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면1
"아, 짜증 나."
소모형 마법 아이템 횃불이 또 꺼졌다. 인벤토리에서 새 횃불을 꺼낸 현피는 마나가 횃불에 빨려가는 느낌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헌혈할 때 몸에서 소중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은 적 있는데, 그 소름 끼치는 느낌과 정말 똑같아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나가 넉넉한 건 현피밖에 없어서 교대해 줄 사람도 없었다.
역천 덕분에 공개된 던전 '영원한 암흑'. 총 13층으로 구성되었고 층마다 보스 하나에 중간 보스 서넛씩 있었다. 10층까지는 몹의 밀도가 높지 않아 네크로 일행이 사냥하기 딱 좋았다.
추종자 제작 : 나무 골렘, 돌 골렘, 강철 골렘, 철갑 전사, 철갑 기사, 타이탄 제작.
골렘 시리즈는 한 마리씩 만들어본 후에 포기했다. 나무 골렘은 해골이나 좀비보단 훨씬 나았다. 움직임이 둘보다 빠르고 전투 지능도 뛰어났다. 다만, 원소 공격에 너무 취약했다.
돌 골렘은 움직임이 느렸다. 속성 공격 방어는 괜찮았지만, 물리 공격, 특히 찌르기와 둔기 공격에 약했다. 찌르기에 당할 때마다 움직임이 삐걱대고 둔기 공격엔 피통이 쭉쭉 깎였다.
강철 골렘은 속성 공격에도 강하고 물리 공격도 잘 버텨냈다. 그러나 걸음이 다소 느린 감이 있고 만드는 데 돈이 너무 들었다. 강철 골렘 하나 만드는 데 철괴가 15개씩 들었다. 광산주 시절이면 몰라도, 지금은 강철 골렘으로 군단 만드는 건 어렵다.
철갑 전사는 철괴 10개에 미스릴 가루 한 줌이 들었다. 철갑 기사는 철괴 25개에 미스릴괴 5개가 들었다. 사령술사 시절과 비교하면 구매해야 할 종류가 줄어서 훨씬 편하긴 했다. 그리고 철갑 전사는 리치나 듀라한 만드는 비용보다 싸게 먹혔다. 철갑 기사는 죽음의 기사나 해골 기사보다 비싸고.
이유는 미스릴괴의 가격이 너무 비쌌다. 역천이 미스릴을 전혀 시장에 풀지 않고 창고에 쌓아두는 바람에 광산이 하나 개발되었음에도 오히려 가격이 올랐다. 일본은 물론 중국 유저들도 슬슬 희망의 등대로 유입되면서 물가가 며칠에 한 번씩 출렁였다.
"중간 보스 암흑 멧돼지예요."
철벽은 평소 반말을 주로 쓰지만, 급한 상황이나 흥분하면 존댓말을 썼다.
"신의 불, 도발."
굳이 도발을 쓸 필요까진 없지만, 스킬 숙련도를 위해 습관적으로 펼쳤다. 신의 불 스킬을 펼치자마자 암흑 멧돼지는 자기 부모와 형제를 잡아 족발집에 넘긴 사냥꾼 만난 것처럼 흥분했다.
"다른 스킬은 자제하고."
영원한 암흑 던전의 몹은 속박 계열이나 디버프 스킬에 엄청난 저항을 보였다. 디버프나 속박 스킬이 실패하면 시전자에게 크게 작게 상태이상이 왔다. 일반 몹이면 상관없지만, 중간 보스면 조심해야 했다. 사냥터마다 다른데, 이 던전은 죽으면 안전지대에서 부활했다. 일행과 합류하느라 시간을 한참 허비해야 하기에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네크로 형 개사기야."
