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서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었다. 거기에 남쪽은 상대적으로 야트막해서 햇볕이 잘 들었다. 눈으로 덮인 산봉우리로부터 녹아서 내린 물이 가운데 모여 못이 되면서 작은 짐승이 많다.
물줄기가 약한 냇물은 위에 얇은 살얼음이 맺히고 밑으로 물이 졸졸 흘렀다. 아쉽게도 먹을만한 크기의 물고기는 보이지 않지만, 못가의 다양한 발자국들을 보면 싱싱한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은가루는 천산 서쪽에서 만난 분지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다 수색하려면 사흘 정도 걸릴 것 같으니 우선 머무를 자리부터 잡읍시다. 눈이 쌓인 남쪽 비탈이 많으니 앞선 두 곳보다 화령초를 찾을 가망이 무척 커진 느낌입니다."
유신이 나서서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계성과 당우형은 맨날 업혀 다녔지만 내공이 적거나 없어서 피로가 잔뜩 쌓였고, 은무성과 전영득은 부담감 때문에 말수가 적어졌다. 더구나 이번이 전영득의 지도에 찍힌 마지막 곳이라 기대와 걱정이 모두 유난히 커서 누구라 할 것도 없이 큰 압박을 느낀다.
전영득이 나서서 좋은 자리를 찾았다. 햇볕이 잘 들어 땅이 말라 있고 바람이 적당히 통해 벌레도 없다. 백화수를 익히면서 손놀림이 더 세밀해진 유신이 심룡척으로 나무 몇 그루 베어다가 자르고 쪼개서 지붕과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큼직한 침대도 만들어서 당우형과 계성이 함께 잘 수 있도록 했다.
은무성은 마음을 다스린다며 산책을 떠났고 백면귀산은 화령초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당우형이 내공을 회복하지 못하면 남무천을 구해낼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계성은 나무 밑에 퍼더버리고 앉아서 지호의 털을 골라주며 휴식을 취했다.
당우형은 한쪽 구석에서 모두를 등지고 백화수를 수련했다. 며칠 전에 눈사태를 한 번 구경한 후부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시간만 나면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수련에 몰두했다. 유신 역시 눈사태를 보고 은접미천과 고주일척을 더 잘 결합할 가능성을 찾았지만, 험한 산길로 당우형을 업고 달려야 하기에 자꾸 치솟아 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눌렀다.
못가에 가서 진흙을 파는 유신을 보고 계성이 일어서서 도왔다. 집 만들고 침대 만드는 일은 도울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부뚜막을 만드는 건 손을 보탤 수 있다.
넓적한 돌을 쌓고 진흙으로 사이사이 틈을 메운 후 바람구멍을 만드니 화력이 기대되는 부뚜막이 모습을 갖췄다. 그러나 대충 모양만 만드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손이 작은 계성은 부뚜막 아궁이로 손을 집어넣어 진흙을 군데군데 발라주었다. 한꺼번에 많이 바르면 안 되고 얇게 발라서 마른 후 또 발라줘야 한다. 이래야 진흙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미리 모아둔 마른 나무에 불을 붙여서 숯을 만든 후 부뚜막 안에 조금씩 집어넣었다. 너무 빨리 마르면 진흙이 떨어지고 그렇게 되면 화기가 달아난다. 부뚜막을 다 만든 후 계성은 땔깜을 주웠다. 마른 나무나 젖더라도 얇아서 빨리 마를 것 같은 것들을 골라서 부뚜막 주변에 쌓아두었다.
산책한다던 은무성이 토실토실한 쥐 두 마리를 들고 나타났다. 껍질을 바른 후 내장과 꼬리는 지호에게 양보했다. 토막 낸 말린 양과 돼지의 내장을 부뚜막 위의 작은 솥에 적당히 넣고 한참 볶아대니 기름이 나왔다. 토막 친 쥐 고기를 솥에 넣고 기름으로 볶으니 무척 고소한 냄새가 났다.
먼저 고기를 먹은 후 솥을 대충 닦고 물을 부은 후 쌀을 넣고 죽을 끓였다. 육포도 넣고 먹을만한 산나물도 넣어서 마구 끓이니 꽤 먹을 만 했다. 집이 생기고 부엌이 생기고 배부르게 식사를 하자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다.
"우선 서쪽의 봉우리부터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소. 다음 동쪽을 찾아보고 제일 험하고 넓은 북쪽은 나중에 찾기로 합시다."
화령초는 특별한 모양의 영초가 아니다. 자주 보이는 잡초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열매는 일 년에도 몇 번씩 맺기에 화령초를 발견하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기만 해도 된다. 유일하게 화령초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전영득이다. 은무성은 비록 화령초를 복용한 적이 있지만, 미처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가 함께 움직이고 화령초로 의심되는 풀이 있으면 전영득을 불렀다. 전영득이 보고 화령초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준다. 그래서 다섯이 함께 움직였다.
"지호 어디 갔지?"
