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섬2
임자 잘못 만났다.
얼음 왕국 던전은 네크로를 잘못 만났다. 빙결 면역 하나로 네크로는 무너진 왕궁 지하의 던전을 빠르게 돌파했다.
지하 1층에선 하급 정령, 정확히는 하급 얼음 악령이 나왔다. 2층에선 중급이 나왔고 3층엔 상급이 출몰했다.
빙결 면역과 높은 저항으로 네크로는 정말 쉽게 돌파했다. 을씨년스러운 던전 풍경만 아니었다면 몇 달 뒤에 네크로 기억에서 얼음 왕국 던전이 사라질지도 모를 정도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4층에서 드디어 보스몹을 만났다.
"인간 성기사? 이건 정령과 드래곤의 일이다. 왜 인간이 끼어드는 거냐?"
보스몹의 머리 위에 '미쳐버린 얼음 왕국 재상'이라고 푸른 글씨로 이름이 떴다. 그냥 레이드 해야 하는 보스몹이 아니고, 대화를 통해 뭔가 정보를 주는 특별 NPC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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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멍하게 하는 광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궁을 지키러 몰려온 백성들, 얼음 드워프나 얼음 뿔 사슴 그리고 먼 바닷가에서 게걸음으로 온 얼음꽃 게가 도망쳤다. 왕궁을 지키는 수비병인 달그림자 곰만 남아서 드래곤에 대항했다.
"재상, 왕비를 데리고 정령 통로로 대피하라."
온몸에 털이 부스스한 국왕이 재상에게 명했다. 국왕의 모습은 엘라투르사에게 잡혔던 얼음의 정령왕과 무척 비슷했다. 물론, 비슷하다뿐이지 같은 존재가 아님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재상은 눈썹이 두꺼운 서리 정령이었고 왕비는 하얀 눈 정령이었다. 왕과 함께 싸우겠다는 왕비를 억지로 끌고 재상은 왕궁 지하로 향했다.
"용아병이다."
아는 자가 얼마 안 되는 지하 통로가 드래곤에게 발각되어 용아병이 둘을 쫓았다. 재상은 서리 군단을 불러 용아병을 막았다. 일반 생물에는 무척 강한 서리 군단이지만, 언데드나 다름없는 용아병에게는 큰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추격을 멈추고 서리의 기운으로 이들의 동작을 굼뜨게 할 수는 있었다.
정령 통로를 통하면 정령계로 돌아갈 수 있다. 정령계로 돌아가면 개성이 사라진다. 다시 중간계로 나올 때는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정령으로 나타난다.
"어서 들어가시오."
왕비가 눈물을 훔치며 정령 통로에 발 하나 들였다. 그때 시리도록 맑은 기운이 왕비의 몸에 깃들었다.
"왕이 죽었어. 난 돌아가지 않아."
"미친 짓. 정령계를 중간계로 소환하려 하다니."
눈의 정령이 주문을 외우자 서리 정령이 황급히 말리려 했다. 그러나 왕비가 소환한 눈사람 군단이 재상을 막았다. 이미 서리 군단을 용아병 막는 데 소모한 재상은 왕비의 만행을 막을 수 없었다.
"이거. 미친 정령이구나."
왕궁을 무너뜨린 드래곤들이 얼음 드워프 모습으로 변해 지하로 내려왔다. 정령계의 일부를 중간계에 소환하려는 모습에 드래곤들이 혀를 끌끌 찼다.
"없던 일로 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정령계와 중간계 사이에 묶어놓고 천천히 방법을 찾아야지."
"용언을 써야겠군.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푹 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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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도 틀릴 때가 있네?'
지하에 생긴 악령은 드래곤 피어 때문에 생긴 게 아니었다. 왕비가 끌어오려던 정령계의 조각을 정령계와 중간계 사이에 고정하면서, 그 조각에 있던 일부 정령이 악령이 되었다.