이름 : 드워프의 보물
분류 : 전투 망치
등급 : 신화
능력 : 타격 성공 시 일정 확률로 대상 방어력을 낮춤
특별 : 무기 슬롯에 '용암의 질주' 장착 가능
특별 : 무기 슬롯에 '대지의 어깨춤' 장착 가능
특별 : 무기 슬롯에 '침묵의 눈사태' 장착 가능
특별 : 무기 슬롯에 '태풍의 눈' 장착 가능
특별 : 내구도 무한
이름 : 하약스
분류 : 목걸이
등급 : 신화
능력 : 저항 대폭 상승
능력 : 생명력 쾌속 회복, 상처 자동 치유, 일격필살 면역
특별 : 목걸이 슬롯에 '피 머금은 장미' 장착 가능
특별 : 목걸이 슬롯에 '고향 언덕의 푸른 꽃잎' 장착 가능
특별 : 파괴 불가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무기도 장난 아니지만, 트롤왕의 심장을 그랜드 마스터 랭크 대장장이 NPC에게 600골드 주고 장착한 덕분에 에픽 목걸이 하약스도 훨씬 쓸모가 커졌다.
게다가 강타의 상위 스킬인 맹격 덕분에 직업이 근접으로 바뀌면서 직접 공격력이 어마어마해졌다. 8이나 되는 힘 그리고 10이나 되는 체력도 그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게 되었다.
"와, 중간 보스몹 살이 물렁물렁해."
진돗개가 참수 스킬로 암흑 멧돼지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
이름 : 망나니의 유품
분류 : 양손 무기
등급 : 전설
능력 : 절삭력 대폭 상승
능력 : 저주술사 스킬 '영혼 흡수' 일정 확률로 발동
능력 : 저주술사 스킬 '출혈' 높은 확률로 발동
특별 : 피를 마시면 내구도 회복
허리가 잘린 암흑 멧돼지는 얼마 못 버티고 죽어버렸다. 최근 목이나 허리 등 중요 부위가 절단되면 오래 못 버티게 게임을 수정했다. 대신 보스몹들이 전보다 더 강해졌지만, 네크로 일행에겐 초딩이 중딩으로 성장한 정도의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
멧돼지가 버둥거림을 멈추자 추종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영기가 13 충전되었다. 최대 1천까지 저장할 수 있는 이 에너지는 철갑 기사 만들 때 35 소모, 철갑 전사 만들 때 15 소모한다. 제작에 실패하면 철괴랑 미스릴도 전부 날렸다.
타이탄은 필요한 금속이 17가지나 되고 그 양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몇 개 금속은 네크로나 진돗개가 들어본 적도 없었고 희망의 등대 어디에서도 팔지 않았다. 게다가 타이탄은 그저 영기만으로 만들 수 없었다. 특정 보스몹들만 주는 특별한 진영기도 필요했다.
영기는 현재 700 정도 쌓였고, 진영기는 0이었다. 열 마리 만들 때 영기를 1 소모하는 강철 골렘은 돈만 있으면 만들 수 있지만, 영원한 암흑 던전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예 영기를 소모하지 않는 나무 골렘이나 돌 골렘은 오히려 짐이 되었다.
"9층 보스 발견했어요."
신기하게 철벽이 몹을 잘 찾았다. 영원한 암흑은 인스턴트 던전이었다. 매번 진입할 때마다 던전 구조가 바뀌어서 지도제작이 무의미했다.
아직 많은 유저가 방문하지 않아 확실치 않은데, 같은 구조가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네크로는 확신했다. 레전드는 미리 짜놓은 프로그램대로 진행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저거 뭐지? 대가리 셋짜리 지옥 지키는 개."
"케르베스? 켈브스?"
"그냥 개라고 하자. 혀가 꼬여."
가까이 다가가니 지옥견이라는 다소 밋밋한 이름이 떠 있었다. 이 던전은 보스몹도 자주 바뀌어서 가끔 이런 식으로 처음 보는 몹이 나타나기도 했다. 예전에 1층에서 봤던 보스몹이 강해져서 8층에 나타나는 일도 있었다.
"철벽, 출동."
"내가 개야?"
툴툴거리면서도 철벽은 방패를 앞세우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갑옷을 전설 템으로 바꾼 후 조심성이 많이 사라졌다.
"오빠, 상태이상."
스킬을 써서 철벽을 덮친 지옥견은 카운터 판정을 받고 경직 상태가 되었다. 유니크 방패의 밀리지 않는 속성 덕분에 시작이 산뜻했다.
