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행유자
"게 누구 없느냐? 가서 황 파파를 다시 모셔오거라."
궁주를 모시는 하녀들은 또 변덕 부린다고 속으로 툴툴거렸다. 목표를 정하면 야무지게 달리지만, 확실한 목표가 없으면 늘 우왕좌왕하는 궁주다. 그래도 자기 사람에게는 마음 씀씀이가 무척 좋아서 다들 좋아하는 편이다.
일각의 시간이 흐르고 황 파파가 조금은 불편한 얼굴로 들어왔다.
"제가 고민이 좀 깊어 아까 확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방금 결정했습니다."
황 파파는 어린 여우가 무슨 수작을 부리나 고민했다. 눈알이 살짝살짝 굴러가서 황 파파가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게 다 보일 지경이다. 담화궁에서 남의 눈치 볼 일이 없는 황 파파여서 표정을 숨기는 게 미숙하다.
"내일 그분이 옵니다."
황 파파는 목덜미와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황 파파는 무공의 위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경지는 담화궁에서 제일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담화궁에서 고수라 불리는 자 중 절반은 황 파파의 가르침을 받았을 정도로 무공에 박식하다.
"그러시군요. 무슨 분부할 일이 있습니까."
자신의 목소리에서 확연한 떨림을 감지한 황 파파는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기세에서 져버려서 궁주가 조금 무리한 요구를 해도 거절하기 힘들다.
"아까 저를 찾아오신 거, 두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서잖아요. 데려가세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황 파파가 잘 알리라고 믿습니다."
'지독한 년, 내 목에 방울을 달 생각이구나.'
황 파파는 궁주의 속셈을 바로 알아차렸다. 내일 그분이 오면 궁주는 아이를 보여주려 했다. 잘되면 궁주는 힘도 얻고 사모하던 남자와 맺어질 수도 있지만, 실패하면 뒤가 없는 배수진이나 다름없다.
궁주는 황 파파에게 아이를 데려가라고 하고, 내일 그분이 오셨을 때 둘 중의 하나를 골라서 대령시키라는 뜻이다. 만약 그 남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게 들통나면 황 파파의 과한 충성심으로 몰아갈 수 있고, 성공하면 궁주에게만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궁주 저 요망한 것이 그분에게 '아이가 있는데 황 파파가 규정 운운하며 데려갔어요'라고 입김을 불어 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담화궁에서 무력이 가장 강한 소요궁의 몽소요도 궁주의 말이라면 콧방귀를 뀌지만, 그분의 말에는 고분고분하다.
'가만, 그런데 그분 이름이 뭐였지?'
분명 들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황 파파는 궁주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궁주도 맨날 그분이라고만 부르는 걸 보면, 본인도 황 파파와 같은 처지일 것이다.
'가랑이 벌려주고도 이름조차 모른다니. 한심하기 그지없구나. 그나저나 이 요망한 것이 잔꾀는 있어도 깊은 속은 없었는데, 이런 수는 누가 알려준 거지? 찾아내서 은밀히 처리해야겠다.'
"황 파파, 왜 대답이 없습니까? 원하는 걸 해준다고 했는데 싫은 얼굴이군요."
황급히 표정을 수습한 황 파파는 일단 시간을 끌었다.
"궁주께서 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내일 잘 처신하시면 용봉궁의 존속에 더불어 부궁주의 자리를 드리죠. 용봉궁의 궁주이자 담화궁의 부궁주가 되는 겁니다."
황 파파가 강 부궁주에게 밀리는 게 바로 감투다. 세력은 비등하지만 직위가 낮아서 많은 일에서 조금씩 손해를 보게 된다. 만약 황 파파가 부궁주가 된다면 오 년 안에 강 부궁주를 말려 죽일 자신이 있다.
"기필코 해내겠습니다."
황 파파는 기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둘의 대화를 들은 궁녀가 두 아이가 있는 곳으로 황 파파를 인도했다.
"다들 나가보거라. 혼자 있고 싶구나."
### 快劍神龍 龍遊迅 ###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청수한 사내가 담화궁에 도착했다. 담화전으로 슬렁슬렁 걸어가는데 누구 하나 저지하는 사람이 없다. 뒷짐을 지고 산책하듯 느릿한 걸음이지만, 어느새 담화전 앞에 도착했다. 활짝 열린 대문을 통해 사내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그리운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아이가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단정한 몸가짐을 한 아이는 사내가 나타난 걸 모르고 계속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사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음."
아이가 여전히 아무 움직임도 없자 사내는 주렴을 걷고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 고명한 점혈 수법이구나.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놀랍게도 아이는 점혈 되어 있는데, 혈맥과 기운의 흐름이 점혈 되지 않은 사람과 똑같았다. 물론 사내도 할 수 있는 일이라 과하게 놀라지는 않았다.
