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시환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부슬부슬 내리는 눈만 보인다. 처음 보는 사람이면 흩날리는 눈송이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천하절색도 매일 보면 못생긴 부분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고개를 내려 땅을 보면 두툼하게 쌓인 눈뿐이다. 경공이 조금만 부족하면 하루에 십 리는커녕 오 리도 걷지 못할 정도로 눈이 두껍게 쌓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눈뿐이다. 천지가 하얗게 물들어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다. 끊어지지 않는 빗줄기가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면, 폭설은 하늘과 땅의 구분을 없애 하나로 만든다.
"길 제대로 찾은 게 맞아?"
"이 늙은 목숨을 걸겠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찾았습니다."
"동서남북도 구분이 어려운데 무슨 자신감으로 큰소리쳐?"
나이가 가장 많은 노인은 두 장년이 번갈아 던지는 질문에 땀을 흘렸다.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천지사방이 모두 눈인 상황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여기 관서를 다 뒤져봐도 저만큼 잘 찾는 놈이 없습니다. 제가 못 찾으면 누구도 못 찾는 겁니다."
"안 죽인다니까. 팔다리 하나 정도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어."
"대호법, 평생 목숨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천산괴노의 말에 전영득이 피식 웃었다. 자기 목숨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놈이 목숨 바쳐서 누구에게 충성한다는 말인가.
남무천이 화령초의 기운을 다 수습하고 난 뒤, 가둬둔 곳에서 천산괴노를 꺼냈을 때는 이미 숨이 간당간당했다. 전영득은 천산괴노를 안 건드린다고 약속했기에 손을 쓸 수 없지만, 남무천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천산괴노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우문현성의 은신처 위치를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산괴노도 진짜로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천산괴노가 소속된 융설당(融雪堂)이라는 방파 성격의 문파가 천산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전설로만 전해지는 만년설삼을 찾는 것으로, 이미 결성한 지 삼십 년이 넘는다.
그래서 천산괴노는 사람 살기 적합한 곳을 몇 군데 알고 있다. 목숨을 부지하다 몸만 회복되면 도망칠 궁리를 했는데, 남무천의 경공이 듣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싸우는 걸 빼면 절정이라는 말이 부끄러운 수준이라 들었는데, 그 말을 했던 자들을 찾아 발바닥으로 혓바닥을 때리고 싶었다.
전영득이 눈을 밟으면 뚜렷한 흔적이 남지만, 남무천은 그저 손바닥으로 살짝 눌렀나 싶은 자국만 남겼다. 웅설혜를 신고도 깊은 자국을 내는 천산괴노가 둘에게서 도망친다는 건, 작은 우리에 쥐와 고양이를 가둬놓고 쥐한테 살아남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천산괴노가 아는 곳들은 다 찾아봤고, 예외 없이 허탕 쳤다. 원래는 당문으로 찾아가서 검을 완성하려 했던 남무천의 심기가 점점 불편해졌다. 원래도 그리 차분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화령초를 복용한 후에 참을성이 훨씬 부족해졌다. 갑자기 내공의 경지가 확 올라가서, 유신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상황이다. 물론 무위지경을 아래로 당기고 있는 유신과 달리, 남무천은 내공의 경지가 경공과 무공을 비롯한 다른 경지들을 위로 당기며 불안정한 심법 때문에 억압받았던 천재성이 마구 분출되고 있다.
궁지에 몰린 천산괴노는 생각을 바꿨다. 일반인이라면 절대 생존할 수 없는 험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매번 찾아내지 못한 천산괴노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웬만한 고수도 견디기 힘든 곳으로 가는 중이다. 짐승들도 살지 않는 곳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천산괴노의 마지막 발버둥이다.
"찾았다."
살았다는 생각에 천산괴노는 눈물이 찔끔 솟아났다. 산양도 기어오르기 힘들 정도의 험준한 절벽 중턱에, 누가 봐도 사람 손이 닿은 석조 건물이 있었다. 두꺼운 바위를 깎아서 만든 건물은 신기하게도 눈이 쌓이지 않았다. 누군가 방금 청소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천산괴노가 자신의 우려를 토해냈다.
"안에 교주가 계시는 거 아닐까요?"
"운남의 청석이다. 자체로 열이 나는 돌이라서 눈이 쌓이지 않는다."
물론 우문현성이 안에 있다고 해도 남무천과 전영득은 목숨을 부지할 자신이 있다. 천산괴노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지, 보호해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무천과 전영득은 바로 몸을 날려 석조 건물로 향했고, 천산괴노는 미리 관을 짜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 얼굴을 하고 비실거리며 따랐다.
"허, 바위 두께를 봐."
석조 건물은 그저 바위 네 개로 벽을 만들고 하나를 위에 지붕으로 씌웠다. 문은 마치 날카로운 칼로 두부를 자른 것처럼, 한쪽 벽을 네모나게 파서 만들었고, 문 앞에는 청석이 아닌 일반 바위를 여럿 세워 눈이 안으로 날리지 않게 막았다.
"이걸 운남에서 여기까지 혼자 가져왔을까?"