드워프의 보물로 대가리 세 개를 한 번씩 두드린 네크로가 큰소리로 외쳤다. 용병들을 배려해서 공용 채널을 사용했다. 파티 채널로 대화하면 용병들에게 전달이 3초 정도 느렸다.
"피통 장난 아니고 물리 방어력도 엄청나."
진돗개와 동해 그리고 현피도 번갈아 공격했다. 동해의 얼음 공격이 그나마 잘 먹혔다.
"속성 공격이 다양한 마법사가 필요해."
"멍청아, 속성 공격의 최고봉은 사냥꾼이야. 속성 화살 스킬 하나면 모든 속성 다 쓴다고."
"누가 멍청이야. 속성 화살 아니고 마법 화살이야. 스킬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우는 주제에."
"하나가 여자였으면 결혼하라 하겠는데. 참 아쉬워요."
철벽의 말에 현피와 진돗개의 싸움이 급종결됐다.
"얘 눈이 빨개졌어."
머리 하나가 갑자기 눈이 붉게 충혈되더니 입을 쫙 벌렸다. 불이나 얼음 토하나 했는데, 냄새가 엄청 고약한 푸른 덩어리를 뱉어냈다. 덩어리가 잠깐 꾸물대더니 작은 강아지 모습이 되었다.
"제이크."
"독 강아지다. 물리면 큰일 난다."
사람은 게으른 존재다. 레전드 몹의 유형이나 특성을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각인하려고 일행은 웬만하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몹 정보를 알아냈다. 제이크가 말해주면 편하긴 한데, 그 기억이 쉽게 지워졌다.
그러나 보기만 해도 위험해 보이는 녹색 강아지가 나타나자 저도 모르게 제이크를 찾았다.
"독 저항은 별도야. 독은 속성 저항에 속하지 않아."
친화력과 밀접한 일반 저항과 달리 독 저항은 체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아이템들이 올려주는 모든 저항에 독 저항이 포함되지 않았다.
"오빠. 얘 머리 셋인데, 한 번에 하나만 도발에 걸려."
"히드라 만나면 철벽이 아홉 있어야겠네."
10층까지는 일행에게 위협이 그다지 되지 않아서 다들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옥견이 두 번째 독 강아지를 토해낸 후 일행은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인지했다.
"지옥견 피통 90%가 넘네?"
"생명력 회복이 엄청 빨라."
"독 강아지는 어떻게 죽이는 거야? 피통 지옥견 꺼 공유하는 거 같은데?"
"제길. 분신술이랑 비슷한 스킬인데 훨씬 까다로워."
"제이크."
"지옥견은 언데드다. 어딘가에 생명력의 원천이 있다. 그걸 없애야 한다."
"게륵. 빨리 찾아."
진돗개의 분부에 제이크와 함께 숨어있던 게륵이 움직였다. 현피와 동해가 물러나서 게륵을 호위했다. 피통이 커서 잘 안 죽는 셋과 달리 현피나 동해는 자칫 실수하면 대기실에서 10분 허비해야 했다. 독 강아지가 세 마리로 늘어나자 회피가 어려워지며 둘이 빠졌다.
"형, 솔직히 요샌 게임이 신나지 않아. 레오칸이랑 투라칸 잡을 땐 엄청 재밌었는데."
게륵이 뼈 무더기에 파묻힌 지옥견의 생명 구슬을 찾아내 파괴했다. 독 강아지는 순식간에 증발했고 지옥견도 볼품없이 말라서 가죽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럼 게임 잠깐 쉬고 여행이나 다녀올까?"
"일본? 동남아?"
"다들 여권 있지?"
현피 제외하면 여권 만든 사람이 없었다.
"다들 여권 만들자. 그리고 이번엔 제주도 가자. 동해가 인터넷 검색해서 코스 알아봐. 괜찮으면 부모님들도 모시고 다녀오자."
10층 보스까지 해치운 후 던전 탈출 스크롤을 찢어 입구로 이동했다. 동해와 진돗개 그리고 현피는 각자 와이번과 그리핀을 타고 출발했고 네크로와 철벽은 역참에 돈 내고 그리핀을 빌려 희망의 등대로 이동했다.
