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에서 봅시다
쪽문으로 보인 모습은 정갈하게 차려입은 하인이었다. 얼굴이 복스럽게 생긴 하인은 차림새가 허름한 둘의 모습을 확인했음에도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개방에서 왔소. 마교의 잔당이 이 장원으로 들어갔다는 제보를 받았소."
하인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대답한 뒤 쪽문을 닫고 급히 달려갔다. 잠시 후 쪽문이 다시 열리더니 수염이 몇 가닥 없는 늙은이가 나타났다.
"나는 임 총관이네. 자네들 누구를 찾는 건가?"
"전당호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유신의 말에 임 총관은 껄껄 웃었다.
"자네 개방은 아니구먼. 그리고 전당호는 항주 토박이야. 마교가 아닌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지. 혹시 포두들이 전당호가 여기로 왔다고 말했나?"
유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 총관의 말하는 속도가 적절해서 저도 모르게 그 흐름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쓸모없는 늙은이가 몇 마디 하겠네. 우선 청죽방 방주 따위가 지부대인과 교분이 있을 것 같은가? 지부대인에게 뇌물을 상납하고 싶어도 직접 못 바치고 다른 사람에게 사정해야 한다네. 그러니 전당호는 여기에 오지 않았네."
"다음, 항주부의 포두들이 그렇게 우스워 보였나? 멍청한 척하며 자네들을 속인 거야. 지부대인도 함부로 못 하는 게 포두들이야. 지부대인이야 몇 년 있고 다른 데로 영전하지만 이놈들은 십 년 이상씩 이곳에 뿌리를 박고 있거든."
유신과 당우형은 말문이 막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임 총관은 혀를 끌끌 차고 마무리했다.
"지금 지부대인이 안에 계시네. 내 대충 둘러댈 테니 더는 일을 만들지 말고 물러가게."
쪽문이 닫힌 후 유신과 당우형은 바로 돌아가서 포두들을 찾았다. 전당호가 어디에 갔는지 이들은 분명히 알 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포두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찾아낼 방도가 없었다.
"참, 내가 포쾌 나부랭이한테 속다니."
당우형은 화내며 투덜댔다. 유신은 뒷짐을 지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경험이 부족해서 한 번 실수하는 건 괜찮다. 그걸 반복하면 멍청이다.
"형님, 지부대인 장원을 한 번 살펴야겠습니다. 그 임 총관이 우리를 속였을 수도 있습니다."
당우형은 바로 기세등등해졌다.
"그래, 장원에서 전당호를 찾으면 우린 속은 게 아니다. 포두에게는 속지 않은 거고 그 총관이라는 자에게는 속을 뻔했을 뿐이야."
장원은 무척 컸다. 관아에 속하는 장원은 지부대인 일가가 머무르기도 하지만, 중요한 손님이 오면 묵어야 할 곳이다. 그래서 크기도 크고 네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담을 넘은 둘은 천천히 움직였다. 유신은 물론이고 당우형도 침투한 경험은 처음이다. 둘 다 처음이라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술 냄새가 난다.]
하인 하나가 술 한 병을 나무 쟁반에 올리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둘은 하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귀한 술인지 하인은 모든 정신을 술병에 집중해 둘이 따라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인은 삼 층으로 된 누각으로 들어갔다. 당우형은 경공을 이용해 누각의 지붕을 밟고 삼 층 처마에 매달렸다. 유신도 당우형을 따라 했다. 그러나 당우형처럼 고명한 신법을 익힌 게 아니라서 안의 백의 서생과 그만 눈이 마주쳤다.
[형님, 저 들킨 것 같습니다.]
당우형은 급히 안에 전음을 날렸다. 들키면 도망치면 된다. 그러나 아까 하인과 총관에게 이미 얼굴을 보였기에 수배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수배가 떨어지면 정말 귀찮다. 보상을 노리고 별 이상한 놈이 다 들러붙는다.
[사천당문의 당우형이오. 원수를 쫓아 여기 온 것이니 부탁하오.]
당우형의 전음을 받은 사내는 잔을 들어 쭉 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요. 좋습니다."
"하하, 이 술에는 얽힌 시구가 있습니다. 바로 일품품천당 일취취서호라는 시구죠."
一品品天堂 一醉醉西湖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항이 있다는 말이 있다. 소항은 바로 소주와 항주를 말한다. 여기 일품품천당에서 일품은 등급을 말하는 것이다. 관계(官階 - 관의 등급)를 나타낼 때 일부터 구까지 품계를 나누듯이 항주를 일품, 즉 최고라 찬양하는 시구다.