화령초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당우형이 갑자기 유신에게 질문했다. 이리저리 쏘다니다가도 자주 당우형의 곁에 와서 촐랑거리던 지호가 보이지 않았다.
"사냥하러 간 것 같아요. 아까 오소리 비슷한 동물 발견하자마자 쫓아가던데요."
어차피 냄새 잘 맡는 지호가 일행을 못 찾을 염려도 없으니 당우형은 다시 화령초를 찾는 데 몰두했다. 진짜 화령초를 본 적이 없기에 전영득이 아무리 화령초와 잡초를 구별하는 법을 설명해도 알 수가 없다. 잡초 자체가 수십 가지 모습을 보이기에 반드시 화령초가 아니라는 확신을 하기 어렵다.
"전 대협, 여기 비슷한 거 있어요."
계성의 외침에 전영득이 경공을 펼쳐 달렸다. 계성이 있는 곳으로 간 전영득이 한참이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유신과 당우형도 셋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화령초는 맞소. 그런데 언제 열매를 맺을지 모르겠군. 일단 표식은 해놓고 더 찾아봅시다. 운 좋으면 열매가 달린 화령초를 찾을 수도 있소."
계성이 찾은 화령초는 너무 작았다. 운이 좋으면 다음 달에라도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아직 덜 자란 화령초라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화령초가 확실히 있다는 데 만족하고 나뭇가지를 꽂아 표시한 후 계속 화령초를 찾았다.
뇌음사가 계책에 걸려든다는 확신은 없지만, 전영득은 뇌음사가 일월교를 공격하거나 염탐하면서 주의를 분산시켜주기 바랐다. 이미 보름이 지났으니 한 달 보름 안에 나포백에 도착하려면 화령초를 빨리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당사자인 당우형과 계성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화령초를 찾았다.
화령초를 찾아낸 계성은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래서 용기 내어 평소 궁금했던 것을 은무성에게 질문했다.
"사부님, 전 대협이랑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잘 아는 사이까지는 아니고. 황실의 숙청을 피해 도망칠 때 천산까지 동행했다. 그때 나는 심술 많은 말썽꾸러기였고 전 대협은 차분하고 똑똑하며 사리에 밝은 아이였지. 그때 모습만 보면 내가 커서 마교의 종자가 되고 전 대협은 정파를 대표하는 고수가 되어야 하는데, 세월이 흘러보니 나는 무림맹주라고 소문이 자자하게 나고 전 대협은 마교의 호법이 되었구나."
"그런데 사부님은 무림맹 사람이고 전 대협은 마교 사람인데 왜 안 싸워요?"
은무성은 계성의 질문에 실소했다.
"비록 지금 마교로 불리지만, 백련교는 한때 중원을 대표하는 무림 세력이었다. 그때는 소림도 그 위세에 미치지 못했지. 그러나 종교의 한계로 결국 뿌리를 박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이곳 관서까지 떠밀려 왔다. 세력 사이의 이익을 위한 다툼이니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건 참으로 꼴불견이다. 너는 출신이나 배경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역모죄를 지은 집안의 유손(遺孫)이다."
계성은 큰 잘못을 저지른 듯이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사부님은 예전에 불교나 도교 역시 종교라고 하셨잖아요?"
은무성은 생각을 천천히 다듬었다.
"불교나 도교는 중원의 사정에 맞춰 계속 변화했다. 그러나 백련교는 오만하게도 세상을 자신들의 종교에 맞추려고 했지. 무공은 이와 반대다. 네가 무공 초식에 맞추려 하지 말고 무공 초식을 네게 맞춰야 한다. 네가 무공이라는 옷에 네 체형을 맞추는 게 아니라 네 체형에 무공이라는 옷을 맞춰야 한다."
계성은 우물쭈물하다 용기 내 질문했다.
"그럼 우양장을 제가 변형해도 되나요?"
"우양장은 나를 버리고 무공의 위력을 추구하는 장법이다. 내가 편한 움직임이 아니라 초식의 위력 하나만 보고 불편한 움직임을 힘들게 연마하는 무공이지. 내가 말한 무공 초식을 자신에게 맞추는 건, 초식의 위력을 줄이라는 뜻은 아니니 네가 고수가 된 다음에 해야 할 일이다. 네가 우양장을 바꿔서 위력이 그대로라는 확신이 있다면 네 입맛에 맞게 초식을 변화해도 된다."
계성은 요즘 유신이 은무성과 전영득에게 무공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 열심히 함께 귀동냥했다. 그래서 예전보다 무공에 관한 생각이 깊어졌다.
"혹시 우양장을 익히고 그걸 나에게 맞추는 과정이 고수가 되기 위한 수련인가요?"
"고놈 참. 물론 내가 만든 무공 중에서 가장 쓸만한 우양장을 계속 이어가려는 마음도 있지만, 네가 말한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재능이 부족해서 우양장을 더 다듬지 못했다. 부디 네가 나를 능가해서 우양장을 더 강한 초식으로 발전시키거라."