"전쟁은 멈춰야 한다. 정령왕이 태어나선 안 된다. 정령왕만 없었다면 드래곤이 우릴 공격하지 않았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미쳐버린 이란 수식어처럼 재상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네크로는 말로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아예 귀를 막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정령왕이 탄생하면 어떤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지 차근히 설명해주기라도 했으면 네크로가 생각을 바꿀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무작정 '안돼'를 외치며 네크로의 접근을 막았다.
네크로는 망치를 휘둘러 기습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대했던 정령과 달리, 재상은 네크로의 공격에 적절히 반응했다. 분명히 코앞에 있었는데 망치를 휘두르는 순간 다른 곳에 나타났다. 만져질 듯 선명했는데 말이다.
"서리 융단."
바닥이 풀을 바른 것처럼 끈적끈적해졌다. 이건 빙결이 아니어서 네크로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돗개야. 정령 상대하는 방법 좀 알아봐 줘. 최상급 정령 같아."
진돗개의 대답은 한참 뒤에 왔다.
"최상급이면 일정 공간을 지배할 수 있어. 공간 전체를 타격해야지 정령을 때리려 하면 안 돼. 정령은 그냥 환영이야. 실체는 공간이야."
"방법. 원리가 궁금한 게 아니야."
"나 지금 사서한테 가는 길이야. 알아내면 바로 알려줄게."
"서리 장벽."
네크로가 무턱대고 정령 통로 방향으로 전진하자 재상이 서리 장벽을 소환해 막았다. 망치로 장벽을 내려친 네크로는 바로 후회했다. 망치가 물 안 묻히고 찹쌀을 내려친 떡메처럼 서리 장벽에 들러붙었다.
"서리 군단."
온갖 형태의 정령 소환수가 네크로 몸에 들러붙었다. 데미지 입는 족족 회복했지만, 장벽에 들러붙은 망치를 떼는 걸 방해했다. 겨우 망치를 떼도 장벽이 가로막아서 전진할 수 없었다.
네크로의 화가 목구멍을 넘어 상욕으로 터지려 할 때, 진돗개의 조언이 도착했다.
"형, 마법에 약하대."
"지옥의 심판."
진돗개의 말이 오기 전에도 홧김에 몇 번이나 화염 마법을 사용할까 고민했었다. 그래도 확실한 게 좋다고 억지로 참았는데, 결국 지금까지 참았던 게 분해서 더 화났다.
기분 탓인지 지옥의 심판으로 불러온 불이 평소보다 더 거세게 타오르는 듯싶었다.
'너무 싱거운데? 에픽이 이렇게 쉬울 리 없으니, 뭔가 또 있겠지?'
에픽 치고는 시간도 들인 공도 엄청 적었다. 네크로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가까스로 누르고 제이크가 건네는 에픽 템을 수습했다. 천 재질로 된 짧은 띠는 허리에 감기엔 조금 짧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 정령 나무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안녕. 날 도울 수 있어?"
"응. 널 도우려고 온 거야. 난 보석꽃 씨앗이 필요하거든. 너도 날 도울 수 있어?"
"보석꽃? 네가 날 도우면 나도 널 도울게."
"어떻게 도와야 해?"
"냉기, 냉기가 필요해. 너한테 좋은 냉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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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보석꽃 씨앗 가격을 알아볼 데가 없어."
진돗개의 말에 네크로는 크게 한숨 쉬었다. 지금 네크로의 인벤토리에는 상급과 최상급 빙정이 가득했다. 최상급은 유니크 혹은 레전드 등급의 보석이고 상급은 레어 등급이다.
그냥 보석이 아니고 10배 가격을 받는 빙정이다. 수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부 팔린다면 쉽게 볼 액수가 아니었다.
'빙정이야 내가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만큼 모을 수 있는데, 보석꽃 씨앗은 총 세 개밖에 없다고 했다. 당연히 보석꽃 씨앗이 이걸 다 합친 것보다 더 비싸겠지. 게다가 신이 내린 퀘스트를 실패하면 그 페널티가 얼마나 세겠어.'