천당을 품(品 - 맛보다, 평가하다)하는 것으로 항주를 지칭해 항주가 최고라는 뜻이다. 일취취서호 중에 취서호가 바로 술 이름이다. 취하는 데는 취서호가 으뜸이라는 뜻이다. 천하에서 항주가 일품이고 그 항주에서 취서호가 으뜸 술이라는 시구다.
"대인께서 좋은 술과 시로 대접해 주셨으니 저도 시 한 수 읊어볼까 합니다."
梁山有好漢 양산유호한
梁上有君子 양산유군자
西湖湖心亭 서호호심정
西門門常開 서문문상개
"하하, 서문 공자의 시재가 참 대단하십니다."
수호지는 관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책이다. 천자, 즉 황제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반면 탐관오리에 대한 원한을 쏟아낸 글이다. 즉 황제는 하늘이 내린 완벽한 사람으로 천하가 어지러운 건 다 탐관오리들 탓으로 돌린다.
양산의 민란을 일으킨 자들을 호한이라고 칭하는 걸 좋아할 벼슬아치가 없다. 그래서 시를 지은 백의공자는 바로 밑에 양상유군자라고 했다. 양상군자는 도둑놈을 멋스럽게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양산유호한의 호한도 나쁜 뜻이 되었다.
호심정은 서호 중심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다. 그리고 본인의 성인 서문을 연관 지어 서문문상개라고 마무리했다. 서호호와 서문문이 어울리고 심정(心亭 - 마음의 뜰, 뜰 庭과 같은 발음)과 상개(常開 - 자주 열리다)가 어울려 시의 품위를 한껏 높여주었다.
[형님, 우리 보고 서호 호심정에서 만나자는 것 같습니다.]
당우형은 조금 고민하다가 백의 공자에게 전음을 날렸다.
[사흘 후 봅시다. 요긴한 일에 묶여있소.]
"대인, 좋은 술이 안타깝긴 하지만, 주량이 일천하여 석 잔만 마시겠습니다."
당우형과 유신은 기회를 잡아 장원을 떠났다. 막막해진 당우형은 유신에게 청죽방을 정면으로 치자고 했다. 유신도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아 청죽방이 있는 주가촌 나루터로 향했다.
서호의 서북쪽에 있는 이 지역은 절반이 땅이고 절반이 물이다. 배가 없이는 움직이기 무척 불편하다. 거기에 늪지대가 많아 함부로 움직이면 위험하다. 상황을 파악한 당우형은 유신을 끌고 번화가로 향했다.
"동생, 이 계책은 조호이산(調虎移山)이네."
당우형의 계책은 이랬다. 좋은 옷을 사 입은 후 돈 많은 사람인 척하면서 청죽방의 지역에서 움직인다. 청죽방은 나쁜 놈들이니 아마 둘을 유인해 전당호가 있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형님, 조호이산은 강한 적을 다른 데로 유인하고 남은 적을 치는 계책입니다. 지금 이 계책은 만천과해(瞞天過海)가 어울립니다."
"동생,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도 전음으로 해라."
가볍게 투덕거리며 당우형과 유신은 포목점을 찾았다. 당우형은 부자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했고 유신은 호위무사다운 옷차림을 했다. 검 자루 끝에 술(가마·깃발·끈·띠·책상보·옷 따위에 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까지 달아놓으니 철부지 도련님과 겉멋만 든 호위무사 같았다.
다시 주가촌 나루터를 찾은 둘은 은두(銀豆 - 콩알 크기의 은) 하나 던져 주고 배를 탔다. 입이 귀에 걸린 뱃사공은 당우형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을 향해 열심히 배를 움직였다. 물이 깊은 곳에서는 노를 젓고 물이 얕은 곳에서는 상앗대로 배를 밀었다.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 땅은 안 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동생, 자네는 공부를 좀 할 필요가 있어. 이 땅에 옛날 주 왕조의 보물이 묻혀 있다고 고서에 나와 있어. 이 땅을 전부 산 다음 여길 뒤집을 거야. 땅값이 싸니 돈도 얼마 들지 않고 말이야. 이런 걸 일벌백계(一罰百戒)라고 하네."
[형님, 일확천금(一攫千金)입니다.]
조금 돌아다니다 유신이 입을 열었다. 짐짓 조용히 말하는 척했지만 쫑긋 세운 뱃사공의 귀에는 똑똑히 들어갔을 것이다.
"형님, 그래도 은자 백 냥씩 들고 움직이는 건 위험합니다. 날이 어둡기 전에 빨리 돌아갑시다."
