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일꾼
아직 이른 새벽, 하늘이 검은색이다. 저 하늘이 어느 순간 하얗게 변했다가 천천히 푸르러지면 아침이 된다. 유신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옷을 빠르게 갖춰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일꾼으로 들어온 지 며칠이 되는데 냄새는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발 냄새뿐이면 그나마 괜찮다. 암내까지 섞여서 두통을 불러일으킨다. 유신은 새벽에 물 긷는 일을 맡고 대신 오시에 잠을 자는 걸 선택했다. 내공이 무척 느리게 모이고 있다. 매화주 한 잔이 간절하다.
물지게가 있으면 좀 더 편하다. 그런데 이쪽에는 물지게가 없고 대신 멜대가 있다. 물지게에서 등에 메는 부분을 제외한 물통을 거는 대가 바로 멜대다. 중간 부분은 싸구려 천으로 감아서 어깨가 덜 아프게 했다.
새벽 일찍 물 길으러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강의 상류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에 물을 무척 더럽게 사용한다. 집 앞을 흐르는 도랑에 온갖 잡물을 버리고 요강의 용변도 버린다. 더러운 도랑물이 강으로 흘러들기 전에 물을 길어야 한다.
가장 큰 물통 두 개를 멜대 양쪽에 매단 유신은 허리를 곧게 펴고 빠른 걸음을 걸었다. 의심을 할까 감히 추구질행의 수련은 하지 못했다. 귀한 물건 의뢰는 전혀 안 들어오는 규모가 작은 표국인데도 일꾼 뽑을 때 엄청 깐깐하게 질문했다.
원래 소개인이 없으면 사람을 잘 들이지 않는다. 표국의 표사와 일꾼 대부분은 이곳 토박이거나 이곳에 친인척이 있어 소개로 들어온 자들이다. 평소라면 어림이 없었겠지만, 계절을 잘 만나서 일꾼으로 뽑힐 수 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난 시기다. 안인표국은 대량의 곡식을 구강(九江)까지 이송해야 한다. 구강에서 강을 타고 항주로 간 후 운하를 통해 곡식이 경사까지 간다. 용호산 주변은 수량이 풍부해서 사람도 많고 논도 많아 안인표국이 운송해야 할 양이 적지 않다.
표사들을 전부 동원할 뿐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일꾼들도 표행에 나선다. 그래서 임시로 궂은일을 대신할 일꾼이 필요하다. 당우형의 예상과 달리 유신은 표국이나 장원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임시 일꾼들은 밖에 따로 잠자리를 안배했다.
같은 방을 쓰는 자들도 전부 임시 일꾼이라 염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낮에 일할 때에는 표국 혹은 장원에 가서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한다. 혹시 뭘 훔치지 않나 의심이 눈길이 항상 따라다녀 몸가짐에 무척 조심해야 했다.
'당 대협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게 아니라 떠돌이 경험이 많은 거였어. 그러니 단서 하나 찾는 데 칠 년이나 걸렸지.'
유식한 말을 억지로 쓰려고 애쓰는 것도 있고, 멧돼지 뒷다리를 구울 때 칼집을 내지 않은 것도 있고, 육포 만들 때 고기를 베는 방향도 잘못되었다. 육포 만드는 고기는 결을 따라 베는 게 아니다. 결을 싹둑싹둑 잘라야 씹기 편하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게 있는 유신에 비교해 당우형은 제대로 배운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유신더러 표국에서 의심스러운 자를 찾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표국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의심스러운 자인 건지 유신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을 듬뿍 담은 유신은 조금 느린 걸음으로 표국을 향해 움직였다. 표국도 그렇고 장원도 그렇고 우물이 있다. 그러나 우물 하나로 많은 사람이 풍족하게 쓸 수 없어서 물독에 물을 채워줘야 한다. 어제 장원의 물독들을 채웠기에 오늘은 표국 차례다.
표국의 뒷문을 두드리니 늙은 문지기가 하품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젊은 놈이 새벽잠도 없냐. 좀 늦게 다녀."
유신은 꾸벅 인사를 하고 물독으로 향했다. 물독들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몇 번 더 왕복해야 할 것 같다. 늦게 걸으면 아침을 못 먹을 수 있다. 유신은 물통의 물을 독에 쏟은 후 강가로 달렸다.