자신을 애써 설득한 네크로는 눈물을 머금고 인벤토리에서 상급 빙정을 꺼내 정령 나무에 던졌다.
"고마워. 더 많이 필요해."
인벤토리에 있는 상급 빙정을 다 던졌는데도 정령 나무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네크로는 인벤토리를 열어놓고 최상급 빙정 중에서도 작아 보이는 것부터 골라 정령 나무에 던졌다.
"고마울 거 뭐 있어. 서로 돕고 사는 거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며 네크로는 계속 빙정을 던졌다. 얼음 왕국이 생겨서 유저에게 좋은 일이 된다면 동영상을 올릴 생각이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대사에 신경 썼다.
'벌써 삼십억은 넘은 것 같은데.'
속으로는 눈물이 아니라 피가 철철 흘렀다.
인벤토리의 빙정을 다 소모한 네크로는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에 있는 최상급 빙정은 얼핏 보기에도 인벤토리 것보다 크기가 컸다.
도토리도 키 재기 한다고, 네크로는 비슷비슷한 빙정 중에서 조금이라도 작은 걸 찾아내려고 애썼다.
'다행이다. 세 개 남았다.'
네크로 눈대중으로 판단해서 가장 큰 세 빙정이 남았다. 정령 나무는 순식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 정령왕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정령 나무의 열매에서 아기 정령왕이 나왔다. 다만, 온몸에 털이 부스스한 성인 크기의 정령왕은 아기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했다.
네크로에게 감사 인사를 한 정령왕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긴 주문이 끝나자 네크로 귀에 연신 메시지가 울렸다.
- 정령계의 한 조각이 얼음섬에 강림했습니다.
- 얼음섬은 정령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지상낙원이 되었습니다.
- 얼음 왕국이 부활했습니다.
- 얼음 왕국의 주민인 얼음 드워프의 숫자가 100배로 늘어납니다.
- 얼음 왕국의 배달부 얼음 뿔 사슴의 숫자가 26배로 늘어납니다.
- 얼음 왕국의 수호자 달그림자 곰의 숫자가 67배로 늘어납니다.
- 얼음 왕국의 파수꾼 얼음꽃 게의 숫자가 70배로 늘어납니다.
- 얼음 왕국의 순찰대 보석 골렘의 숫자가 300배로 늘어납니다.
- 편제를 회복한 보석 골렘이 얼음섬을 순찰합니다.
- 얼음섬은 정령계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얼음섬에서 정령은 무한한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얼음 왕국의 부활로 대륙 서북부 기온이 하강합니다.
- 얼음섬의 출현으로 대륙에 정령왕 숫자가 차츰 늘어납니다.
얼음의 정령왕과 함께 지상으로 올라와 확인한 얼음섬의 모습은 변했다. 얼음이 사라지고 흙바닥을 드러낸 부분이 꽤 보였다.
눈 혹은 얼음으로 덮여있던 바위산들도 모습이 변했다.
"정령은 자신이 편한 환경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많은 종족이 생존하기 편한 환경이 되도록 조율하는 존재. 내 부친처럼 섬을 얼음 투성이로 만들어 많은 종족의 반발을 사는 일은 없을 거야."
- 퀘스트 보상입니다.
- 보석꽃 씨앗을 얻었습니다.
- 신화 등급 소모형 아이템 얼음 폭탄 3개를 얻었습니다.
- 신화 등급 귀걸이 '회한의 눈물'을 얻었습니다.
이름 : 회한의 눈물
분류 : 귀걸이
등급 : 신화
능력 : 얼음 속성 절대 면역
특별 : 스킬 '정령 소환' 사용 가능 - 쿨타임 1일
특별 : 스킬 '얼음 왕국 창기사 소환' 사용 가능 - 쿨타임 1일
특별 : 스킬 '얼음 지옥' 사용 가능 - 쿨타임 60일
특별 : 얼음섬으로 이동 - 쿨타임 30일
- 얼음의 정령왕이 축복을 내립니다.