"동생, 나야 무공을 모르지만 동생은 삼 년이나 무공을 수련했는데 두려울 게 뭔가. 곧 내 땅이 될 곳을 좀 더 보고 싶군."
당우형은 짐짓 고집을 부렸다. 당우형이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자 뱃사공이 입을 열었다. 유신보다 훨씬 진한 항주 말투가 튀어나왔다.
"손님, 아까 가본 곳입니다. 유람이 목적인 거 같은데 차라리 제가 볼만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당우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뱃사공은 배를 몰았다. 그러다 꽤 큰 나루터에 배를 갖다 댔다.
"손님, 잠깐 소피 보겠습니다. 혹시 급하신 분 있으면 함께 가시죠."
당우형은 고개를 저었다. 유신은 검 자루에 손을 올려놓고 주변을 경계하는 척했다. 뱃사공은 혼자 움직였다. 꽤 긴 시간이 흘러 뱃사공이 돌아왔다.
"손님, 혹시 식사 안 하셨으면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실까요? 술도 좋고 안주도 좋고 여자도 좋은 곳이 있습니다."
유신이 말리는 척하고 당우형은 고집을 부렸다. 결국 둘은 저녁이 되기도 전에 부용루라는 이름을 가진 주루로 향했다. 외관은 허름했지만 오 층이나 되는 누각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몇 없다.
"옛날 항주 제일의 부자가 세운 누각입니다. 후에 집안이 망하면서 팔았고 지금은 부용루가 되었습니다."
둘은 바로 오 층으로 모셔졌다. 기녀들이 치장하느라 시간이 필요하다며 접객 기녀가 양해를 구했다. 접객 기녀가 술상을 차린다고 밖으로 나가자 당우형은 품에서 검은색 구슬 하나를 유신에게 넘겼다.
[피독주다. 극독에는 효과가 없지만 웬만한 독은 두려워할 것 없다. 선물이다.]
잠시 후 술상과 함께 동기(童妓 - 어린 기생) 둘이 들어왔다. 정식 기녀가 되지 못하고 아직 배우는 아이들인데, 기녀들이 준비되기 전에 술을 따르라고 들여보낸 것이다. 그리고 손님의 성향을 알아보려는 의도도 있다.
점잖은 손님에게는 부드러운 술과 금기서화에 능한 기녀를 들여보내고, 추잡한 손님에게는 독한 술과 몸매가 뛰어난 기녀를 들여보낸다. 기루가 처음인 유신은 뻣뻣하게 앉아있었고 당우형은 술과 안주에 독이 들었나 감별하느라 술 따르는 동기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유신의 옆에 앉은 기녀가 은근슬쩍 몸을 비벼오며 눈웃음을 쳤다. 당우형의 옆에 앉은 기녀는 가끔 손으로 당우형의 허벅지를 스칠 뿐 노골적이지 않았다. 귀한 상을 타고난 당우형은 무척 기품 있어 보여 유신처럼 편하지 않았다.
[독이 없다. 그래도 새 음식이나 술이 나오면 내가 먹기 전에는 손대지 말아라.]
피독주가 있지만 몽한약이나 최음제에는 효과가 미미하다. 독보다는 덜하지만, 의지가 약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독보다 더 잘 먹힐 수 있다. 유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술을 입에 넣었다. 술이 뱃속에 들어가자 단전의 내공이 움직였다.
'일류가 가까운 건가?'
전에 술을 마실 때 내공이 움직이지 않았었다. 이미 술에 독이 없다는 건 당우형이 알려줬으니 일류 고수에 가까워진 방증이다. 술잔을 내려놓는 유신의 얼굴에 기꺼운 기색이 어리자 곁에 동기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을 걸었다.
"술맛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관인."
관인(官人)은 일정 지위에 있는 남자를 칭하기도 하고 아내가 남편을 칭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루에서는 손님을 늘 관인이라 부른다.
"술만 마음에 들겠느냐? 가인도 마음에 들지."
고급 기루의 기녀는 학식이 웬만한 서생들과 맞먹는다. 유신 대신 대답한 당우형은 함부로 문자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당우형이 손으로 자신 곁에 동기의 얼굴을 쓰다듬자 동기의 얼굴이 빨개졌다.
"관인, 얼굴은 귀한 상인데 손이 무척 거칩니다."
"사실 나 엄청 부드러우면서도 엄청 거친 남자야."
- 작가의말
이번 편은 무척 힘들게 썼습니다. 담을 넘어본 적도, 기루에 가본 적도 없으니 참 힘듭니다.
그리고 네 토막짜리 시는 제가 지은 겁니다. 어젯밤 오래 고민해서 만들었습니다. 후후, 나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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