월이네요. 어떻게든 가미카제랑 우리가 버텨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간 할당한 식량은 물론 상대가 남긴 식량까지 다 사들이느라 허리띠 졸랐거든요. 그 보답을 받을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드래곤 레어 털어서 돈이 넉넉한 거로 아는데."
"팔지 못하는 아이템은 연못에 비친 달 아니겠습니까."
역천이나 가미카제는 소모하는 식량과 아이템을 보충할 골드마저 부족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중국 길드에 팔자니 적만 강하게 만드는 셈이었다. 그래서 드래곤 레이드로 얻은 아이템은 창고에 박아두기만 했다. 심지어 감정비 아끼려고 감정도 안 한 상태로 내버려 뒀다.
"먼저 시작하시죠."
지금 네크로와 역천은 소금성에 있었다.
"도시 포기, 우르그르."
진짜 포기하겠냐고 메시지가 물어봤다. 확인을 마치자 우르그르는 주인 없는 도시가 되었다. 네크로가 우르그르를 포기하고 3분도 안 되어 정령 거미를 타고 나타난 우르크 황제가 도시를 공격했다.
황제의 부름으로 불러온 군대가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의 도시를 점령했다. 다시 황궁을 찾은 황제는, 벽화를 뜯고 장식품을 옮겨간 흔적을 보며 가슴을 쳤다.
전부 인간을 비롯한 각 종족으로부터 빼앗은 것이긴 한데, 아끼던 물건이어서 마음이 무척 아팠다.
정말 은밀히 숨긴 몇몇 창고는 무사했다. 그리고 황제만 열 수 있는 개인 창고는 여전히 재물이 넘쳤다.
"세라프."
식량을 보충한 황제는 곧바로 전쟁을 일으켰다. 인구의 1%를 군대로 전환할 수 있는 인간과 달리 우르크는 3%까지 가능했다.
원래 인구가 1억 정도여서 군대를 3백만 보유해야 했다. 하지만, 우르크의 1차 반격 때 인공지능이 간섭해서 설정을 바꿨고 그 반동으로 8백만 보유했다. 8%까지 보유할 수 있도록 설정이 바뀐 것이었다.
지금 황제가 거느린 우르크는 천만이 조금 넘는다. 우르크 제국이 정식으로 멸망하면서 우르크 황제에게 복종했던 귀족들이 전부 독립했다. 우르크 황제는 군대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도시와 마을을 빨리 점령해야 했다.
그간 가미카제의 도시 스무 개 정도 빼앗고 하늘 높이 솟았던 철혈팔기의 기분이 바닥을 쳤다. 프리덤은 아예 수비를 포기했고, 초인동맹과 함께 고구려의 성을 힘겹게 공략하던 만리장성 역시 우르크의 갑작스러운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우르크 황제가 정령 거미를 타고 전장에서 활약할 때, 역천은 초인동맹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레벨4로 키운 역천의 페가수스도 공간 이동 능력이 생겼다.
네크로와 다른 점이라면 쿨타임이었다. 무조건 한 달인 네크로와 달리 페가수스는 이동 거리에 따라 쿨타임이 달라졌다.
"엄동설한."
역천의 심장이 뿔난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만리동토."
벌써 눈치를 챈 만리장성 유저들이 역천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높이에 있는 역천은 쉽게 발견하기도 어려웠지만, 발견해도 날아서 접근하기 힘들었다. 드레이크나 와이번 그리고 그리핀은 현재 역천이 있는 높이까지 날지도 못한다.
"봄이 오려 하나 겨울은 가지 않는다."
서브 직업 음유시인의 스킬. 이로써 빙하시대의 지속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다. 처음 시도하는 음유시인 스킬에 성공한 역천은 마나 물약을 꺼내 쭉 들이켰다.
"빙하시대."