실제 화령초를 봤기에 이젠 다른 사람들도 구별할 수 있다. 전영득은 경공을 펼쳐 빠르게 산을 누볐고 남은 사람들은 둘씩 짝을 지어 천천히 수색했다.
"동생, 아흔일곱."
당우형이 뜬금없이 유신에게 백화수의 성취를 자랑했다. 백화수는 원래 내공의 도움 없이 암기술을 펼쳐야 했던 옛날에 만든 수법이다. 그래서 내공이 없는 지금 백화수의 성취가 오히려 빠르게 올라갔다.
백화수는 내공을 생각지 않고 만든 수법이기에 어설픈 상태에서 수련하다가 내공이 잘못 움직여 오히려 손의 경락이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운 절정에 이르러야 비로소 익히고 수련하게 한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절정이 옛날에는 일류 수준에 불과하기에 내공이 백화수를 익히는 데 적당히 방해된다. 당문도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로, 당우형은 유신 탓에 내공이 사라진 덕분에 백화수를 제대로 익혀내고 있다.
"저는 지금 서른셋인데요."
"내공이 없으니까 오히려 더 잘되는 느낌이야. 그리고 네가 알려준 역근경 동작의 도움이 무척 큰 것 같다. 내공도 아닌 의념의 움직임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토납공과 역근경 덕분도 있지만, 내공이 사라지며 절박함이 생겨서 집중력이 올라간 덕도 꽤 보았다. 당우형은 유신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눈사태 있잖아. 난 그걸 보고 이렇게 생각했어. 눈사태의 모든 눈은 미리 도착할 지점을 알고 움직이는 거라고. 그 모든 움직임이 합쳐져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인 거지. 백화수 역시 마찬가지야. 첫 동작은 두 번째 동작을 위한 준비가 아니야. 첫 동작도 그렇고 두 번째 동작도 그렇고, 다 마지막 동작을 향해 가는 거지. 눈사태처럼 동시에 움직일 수 없으니 차례로 움직일 수밖에."
유신은 귀신에 홀린 듯 발걸음을 멈추고 백화수를 펼쳤다. 손이 복잡하게 움직이다가 멈칫했다. 당우형이 손으로 유신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예순여덟. 정말 일취월담했구나."
"형님, 일취월장(日就月將)입니다."
유신의 두 눈은 총기가 어느새 사라지고 흐릿해졌다. 당우형은 유신이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음을 알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유신의 게슴츠레 뜬 눈에서 눈동자가 사방으로 마구 굴러다녔다.
'형님의 말도 이치에 맞지만, 눈사태는 각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뒤의 눈이 앞의 눈을 밀면서 움직였다. 각자 최종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면서도 상호작용도 한다. 앞의 눈은 뒤의 눈을 가로막고 뒤의 눈은 앞의 눈을 압박한다. 만약 형님이 깨달은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서로 충돌 없이 일치해진다면.'
생각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왠지 말로 정리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저 느낌으로 간직해야지 억지로 말로 다듬으면 크게 훼손된다. 그런데 느낌으로만 두기에는 또 너무나도 명확히 느끼고 싶다.
"어어."
유신의 두 손이 갑자기 꽃을 피웠다. 순식간에 여든 개의 꽃을 피운 유신의 두 눈이 총기를 되찾았다. 당우형은 절정에 이르고 백화수를 익히자마자 오십 개가 넘는 꽃을 피웠다. 그러나 여든 개를 넘기까지 반년이 훌쩍 넘는 기간을 소요했다. 그런데 유신은 서른세 개에서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여든 개로 도약했다.
"형님, 하나하나가 끝을 향해 치닫지만, 그 하나하나가 혼자인 건 아닙니다. 함께 가는 거예요."
당우형은 숨이 턱 막혀오며 가슴이 갑갑하고 온몸이 저렸다. 억지로 숨을 몰아쉰 당우형은 두 손을 들어 백화수를 펼쳤다. 세상에 존재하는 꽃과 존재하지도 않은 꽃들이 순식간에 당우형의 손에서 피어나 생명을 얻었다. 주변이 꽃밭으로 변하고 싱그러운 꽃향기가 사방을 채워갔다.
정확히 한 호흡에 백 개의 꽃을 피운 당우형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새 나왔다. 유신도 덩달아 코끝이 시큼해졌다. 이제 내공만 회복하면 천하에서 당우형의 암기를 피할 자가 없다. 그리고 암기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도 손에 꼽는다. 화령초 열매에 대한 갈증에 당우형은 목이 바짝 타올랐다.
- 작가의말
완전히 다르게 진행하는 비축분을 2편이나 썼습니다. 글자 수로는 1만 자가 넘었는데 마음에 안 들어 어제저녁에 삭제했습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법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글이 마음에 안 들어도 완전히 싫어질 때까지 쓰고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그러면 삭제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쓰면 글이 잘 풀립니다.이 방법의 크나큰 결함은, 비축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사라진 비축분이 모두 5편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본인 마음에도 들지 않는 글을 버젓이 올리는 것보다는 마음이 훨씬 편하고 좋습니다.
Commen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