두께가 석 자는 가뿐하게 넘는 바위다. 물론 남무천도 지금은 저 정도 바위를 들고 움직이는 건 할 수 있다. 그러나 운남부터 천산까지 들고 움직인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바위 다섯 개를 옮기려면 몇 년은 걸릴 것이고, 눈이 잔뜩 쌓인 천산에서 움직일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남무천이 빤질거리는 벽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우문현성의 경지를 가늠하고 있을 때, 전영득은 방의 크기를 가늠했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데.'
물론 방이라는 게 몸 뉠 자리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사람 살기도 어려운 곳에 굳이 이렇게 큰 집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돌을 끾아서 만든 침대, 돌을 깎아서 만든 식탁, 돌을 깎아서 만든 의자, 돌을 깎아서 만든 조각품. 돌의 색이 제각각이기는 하지만, 온통 돌이어서 삭막하기 그지없다.
"전 형, 이 청석이라는 돌 어디에서 나는 거요? 돈도 꽤 벌었는데 나도 이런 집 하나 장만하고 싶소."
사치에 관심이 부쩍 커진 남무천이지만, 가난하게 살았던 삶이 상상력을 제한했다. 그래서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차에, 이거다 싶었는지 청석을 욕심냈다.
"네 몫으로는 이런 바위 하나도 구하기 힘들다."
"뭔 놈의 돌이 그렇게 비싸단 말이오?"
"작은 돌이야 네 돈으로 넉넉하게 살 수 있지. 그러나 이 정도 크기라면 부르는 게 값이다.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전영득의 핀잔에 남무천이 비웃었다.
"전 형, 그럼 작은 돌을 사서 벽돌로 깎은 다음 벽을 쌓으면 되지. 굳이 큰 바위를 살 필요가 있소?"
남무천의 비웃음에 전영득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제길, 굳이 통 바위를 쓴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뭔가 숨겨진 게 있을 것이다."
전영득의 말에 남무천은 물론 천산괴노도 적극적으로 숨겨진 뭔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말 그대로 벽돌로 쌓고 틈을 청석 부스러기로 막아도 이 정도 두께라면 추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굳이 통 바위를 고집했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이다.
전영득은 벽과 천장을 향해 동요를 불렀다. 그저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동요를 부르며 음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탐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그간의 노력으로 수백 곡이 되는 동요 중에서 가장 적합한 동요를 찾아냈다.
"속이 비어있지 않아."
그때 지붕 위를 살핀 남무천도 방안에 들어오며 고개를 저었다.
"발견한 게 없소."
둘의 눈이 천산괴노를 향했다.
"육합에서 다섯 개를 확인했으니, 남은 건 바닥이겠지요."
의자와 탁자 그리고 침대를 하나씩 옮기니, 침대 밑에 공간이 나타났다. 비록 빛이 거의 없지만, 전영득과 남무천에게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밝은 게 당연히 낫기 때문에, 전영득은 보따리를 뒤적거려 인등(燐燈)을 꺼냈다. 서역 상인에게서 구매한 등으로, 촛불보다 더 밝고 불씨가 튈 위험이 없는 훌륭한 물건이다.
"벽과 지붕은 이 바위에서 파낸 것이었군."
놀랍게도 이 석조 건물은 지상과 지하로 나뉘었다. 그리고 지하는 통 바위를 파내서 만든 것이다. 파낸 여섯 장의 바위가 각각 지상에 보이는 석조건물의 바닥과 벽과 지붕이었다.
"교주는 정녕 인간이 아니라는 말인가?"
누군가가 네 벽과 지붕과 바닥을 다 이 안에 집어넣은 후 남무천을 보고 움직이라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돌부터 던졌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한 치도 움직일 수 있을지 의심되는 바위를 통째로 이곳에 옮긴 후, 속을 파내서 벽과 바닥과 지붕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바위를 파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청석 바위를 안에 박아넣기까지 했다.
"교주가 만든 게 아닐 거야.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것 같단 말이야."
만든 지 오래되지 않았다면, 바위를 파내고 청석 바위를 넣은 흔적이 쉽게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셋 다 그런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만들어진 시간이 꽤 되어 청석과 바위의 틈이 자연스럽게 메꿔졌다는 뜻이다.
"여기 그림들 전부 진품입니다."
벽에는 몇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전영득은 그림을 살폈지만, 남무천은 그림을 걸려고 청석에 꽂은 나무로 된 못이 더 눈길을 끌었다. 나무로 된 못을 바위에 박아 넣으려면 내공을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나야 할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추룡은 누구인가?"
그림마다 추룡(鰍龍)이라는 낙관이 있었다. 전영득의 의문에 천산괴노가 곧바로 대답했다.
"한복명 이전의 교주의 호가 추룡입니다."
미꾸라지 용이라는 이름이 모순되면서도 어울리는 말이다. 금기서화는 물론, 온갖 잡기에 능한 게 한복명의 아비다. 하늘이 무공에 관한 재능을 빼고 모두 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 형. 여기 더 중요한 게 보이오."