찬 기운이 초인동맹의 땅을 점령했다. 얼음섬의 영향으로 평균 온도가 떨어진 대륙 서북부는 빙하시대 스킬에 취약했다. 프리덤의 성으로 가서 포탈을 탄 역천은 고구려의 수도 졸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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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자드 부족을 토벌하라'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하약스에게서 국가 퀘스트를 받았다. 대륙은 봉화와 연기로 자욱했지만, 네크로가 차지한 남서부는 청정 구역이었다. 조용히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몰려와서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
조건 없이 상대방 진영에 가입할 수 있는 리자드 종족이다. 신이 숨고 왕이 없어서 단합은 형편없겠지만, 신성이 깃든 토템을 부순 네크로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의외로 많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네크로는 대규모 전쟁 연습 삼아 국가 등급 퀘스트를 받았다.
20만 명의 유저가 임시 필드에서 30만 리자드를 상대로 싸웠다. 싱겁게도 40분 만에 전투가 끝났다. 그것도 이것저것 여러 시도를 하며 천천히 해치운 결과였다.
-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 리자드 종족이 한껏 위축됩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국가 공적치와 스킬 숙련도를 받았다. 네크로나 진돗개에겐 소용없지만, 다른 유저들에겐 무척 소중했다.
특히 드래곤 레이드에 참여했던 유저들은 짧은 전투에도 스킬 숙련도가 엄청나게 올랐다. 100레벨 퀘스트 고지에 가까운 유저가 많아서 하약스의 퀘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게임 시간으로 하루 지나야 하약스는 새로운 퀘스트를 생성한다. 퀘스트 내용과 보상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네크로가 숙련도 보상이 최고라고 거듭 강조했기에 기대해도 괜찮았다.
도시로 돌아가는 게 귀찮아서 유저들은 그냥 트롤 부족에서 로그아웃했다. 로그아웃하지 않고 게임에 남은 유저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대화했다.
"이대로 질릴 때까지 게임 할 수 있으면 참 원 없겠다."
"그냥 소금성을 내주고 남은 국토를 인정해달라고 할까?"
"처음에야 오케이 하겠지. 역천이랑 가미카제를 해치워야 하니까. 그러다 둘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우리 도시와 마을을 빼앗을 거야."
"나쁜 새끼들이. 적당히 하는 법을 몰라."
"근데 왜 미국은 저 꼴이야?"
"돈줄이 말랐대. 솔직히 중국 애들도 돈줄 마르면 우리 상대가 아냐."
레전드 최고의 길드 즐기자. 유일하게 길드 8레벨을 달성했다. 드래곤 잡고 어마어마한 길드 명성을 얻으며 9레벨이 오래지 않은데, 9레벨이면 10만 유저를 수용할 수 있다.
최고 레벨인 10레벨이 되면 설정의 보호를 받는 길드 연합을 만들 수 있다. 예전에 친분이나 이익으로 유지하는 그런 연합 관계가 아니라, 시스템 보호를 받아 같은 길드나 다름없는 길드 연합이 되는 것이다.
"형. 근데 고구려 지금 무슨 플레이야?"
"질문도 좀 알아듣게 해."
네크로 일행도 레전드 게시판을 훑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젠 네크로도 돈이 좀 있는 편이지만, 사람을 매수하고 정보원을 심는 등 심오한 수법은 깨우치지 못했다. 레전드 게시판 정보도 꽤 알차기에 딱히 아쉽진 않았다.
"만리장성 해치워도 되잖아."
"못 해치워. 만리장성이 우르크랑 역천에게 시달려 힘을 못 써서 그렇지, 약하지 않아."
"이 악물고 수도 공격하면?"
"초인동맹이 이 악물고 달려가겠지."
네크로의 말에 진돗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식량 없으면 못 움직이는 거 아냐?"
"순진하긴. 그럼 역천도 식량이 넉넉하지 않은데 어떻게 지금까지 싸운 거야?"
"듣고 보니 그러네? 식량 몰래 숨겼다는 거야? 어떻게?"
"나도 모르지. 그리고 우린 식량 안 숨기는 게 나아."
"식량 많으면 좋은 점 있어?"
"인구가 빨리 늘고 치안도 높아. 국가 발전이 빠르지. 초인동맹이나 역천은 속에 꿍꿍이가 있어서 식량을 숨겼겠지."
