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종흑룡
두 진영이 서로 격돌할 때, 보통 장수가 앞장선다. 군졸이 가장 앞에서 달리는 건, 도망치는 군대일 것이다. 강호의 다툼도 크게 다를 게 없어, 고수들이 가장 앞으로 뛰쳐나간다. 물론, 가끔 무공은 평범하지만 경공이 뛰어난 자들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갔다가 송장이 되기도 한다.
담화궁은 방진을 짜고 차분하게 전진했고, 백련교 고수들은 마실이라도 나온 듯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숫자는 무림맹이 이천 명으로 더 많지만, 기세는 마교 쪽이 나았다. 몇 차례의 대격돌로 무림맹의 고수들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가을마다 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도, 선두 기러기를 따른다. 새는 머리가 없으면 날지 않는다는 말에서, 머리가 바로 선두 기러기를 말하는 것이다. 앞장서서 이끄는 고수가 부족하니, 사기가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금의위에서 나온 독전관이 지켜보고 있으니 도망칠 수도 없다. 도망치다 걸리면 가족들까지 역모죄로 참수당한다. 억지로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앞장서서 목숨 걸고 싸우려는 고수의 부재로 무림맹의 사기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저조했다.
백련교의 무리는 성화신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신의 곁으로 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싸울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구로 살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이 백련교도들이다. 담화궁 역시, 여인이 핍박받지 않는 세상을 만든다는 명분이 있다. 험한 꼴을 당한 여인이 적지 않고, 그런 여인들의 주도하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반면 무림맹은 수뇌부의 욕심과 황실의 압박 때문에 억지로 차출된 무인들이다. 싸우는 척 시늉만 하며 빨리 군대가 내려와서 반란을 평정하기를 기다리는 게 이들 마음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봉기군을 상대할 때도, 하나라도 더 죽여서 공을 세우려는 생각보다는 적당히 하다가 물러나려는 마음이 더 강하다.
"돌격해서 상대의 진형을 흩트려야 하는 게 아닌가?"
"고수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우리 진형이 흐트러져서 대패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딱 한 번 승리했네. 폐하께서 전황에 큰 우려를 품고 계시네."
한 번의 승리도, 삼천에 달하는 무인이 백 명도 되지 않는 상대를 격파한 것이다.
"지금 증원 부대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버티다가 협공으로 적을 처리하면 됩니다. 난전이 되면 고수가 많은 마교의 악적들이 더 유리합니다."
"무림맹에 바다를 뒤집고 강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고수가 즐비하다 들었는데, 왜 이곳에 한 명도 오지 않은 것이오?"
"소문이 과장된 것입니다. 지금 보시는 고수가 강호인들의 일반적인 수준입니다. 무림맹은 중원 무림의 정예들이 모인 곳이고, 광서로는 그 정예들이 파견되었습니다. 마교의 무리는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마공을 익혀 위력은 더 강하지만, 무공을 사용하면 할수록 자기 목숨을 단축합니다."
적지 않은 은자를 받아먹은 독전관은, 더 쓴소리를 할 수 없었다. 작은 승리를 크게 부풀려서 보고할 수 있지만, 있지도 않은 승리를 꾸며내서 보고하면 모가지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다. 승전보를 한 번밖에 올리지 못한 독전관은, 작은 승리도 매우 시급한 상황이다.
마교 무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무림맹 무인들의 기세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마교나 담화궁에 비교하면 목숨을 던지는 호기가 부족할지 몰라도, 어차피 칼밥 먹고 사는 강호 인생들이다. 전투가 가까이 다가오자 사기와 무관하게 각자 기세를 끌어올렸다.
"당문흑룡 운상종."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슬며시 불어온 시원한 가을바람처럼, 서늘한 목소리의 전음이 삼천에 육박하는 무인들의 귀에 스며들었다.
"저자는 뭔가?"
"당문의 야인인 듯합니다. 무림맹에도 들지 못한 변방의 작은 가문입니다."
"백화제방 만천우."
말을 마친 당우형은, 오매불망 바라던 소원을 이룩했다.
금전표, 비표, 지요, 삼릉자, 아미자, 비수, 비황석, 조핵전, 건곤권, 철원앙, 철섬여, 매화침, 철질려, 표도, 유성표, 당전연.
같은 금전표도 십수 가지 모양새가 있고 비표는 그 규격이 정해지지도 않았다. 철질려는 싸구려 철로 만든 암기로, 똑같은 모양을 찾기 힘들 정도다.