한쪽 구석에 종이들이 잔뜩 쌓여있다. 그림은 미인도(美人圖)나 도화첩(桃花帖) 따위만 취급하는 남무천은, 둘이 대화하는 사이 혼자 두리번거리다 종이 무더기를 발견했다.
"일단 위에 가지고 올라가서 살피자."
종이를 한 뭉텅이씩 든 남무천과 전영득이 위로 올라갔다. 천산괴노도 그림 한 점을 들고 올라와 천천히 감상했다. 추룡이 낙관했기에 절대 팔리지 않을 것이다. 주원장과 반목하고 역적으로 몰린 게 바로 추룡이기에, 아무리 잘 그린 진품이라도 거래할 수 없다. 그러나 천산괴노는 가격이나 실제 가치와 쓸모보다, 귀한 물건이라는 데 더 집중했다.
"무천, 이건 순서대로 봐야 할 것 같다."
두 사람이 서로 필담을 나눈 흔적이다. 두 가지 확연히 다른 글씨체여서 의심의 여지도 없다. 둘은 우선 글씨체대로 종이를 구분한 후, 대화의 순서를 찾는 데 몰두했다. 그때 추룡의 그림을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감상하던 천산괴노가 슬며시 눈길을 주더니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한복명!"
주산이 깨진 후 새로운 무기를 장만하지 못한 전영득은 잽싸게 남무천의 뒤로 숨었다. 남무천은 귀면암영이 사막에서 선물로 준 묵검을 뽑아 들고 기척을 느끼려고 애썼다.
"죄송합니다. 남 호법 앞에 있는 종이의 글씨가 한복명과 똑같습니다."
"그럼 이건 우문현성의 글씨인가?"
"우문 교주의 글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모릅니다."
천산괴노가 송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의외로 남무천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우문현성의 글이 맞아. 글씨에 낙월검의 검법 초식이 깃들어 있어."
전영득이 급히 종이의 귀퉁이를 잘라서 단면을 살폈다.
"한복명의 시체가 무림맹에 의해 발견된 게 십일 년 전이지?"
"십이 년 아닌가?"
"하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 종이는 만들어진 지 오 년도 안 되었어. 기후에 따라 변질하는 속도가 달라진다고 하지만, 내가 정말 후하게 마음을 써도 칠 년은 안 된 종이야."
침묵이 이어졌다. 천산괴노는 가슴을 누르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교주의 시신은 무림맹에서 발견한 게 아닙니까?"
"무림맹에도 교주의 끄나풀이 많았을 테니, 거짓일지도 모르지."
"그건 아닐 겁니다. 그때 한 교주와 안면이 있는 자들이 전부 몰려가서 시신의 진위를 확인했습니다."
"그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잖아. 그리고 한복명이라면, 차시환혼도 가능하겠지."
차시환혼(借屍還魂),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가짜로 죽은 척하고 일부러 무림맹에 들킨 후, 그 시체를 다시 탈취해서 살리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물론 누군가가 심장에 칼을 박거나 내가 중수법으로 내장을 터뜨리면 그저 죽은 목숨이다.
"설마 그런 모험은 하지 않겠지?"
남무천의 말에 전영득이 대답했다.
"답이 이 종이에 있을지도."
천산괴노는 문 어귀에 가서 보초를 섰다. 갑자기 우문현성 혹은 한복명이 찾아올 것 같은 불안감에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남무천과 전영득은 순서보다는 우선 같은 주제 혹은 인물이 나오는 종이들을 서로 연관 지어 대화 한 단락이라도 복원하는 데 집중했다.
"여기 모용부영 관련된 내용을 먼저 맞추자. 그리고 위쪽에 있는 종이들은 남궁용현에 대한 대화들 같으니 이것도 우선 맞추자."
하나만 잘못 맞추면 모두가 틀린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한 장씩 주고받는다는 법도 없어서, 한 사람이 몇 장을 연속 썼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럴듯하게 대화를 맞추는 데 총 사흘이 걸렸다.
"전 형. 우리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어쩔 수 없지. 먼저 가서 지호를 찾은 다음 당문으로 가자. 검을 맡기고 은 대협을 찾아 한복명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아봐달라고 해야지. 그저 이 종이에 쓰인 게 다 거짓이길 바라야지."
- 작가의말
비축분이 있으니 좋긴 좋네요. 원래 다르게 진행했는데,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뜯어고쳤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이미 쓴 부분을 삭제하지는 않고, 뒷부분에서 사용할 생각입니다. 흐름이 경로를 이탈한 건 아닌데, 너무 빠르고 느닷없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의 진행 순서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무천이 드디어 날개를 달았습니다. 흑혈기공 때문에 내공을 다루는 데 애먹었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이 전혀 없습니다. 유치하지만, 유신이랑 싸우면 남무천이 이깁니다.벽과 지붕을 통 바위로 한 건, 딱히 이유가 없었습니다. 커다란 바위에서 바위 판자 여섯 개를 뽑아낸 후, 그걸로 바닥과 벽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수직으로 뽑아낸 것이기에, 바닥이 바위에 파낸 구멍보다 더 큽니다. 괜히 중요하지 않은 일에 뇌세포 낭비할까 봐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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