"형, 우리도 좀 음모 이런 거 꾸미면서 게임 해야지 않겠어?"
"돗오빠. 여기 음모 꾸밀만한 사람 어딨어?"
게시판에 흥미를 잃은 철벽이 끼어들었다.
"네크로 형 잘할 거 같은데."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 음모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보는데? 그런 사람 맞거든."
"상황을 봐. 이상한 구석이 있어. 합리적이지 않은. 그럼 별거 없어. 뭔가 개입이 있는 거야. 개입이 있다는 건 이익이 있다는 거야. 저기에 무슨 이익이 있는지 살펴보면 누가 개입했는지, 왜 개입했는지, 뭘 원하는지 어렴풋이 보이거든. 그럼 근거를 찾는 거지. 내 추측을 증명하거나 부정할만한 무언가를. 그런 걸 찾아서 가설을 완성하는 거야."
"형, 대학에선 이런 것도 가르쳐? 근데 현피는 왜 저 모양이야?"
얌전히 있다가 불똥이 튄 현피가 버럭 화냈다.
"너 지금 혼자 여자친구 없다고 심술부리는 거야?"
현피의 말에 철벽이 깜짝 놀랐다.
"혼자? 오빠 누구 사겨?"
동해도 마찬가지로 놀랐다.
"형, 여자 있어?"
네크로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현피, 네가 뿜뿜이랑 몰래 만나는 거 내가 비밀 지켜줬잖아."
"이런 도둑놈."
무인과 전사가 허약한 주술사를 괴롭혔다. 그러나 두 성기사도 주술사 편이 아니었다.
"강순희 이 기지배. 나한테는 맨날 든든한 남자 있었으면 좋겠다더니."
"현피가 좀 부실하긴 하지."
한바탕 떠들고 숨을 골랐다. 그러고 나니 걱정이 치밀었다.
"오빠. 소금성 뺏기면 우리 망하는 거 아냐?"
"망하는 건 아니지. 우리 원래 빈손으로 시작했잖아."
"게임 계속할 수 있을까?"
"아이템이랑 탄광 안 넘기면 계속 귀찮게 하겠지. 당연히 그럴 능력이 되는 놈들이니까."
"그럼 어떡해?"
네크로는 하늘을 쳐다봤다. 지구의 것보다 훨씬 밝은 별들이 네크로를 향해 깜빡였다.
"얼음섬 동영상 다들 봤지?"
"응. 빨리 항로 통해서 놀러 갔으면 좋겠어."
"나 거기 왕이랑 친하잖아. 중국 애들이 못살게 굴면 거기 가서 게임하면 돼."
"거기 얼마나 커?"
"대륙섬 정도."
철벽은 별 하늘을 쳐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귀여운 정령들과 함께 뛰노는 상상에 빠져 헤벌쭉 웃었다.
'우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
동생들에게 말 못한 진실. 네크로와 역천은 큰 그림을 그렸다. 역천은 단일 세력으로 대륙을 통치하는 건 어려운 일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공생을 원하지 않는 세력들이 있었다. 초인동맹은 아직 속을 알 수 없지만, 철혈팔기와 만리장성은 혼자, 혹은 중국 세력만 대륙에 살아남기를 바란다.
'설정이 바뀌었어. 의도적인지 실순지 몰라도.'
원래는 대륙에서 쫓겨나도 중앙섬에 돌아가 식량을 모으며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량을 국가에만 판매했다. 그것도 대륙에 수도를 둔 국가에만.
멸망하고 시간이 많이 흐르면 재기할 수 없다. 대규모 군대를 유지한 식량이 필요하다. 세력들이 잘게 찢어져 전쟁 규모가 작아지면 몰라도, 지금처럼 최소 20만은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국가가 없는 세력이 일어서기 어렵다.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하지? 역천이 나를 속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진실을 나와 공유한 게 아니다. 분명히 뭔가 따로 준비하는 게 있다.'
별로 밝은 밤하늘과 달리, 네크로의 속은 까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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