"오셨군요."
궁주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하던 사내를 다시 보게 되어 기쁨이 넘쳐나지만, 어제 산 도깨비(山魅 - 산매)같은 남자에게 점혈 당하고 여우 귀신(狐仙 - 호선)같은 여자가 자기 목소리를 흉내 낼 때부터 혼이 반쯤 나가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게 기쁨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본인도 헷갈릴 지경이다.
우행유자(愚行留字).
우행이라고 하기에는 글씨가 덜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행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글에 은은히 묻어나는 무위지경의 경지가 눈에 보인다.
"어떤 사람이더냐?"
"덩치가 산 도깨비 같고 젊은 얼굴의 사내였습니다."
"설마 반로환동인가? 확인하거라."
"네, 주군."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내 필생의 적이자 조력자가 가까이 왔구나. 가볍게 경고만 한 걸 보니 오늘은 다툼 없이 넘어갈 생각인 듯하니,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지. 다음에 시간이 되면 다시 보러 오겠다."
말을 마친 사내의 신형이 사라졌다. 바람으로 변해 사라진 거라면 살랑거림이라도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런 조짐도 없고 아무런 흔적도 없이 지워지듯 궁주의 눈앞에서 종적을 감췄다.
궁주는 자리에 퍼더버리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얼굴이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고 가시지, 너무 야속하다는 생각에 송곳으로 콕콕 찌르고 칼로 후벼 파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궁주, 큰일 났습니다. 황 파파가 죽었습니다."
수하의 말에 궁주는 황급히 눈물을 닦은 후 화장을 다시 했다. 평소에 입고 있던 치렁치렁한 궁장 대신 움직임이 편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후 곧바로 용봉궁으로 향했다.
"최명판관의 쇄심수(碎心手) 같습니다."
황 파파가 웃는 얼굴로 침상에 누운 채 빳빳하게 굳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쇄심수는 최명판관이 직접 만들어낸 절기로, 손바닥으로 가슴 혹은 등을 때려 심장을 멈춘다. 심장이 멈추며 혈류가 역행하여, 죽는 자는 웃는 얼굴로 세상과 작별한다.
강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명판관과 교분이 꽤 깊은 담화궁은 쇄심수에 대해 잘 아는 편이다. 그러나 궁주는 고개를 저었다.
"쇄심수에 당하면 혈류가 역행하여 얼굴에 피가 차고 웃는 모습도 억지스럽다고 들었다. 저 시체는 진심으로 기쁘게 웃는 것 같구나. 검시(檢屍)하라."
"저, 온전한 시체를 남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황 파파도 흉수를 찾아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반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밤새 점혈로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있은 서러움과 두려움, 그분의 얼굴을 잠깐 보고 헤어지게 된 서글픔과 서운함, 남아서 자신을 지켜줄 거로 생각했는데 훌쩍 떠나며 생긴 상실감. 궁주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황 파파의 심장은 그대로였다. 궁주는 자신도 어제 자칫하면 황 파파 꼴이 날 뻔했다는 사실에 겁이 더럭 났다. 그러다 문득 두 아이가 생각나 자신을 따라온 하녀들에게 분부했다.
"어제 황 파파가 데려간 두 아이를 찾아라."
두 아이의 얼굴을 아는 하녀들이 용봉궁을 다 뒤졌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담화전으로 돌아간 궁주는 배치된 기물(器物)의 절반을 부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 快劍神龍 龍遊迅 ###
"대협, 제발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왜, 제자로 안 받아주면 소리 지르게?"
올 때와 다르게 배는 강물의 흐름을 따랐다. 그래서 유신은 가끔 장대로 수면을 살짝 건드리는 것으로 방향만 조절해주면 된다. 초설의 품에 안겨 곤하게 자는 귀소와 달리, 함께 구해낸 아이는 똘똘한 눈으로 유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듭 간청했다.
"어제는 미안했습니다. 제 사정이 하도 급해서 염치 불고하고 폐를 끼쳤습니다."
"너 몇 살이냐?"
"사부님의 공자, 아니, 대사형과 동갑입니다."
기껏해야 만으로 네 살이라는 뜻이다. 유신은 저 때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던지 회상하다가, 자괴감에 그만두었다. 귀소야 자기 자식이니 그저 이쁘기만 했는데, 귀소랑 맞먹는 녀석을 보게 되니 밤마다 이불 적시던 시절이 생각나서 부끄러움이 마구 몰려왔다.
"너 이름이 뭐냐?"
"제자 성은 남궁이고 이름은 도룡(屠龍)입니다."