이름만 십수 가지이고, 실질적으로는 백 가지가 넘는 암기들이 당우형의 몸에서 끊임없이 쏟아졌다. 마치 요술 주머니라도 있는 듯, 수천 개의 암기가 순식간에 마교의 무리를 뒤덮었다.
"이보시오. 저자가 변방의 야인이면, 지금까지 무림맹이 보낸 무인들은 서당에서 글 읽는 꼬맹이들이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독전관에게, 당우형이 한 짓은 그저 대단하고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당우형이 보여준 경지와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어렴풋이 느낀 무림맹 대표는, 넋 놓고 구경하느라 독전관의 말을 듣지 못했다.
"갈 길이 바빠서 이만."
당우형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지자, 독전관은 눈을 세게 비볐다. 여전히 멍해 있는 무림맹 대표를 흔들어 정신 차리게 만든 후, 뾰족한 소리로 질문했다.
"저 자는 대체 누구요?"
"당문에 사고만 치고 다니는 운종흑룡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아마 그자인 듯합니다. 이름은 들은 적 있는데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빨리 무인들을 돌진시키시오. 작은 공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소?"
천 명에 가까운 마교 무리는 수백 명이 죽고 수백 명이 암기에 적중당했다. 멀쩡한 자가 이백 명이 넘지만,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미 죽은 자들은 몸에 병장기 자국 여러 개씩 더 얻고, 다친 자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암기를 피하거나 막아낸 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오늘 일은 폐하께 여실히 상주하겠소. 무림맹이 지금껏 폐하의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여겨도 괜찮은 거요?"
'또 돈을 달라는 말이구나. 그나저나 빨리 맹에 보고하여 고수를 급파하게 해야겠구나. 자칫하면 당문이 마교를 다 처리해 버려 공을 차지하고, 무림맹은 황실의 압박에 못 이겨 해체될지도 모른다.'
### 快劍神龍 龍遊迅 ###
"형님, 이젠 좀 괜찮으시죠?"
"아이고, 삭신이야."
백화제방을 전력으로 펼친 탓에, 작은 내상을 입었다. 내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묘하게, 단지 기의 흐름이 불온하게 변했다. 백화제방의 경지에 내공이 못 미쳐,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있다. 외공을 단련하면 근육이 생기듯, 내공의 수준을 뛰어넘는 초식을 펼치면서 경락과 혈도들이 그에 상응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당우형은 고수답지 않게 전신에서 통증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약속한 일 년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휴식할 겨를도 없다. 당우형은 경공을 펼쳐 달리면서 가끔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 여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새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곳만 찾아다녔다. 그러나 전영득도 지형을 잘 모르는 곳이라, 최적의 경로로 움직이기 힘들어 수색 속도가 꽤 느렸다. 밤이 되어 휴식을 취하게 되자, 당우형은 바로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소형제처럼 칠 일 자는 건 아니겠지?"
"남은 시간이 얼마죠? 보름 정도인가요?"
"날이 밝으면 열흘 하고도 나흘이 남은 셈이네. 우행 진인의 일 년이 정확히 일 년 되는 날을 말한 것이라면 말이오."
다행히 당우형은 고기가 익는 때를 맞춰서 일어났다. 잘 잤다는 듯이 기지개를 쭉 켜던 당우형은, 아침이 아니고 여전히 저녁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정말 시원하게 잤는데 반 시진도 안됐다고?"
백화제방을 펼치기 전과 뭔가 달라졌는데, 당우형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말해주는 것도 안 좋을 것 같아, 일행도 모른 척 했다. 고기를 맛있게 뜯고 배가 부른 당우형은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여기군요. 모든 게 시작한 곳이."
용박의 말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말을 마친 용박은 바로 혼절해 쓰러졌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은 게 아니어서, 이젠 모두가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하늘의 안배인가? 아니면 우행 진인의 뜻인가? 혹은 우문현성이 꾸민 궤계인가?"
대화의 맥락을 살펴봤을 때, 천산의 은신처가 최근까지 사용했던 마지막 은신처였다. 그리고 필담의 내용에는 항상 그 전에 있었던 은신처에 관한 단서가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서신을 받은 지 일 년 되는 날에, 일행은 최초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곳에 도착했다.
"한복명이 그 배후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런데 한복명은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으니까 우문현성이 모든 일의 주모자로 느껴지고 있어."