늦으면 더 먼 길을 걸어 상류에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 유신 먼저 물 긷는 일을 하던 일꾼 둘은 아침때를 놓쳐 굶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 둘은 작은 물통으로 물을 길었기에 둘이 합쳐도 유신이 큰 물통으로 한 번 왕복하는 것보다 적은 양을 길었다.
물을 긷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걸었는데도 바짓단이 흠뻑 젖었다. 유신은 다섯인가 여섯부터 수련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외공 수련 십 년을 해왔다. 수련의 수준이 낮음을 강호에 나와서 깨닫게 되었다.
남무천과 같은 경우도 기초 수련이 부실하다. 그걸 남무천은 목숨을 건 전장을 통해 극복했다. 지금의 강호는 싸움이 잦은 편이 아니고, 유신도 목숨을 걸고 수련할 생각이 없다. 대문파나 세가보다 수련 환경이나 질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남무천이 괜히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이래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이 생겼구나.'
무공 수련뿐 아니라 글공부도 마찬가지다. 과거 제도 덕분에 평민들도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아이에게 글공부를 시키는 데 많은 돈이 든다. 그리고 시험관들이 돈을 받고 합격 명단을 조작하기도 하니 십 년씩 붓을 잡다가 다시 쟁기 자루를 잡는 자가 적지 않다. 운이 좋으면 서당 선생이 되거나 중 혹은 도사가 된다.
오현사에도 낙방하여 중이 된 사람이 있다. 글씨 하나는 정말 괜찮게 써서 가끔 대필 의뢰도 받는다. 유신에게 가장 많은 걸 가르쳐준 사람이다.
"자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침을 먹으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유신은 한 번 더 왕복해야 물독을 채울 수 있다. 물독을 채운 후 잠자던 곳으로 빨리 달려가야 겨우 아침을 먹을 수 있다. 한계까지는 아니지만 점혈 되어 이틀 가까이 굶은 경험이 있어 식탐이 강해진 유신은 누군가의 관심이 반갑지 않았다.
"며칠 전에 일꾼으로 뽑혔습니다."
유신을 불러세운 사내는 면도를 자주 하는지 수염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한눈에 구레나룻 자국이 보였다. 아마 면도를 안 하면 털보일 것이다. 유신은 남무천의 짧은 가르침을 통해 항상 관찰을 면밀히 하고 분석하는 습관을 키웠다.
"자네 혹시 무공을 수련한 적이 있는가?"
"어릴 때 절에서 살면서 조금 배웠습니다. 중이 되기 싫어 절에서 나와 여기 일꾼이 되었습니다."
"알았네, 가보게."
유신은 강가를 향해 달렸다. 사내는 유신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표국의 표사 대부분이 하체가 저 일꾼보다 튼튼하지 못하다. 그리고 빈 물통이라지만 두 어깨가 항상 균형을 이루고 있다. 조금 수련한 정도가 아니다. 사내는 유신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안인표국은 진짜 별 볼 일 없는 표국이다. 그런데 왜 나를 경계하지? 저 사내가 조금 의심스럽구나.'
사내와 유신은 서로 상대를 의심했다. 물독을 다 채우니 아침이 되었다. 유신은 빠르게 달렸다. 다행히 늦지 않아 만두 두 개에 배춧잎이 조금 떠 있는 죽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조금 휴식한 후 유신은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여름과 가을 내내 사들인 장작은 마르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유신은 마른 장작을 골라낸 후 왼손으로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팼다. 기면서 왼팔의 힘이나 지구력이 오른팔보다 훨씬 부족함을 느꼈다. 남무천이 검을 왼손으로 바꾸어 불의의 반격을 했던 게 기억나서 여기서 왼손잡이 행세를 했다.
장작을 패고 나서 유신은 잠자러 방으로 향했다. 미리 문과 창을 열어서 환기했기에 냄새가 많이 가셨다. 홑이불을 덮은 유신은 죽절공을 운기 하다 빠르게 잠이 들었다. 다른 일꾼들은 장작과 필요한 도구를 짊어지고 장원 혹은 표국으로 향했다.
다시 깨어난 유신은 거의 변화가 없는 내공에 답답함을 느꼈다. 원래 삼절수를 잘못 건드리면 혈도와 단전이 전부 망가진다. 당우형은 유신이 특이한 체질인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유신은 죽절공의 효능이 아닐까 짐작했다. 자면서 알아서 운기 되는 심법에 관해 유신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자넨 표국에 가게. 빨리 가면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게야."