절대영도 스킬이 완성되었다.
- 정령사 직업이 생깁니다.
- 정령사는 정령을 부리는 마법형 정령사, 정령을 소환해 함께 싸우는 근접형 정령사로 나뉩니다.
- 푸레와 고블린 종족에 정령사가 생깁니다.
- 60레벨에 마스터를 달성한 유저는 한 번의 전직 기회가 있습니다. 이미 다른 직업으로 전환한 적 있는 직업은 정령사로 전직하지 못합니다.
네크로는 텔레포트 쿨타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얼음섬 관광을 했다. 궁전 주변을 제외하면 얼음이 별로 없어서 얼음섬보다는 정령섬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얼음 정령 말고도 온갖 정령이 섬 곳곳에서 즐겁게 뛰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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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을 지원해주지 못한다면 우린 철수하겠습니다."
갑자기 서북부의 기온이 확 내려갔다. 원래부터 생산량이 부족해 식량을 사들이는 거로 버티는 초인동맹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우르크 수도를 함락하고 전리품을 나눌 수 있는데도?"
"군대를 물리지 않으면 NPC들이 폭동 일으킬 겁니다."
농업에 많은 세금을 퍼붓는 네크로와 달리, 초인동맹은 여러 방면에 골고루 세금을 분배했다. 소속 세력들과 계약 관계여서 농업에 더 많은 투자를 해달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식량난에 허덕이는데도 침략 전쟁을 하면 NPC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초인동맹은 더 버티기 힘들다고 항변했다.
"지원해주고 싶지만, 우리도 사정이 좋은 게 아니어서."
게임 설정에 따라 공격하는 전쟁에서 식량 소모가 평소 3배가 된다. 철혈팔기가 역천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도 식량 비축이 너무 적어서였다. 초인동맹 지원하다간 철혈팔기의 NPC들이 반란을 일으킬 판이었다.
"네크로나 가미카제는 식량에 여유가 있는 거로 아는데."
"네크로 국왕이 개인 퀘스트로 자리를 비워서 두 NPC 재상이 국가 사무를 봅니다. NPC 대현자를 설득할 자신 있다면 직접 시도해 보십시오."
네크로 세력 파견군 대표는 유럽 유저였다. 도시 2개에 마을 7개 점령한 동맹 중 최강 세력으로서 국가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우르크 전쟁 끝나고 현실로 반년 우리 국가를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다고 연명해서 협약을 작성해 주십시오. 그러면 식량을 최저가로 넘기겠습니다."
가미카제 역시 호락호락하게 나오지 않았다.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억지로 군대를 파견했지만, 우르크와 벌이는 전쟁이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정도로 멍청한 자들이 아니었다.
"네크로가 잠깐 와서 일을 처리하고 떠나면 안 됩니까?"
"쉽게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텔레포트 쿨타임이 채 돌지 않았답니다."
"아니, 이 긴박한 때에 개인 퀘스트나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일국의 국왕인 유저가."
"함께 우르크 수도를 공격하자는 걸 필사적으로 거절한 게 철혈팔기 아닙니까? 이런 긴박한 상황에도 주판을 튀긴 게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가미카제가 나서서 철혈팔기를 저격했다. 철혈팔기가 잘못한 것도 맞지만, 가미카제가 발을 뺄 명분을 만들려고 일부러 자극하는 것임을 아는 철혈팔기 간부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때 힘을 합쳐 우르크를 더 약하게 만들었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역천이나 프리덤을 도우러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을 때 억지로 동맹군을 해산한 게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네크로를 대표한 유럽 유저와 가미카제 대표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저기, 논점 흐리지 맙시다. 도대체 식량 지원할지만 말씀해주세요."
초인동맹 대표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회군이 늦어질수록 민심이 나빠지고, 민심이 나빠지면 경제나 문화를 비롯해 모든 부분이 위축된다.
"실질적 식량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날이 밝는 대로 철수합니다."
몇 시간 후 초인동맹이 동맹군을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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