"다 죽이면 되오. 골치 아프게 고민할 일이 뭐 있겠소."
용박을 등에 업고 줄로 단단히 묶은 다음, 일행은 함께 움직이며 은신처를 찾았다. 하지만 일행이 찾은 곳은, 은신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커다란 장원이었다. 성화분천(聖火焚天)이라는 네 글자가 멋지게 적혀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백련교의 거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에 우행 진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규모가 커서 장원이라고 불렀지만, 돌담이 아닌 목책으로 둘렀고, 바닥에 깐 돌들이 부서져서 울퉁불퉁했다. 집을 만든 나무들도 귀하거나 비싼 나무가 아니라, 근처의 나무들로 대충 지은 티가 났다.
화원이라고 불러야 할 곳에는 꽃 대신 잡풀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 오랜 시간 가꿈을 받지 못했지만, 수십 년은 된 것 같은 멋진 나무들이 그래도 풍경을 살렸다.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이 장원의 노복입니다. 주인님과 우행 진인께서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길 안내하는 자가 천천히 걸으니, 일행도 경공을 펼치지 않고 느긋하게 따라갔다. 유신은 안내하는 자의 등만 바라보며 곧게 걸었고, 남무천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저 걸었다. 전영득은 주위를 꼼꼼히 살피면서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 했고, 당우형은 자신감 넘치는 눈으로 멀리 보이는 이 층 건물을 노려보았다.
건물은 낡았지만, 관리를 잘했는지 먼지가 보이지 않았다. 장원의 중심에 있는 이 층 건물에 들어가니, 우문현성과 우행 진인이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들 오셨군. 내가 사실 천수가 지난 지 오래되었네. 지금까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육신을 어렵게 잡고 있었는데, 이젠 그만 섭리를 따라야 할 것 같군. 그러니 내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해 주게. 그 등에 업은 아이도 깨워주게나."
유신은 혼절한 용박의 몸으로 내력을 흘려보냈다. 정신을 차린 용박은 우문현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이냐?"
"용박입니다."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용박이 대답했다.
"용박을 업은 아이야, 이름이 무엇이냐?"
"용유신입니다."
"용유신의 왼편에 선 아이야, 넌 이름이 무엇이냐?"
"당우형이라고 합니다."
"당우형의 오른쪽에 있는 용유신의 오른쪽에 선 당신은 이름이 무엇인가?"
"남무천이라 합니다."
"남무천의 곁에 선 당신, 이름이 무언가?"
"전영득입니다."
우행 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앉아서 차를 마시던 우문현성에게 말을 걸었다.
"우문현성."
"왜?"
"넌 우문현성이냐?"
"난 우문현성이오."
"검왕 우문현성이 맞느냐?"
"내가 검왕 우문현성이오."
고개를 돌린 우행 진인은, 유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풍을 피운 아이야. 너는 용유신이더냐?"
"그렇습니다."
"네 등에 업은 아이는 너랑 어떤 사이더냐?"
"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이어진 내 아들이고, 나는 이 아이의 유일한 아비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냐?"
"용박입니다."
우행 진인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문현성과 일행에게 포권을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풍류경 이 대 전승자 우행이다. 이만 작별할 때가 된 것 같구나."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와 우행의 몸을 흔들었다. 흐릿해지던 우행의 몸이 갑자기 사라졌다. 몸에 걸친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지고, 우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우화한 겁니까?"
유신의 질문을 받은 사람은 우문현성이었다.
"아니네. 이미 죽을 날이 지났는데 나 때문에 죽지 못하고 버티고 계셨네. 힘겹게 형체를 잡고 있던 육신이 그대로 사라진 것뿐이네. 우화와는 완전히 다른 죽음이지."
우문현성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힘든 격전을 생각하며 찾아왔던 일행은, 뜻밖의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난 참 불쌍한 사람이었다네."
- 작가의말
모레 연참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이 글은 시리즈로 생각하고 있던 글입니다. 고룡의 초류향처럼 말이죠. 그래서 100편 이하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조금 길어졌습니다. 용박을 주인공으로 하는 글을 구상 중인데, 당분간은 쓸 생각이 없습니다. 이 글과는 다른 분위기로 쓰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 글의 추억이 희미해졌을 때 쓸 생각입니다. 용박의 글은 좀 더 고룡스럽게 쓰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장담하진 못합니다.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