이곳은 아침과 저녁만 준다. 점심은 일하는 곳에 가서 먹어야 한다. 유신은 표국을 향해 달렸다. 일꾼이 된 지 며칠밖에 안 되는 유신을 위해 일부러 밥을 남겨줄 인심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서로의 목숨을 노리거나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와주는 강호가 더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다.
운이 좋은지 오늘은 고기가 나왔다. 물이 많고 식량이 풍족한 곳이라 사냥꾼이 적다. 그래서 평민들은 고기를 먹기 힘들다. 고기가 조금 질기기는 했지만 유신은 튼튼한 이로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자네 혹시 무슨 실수한 게 있는가?"
표국에서 장부를 담당하는 장방(賬房)이다. 표국주의 동생으로 무공은 전혀 모르지만 실세 중의 실세다. 일꾼들의 삯과 상벌을 담당하기 때문에 농으로 염라대왕보다 더 무섭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강 표두가 자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더군."
"아침에 물을 긷는데 무공을 배운 적 있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릴 때 절에서 조금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장방은 새삼스럽다는 듯이 유신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조금 작은 옷을 입어 발목을 드러냈다. 그래서 볼품없어 보였다. 그러나 옷을 제외하고 보면 기골이 장대하고 몸통이 무척 두껍다. 얼굴도 사내답지는 않지만 잘생긴 편이다.
국자형(國字形)의 넓적한 얼굴을 최고로 치고 눈코입이 큼직큼직한 사내를 잘 생겼다고 한다. 물론 남자들의 시선이다. 장방은 나이를 먹으며 여자들이 좋아하는 얼굴이 남자들과 다름을 알았다. 저놈은 기생오라비가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도 듣기 좋고 말투도 거슬리는 데가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표국의 창고 알지? 그 창고 옆에 강 표두의 집무실이 있네. 자네 거기에 가서 강 표두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게. 절대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네. 강호의 일류 고수 중에서도 대단한 분이라고 들었네."
장방은 무척 잔소리가 많다. 유신은 고개만 주억거리며 장방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장방의 일을 돕는 도제(徒弟)가 장방을 불러서 짧게 끝낼 수 있었다.
'안인표국 따위에 일류 고수라. 점점 의심되는구나.'
유신은 일꾼들을 관리하는 늙은 하인에게 강 표두의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고 나서 창고로 향했다. 창고를 지키던 표사 둘에게 또 한 번 강 표두의 부름을 받았다고 말했다. 표사 한 명이 들어가서 표두에게 확인을 받은 후 유신을 데리고 강 표두의 방으로 향했다.
강 표두의 집무실은 크기가 작았다. 창고지기가 쪽잠을 자는 곳을 집무실로 사용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의자가 하나 있었지만 유신은 서서 강 표두와 대화했다.
"자네 말투 들어보니 절강 항주 태생인 것 같군."
"제가 절에서 자랐습니다. 그 절이 항주와 삼십 리 정도 거리라고 들었습니다."
"절에서 무공을 배웠다고 하니, 혹시 소림의 갈래인가?"
"오현사라고, 주지 스님의 법호가 누진입니다."
강 표두는 이마를 찌푸렸다. 오현사든 누진이든 들어본 적이 없다. 강호와 관련이 없이 그저 외공으로 몸 단련을 하거나, 무명 소졸일 가능성이 크다. 자꾸 생기는 불안감과 묘한 간질거림 때문에 유신을 불렀지만, 표두 본인도 왜 자신이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다.
"자네 양친은?"
"어릴 때부터 절에서 자랐습니다. 양친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유신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자 강 표두는 괜한 것을 물었나 싶었다. 자신처럼 고아로 자라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 있고 저 어린 일꾼처럼 격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되나?"
"스물입니다."
유신은 강 표두의 집무실에 나온 후 측간에 갔다. 소피가 마려웠던 건 아니다. 어렵게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 표두의 집무실에서 검 한 자루를 보았다. 그때부터 격동하기 시작한 마음을 억누르느라 무척 힘들었다.
- 작가의말
이 글은 딱 생각했던 흐름대로 끌고 가서 완결을 내겠습니다. 당문지예는 조금 서둘렀던 감이 있고, 절세신응은 소림에서 비무하는 파트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평가는 절세신응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원래 생각한 줄거리대로만 이끌어 깔끔하게 끝낼 생각입니다.
고룡식 구성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단계마다 서로 다른 주제가 있어 독립된 이야기처럼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완결된 후 다시 읽으시면 더 재밌는 글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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