"제자로 받긴 힘들 것 같다. 내 성이 용 씨인데 너는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제 아비 성이 남궁이고 이름에 용 자가 들어갔습니다. 부덕한 제 아비는 회임한 모친을 죽이려 했습니다. 아비 이전에 목숨을 지우려 했던 원수여서 이름을 저렇게 지었습니다."
'인연인가?'
독을 먹고 자결했는지 아니면 몽소요에게 독살당했는지 모를 여인의 죽음이 석연치 않았는데, 그 자식으로 추측되는 아이를 구하게 되니 하늘이 점지한 인연이 아닌지 의심되었다.
"너 혹시 봉양루에서 자랐느냐?"
"어찌 아셨습니까?"
"이름을 남궁도현으로 바꾸거라. 네 아비 이름에 현 자가 들어갔으니."
"제 가련한 모친은 소원을 이루었습니까?"
"울어도 된다."
아이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무래도 기구하게 자라다 보니 일찍 셈이 든 것 같다. 그러다 귀소 역시 아비 없이 자라느라 일찍 철이 들고 어른스러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유신도 코가 시큰해졌다.
'무위지경인데 감정 기복이 심하네?'
내공을 움직여보니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평소처럼 잘 흘렀다. 갓 무위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감정에 대한 반응이 무뎠는데 시일이 지나며 감정의 기복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경지가 제각각이어서 서로 당기나 보다.'
전영득에게 언젠가 들었는데, 마교에서는 한 가지 무공만 죽으라고 익히는 수련 방식이 있다. 하나의 경지를 높게 끌어올리면 남은 경지들도 따라서 서서히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낮은 경지들이 높게 올라간 하나의 경지를 내리 당기면, 평생 수준 이하의 무인으로 살아야 하는 위험천만한 수련법이다.
"그럼 제자 이름을 남궁도현으로 바꾸겠습니다."
"부군, 제 오라비가 서문초현입니다."
"그럼 그저 남궁도라 하겠습니다. 제발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유신은 고민하다 대답했다.
"내 가전 무공은 체질이 맞지 않으면 익혀도 이류를 벗어나기 어렵다. 당문에 가서 네 체질이 내 무공과 맞는다면 너를 제자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좋은 사부 소개해주마."
"제가 보기에는 사부님만큼 제게 적합한 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억지로 웃을 필요 없고 남의 기분을 살피며 말할 필요도 없다. 원한에 먹히지 말고 복수에 휩쓸리지 말고 오롯이 너로 자라거라. 네 이름을 다시 지어야겠구나."
유신은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호가박이 어떠냐?"
예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이 바로 호가십팔박이다.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의미가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영리한 아이여서 그런지 사부라는 말을 더는 입에 담지 않았다. 짧은 대화를 통해 본능적으로 자기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래도 봉양루에서 눈치를 보며 자란 탓이 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연민을 느꼈다.
"글은 아느냐?"
"눈동냥으로 몇십 자는 익혔습니다."
"무공을 배우기 전에 세상부터 배워야 하고 세상을 배우기 전에 사람이 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아직 근골이 자리 잡지 않았으니 글공부에 열중하거라."
"성현들의 고리타분한 말이 세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까? 제 생각은 아니고 얻어들은 말입니다."
유신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아이의 평생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말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꾸며서 좋게 말할 필요까지 느끼지 못했다.
"누구의 말이든 곧이곧대로 따르는 건 멍청한 짓이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뿌리를 찾고, 이 말이 어떻게 자랐는지 줄기를 살피고, 어디까지 뻗었는지 가지를 더듬고, 어떤 꽃을 피웠는지 향을 맡고, 그 과실이 단 것인지 신 것인지 떫은 것인지 맛보고, 꽃을 받쳐주는 잎이 어떤 모양인지 알아본 다음에 네 마음 가는 대로 정하면 된다."
"귀한 가르침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남궁용현과 성은 모르는 혜연이라는 여자의 자식을 우연히 구한 유신은, 하늘의 뜻이 뭘까 고민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남긴 우행유자라는 넉 자가 효과를 보았을지도 무척 궁금했다.
- 작가의말
깔끔하게 마무리했습니다. 황 파파의 사인은 성추행입니다.
최근 쓰고 싶은 유형의 글이 몇 가지 있는데, 안타깝게도 무협은 없습니다. 구상 중인 중2병 무협이 있지만, 자신이 없네요. 쓰다가 또 기존 스타일의 글이 되지 않을지 걱정이 큽니다. 쓰더라도 비축을 많이 쌓아놓고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도 일주일에 이틀 혹은 사흘씩 글이 안 써질 때가 있습니다. 동시에 글 두 개를 연재하기에 이쪽이 안 써지면 저쪽을 쓰면 되는데, 글이 안 써질 때면 둘 다 끄적이다 말곤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아무것도 몰라서 하루에 3편씩 쓸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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