진돗개와 현피는 바로 로그아웃했고 동해는 용병들과 스킬과 아이템을 배제한 맨손 격투를 하러 갔다. 철벽은 성벽 쌓는 퀘스트 하러 떠나고 네크로만 남았다.
저장 공간이 큰 관계로 잡템을 모두 떠안은 네크로는 길드 소속 마스터 랭크 상인을 찾아가 잡템을 모조리 넘겼다. 판매 자금은 상인이 5% 남기고 남은 건 전부 길드 자금으로 들어갔다.
"네크로 님. 길드 확장할 계획 없나요?"
"왜요? 혹시 무슨 소식 있어요?"
"배틀넷 있잖아요. 원래 OB 길드장이었던 그 사람. 갑자기 길드장 자리를 넘기고 사라졌잖아요. 최근 나타나서 길드 만들고 확장하더군요. 제가 아는 사람이 그 길드에 가입했는데, 우리 길드랑 연합을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네크로 님이 강한 건 알지만, 게임은 결국 머릿수를 못 이깁니다. 그쪽이랑 연합하든 안 하든, 힘을 키워놔야 이득일 것 같아서요."
"말씀 감사합니다. 많이 고민해보겠습니다."
잡템과 아이템을 모조리 처분한 네크로는 신전으로 향했다.
"대주교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크로 형제. 모든 게 순조롭다네."
이름 : 드래곤의 알
분류 : 탈것 - 귀속
등급 : 드래곤
"상태 확인."
- 현재 부화율은 37%입니다.
드래곤 로드 레어에서 넷은 직업 제한으로 아이템을 많이 얻지 못했다. 그러나 테스트 레벨이었던 네크로는 모든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었다. 확인도 안 하고 다급히 넣은 아이템 중에는 드래곤의 알이 섞여 있었다. 일부 아이템은 미처 전송 버튼을 못 눌러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 도로 드랍했다.
"여기 무구들입니다."
헤아는 네크로가 전한 레어템들을 받아서 스킬로 녹였다. 템이 녹으면서 밝은 빛이 나타났고 그 빛은 헤아의 인도를 받아 드래곤의 알에 흡수되었다.
"부화율이 70% 되면 더 높은 등급의 무구가 필요하네."
20%까지는 매직으로 때웠다. 20%부터는 레어가 필요했고, 70%부터는 유니크가 소모된다.
'제발 레전드에서 끝나야 하는데, 신화 아이템은 너무 아까워.'
아직 드래곤 탈것은 일행에게도 비밀로 했다. 부화 성공률이 100%도 아니고, 괜히 말이 새면 누군가 방해할 것 같기도 했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역천일 가능성이 가장 크고.
즐기자 길드가 확장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건 관리할 여력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역천 길드의 견제를 덜 받기 위함도 컸다. 드래곤을 제외하면 아직 무력의 부족함을 느껴보지 못했고, 현재 공개된 콘텐츠들은 일행의 능력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NPC 영입도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고.'
생각 밖으로 NPC 길드원을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비쌌다. 네크로의 기준이 높은 것도 이유가 되지만, 길드가 많아지면서 NPC의 몸값이 몇 배로 뛴 것도 있었다. 유저를 영입하기 힘든 길드들이 무력을 충당하려고 NPC를 영입하기 시작하면서,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NPC 몸값이 빠르게 상승했다.
'푹 쉬자. 제주도 가서 며칠 즐겁게 지내고. 돈 벌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야.'
신의 흔적을 찾는 에픽 퀘스트가 끝나자 네크로가 아닌 일행이 오히려 방황했다. 단순한 편인 동해나 아직 게임이 한창 재밌는 철벽은 괜찮았지만, 현피와 진돗개는 방황이 꽤 심했다. 전투에서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보였다.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이라고 하지만, 내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겠다고 하면 애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광해는 레전드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이 다짐은 최강의 유저가 되려는 생각이었지 국가를 세우고 왕이 될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거래하는 과정에 왕의 혈통을 마시게 되었다.
'애들이 비웃지는 않겠지?'
현재는 도시 점령도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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